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아침 7시 30분쯤 ‘성산포 터진목’의 모습이다.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에서 213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학살됐다. 제주4.3 당시 성산면, 구좌면, 표선면 관할했던 특별중대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30여 차례 붙잡아 온 주민들을 고문·취조한 뒤 이곳 성산포 터진목으로 끌고 가 즉결 처형했다. 2023.04.01. ⓒ민중의소리 1일 오전 7시쯤, 제주도 성산포 광치기해변 끝자락 ‘해녀의집’ 앞에서 만난 주민에게 물었다. “여기 학살터가 어디에요?” 해변의 바람을 쐬던 그는 휴대전화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열고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지 푸석푸석한 손으로 콕 짚어 알려줬다. “원래 여기가 당시 다리가 없었는데, 여기에서 죽이고 시신을 바다에 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설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는 데, 그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자주 찾아와 주세요.”
그가 짚어준 곳까지 갔더니 정말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표지판은 빽빽한 방풍림 사이로 난 오솔길을 가리켰다. 나지막한 언덕이어서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그늘이 짙게 깔린 호젓한 언덕길을 지나자, 광활한 해변과 바다가 펼쳐졌다. 갓 성산일출봉 위로 떠오른 해는 바다의 무수한 물결을 따라 부서지며 반짝였다.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 강매를 거부했다는 이유, 남편과 아들을 도피시켰다는 이유 등으로 끌려온 2백여명의 섬사람들이 숙청당하기 전 바라봤을 풍경이었다. 섬사람들의 피를 마신 모래와 바다이지만, 지금은 매해 1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 곳이자, 여름이면 아이들이 헤엄치며 노는 곳이기도 했다.
이날 아침에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풍광에 젖어 산책하는 연인과 관광객이 해변에 기다란 그림자를 그렸다.
지난 4월 1일 아침 7시 30분쯤 ‘성산포 터진목’의 모습이다.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에서 213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학살됐다. 제주4.3 당시 성산면, 구좌면, 표선면 관할했던 특별중대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30여 차례 붙잡아 온 주민들을 고문·취조한 뒤 이곳 성산포 터진목으로 끌고 가 즉결 처형했다. 2023.04.01. ⓒ민중의소리
① 서청으로 구성된 ‘특별중대’ 학살극 이승만 초상화 강매 거부 청년들 총살당해야만 했나
제주4·3 당시, 이곳 성산면을 관할했던 ‘특별중대’는 서북청년회(서청) 단원으로 구성됐다.
서청을 빼고 제주4.3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왜 그토록 잔혹했는지가 연구의 주제가 될 정도다. 서청은 이북에서 넘어온 반공청년들의 단체다. 해방 이후 이북에서는 ‘토지개혁’과 ‘친일숙청’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자본가와 일본군·친일경찰 출신 등이 이를 피해 월남했다. 재산을 잃고, 민족반역자가 되어, 혈혈단신으로 도망치듯 월남했기에 이들 중에는 극렬한 반공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남쪽은 극심한 실업난과 식량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기에, 이들은 목숨을 부지했더라도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 등은 이들의 처지를 이용했다. 1947년 3월 1일 기념행사에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고 8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제주도 사회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서청 단원 또는 서청 출신 경찰들이 제주도로 투입되기 시작한 이유였다.
하지만 서청의 투입은 제주도를 파국으로 몰았다. 제주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조선일보 사장 등의 후원, 미군정의 경무부장 조병옥 등의 비호를 받으며 거리낌 없이 만행을 저질렀다. 별다른 봉급을 받는 것도 아니었던 서청 단원들은 제주도민에게 강매하거나, 강제모금 등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을 대상으로 폭력과 테러 행위도 저질렀다. 실제 공산주의자든 아니든 “빨갱이”라고 여기면 테러의 대상이었다. 미군정이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2500명 구금, 경찰에 의한 ‘김용철·양은하 고문치사 사건’과 ‘박행구 즉결총살 사건’ 등이 발생했고, 이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극단적인 투쟁을 불렀다. 또 이는 무장봉기 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학살과 보복의 반복을 낳으며 제주도를 피의 섬으로 물들였다.
서청 단원으로 구성된 특별중대 또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산국민학교에 주둔하며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30여 차례에 걸쳐 붙잡아 온 주민들을 고문·취조한 뒤, 이곳 ‘성산포 터진목’으로 끌고 와 즉결 처형했다. 아들과 남편을 산과 일본 등으로 도피시켰다는 게 이유였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줄줄이 세워놓고 총살시켰다. 시체는 바다에 버렸다.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 강매를 거부한 청년 30여명을 학살한 경우도 있었다. 제주4·3평화재단이 펴낸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렇게 터진목에서 죽은 제주도민은 213명이었다.
지난 3월 31일 찾은 외도지서 터다. 외도지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유총연맹 등 보수단체의 지원으로 세운 비석이 없었다면 이곳이 외도지서 터인지 알 수 없었다. 비석 뒤편으로는 가냘픈 동백꽃이 심겨 있었다. 2023.03.31. ⓒ민중의소리
② 외도지서 서청 출신 이윤도와 ‘절뒤’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서청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악행을 전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사례 중 하나는 ‘서청 출신 경찰 이윤도의 학살극’이다.
지난달 31일 이윤도가 근무했던 외도2동 외도지서 터를 찾았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별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서, 자유논객연합 등 보수단체 지원으로 세워진 표지석이 없으면 이곳이 4·3 당시 외도지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비석 뒤로는 작은 동백나무 하나가 폭낭(팽나무의 제주 방언) 옆에 꼭 붙은 채 심겨 있었다. 성한 동백꽃은 한두 개뿐, 나무는 힘겹게 꽃을 피우려 애쓰고 있었다.
중산간 마을 주민이었다가 친인척의 도움으로 외도지서 특공대원이 돼 목숨을 부지했던 고치돈 씨는 이윤도의 학살극을 1999년 제민일보 4·3취재반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윤도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그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다. (...생략...)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다.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다. (...생략...)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지난 3월 31일 외도에서 ‘절뒤’라고 불리는 곳을 찾아다녔다.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서 찾기 힘들었다. 여러 사람이 이곳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만할 뿐이었다. ⓒ민중의소리
외도지서에서 근무하던 이윤도 등은 ‘도피자 가족’들을 잡아다 ‘절뒤’라 불리는 곳으로 끌고 간 뒤 학살했다. 그중 ‘이완영 일가족 학살 사건’은 1960년 4·19 혁명 직후 구성된 국회 양민학살조사특별위원회에 외도 주민들이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949년 2월 14일 외도지서는 이완영(40)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아버지(67)·어머니(63) 그리고 아내(41), 10대 자녀 둘, 8살·7살·3살 자녀 셋, 며느리(22)와 생후 10일된 손자를 죽창으로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완영은 일가족을 잃은 뒤 약 1달 만에 토벌대에 붙잡혀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50년 1월 옥사했다. 아무리 야만의 시대라지만, 생후 10일된 손자까지 잔인하게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찰 뒤편’이라는 의미의 이곳 학살터 ‘절뒤’도 가보았으나, 현재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고 건물이 세워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담장 너머로 분홍빛 풀또기(장미과 관목)꽃만 만개해 있었다.
지난 4월 1일 ‘조천지서 앞밭 학살터’를 찾았다. 동네 주민들은 “저곳”이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새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 노는 땅은 잡초만 무성했다. 이 땅 도로 건너편에는 지구대가 하나 있었는데, 지구대가 있는 자리가 조천지서 터였다. ⓒ민중의소리
③ 서청 출신 경찰들 있던 조천지서·삼양지서 흔적은 없지만, 주민들이 손으로 가리킨 곳
지난 1일 성산포 터진목 학살터를 방문했다가 시내로 돌아오며 조천지서 터와 삼양지서 터도 들렸다. 이곳에서도 4·3 당시 서청 출신 경찰이 근무하면서 잔인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당시 조천지서 경찰들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집에 없으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도피자 가족’으로 간주하고 지서 근처 창고에 잡아넣었다. 그렇게 잡힌 126명의 ‘도피자 가족’은 조천지서 인근 ‘조천지서 앞 밭’이란 곳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희생자 126명 중 10살 미만 유·아동은 26명이었다. 총살당한 김군선의 손녀와 방상규의 아들 등 3명은 겨우 1살이었다.
‘조천지서 앞밭’은 새 건물이 올라간 상태였고, 공터로 남은 곳도 풀만 무성했다.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어느 곳에서 섬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당했는지 기억한다는 듯 “저곳”이라며 한곳을 가리켰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주름 깊은 한 주민은 “저기 하얀 차 세워진 곳 있지예? 저기가 예전에 사람들 막 죽인 곳이우다”라고 말했다.
삼양지서 터도 비슷했다. 새 건물이 세워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오래된 것은 울타리 쳐진 폭낭뿐이었다. 폭낭은 성인 두 명이 팔 벌려 껴안아도 다 감싸지 못할 정도로 컸다.
삼양지서에는 악명 높은 서청 출신 경찰 정용철이 근무했다. 지난 1일 찾은 삼양지서 터에는 별다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커다란 고목만 있을 뿐이었다. ⓒ민중의소리
이윤도 뛰어넘는 삼양지서 정용철
삼양지터에서 근무했던 서청 출신 경찰 정용철은 이윤도 못지않게 잔인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제주경찰 10기생으로 4·3 당시 삼양지서에서 잠시 근무했던 김제진 씨와 대한청년단 분대장이었던 고봉수 씨의 증언이 담겼다.
김제진 씨는 정용철의 학살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서청 출신 정 주임은 너무 잔인했다. 여자들 옷을 벗겨 더러운 행위를 하는 것도 봤다. 그 추운 겨울날 옷을 벗긴 채 망루 위에 오랜 시간 앉혔다. (중략) 그러다 날이 밝으면 삼양지서 옆 밭에서 수십명씩 잡아다 죽였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강요했다.” 4.3 당시 제주의 청년들은 좌익으로 몰려 죽지 않기 위해 대동청년단원과 같은 보수단체에 가입해 서청 출신 경찰의 손발이 되기도 했는데, 서청 출신 경찰들은 이같이 같은 마을에 살던 이웃을 살해하게끔 종용하다 시원치 않으면 자신이 직접 죽였다.
고봉수 씨가 증언한 정용철의 학살극은 상상조차 힘든 수준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다. 그런데 정 주임은 웬일인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었다. 그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다. 임신한 상태였다. 정 주임은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속으로 찔러 넣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 주임은 그 짓을 하다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 (생략)”
이날 희생된 여성은 21세의 김진옥. 당시 산으로 피신했던 김태생의 아내였다. 김태생은 이날 아내와 부모를 잃었고, 이튿날 처조부를, 이후 며칠 만에 장모와 처제까지 잃었다. 김태생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이토록 잔인했던 정용철에게도 연정을 품은 여성이 있었다. 정용철과 같은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경찰이 되어 제주에 파견 갔던 김시훈은 그를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고 한다. “성격이 좀 이상해서 자기 비위에 거슬리면 당장 총을 끄집어내 쏘려고 했다. 당시 경찰관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파리새끼 죽이는 것처럼 간단했다. 그런데 그도 ‘이옥’이라는 처녀에게 반해 면회도 하던 사람이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이 같은 정용철의 양면성을 짚으며 “서청 단원들도 어쩌면 역사의 희생자일지 모른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누가 그들의 처지를 이용했는지 밝히고 있다. 보고서는 “문제는 서청을 사주한 자들”이라며 “왜 서청 단원들이 경찰로 둔갑해 제주에 파견됐으며, 어떻게 처음부터 경위로 특채될 정도로 우대받았는가? 이에 대해 미군보고서는 이승만의 결정에 따라 과격한 반공주의자로 주목받는 서청 단원을 경찰로 만들었으며 지원자를 늘리기 위해 단원 20명을 모아오면 그중 일부를 특채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1일 ‘조천지서 앞밭 학살터’를 찾았다. 동네 주민들은 “저곳”이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새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 노는 땅은 잡초만 무성했다. 이 땅 도로 건너편에는 지구대가 하나 있었는데, 지구대가 있는 자리가 조천지서 터였다. ⓒ민중의소리
4월 3일 추념식 찾는 서북청년단 75주년 4·3 추념식 장소 앞 집회신고
지난 3월 31일~4월 1일 이틀 동안 이곳을 돌아본 이유는 제주도민이 ‘서북청년회’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고통과 상처가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기 위함이었다. 이날 돌아본 제주4·3 터에서 벌어진 서청의 학살은 극히 일부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제주도민이 서청이라는 이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당선된 태영호 의원이 제주4·3 역사를 다시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리는 ‘북한 지령설’을 서슴지 않고 꺼내고, 여당도 구두경고로 이를 묵인하더니, 극우정당들이 제주도 전역에 태 의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현수막을 달기에 이르렀다.
서북청년단 정함철 씨는 지난 3월 23일 제주동부경찰서에 오는 4월 3일 75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리는 제주4.3평화공원 앞 등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신고했다. ⓒ서북청년단이 카페에 공개한 집회신고서와 과거 집회 사진
그리고 그 서청의 의지와 정신을 잇겠다는 단체가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으로 오는 4월 3일 제주도를 찾는다. 4월 3일 오전 제75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리는 제주4.3평화공원 앞에서도 서북청년단 깃발을 흔들며 집회를 하겠다고 옥외집회 신고서도 접수한 상태다. ‘서북청년단 구국결사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정함철 씨는 2일 제주도로 향하며 서북청년단 페이스북 페이지에 “좌익(거짓과 어둠)의 해방구로 전락한 제주도민들의 병든 양심이 치유되기를 소망한다”고 썼다. 서청이 행했던 일들이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듯.
이에 일각에서는 정권이 바뀐 지 1년 만에 1948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한탄이 나온다. 학살터를 돌고, 시내의 한 카페로 이동하던 중 만난 한 택시기사는 최근 극우정당의 현수막과 서북청년단 집회예고 등에 대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현수막을 보면 기분이 안 좋다. 아마 제주사람이면 다 그렇겠지. 근데 방법이 없다. 훼손하면 우리가 잡혀가니까. 제주사람이 한 거라면 말이라도 할 텐데, 외부인이...다른 해에는 이런 적 없었는데, 누가 시킨 것 같다.” “ 이승훈 기자 ” 응원하기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신문은 선생님] [예쁜 말 바른 말] [338] ‘무례한’과 ‘드잡이’ 류덕엽 교육학 박사·전 서울 양진초 교장 입력 2024.03.13. 03:00 0 일러스트=정서용 *한 시민 단체가 무뢰한 정치인들의 사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중요한 경기 전날 저녁 톱스타 두 선수가 드잡이하며 팀 내 갈등이 불거졌다. 위 기사문에 나온 ‘무뢰한’과 ‘드잡이’ 중에서 잘못 쓰인 말을 골라 보세요. 정답은 ‘무뢰한’입니다. ‘무뢰한(無賴漢)’은 성품이 막되어 예의와 염치를 모르며, 일정한 소속이나 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해요. 줄여서 ‘무뢰’라고도 해요. 발음이 비슷한 ‘무례(無禮)’는 태도나 말에 예의가 없음을 뜻하는데 의미상 차이가 있으니 구별해서 써야겠죠. ‘드잡이’는 서로 머리나 멱살을 움켜잡고 싸우는 짓을 뜻하는 말이에요. 유의어는 ‘격투, 난투, 몸싸움’ 등이 있어요. 예를 들면 ‘드잡이 싸움’, 두 친구가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드잡이하는 바람에 말릴 겨를이 없었다’와 같이 써요. 또 빚을 못 갚은 사람의 가마나 솥 따위를 떼어 가거나 세간을 가져가는 일을 뜻하지요. 예를 들면 ‘한때 드잡이를 당할 만큼 어려웠지만 성실하게 일해 극복했다’와 같이 쓸 수 있어요. ‘드잽이’ ‘디잽이’는 강원·충청 지역에서 쓰는 방언이고, 간혹 ‘뒤재비’를 쓰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비표준어랍니다. ‘드잡이’는 접두사 ‘드-’와 ‘잡-’이 결합한 ‘드잡-’과 접미사 ‘-이’가 결합한 것으로, 이와 관련된 ‘드잡다’는 ‘매우 세게 잡다’라는 뜻을 가진 북한어예요.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뢰한이라며 차별했다. -”젊은이와 드잡이하는 어르신을 보고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하다니, 어찌 그럴 수 있나?” 류덕엽 교육학 박사·전 서울 양진초 교장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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