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형 비례제'보다 '강한 정당'이 중요하다
[기고] 심상정 의원의 오류
2019.03.24 13:52:27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상대방 행태나 의견 속의 모순과 오류를 밝혀 자신의 정당성과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그 비판의 대상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채근하는 경우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전자와 후자를 구분할 줄 안다. 직장에서나 동네에서나 이 둘을 잘 구분하는 이들이 주변 사람들의 믿음과 지지를 얻는다.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산식이 필요 없다"는 말의 출처
심상정 의원(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주 선거제도 개정안에 대한 발언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여야4당이 잠정 합의한 개정안에 대해 기자들이 설명을 요구하며, '산식(算式·계산 방식)을 보여 달라. 우리가 이해를 못하면 국민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고 묻자 심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국민들은 산식이 필요 없어요. 예를 들어, 컴퓨터를 칠 때 치는 방법만 알면 되지, 그 안에 부품이 어떻게 되고 이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죠."
내가 이 발언을 정치인들의 수많은 실언 가운데 하나로 흘려듣지 못한 이유는 그 말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당정치인과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분업 관계가 불가피함을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현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꼭 알아야 하는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 자동차 기능공이 되거나 아기를 갖기 위해 산부인과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할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된다." 샤츠에게 민주주의는 생업에 바빠 나라 일을 일일이 다 챙길 수 없는 보통 사람들과 그들의 의견을 모아 정책으로 만들어 집행하고 평가받으려는 정치인들 간의 협력 체제이다.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이해
이런 논리를 토대로 그는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1억8000만 명의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1억8000만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이 공동체가 보통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것은 "리더십, 조직, 대안 그리고 책임과 신뢰의 체계에 관한 문제"로 귀결되며, 그 한 가운데 샤츠가 현대 민주주의의 중핵으로 끊임없이 강조했던 정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샤츠의 주장과 심 의원 발언이 포개진 것은 잠시나마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절반의 인민주권>은 반세기 전 미국 정치를 소재로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이해와 정당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지금 우리나라와 같이 시민 역량에 대한 믿음이 과도하고 정당 활동에 대한 반감이 지나친 사회에서는 여전히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 많은 책이다. 그런데 그 주장의 일단을 담은 심의원 답변은 누가 봐도 민주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시민을 무시한 발언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며칠 간 그 발언을 둘러싼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심상정 의원이 정개특위 활동에서 범한 몇 가지 오류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정치인들과의 협력이 필요한 시민
첫째, 심 의원의 샤츠 원용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잘못된 것임에 분명하다. 샤츠는 시민들의 정치적 무지를 근거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이들에 대항해 위와 같은 논리를 펼쳤다. 요즘의 한국같이 시민들이 국민청원도 하고 참여예산도 하고 공론조사도 하며 직접․참여․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오른 조건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장한 이래 국가 예산은 물론 자기 동네 예산 항목과 규모도 모르고 심지어 지역구 국회의원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할 수 있냐는 식의 힐난은 끊임없이 민주 정치를 괴롭혀왔다.
그러나 샤츠가 보기에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오해이며, 일반 시민들은 정당과 같은 정치 조직의 도움을 제대로 받기만 하면 현명한 주권자로 충분히 자기 권익을 실현할 수 있다. 요컨대 샤츠의 주장은 시민들이 잘 모른다는 사실만 갖고 민주주의를 비하하지 말라는 것이지, 자신들에게 중요한 법규나 정책의 주요 내용을 시민들이 몰라도 좋다고 한 말이 아니다.
게임의 규칙은 간명해야할 뿐 아니라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
둘째, 심 의원이 던진 말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주도한 선거제 합의의 내용과 과정에 있다. 어떤 법규든 간결하고 분명할수록 좋다.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짐에 따라 사회생활을 규율하는 법규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권력의 소재와 행사, 시민권의 내용과 행사 방법 같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법률과 제도는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 불행히도 현재의 합의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현업 정치인으로 활동해온 박지원 의원조차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합의안이다. 박 의원이 싫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을 배제한 문제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선거제도의 핵심은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라는데 있다. 게임 규칙이 모두에게 공정한 효과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 야당 대표들이 단식까지 하며 기존 선거제도를 바꾸려는 것도, 한국당이 끝까지 연동형 비례제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이런 파당적 효과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이란 참가자 모두가 동의하고 따를 때만 정당성을 가지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국당을, 제1야당을, 두 차례나 집권 경험을 가진 정당을 배제한 채 선거제도를 변경하고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은 민주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향후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 모르는 위험한 실험이다. 극우가 싫다고 한국당이 싫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연동형 비례제보다 사회적 기반을 갖는 강한 정당이 중요하다
그 모든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연동형 비례제는 한국 사회를 크게 바꾸는 정치 개혁의 주춧돌이 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심 의원의 마지막 오류는 그런 선거제도 변화가 정의당이나 그 지지자들의 기대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다는데 있다.
우선 비례제 확대는 분명 현재의 군소 정당에 더 많은 의석을 보장하고 더 많은 정당의 의회 진입을 허용할 것이다. 이를 두고 '민심 그대로 국회'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기반을 갖고 안정적으로 제도화된 정당이 없다면, 그렇게 표출된 민심이 의회 법률과 정부 정책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낮다. 지금껏 우리가 지켜봐 왔듯이 청와대만 바라보고 청와대만 성토하는 정당들이 당명변경에 이합집산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상황이 변하는 않는 한 '민심 그대로 의회'는 그저 내용 없는 장식으로 남을 뿐이다.
연동형 비례제가 강한 정당 발전을 도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계 어디서도 그런 경우는 없었으며, 오히려 비례제는 반대 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다. 쉽게 얻는 의석은 강한 정당 건설의 유인을 떨어뜨린다. 힘들여 정당 조직을 강화하고 그 조직의 힘으로 당선자를 내는 노력 없이도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조건에서 누가 그 어렵고 고된 일을 맡으려 하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질문해 볼 수도 있겠다. 정의당은 비례제 확대가 야기하는 원심력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약간의 노력으로도 쉽게 의석을 얻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당내 이견을 견디기보다 당 밖으로 뛰쳐나가 새로운 정당을 다시 한 번 건설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지난 진보정당들의 경험을 돌아보면, 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하기도 어렵다.
책임을 묻는 시민과 책임질 수 있는 정당
다른 한편, 연동형 비례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대표성에 주목한 나머지 그와 짝을 이루는 책임성의 가치를 쉽게 간과하는 것 같다. 비례제 확대로 인한 다당제는 안정적인 의회 다수파 구성을 위해 정당 간 협력을 유도하지만, 정당 수가 많고 그들 간 갈등이 심할 경우 다수파 구성 자체가 지난한 일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어렵게 다수파를 구성해 국정을 이끌어간다 해도 그 연합에 참여한 정당이 많거나 그들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불분명하면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어느 정당이 무엇을 잘 했고 잘못 했는지 책임을 묻기 어렵다.
요컨대 지금과 같이 대통령과 청와대만 보이고 정당 간 경쟁은 '실체 없는 이념 대립'을 맴도는 조건에서 연동형 비례제에 따른 다당제가 어떻게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가져올 수 있는지, 설령 이념 대립이 아닌 정책 대화가 정치 과정을 주도한다 해도 그것이 정치경제 엘리트들만을 위한 담합인지 다양한 사회집단을 아우르는 타협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다수 지지를 얻기 위해 진력하는 강한 정당에 대한 고려 없는 연동형 비례제는 자기만족을 즐기는 지식인들의 헛된 꿈처럼 보일 뿐이다.
*** *** ***
심상정 의원이 선거제 산식 요구를 컴퓨터 타이핑으로 받아넘긴 다음 날, 뉴스 포털에는 심의원 발언이 한국당 측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샤츠슈나이더가 강조했듯이 모든 정치 활동은 편향성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파당적인 성격을 갖는다. 민주주의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해 사실과 이론, 조직과 이념을 동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파당적 경쟁이 너무 자주 진실을 가리고 진의를 왜곡하는 것은 시민들에게도 정치인들에게도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국민들은 산식이 필요 없다"는 말의 출처
심상정 의원(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주 선거제도 개정안에 대한 발언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여야4당이 잠정 합의한 개정안에 대해 기자들이 설명을 요구하며, '산식(算式·계산 방식)을 보여 달라. 우리가 이해를 못하면 국민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고 묻자 심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국민들은 산식이 필요 없어요. 예를 들어, 컴퓨터를 칠 때 치는 방법만 알면 되지, 그 안에 부품이 어떻게 되고 이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죠."
내가 이 발언을 정치인들의 수많은 실언 가운데 하나로 흘려듣지 못한 이유는 그 말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당정치인과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분업 관계가 불가피함을 설명하며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현대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꼭 알아야 하는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 자동차 기능공이 되거나 아기를 갖기 위해 산부인과 의사가 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할 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된다." 샤츠에게 민주주의는 생업에 바빠 나라 일을 일일이 다 챙길 수 없는 보통 사람들과 그들의 의견을 모아 정책으로 만들어 집행하고 평가받으려는 정치인들 간의 협력 체제이다.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이해
이런 논리를 토대로 그는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1억8000만 명의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1억8000만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이 공동체가 보통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것은 "리더십, 조직, 대안 그리고 책임과 신뢰의 체계에 관한 문제"로 귀결되며, 그 한 가운데 샤츠가 현대 민주주의의 중핵으로 끊임없이 강조했던 정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샤츠의 주장과 심 의원 발언이 포개진 것은 잠시나마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절반의 인민주권>은 반세기 전 미국 정치를 소재로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이해와 정당의 역할을 강조했지만, 지금 우리나라와 같이 시민 역량에 대한 믿음이 과도하고 정당 활동에 대한 반감이 지나친 사회에서는 여전히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 많은 책이다. 그런데 그 주장의 일단을 담은 심의원 답변은 누가 봐도 민주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시민을 무시한 발언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며칠 간 그 발언을 둘러싼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심상정 의원이 정개특위 활동에서 범한 몇 가지 오류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정치인들과의 협력이 필요한 시민
첫째, 심 의원의 샤츠 원용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잘못된 것임에 분명하다. 샤츠는 시민들의 정치적 무지를 근거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이들에 대항해 위와 같은 논리를 펼쳤다. 요즘의 한국같이 시민들이 국민청원도 하고 참여예산도 하고 공론조사도 하며 직접․참여․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오른 조건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장한 이래 국가 예산은 물론 자기 동네 예산 항목과 규모도 모르고 심지어 지역구 국회의원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할 수 있냐는 식의 힐난은 끊임없이 민주 정치를 괴롭혀왔다.
그러나 샤츠가 보기에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오해이며, 일반 시민들은 정당과 같은 정치 조직의 도움을 제대로 받기만 하면 현명한 주권자로 충분히 자기 권익을 실현할 수 있다. 요컨대 샤츠의 주장은 시민들이 잘 모른다는 사실만 갖고 민주주의를 비하하지 말라는 것이지, 자신들에게 중요한 법규나 정책의 주요 내용을 시민들이 몰라도 좋다고 한 말이 아니다.
게임의 규칙은 간명해야할 뿐 아니라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
둘째, 심 의원이 던진 말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주도한 선거제 합의의 내용과 과정에 있다. 어떤 법규든 간결하고 분명할수록 좋다.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짐에 따라 사회생활을 규율하는 법규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권력의 소재와 행사, 시민권의 내용과 행사 방법 같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법률과 제도는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분명하게 규정해야 한다. 불행히도 현재의 합의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현업 정치인으로 활동해온 박지원 의원조차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합의안이다. 박 의원이 싫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을 배제한 문제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선거제도의 핵심은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라는데 있다. 게임 규칙이 모두에게 공정한 효과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 야당 대표들이 단식까지 하며 기존 선거제도를 바꾸려는 것도, 한국당이 끝까지 연동형 비례제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이런 파당적 효과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이란 참가자 모두가 동의하고 따를 때만 정당성을 가지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국당을, 제1야당을, 두 차례나 집권 경험을 가진 정당을 배제한 채 선거제도를 변경하고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은 민주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향후 어떤 사태를 불러올지 모르는 위험한 실험이다. 극우가 싫다고 한국당이 싫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연동형 비례제보다 사회적 기반을 갖는 강한 정당이 중요하다
그 모든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연동형 비례제는 한국 사회를 크게 바꾸는 정치 개혁의 주춧돌이 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심 의원의 마지막 오류는 그런 선거제도 변화가 정의당이나 그 지지자들의 기대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다는데 있다.
우선 비례제 확대는 분명 현재의 군소 정당에 더 많은 의석을 보장하고 더 많은 정당의 의회 진입을 허용할 것이다. 이를 두고 '민심 그대로 국회'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기반을 갖고 안정적으로 제도화된 정당이 없다면, 그렇게 표출된 민심이 의회 법률과 정부 정책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낮다. 지금껏 우리가 지켜봐 왔듯이 청와대만 바라보고 청와대만 성토하는 정당들이 당명변경에 이합집산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상황이 변하는 않는 한 '민심 그대로 의회'는 그저 내용 없는 장식으로 남을 뿐이다.
연동형 비례제가 강한 정당 발전을 도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계 어디서도 그런 경우는 없었으며, 오히려 비례제는 반대 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높다. 쉽게 얻는 의석은 강한 정당 건설의 유인을 떨어뜨린다. 힘들여 정당 조직을 강화하고 그 조직의 힘으로 당선자를 내는 노력 없이도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조건에서 누가 그 어렵고 고된 일을 맡으려 하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질문해 볼 수도 있겠다. 정의당은 비례제 확대가 야기하는 원심력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약간의 노력으로도 쉽게 의석을 얻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당내 이견을 견디기보다 당 밖으로 뛰쳐나가 새로운 정당을 다시 한 번 건설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지난 진보정당들의 경험을 돌아보면, 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하기도 어렵다.
책임을 묻는 시민과 책임질 수 있는 정당
다른 한편, 연동형 비례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대표성에 주목한 나머지 그와 짝을 이루는 책임성의 가치를 쉽게 간과하는 것 같다. 비례제 확대로 인한 다당제는 안정적인 의회 다수파 구성을 위해 정당 간 협력을 유도하지만, 정당 수가 많고 그들 간 갈등이 심할 경우 다수파 구성 자체가 지난한 일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어렵게 다수파를 구성해 국정을 이끌어간다 해도 그 연합에 참여한 정당이 많거나 그들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불분명하면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어느 정당이 무엇을 잘 했고 잘못 했는지 책임을 묻기 어렵다.
요컨대 지금과 같이 대통령과 청와대만 보이고 정당 간 경쟁은 '실체 없는 이념 대립'을 맴도는 조건에서 연동형 비례제에 따른 다당제가 어떻게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가져올 수 있는지, 설령 이념 대립이 아닌 정책 대화가 정치 과정을 주도한다 해도 그것이 정치경제 엘리트들만을 위한 담합인지 다양한 사회집단을 아우르는 타협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더라도 다수 지지를 얻기 위해 진력하는 강한 정당에 대한 고려 없는 연동형 비례제는 자기만족을 즐기는 지식인들의 헛된 꿈처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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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의원이 선거제 산식 요구를 컴퓨터 타이핑으로 받아넘긴 다음 날, 뉴스 포털에는 심의원 발언이 한국당 측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샤츠슈나이더가 강조했듯이 모든 정치 활동은 편향성을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파당적인 성격을 갖는다. 민주주의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해 사실과 이론, 조직과 이념을 동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파당적 경쟁이 너무 자주 진실을 가리고 진의를 왜곡하는 것은 시민들에게도 정치인들에게도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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