육지 속 섬마을, 집배원 가방엔 편지 대신 약봉지


최수경 2019.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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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방우리, 고생 끝에 범람원 자갈밭을 옥토로 일궜지만…


연재에 앞서
10년 넘게 '비단물결 금강천리 트레킹'을 운영하면서 금강 천리길을 수없이 답사했습니다. 때로는 불어난 강물에 자동차가 미끄러질 뻔했고, 여울을 건너며 급류에 아찔한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매번 이런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금강의 매력이었습니다. 그 매력은 스스로 발산하는 위대한 아름다움이자, 사람을 고개 숙이게 하는 매서운 선생님이자,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매력 덩어리를 더 매력 있게 하는 강마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비단금강에서 만난 강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개발로 몸살 앓고 시름하는 금강이 그래도 외롭지 않은 것은, 강에 기대어 살며 강의 벗이 되어온 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06.jpg» 금강이 크게 한 바퀴 휘어 물돌이 마을을 이룬 방우리 사람들의 삶에는 우리의 근대화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트레킹 참가자들이 지렛여울을 건너고 있다.

45년 집배원과의 만남

“최여사님, 저희 방우리에 언제 오세요? 하도 연락이 없으셔서 언제 오시나 궁금해서요.”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딸 뻘인 사람을 상전 대하듯 하신다. 매년 봄 가을을 앞두고 예외 없이 안부를 물어오시는데, 용건은 언제 방우리를 방문하냐는 것이다.  충남 금산군 부리면 방우리는 목소리 주인공인 박상식 집배원의 근무지로, 자신의 첫 발령지였던 곳에서 정년을 하기로 마음먹고 십여 년 전부터 이곳으로 우편물을 나르고 있다. 
  
내가 이끄는 교육여행이 방우리를 방문하면, 으레 박상식 집배원을 만날 수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고갯마루에 올라 방문객들이 한소끔 땀을 닦고 쉴 때쯤, 집배원은 고갯마루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다. 방문객들이 작은 오토바이 앞 바구니에 실은 손때가 잔뜩 묻은 낡은 소가죽 우체부 가방을 보는 순간 만면에 미소를 감출 수 없다. 그를 세우고 방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45년을 이어온 성실함과 노고에 깊은 감동이 밀려온다. 사실 이것은 내가 집배원과의 사전 교섭을 통해 우연한 만남을 가장한 장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매우 소중하고, 집배원도 이 시간이 보람 있기 때문이다.

01.jpg» 박상식 집배원

나는 십여년간 사람들을 인솔해 금강을 여행하고 있다. 이 여행은 강이 생명과 사람, 문화의 젖줄임을 느끼게 하는 체험여행이자, 도시민이 강 유역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한 생태관광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방우리는 방문객들 대부분이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하는 매력 요인이 아주 많은 곳이다. ‘범죄 없는 마을’ 팻말이 매년 더해지고, 강변에서 주워 온 돌과 밭 일구다 고른 돌이 담장을 이룬 마을, 너무나도 오지이기에 슬레이트 지붕이 아직도 대부분이고, 집마루 기둥에는 ‘배 당번’ 이라는 문패가 매달려 있는 그런 마을이다. 

11.jpg» 마을 들머리의 4H 클로버 마크.
12.jpg» 개울을 건너는 배를 담당하는 집을 가리키는 팻말.

강물의 땅

그날도 답사를 위해 큰 방우리 마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들어와 밥 먹으라며 경로당 할머니들이 부르신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밥 때가 되면 같이 먹자고 부른다. 진짓상 앞에 놓고, 열나게 시집 온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 중 한 분은 친정엄마에게 '속아서' 시집 왔다고 했다. “시집 오기 전 친정 동네는 여기보다 백배는 나았어. 논산 연무대가 친정여. 나는 읍내 같은 곳에서 살고 싶었어. 시집 가는 곳이 무주 읍내라는 말에 신랑 얼굴도 안보고 왔잖여. 그런데 세상에나 말만 무주읍이지, 강에 둘러싸인 육지 속 섬마을이 아닌가벼. 시집와서 무주 읍내를 츰 나가 본 게, 이십년 만이었어. 나는 멋모르고 완전 속아서 시집왔다니께.”

13.jpg» 밥 때가 되면 누구인지 몰라도 밥 한 술 뜨자고 부르는 게 이곳 인정이다.

방우리는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북에서 충남 금산군으로 돌아왔지만, 지형적 여건으로 인해 여전히 전북 무주를 생활권으로 하는 독특한 생활방식을 이어오고 있다. 큰방우리와 농원방우리(작은방우리)로 나뉘어져 있는데, 두 곳 모두 강에 막혀 되돌아 나와야 하는 '육지 속 섬마을'이다. “지금이야 빈 집이 많아 10여가구밖에 안 살지만, 사람 많이 모여 살던 큰방우리는 날멩이에다 집 짓고 50가구도 넘었어. 다 뜯고 읍써졌지. 집 주변은 다 밭데기여, 논은 저 농원방우리에 있지. 거기 가려면 높은 바위를 넘어다녔어. 산 넘어 삐딸삐딸 요맹한 길로 다녔지. 지금은 차도 다니고 고속도로여. 버스가 안 다녀서 그렇지.” 강물이 수시로 범람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다. 

14.jpg» 방우리 위치. 금강이 한 바퀴 휘도는 가운데 위치해 사방이 강물로 막힌 '육지 속 섬'이다.

방우리는 행정적으로는 충청남도인데, 지형적으로는 전라북도이다 보니, 충남 금산군 부리면 사무소를 가려 해도 40분이나 차를 타고 가야 한다. 금강을 따라 3㎞만 내려가면 부리면 수통리인데도, 그곳은 언제든 물이 가득 차 흘러가는 습지이다. “옛날엔 면사무소 갈려면 저 갈선산 메바우, 군바우를 넘어다녔어. 지금은 안 다녀서 길이 읍써졌지.” 사람은 전라도 사람인데, 행정권은 충남이 갖고 있다 보니, 그렇다고 마을앞까지 충남이 버스를 내주는 것도 아니고, 전라도는 충남 마을에 편의를 제공할 의지가 없다. 시장, 학교 등 모든 생활권이 편리한 무주읍에 있다 보니, 버스를 타려면 두 시간을 걸어나와야 한다. “방우리 사람들이 무주로 전입을 해달라 해두 안 해주니 이 고생하고 살고 있지. 아이고, 이런 동네 없어유. 여기는 사람 살 디가 안댜. 새끼들 있고 서방님 있응께 어디 떠나두 못하고 살었지. 살다살다 보니께, 이제 나이먹어 죽을 때가 되가잖여~~”

새마을 운동과 영화 <쌀>

작은방우리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전쟁 뒤 일이었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살 거처를 나라에서 제공했는데, 세상에나 아무도 살 수 없는 강가의 자갈밭이었던 것이다. 이곳을 개간해서 살 재주가 있으면 함 살아봐라. 그러나 당시는 전쟁 이후 먹을거리도 없고 참 힘든 때가 아니었나. 전쟁 이후 황폐해진 국토, 그리고 잘 살아보자고 새마을사업을 시작하던 때가 아니었나. 

방우리 주민들은 기어코 강변 돌밭을 파서 모래섬 장자벌을 농원마을로 바꿔 내고야 만다. 방우리 앞 구시소에서 산 너머 절벽까지 길이 250m, 둘레 2.3m 의 굴을 뚫어 물길을 내는 계획은 1940년대 초 동양척식회사 무주 지사장이던 일본인이 시작했다. 바위산에 27m쯤 파던 굴 뚫는 공사는 8.15 광복과 함께 중단되었지만, 1950년대 말부터 방우리 주민 설병환씨를 중심으로 다시 추진했다. 밀가루와 옥수수 등을 배급받으며, 석공들은 오른손에 쇠망치, 왼손에는 쇠정을 들고 허리도 못 펴는 바위 굴 속에서 바윗돌을 찍어냈다. 주변에 대장간까지 만들어놓고 정 끝을 벼리며 하루에 12㎝씩 굴을 뚫어나갔다. 공병부대가 불도저로 하천바닥을 고르면 주민들은 개미처럼 흙을 파 지게에 날랐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날랐다. 그 결과, 상류와 하류의 12m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고, 광활한 농토에서 생산된 쌀을 빻을 마을 공동 정미소도 만들었다. 발전소의 전기는 방우리와 무주 뒷섬마을 뿐만 아니라 굴천, 산의실, 방죽안, 안골, 수통리, 도파리까지 불을 밝혔다. 마을 진입로마저 없던 산골 강마을 오지가 호롱불이 아닌 터빈을 돌려 전깃불을 켤 수 있었으니, 천지개벽을 한 셈이었다. 만든 전기로 농원방우리 장자벌에 일군 논 3만평에 물이 콸콸 흘러들었으니, 비로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문전옥답이 만들어진 것이다.
  
배고팠던 시절, 밀가루 배급을 받아가며 마을 만들기를 했던 것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였으리라. 이러한 피와 땀이 오늘의 방우리를 만들어냈건만, 과거 64가구가 모여 살던 농원마을은 쌀에 기댈 수 없게 된 지금, 9가구만 남아 노인들이 지키고 있다. 여전히 수력발전 전기는 생산되고 있고, 방우리 문전옥답은 이제 농사지을 여력이 없어 밭으로 바뀌어 묘목만 심겨진 상태다. 마을의 정자 옆엔 당시 마을 사업을 이끌었던 설병환씨(1974년 향년 56 작고)의 공적비가 방우리의 역사를 말해 줄 뿐이다.

15.jpg» 바위에 수로를 뚫어 유로를 단축시켜 생긴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소수력발전소는 마을에 상전벽해의 변화를 불러왔다.

이렇게 달성한 위업은 정말 대단했고, 이 사실이 정부에까지 알려지면서, 1963년 <쌀>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신상옥이 감독하고, 배우 신영균, 김희갑, 최윤희, 허장강 등이 열연하였으며, 실제 배경지도 이곳이고, 영화의 내용도 방우리의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수작업으로 이뤄낸 거대한 토목공사였기에, 방우리 마을사업은 새마을운동을 홍보하는 실화의 배경지가 되었다. 영화 <쌀>은 영화사적으로 볼 때 1960년대 초 근대화라는 시대적 요구에 충실히 부응한 영화이며,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의 하나로 꼽히는 신상옥 감독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16.jpg» 신상옥 감독의 영화 <쌀>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방우리 자연환경과 개발

과거에는 시대를 앞서갔던 방우리였지만, 여전히 지형적 여건으로 인해 개발에서 비껴갔다. 덕분에 천혜의 자연환경은 온전히 보전되었다. 강길은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꼭 가고 싶은 코스가 되었고, 여울을 건너며 보는 강바닥의 수많은 생물들은 좋은 생태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다
  
방우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선바위 혹은 촛대바위라 불리는 바위는 마을의 동구나무나 장승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바위이다. 근대화의 상징인 새마을운동 마크도 정겹고, 돌탑의 금줄도 반가이 길손을 맞는다. 큰방우리는 세월이 정지된 듯 아늑한 강마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산밭은 있되 논 하나 없는 큰방우리는 과거 마을 앞 백사장의 길이가 1㎞에 이르렀다고 한다. 강가에 느티나무 노거수마저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고사한 채 외로이 서 있을 뿐, 강 건너는 바위 절벽이 병풍을 치듯 장관을 이루고 있다.

17.jpg» 장승 구실을 하는 방우리 들머리의 촛대바위.

02.jpg» 큰방우리의 병풍절벽.

농원방우리로 가기 위해 자동차 하나가 지나갈 만한 가파른 도로를 올라간다. 고개 정상에서 한쪽으로는 큰방우리에서 흘러온 금강이 무주 내도리로 향해가는 것을, 다른 한쪽으로는 무주 외도리에서 흘러온 금강이 농원방우리로 향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금강이 내도리 반도를 한 바퀴 도는 경치가 가히 절경이어서 금강 홍보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이다. 

03.jpg» 물돌이 마을 내도리의 정경.
 
농원방우리 제방에서 자갈밭으로 내려가 본다. 상류에서 내려온 둥근 호박돌들은 방우리 제방의 돌망태 속에 갇혀있다. 제방 높임 공사만 아니었다면, 하류로 내려갈 호박돌들이다. 넓은 자갈밭의 돌들은 허연 먼지를 뒤집어쓴 회색돌이다. 용담댐이 생기기 전에는 홍수 뒤에 반드시 맑은 물이 흘렀으나 지금은 흙탕물만 쏟아 붓다가 일시에 뚝 그친다. 댐은 물과 함께 물속에 있던 이끼와 썩은 수초 등도 함께 떠내려 보낸다. 따라서 흙탕물을 뒤집어 쓴 돌은 맑은 물로 씻어주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모두 시커먼 뻘흙이 마른 후 회색빛을 띠게 된다. 용담댐으로 인해 수량이 줄어 강은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모래가 넘쳐나던 강변 유원지들은 모두 자갈밭으로 바뀌고 점차 육상화 되어 잡풀이 우거지고 있다. 강가에 초목이 우거지다 보니 고라니와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의 천국이다. 이렇게 늘어난 야생동물은 강변 농경지 농작물에 해를 끼친다.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유해조수로 지정해 제거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지만 대책이 없다. 무주의 하류는 대청댐이 생기면서 강 상류로 회귀해야 하는 많은 물고기들이 뚝 끊긴 지 오래다. 용담댐이 생기면서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육상화 되고 있는 강변이 늘어나고 있다. 답답한 무주, 금산 주민들은 용담댐을 열어 인공 홍수라도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댐의 수량관리를 위해 방류는 제한적이기만 하다. 이래저래 용담댐 하류 주민들의 마음은 고달프기만 하다.

04.jpg» 용담댐이 들어서기 전 강의 모습. 남준기 제공.

05.jpg» 용담댐이 들어선 뒤 여울이 사라진 모습.

농원마을 제방 끝에서 강 따라 흙길을 내려가면 갈선산 절벽 앞에서 물길이 넓게 퍼진 지렛여울을 만난다. 지렛여울은 금산 사람들이 무주 장에 갈 때 이용하거나, 양각산 아래 작은 농토를 일구며 건너다녔다. 여울의 폭이 어찌나 넓은지 맨발로 건너려면, 언제 저 끝까지 건너나 싶은 고통의 연속이다. 발에 밟히는 돌멩이는 이끼로 인해 미끄럽고, 하절기엔 수력발전용 수량이 불어 여울 가운데로 갈수록 유속이 매우 세다. 여울 주변에는 늘 다슬기를 줍는 사람들과 여울 근처에서에 허리까지 담그고 쏘가리를 낚는 사람을 자주 본다. 여울의 시작과 끝 지점의 물결이 잔잔하고 따뜻한 곳에는 감돌고기(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들이 돌고기와 어울려 논다. 지천에 깔려있는 다양한 물고기를 보게 되니, 이곳이 과연 금강의 모습이구나! 느끼는 순간이다.

강 따라 자갈밭을 걷다 작은갈선산의 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강변에 누워 본다. 자갈돌은 따뜻하게 데워져 찜질하듯 등이 따뜻하다. 사람의 소리는 잠시 멈추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하늘은 파랗고, 높이 솟은 작은갈선산의 바위벽은 온통 자연의 색이다. 눈을 감으니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만이 청각을 자극한다. 어디선가 작은 소곤거림마저도 정적의 기세에 눌려 멈춘다. 아주 한동안 무아지경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어느새 아주 잠깐 잠 속에 빠져든다.

07.jpg» 강변 호박돌 위에 누워 자연의 소리에 빠져드는 트레킹 참가자들.

방우리는 금강의 속살이라고 표현한다. 쉽게 내어주지도 않을 뿐더러, 고이 숨어서 쉽게 볼 수가 없다. 감춰진 곳은 더 보고 싶지만, 방우리는 마음먹는다고 해서 열려있는 곳이 아니다. 또한 속살은 쉽게 상처가 나기 때문에 아프게 하면 안되는 곳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경관적으로 뛰어난 곳이 잘 보존되다 보니, 원시적인 자연을 탐하는 사람들로 인해 방우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어떻게 허가를 받았는지 모를 펜션단지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고, 오프로드 자동차가 여울을 파괴하며 가로질러 들어가 캠핑을 하고 쓰레기를 버린다. 점차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조용하던 방우리가 위기를 맞고 있다.

지렛여울부터 어신여울까지의 구간은 언제든지 큰물이 멍석물처럼 밀려와 깊어지는 곳이다. 농원방우리가 개간되기 전에는 방우리 전체가 커다란 배후습지 기능을 했지만, 지금은 금강의 골 외에는 물을 담아낼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 수로의 기능에 충실한 이곳에 주민들은 다리를 놓아달라고 한다. 두 개의 여울에 수침교를 놓고, 그 사이 하상도로를 건설해 수통리와 방우리를 연결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경관이 망가질 것이고, 무엇보다도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과도한 건설사업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마을사람들의 편익도 중요하지만, 정작 방우리는 생활권이 무주이다. 다리를 이용한다 해도, 수통에서 다시 부리면사무소까지는 30분을 나와야 해서, 현재 이동시간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 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의 대다수는 방우리로 놀러오는 관광객일 뿐이다. 지금껏 금강 전역에서 유일하게 개발을 비껴간 곳, 이 공간을 미래세대에게 물려준다면 우리는 덜 부끄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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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죽 가방엔 편지가 없다

운 좋은 날, 농원방우리 제방에서 낡고 허름한 전통적 집배원 가방을 메고 자전거를 탄 박상식 집배원을 만났다. 이 분은 금산 부리면에서 예까지 자동차가 없던 시절부터 지금껏 방우리 마을을 다니셨기에, 방우리의 역사와 가가호호 내력을 소상히 꿰고 있다. 불과 오년 전에야 마을 진입로가 겨우 포장되었을 정도이니, 그 이전의 생활은 어떠했으랴. 부임 초기, 까막눈이 대다수인 주민들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도 대신 써주었다. 차마 전할 수 없는 좋지 않은 소식 앞에서 목이 메였고, 오지 않는 소식을 기다리느라 매일 집배원에게 내 편지 없냐고 물으며 목 빼던 어머니를 피해 다녀야 했다. 입대한 아들의 옷이 돌아오거나 비보라도 전할 때면, 함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때로는 중매를 잘 서서 혼인을 시켜주기도 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읽어주고 나올 땐 쌀을 한말 자전거에 실어 주었다. 실로 마을의 울고 웃던 역사와 함께 한 사십오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전달할 편지도 별로 없고, 편지 읽어 줄 일도 없어졌다. 그나마 전하는 것은 고지서 몇 장이 전부다. 달라졌다면 가방은 가벼워졌고,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비가 오면 작은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당시만 해도 전할 편지가 많은 날은 하루해가 짧았다. 먼 길을 자전거 타고 오는 것보다 물길을 따라 물에 빠져서 질러오는 것이 빨랐다. 물이 아무리 차가워도 신발 벗고 바짓단 걷는 것은 기본이었다. 물이 많을 때는 편지가방 젖을라 머리 위로 쳐들고 물에 빠져 와야 했다.
  
집배원이 때묻은 소가죽 가방에서 꺼내 보이는 것은 의외의 물건이었다. 당뇨 체크 기구와 혈압계 그리고 두툼한 약봉지들. 세월이 흘러 방우리를 일궜던 근력 있던 주민들은 한분 한분씩 돌아가셨다. 빈 집이 더 많아졌고 그나마 한 집에 한 분씩 남아있지만 약에 의존하는 노인이 대다수다. 매일 매일 마을 집을 방문하는 집배원의 서비스라면 어르신의 혈압을 재고, 읍내 보건소 약을 타다 주는 일, 그리고 오늘도 밤새 안녕하신지 들여다 보는 일이다. 앞집서 받은 찐 고구마를 뒷집 시장한 어르신께 드리고, 동네 들어오는 읍내 마트에서 주전부리로 영양갱도 한 묶음 사서 경노당 들러 어르신들에게 나눠 드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콩이며 팥을 턴 날엔 집배원 오면 주겠다고 비닐봉지에 한줌 남겨놓았다가 가방에 넣어주신다. 

실제 주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 사람들은 노인네들한테 냄새 난다고 싫어하는데, 박 집배원은 오면 한참 동안 안 가고 말벗이 되어줘” 하신다. 박 집배원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라면, 오래된 똑딱이 카메라로 마을 곳곳을 찍고, 마을 주민들을 찍어드리는 것이다. 최근에는 어르신들 영정 사진을 찍어 깨끗하게 인화해 액자에 넣어 갖다드린다. 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백일이나 돌을 챙겨 사진을 찍어준다. “나도 내일이 정년이지만,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방우리는 내 인생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방문객들에게 시간을 내준 지 얼마나 됐을까. 가던 길을 재촉하느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박상식 집배원께 우리는 박수로 화답을 한다. 그 분은 당연한 일이라며 손사래를 치면서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저와 사진 좀 한 장 찍어주세요. 우리 손주들에게 보여주게요” 한다. 

09.jpg» 편지 가방에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나눠주려고 읍내 마트에서 산 양갱이 들어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듯 마을도 나이를 먹는다. 무릇 나이를 먹으며 사람은 깊게 무르익어감을 아는데, 마을은 그 무르익은 진가가 잊혀지고 있다. 그래서 살아있는 이야기가 더욱 그리운 때다.

10.jpg» 박상식 집배원이 방문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인간은 정말 초라하다. 때로는 방우리를 일군 사람들처럼, 자연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그 초라함을 덮고 빛나기도 한다. 쌀 한톨을 만들려던 불굴의 의지는 공동체의 힘으로 배고픔을 극복했다. 비록 그것이 자연을 개발하는 과정이었다 해도,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지금의 방우리로 자리하게 한 역사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과도한 개발과 자연 파괴가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인지, 그 과정의 합의가 방우리 주민들처럼 모두의 의지가 모아진 결과인지 자문해야 한다.

미래의 열쇠는 과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기후변화 환경위기 등 상상하기 어려운 재난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과제는 조상들의 삶의 지혜, 협동하는 마음, 공동체 정신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다. 
  
금강에 영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 영혼은 금강과 함께하며 살았던 옛 사람들의 혼을 이야기하는 것일 게다.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문화와 그 발자취 속에서 울고 웃고 성장하며 발전해 온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혼이 금강에 고스란히 묻어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글·사진 최수경/ 금강생태문화연구소 ‘숨결’ 소장,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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