跳至主要内容

우리 글『세종어제 훈민정음』과 『신지비사』

 

우리 글『세종어제 훈민정음』과 『신지비사』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8)

  • 기자명 이양재 
  •  
  •  입력 2022.03.29 00:05
  •  
  •  수정 2022.03.29 09:29
  •  
  •  댓글 0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우리 말과 어순(語順)은 단군 조선 이전부터 변화하며 내려왔지만 한글은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부터 나왔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은 우리 민족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6) 『세종어제 훈민정음』과 『신지비사(神誌祕詞)

우리는 우리 말과 우리 글로 생각을 한다. 말과 글은 생각이고 정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생각과 정신을 자주적으로 표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금지한 것은 우리의 생각을 빼앗고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의 학자들은 사투를 벌이며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냈다.

가.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 어제(世宗御製)이다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 첫 면, 1권1책(33장),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청. [사진제공 - 이양재]  간송본의 앞 두 장은 떨어져 나갔으므로, 필사하여 복원하였다. 이 부분은 세종대왕이 지은 어제 서문이다.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 첫 면, 1권1책(33장),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청. [사진제공 - 이양재]  간송본의 앞 두 장은 떨어져 나갔으므로, 필사하여 복원하였다. 이 부분은 세종대왕이 지은 어제 서문이다.
『세종어제훈민정음』 번역본(13장), 목판본,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 서두에 실려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종 서문만을 번역 설명하였다. [사진제공 - 이양재]
『세종어제훈민정음』 번역본(13장), 목판본,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 서두에 실려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종 서문만을 번역 설명하였다. [사진제공 - 이양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국보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 초판본에서와는 달리 『월인석보』 권1에 실린 번역본에서는 『세종어제 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적고 있다. ‘세종어제’라 부친 것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친히 지었다”는 의미이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 기사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라고 하였다.

또한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에는 세종이 지은 어제(御製)가 실려 있다. 여기에서도 어제(御製)라 하고 있다.

『세종실록』 원문 :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日用耳。 ㄱ牙音, 如君字初發聲, 竝書如蚪字初發聲。 ㅋ牙音, 如快字初發聲。 ㆁ牙音, 如業字初發聲。 ㄷ舌音, 如斗字初發聲, 竝書如覃字初發聲。 ㅌ舌音, 呑字初發聲。 ㄴ舌音, 如那字初發聲。 ㅂ唇音, 如彆字初發聲, 竝書如步字初發聲。 ㅍ唇音, 如漂字初發聲。 ㅁ唇音, 如彌字初發聲。 ㅈ齒音, 如卽字初發聲, 竝書如慈字初發聲。 ㅊ齒音, 如侵字初發聲。 ㅅ齒音, 如戍字初發聲, 竝書如邪字初發聲。 ㆆ喉音, 如挹字初發聲。 ㅎ喉音, 如虛字初發聲, 竝書如洪字初發聲。 ㅇ喉音, 如欲字初發聲。 ㄹ半舌音, 如閭字初發聲。 ㅿ半齒音, 如穰字初發聲。 ㆍ如呑字中聲, ㅡ如卽字中聲, ㅣ如侵字中聲, ㅗ如洪字中聲, ㅏ如覃字中聲, ㅜ如君字中聲, ㅓ如業字中聲, ㅛ如欲字中聲, ㅑ如穰字中聲, ㅠ如戌字中聲, ㅕ如彆字中聲。 終聲復用初聲。 ㅇ連書唇音之下, 則爲唇輕音, 初聲合用則竝書。 終聲同。 ㆍㅡㅗㅜㅛㅠ附書初聲之下, ㅣㅓㅏㅑㅕ附書於右。 凡字必合而成音, 左加一點則去聲, 二則上聲, 無則平聲。 入聲加點同而促急。”

『세종실록』 번역 :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ㄱ은 아음(牙音)이니 군(君)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규(虯)자의 첫 발성(發聲)과 같고, ㅋ은 아음(牙音)이니 쾌(快)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ㆁ은 아음(牙音)이니 업(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ㄷ은 설음(舌音)이니 두(斗)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담(覃)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ㅌ은 설음(舌音)이니 탄(呑)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ㄴ은 설음(舌音)이니 나(那)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ㅂ은 순음(脣音)이니 별(彆)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보(步)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ㅍ은 순음(脣音)이니 표(漂)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ㅁ은 순음(脣音)이니 미(彌)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ㅈ은 치음(齒音)이니 즉(卽)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자(慈)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ㅊ은 치음(齒音)이니 침(侵)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ㅅ은 치음(齒音)이니 슐(戌)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사(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ㆆ은 후음(喉音)이니 읍(挹)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ㅎ은 후음(喉音)이니 허(虛)자의 첫 발성과 같은데 가로 나란히 붙여 쓰면 홍(洪)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ㅇ은 후음(喉音)이니 욕(欲)자의 첫 발성과 같고, ㄹ은 반설음(半舌音)이니 려(閭)자의 첫 발성과 같고, ㅿ는 반치음(半齒音)이니 양(穰)자의 첫 발성과 같고, ㆍ은 탄(呑)자의 중성(中聲)과 같고, ㅡ는 즉(卽)자의 중성과 같고, ㅣ는 침(侵)자의 중성과 같고, ㅗ는 홍(洪)자의 중성과 같고, ㅏ는 담(覃)자의 중성과 같고, ㅜ는 군(君)자의 중성과 같고, ㅓ는 업(業)자의 중성과 같고, ㅛ는 욕(欲)자의 중성과 같고, ㅑ는 양(穰)자의 중성과 같고, ㅠ는 슐(戌)자의 중성과 같고, ㅕ는 별(彆)자의 중성과 같으며, 종성(終聲)은 다시 초성(初聲)으로 사용하며, ㅇ을 순음(脣音) 밑에 연달아 쓰면 순경음(脣輕音)이 되고, 초성(初聲)을 합해 사용하려면 가로 나란히 붙여 쓰고, 종성(終聲)도 같다. ㆍ, ㅡ, ㅗ, ㅜ, ㅛ, ㅠ는 초성의 밑에 붙여 쓰고, ㅣ, ㅓ, ㅏ, ㅑ, ㅕ는 오른쪽에 붙여 쓴다.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하여 음을 이루게 되니, 왼쪽에 1점을 가하면 거성(去聲)이 되고, 2점을 가하면 상성(上聲)이 되고, 점이 없으면 평성(平聲)이 되고, 입성(入聲)은 점을 가하는 것은 같되 촉급(促急)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훈민정음』이 세종 어제라는 역사 기록을 무시하고 『훈민정음』 창제에 부수적 역할을 했던 신미(信眉)라든가 집현전 학자들의 공동 창제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주장이다. 오케스트라(orchestra) 연주에서는 각각의 연주가는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연주하여야 한다. 지휘자가 일부 연주가를 교체할 수는 있지만, 각각의 연주가가 지휘자를 교체할 수는 없다. 유명 가수의 독창회에서도 연주가나 지휘자도 중요하지만, 연주가나 지휘자가 성악가를 빼낼 수는 없는 것이다. 독창회에서는 독창하는 성악가가 핵심이다.

마찬가지로 『훈민정음』의 창제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결정적 인물은 세종이다. 다른 인물들은 부수적인 삯꾼이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세종어제라 한다. 세종대왕이 삯꾼들의 성과를 가로채 간 것이 아니다. 당시에 예조판서 정인지(鄭麟趾, 1396~1478)나 학승(學僧) 신미(信眉)가 아무리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조선어학자들과 당시의 민족사학자들은 『훈민정음』이 ‘세종어제’라는 명제를 흔들지 않았다.

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

국보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制字解), 1446년, 목판본.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청. [사진제공 - 이양재]  판심에 세흑구상하하향흑어미(細黑口上下下向黑魚尾)가 식별된다.
국보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制字解), 1446년, 목판본. 간송미술관 소장. Ⓒ문화재청. [사진제공 - 이양재]  판심에 세흑구상하하향흑어미(細黑口上下下向黑魚尾)가 식별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에 목판본(木版本)으로 출판되었다. 책의 구성을 보면 총 33장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맨 앞에는 세종의 어제 본문을 싣고, 이어서 「훈민정음 해례」를, 끝으로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정통 11년 9월 상한(上澣)’에 쓴 서문을 싣고 있다.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의 세종 어제 본문에 이어 기록되어 있는 “예조판서 정인지의 서문에,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매 성기(聲氣)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日用)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기 처지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중국에 견주 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같지 않으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지취(旨趣)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합하여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연원의 정밀한 뜻의 오묘한 것은 신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히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한 사람의 사적인 업적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하였다.”

즉 『세종실록』에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 9월 상한에 반포한 것으로 나온다.

다. 『훈민정음』과 한자 서체의 고전자(古篆字)는 무관하다

정인지의 서문에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여 여기서 말하는 고전은 한자 서체에서의 전자(篆字)는 아니다. 전자와 『훈민정음』의 형상은 일치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고전(古篆)을 모방하였다는 것은 『훈민정음』에 보이는 한글 서체가 붓의 운필(運筆)이 나타내는 예서체(隸書體)도 행서체(行書體)도 초서체(草書體)도 아닌 붓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 막대기로 그은 듯한 서체가 흡사 전서체(篆書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이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라는 것은 『훈민정음』의 가치를 비하한 것으로, 실제로는 고전(古篆)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훈민정음』의 타 문자 기원설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 공개된 이후와 이전을 달리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 해례본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입과 혀, 목구멍 등 발음 기관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음이 확실하다. 현존하는 모든 문자 가운데 그러한 발음 기관의 형상을 따라 만든 것은 한글이 유일하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한글 창제 원리와 기원에 대하여 고대 문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窓)살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여러 학설이 난무하여 그 독창성이 부정당했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조음(調音) 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분명히 밝혀졌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의 우수성, 독창성을 올바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읽는 음(音)조차 불분명한 이른바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한글의 원조라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환단고기』가 유일하다. 『훈민정음』의 타 문자 기원설은 다양한데, 그러한 기원설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된 이후 이미 정리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과거의 주장일 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고, 1946년에 조선어학회에서 영인본을 발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음에도, 첫 영인본을 발행한 지 76년이나 되는 2022년까지 허상의 문자 ‘가림토 문자’를 운운하며 『훈민정음』의 가치를 모방적인 것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우리 민족 문화의 정수인 한글을 왜곡하는 아주 참담한 황당사관(荒唐史觀)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고조선에서 사용한신지 문자나 녹도문자 등등이 있어 후일 나타난다고 해도 이두(吏讀)나 구결(口訣)처럼 『훈민정음』과는 모양새가 전혀 다른 글자일 것이다.

라.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과 그 영인 및 복원 보급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에 목판으로 인출한 초판본이다. 이 책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나, 앞 2장은 1940년경에 필사(筆寫)하여 복원하였다. 책의 크기는 세로가 32.3cm, 가로가 20cm이고, 사주쌍변에 판심(版心)에는 세흑구상하하향흑어미(細黑口上下下向黑魚尾)가 있다. 이 책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6년 조선어학회에서 실물 크기로 영인본을 발행하였는데, 이 영인본은 판심 부분을 제거하고 당시 중국산 선지(宣紙)에 영인하고 오침(五針) 장정하였다. 반면에 1957년에 통문관에서 발행한 김민수의 『주해 훈민정음』은 판심을 제거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사진판으로 축소 영인하였다. 한편 1980년대 중후반에 인사동 노변(路邊)에서 전각 공방을 운영하던 전각가 조정훈이 판심을 살린 상태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판목으로 복원하여 한정 부수를 인출한 바 있다.

『훈민정음』의 세종 서문 부분은, 세조 5년(1459)에 간행된 『월인석보』 권1 책머리에 『세종어제훈민정음』으로 한글 번역하여 들어가 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한 책으로, 현존하는 『월인석보』는 권1~2, 합본 2권1책 초판본(목판본)은 서강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이 초판본은 1983년 5월 12일 자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책의 크기는 가로 22.8㎝, 세로 33.8㎝이다. 이 『월인석보』 권1~2, 1459년 초판본은 서강대 도서관본이 유일하며, 이 판본은 풍기(豐基) 희방사(喜方寺)에서 1568년에 복각 재판을 발행한 바 있다.

희방사 재판본은 원판목이 1950년 초까지 남아 있었으나, 전란 중 겨울에 땔감을 구하지 못한 희방사의 승려들이 쪼개어 화목으로 썼다고 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풍기 희방사 재판본은 조선 후기나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수요에 따라 인출된 바가 있어 시중에 간혹 유통되기도 한다.

마. 신지문자에 대하여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1장 후면, 1장 전면에 실린 신지문자. [사진제공 - 이양재]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1장 후면, 1장 전면에 실린 신지문자. [사진제공 - 이양재]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2장 후면, 2장 전면에 실린 신지문자. [사진제공 - 이양재]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2장 후면, 2장 전면에 실린 신지문자. [사진제공 - 이양재]

한반도를 포함하여 고조선의 영토에서 사용한 옛 문자를 탐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한 문자는 발견되어도 어떻게 읽는지, 또는 무슨 내용인지 해독할 수 있어야 단어나 문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한반도에만 해도 몇 곳에 암각화가 있고, 남해(南海) 양아리 등 몇 곳에 암각문자(岩刻文子)로 보이는 것이 남아 있다. 암각화는 단순한 그림일 뿐이며, 암각문자로 보이는 것은 완전 해독이 불가능하여 문자나 문장으로 안정 받지 못한다.

고조선 시대에 남긴 현존하는 기록은 없는가? 고조선 시대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므로, 만약 글이 쓰여졌다면 죽간(竹簡)이나 직물(織物) 위에 썼을 것이다. 문제는 “필기구나 죽간이 아니라 그 시대에 어떠한 문자를 사용하였느냐?”는 것이다.

금석학(金石學)의 측면에서 보면 『환단고기』의 이른바 가림토 문자라는 것은 『환단고기』 이외의 문헌에는 단 한 번도 단 한 자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단 한 줄의 문장도 없고, 음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에 열광하는 이상스러운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 민족의 고대 문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해도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는 고대 문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현대의 몽상가가 만들어 낸 몽상 속의 문자로 판단된다.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포갑과 권1 표지. 6권6책, 1926년. 한남서림 발행.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포갑과 권1 표지. 6권6책, 1926년. 한남서림 발행.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권지일 목록.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이 필보의 맨 처음에 신지의 글씨라는 것을 4면에 걸쳐 싣고 있는데, 한글과의 유사성은 없다.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권지일 목록.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이 필보의 맨 처음에 신지의 글씨라는 것을 4면에 걸쳐 싣고 있는데, 한글과의 유사성은 없다.

그렇다면 신지문자(神誌文字)는 있었던 것일까?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후원으로 관훈동에 한남서림을 운영하였던 백두용(白斗鏞, 1872~1935년경)은 1926년에 선친 때부터 모은 글씨를 엮어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 6권6책을 출판하였는데, 그 권1의 첫머리에 단군시대의 인물이라는 신지(神誌)의 글씨를 싣고 있으나, 한글과의 유사성은 전혀 없고 내용의 판독도 전혀 불가능하다.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 장3의 앞면과 표지.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박문회(朴文會)가 1859년에 목판본으로 편찬. 장3의 앞면 둘째 줄이 창힐의 서라 한다. Ⓒ필자.  『해동역대명가필보』에 실린 신지(神誌)의 서(書)와 『고금역대법첩』에서 보이는 창힐의 글씨는 같은 자가 대부분이다. 창힐은 황제의 사관으로 한자를 창조 발명하여 ‘조자성인(造字聖人)’으로 추앙받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즉 중국의 황제(黃帝)에게 창힐이 있다면, 조선의 단군에게는 신지가 있는 것이고, 창힐의 문자로 알려진 것과 신지의 문자로 알려진 것은 거의 같다.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 장3의 앞면과 표지.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박문회(朴文會)가 1859년에 목판본으로 편찬. 장3의 앞면 둘째 줄이 창힐의 서라 한다. Ⓒ필자.  『해동역대명가필보』에 실린 신지(神誌)의 서(書)와 『고금역대법첩』에서 보이는 창힐의 글씨는 같은 자가 대부분이다. 창힐은 황제의 사관으로 한자를 창조 발명하여 ‘조자성인(造字聖人)’으로 추앙받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즉 중국의 황제(黃帝)에게 창힐이 있다면, 조선의 단군에게는 신지가 있는 것이고, 창힐의 문자로 알려진 것과 신지의 문자로 알려진 것은 거의 같다.

한편 백두용보다 앞서 박문회(朴文會)가 1859년에 펴낸 『고금역대법첩(古今歷代法帖)』에는 황제의 사관이라고 전하는 창힐(蒼頡)의 서(書)가 9자 음각되어 있는데 『해동역대명가필보』에 실린 신지의 서(書)와 대부분이 같다. 창힐은 황제의 사관으로 한자를 창조 발명하여 ‘조자성인(造字聖人)’으로 추앙받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즉 중국의 황제에게 창힐이 있다면, 조선의 단군에게는 신지가 있는 것이고, 창힐의 문자와 신지의 문자는 거의 같다. 마치 황제와 창힐의 삶이 단군과 신지의 삶으로 재현된 것인지? 단군이 실존이라면 신지도 실존인지? 황제와 창힐의 관계를 상정하여 단군에게는 신지란 인물이 있다고 근대에 만든 상상의 인물인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지에 대한 고문헌을 탐색해야 한다.

바. 신지와 『신지비사』를 언급하는 고문헌

의외로 신지나 『신지비사』를 언급하고 있는 고문헌은 몇 종 있다.

『삼국유사』 권3, 장(張)11 앞면. [사진제공 - 이양재]  첫 행(行)의 아홉 번째 자에서 시작하는 주(註)에서 『신지비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구려의 『신지비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유사』 권3, 장(張)11 앞면. [사진제공 - 이양재]  첫 행(行)의 아홉 번째 자에서 시작하는 주(註)에서 『신지비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구려의 『신지비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① 가장 오래된 것이 『삼국유사』 권제3. 장(張)11 앞면의 첫 행(行)이다. 『삼국유사』는 일연(一然, 1206~1289)의 편저이다. 『삼국유사』는 본문을 적으며 보조적 설명으로 주(註)를 달고 있다. 그 주(註)도 편저자 일연이 단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3,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에, “帝崩後生於髙䴡十五聦明神武. 時武陽王聞其賢 囯史榮留王名建武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徴入爲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라 한 후에, 주(註)에서는 “唐書云, “盖蘇文自謂莫離攴校勘 猶中書令.” 又按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序并注.” 則蘇文乃職名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라고 한 것이다.

즉, 본문은 “황제가 죽은 후 [양명은] 고구려에 태어나서 15세에 총명하고 신무(神武)하였다. 그때 무양왕(武陽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국사(國史)」에는 영류왕의 이름이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무양(武陽)이라고 하니 잘 알 수 없다.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고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고 하였는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侍中)의 직이다”라 한 후에, 주(註, 注)에서는 “『당서』에는 “개소문이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으니, 중서령(中書令)과 같다”고 하였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에는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아울러 주석하다”고 했으니, 즉, 소문이 곧 직명인 것은 문헌으로 증명되지만, 전기에 이르기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의 서문”이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렇듯 『삼국유사』의 주에 딱 한 번 『신지비사』가 언급되는데, 이 언급을 분석하여보면 『신지비사』에 있는 서문은 대영홍(大英弘) 또는 소영홍(蘇英弘)이 썼는데, 그가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일 수 있다는 언급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신지비사』의 한문 번역이 고구려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한역(漢譯) 서문은 연개소문이 썼다는 의미이다. 신지의 문자로 된 『신지비사』가 고구려 때까지는 고구려의 도가(道家)에 전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물론 『신지비사』가 한역(漢譯)되었다면 그 서문은 고구려 말기에 쓰였지만, 한역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② 조선초(1449~1451)에 편찬된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권제35에서도 『신지비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본문 : “又神誌秘詞曰, ‘如秤錘·極器·秤幹·扶疎·樑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精首尾, 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이하 중략), 睿宗時, 殷元中亦以道詵說, 上書言之.”

번역문 :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 말하기를,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扶疎)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고, 만약 비유로 들은 세 곳의 땅을 버린다면 왕업은 쇠퇴할 것이다.’ (이하 중략), 예종(睿宗) 때의 은원중(殷元中) 역시 도선의 설에 따라 상소하여 〈같은 내용을〉 말하였다.”

『청구시초(靑丘詩鈔)』, 1915년, 임진자본(壬辰字本). Ⓒ필자.[사진제공 - 이양재]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을 강점한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갑인자 계열이 임진자를 사용하여 찍은 조선 최후의 금속활자본 고서이다. 첫머리에 단군조선의 한시(漢詩)로 『고려사』에서 발췌한 [신지비사]가 수록되어 있다.
『청구시초(靑丘詩鈔)』, 1915년, 임진자본(壬辰字本). Ⓒ필자.[사진제공 - 이양재]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을 강점한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갑인자 계열이 임진자를 사용하여 찍은 조선 최후의 금속활자본 고서이다. 첫머리에 단군조선의 한시(漢詩)로 『고려사』에서 발췌한 [신지비사]가 수록되어 있다.

『고려사』에 실린 『신지비사』의 이 인용문은 현재 확인되는 『신지비사』의 유일한 내용으로서 『청구풍아전집(靑丘風雅前集)』 권제1과 1915년에 나온 『청구시초(靑丘詩鈔)』의 첫머리에도 한시(漢詩)의 한 체(體)인 사(詞)로, 즉 문학작품으로써 싣고 있다.

③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1457) 5월 26일 戊子 3번째 기사에는,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卷、《動天錄》、《磨蝨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道詵 《漢都讖記》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라 기록되어 있다.

즉, 세조는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조선비사』는 『신지비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신지비사』의 언급은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각기 한 번씩 언급되고 있다. 즉 신지는 단군 시대의 인물로 전해지고 있고, 『신지비사』는 신지가 저술했든 아니든 우리 민족 고유의 저술임은 확실하다.

한편 『평양지(平壤誌)』에 “평양 법수교에 옛 비석이 있는데, 언문(한글)도 아니고 범문도 아니며 전서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平壤法首橋有古碑, 非諺, 非梵, 非篆, 人莫能曉)』”라고 하였다. 발견 당시에 이 비석은 신지 문자가 아닌가 여겨져 왔으나 현재 이 비석은 실존하지 않고 있다.

사. 고구려 영토의 한문 금석문 2종

현재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금석문은 위(魏)나라 때의 이른바 [관구검기공비(毋丘儉紀功碑)]이다. 그 이전 것은 없다. 수년 전 필자는 동경국립박물관의 한 기획전에 전시된 그 비석 잔편(殘片) 실물을 보았다. 현재 소장처는 중국 요녕성박물관이었다.

이른바 [관구검기공비]는 1906년 길림성 집안 판석령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정시3년(242년)으로 시작하는 비편(碑片)이니 242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학계에서는 24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이 비편에서 판독이 가능한 부분은 제1행의 ‘정시삼년고구려반(正始三年高句驪反)’, 제2행의 ‘독칠아문토구려오(督七牙門討句驪五)’, 제3행의 ‘부견구육년오월선(復遣寇六年五月旋)’, 제4행의 ‘토구장군외오환선우(討寇將軍巍烏丸單于)’, 제5행의 ‘위구장군도정후(威寇將軍都亭侯)’, 제6행의 ‘행비장군령(行裨將軍領)’, 제7행의 ‘비장군(裨將軍)’ 뿐이다. 즉 이 비편은 ‘고구려’라는 국호가 등장하는 가장 오래전의 비편이다.

이 비편보다 연대가 앞서는 것이 1914년 평남 용강군에서 발견된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인데, 학계에서 이 비는 85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비석을 세운 주체가 중국이든 고구려이든, 이 두 비석 이전에 세워진 비석은 중국 동북 3성이나 한반도에는 없다. 즉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 내에서 이 두 비석을 추월하여 더 이전으로 올라가는 고대의 비문은 없다. 이외에 판독할 수 없는 문자로라도 일정한 문장을 가진 비문은 없을까?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신지 문자와 고구려 영토의 한문 금석문을 탐색하며 갖게 된 아쉬움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릉비문』은 로제타석(Rosetta Stone)처럼, 신지문(神誌文)과 한문이 함께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엉뚱하게 신지 문자와 이른바 가림토 문자를 같은 것으로 주장하여, 신지 문자의 실제성과 한글의 독창성을 왜곡하려 한 『환단고기』의 시도는 정말 그 몽상(夢想)이 크다 할 것이다. 신지 문자와 한글 문자는 혼합될 수 없으며 혼합되어서도 안 된다. 신지 문자의 실체는 오리무중이며 『훈민정음』의 실체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아. 추기(追記) : 한글 띄어쓰기의 시작

한문에는 어조사(語助辭)는 있으나 띄어쓰기가 없다. 이러한 한문을 해독(解讀)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우리 선조들이 해결해 낸 방법이 구결(口訣)을 붙이거나 한글 현토(懸吐)를 붙이는 방법이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 첫 번째 한글(『훈민정음』) 저술이 1445년에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안지(安止, 1377~1464) 권제(權踶, 1387~1445) 등이 지어 1447년에 초판 간행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이며, 이후에 『석보상절(釋譜詳節, 1447, 수양대군)』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9, 세종어제)』이 지어졌다.

한글도 된 첫 번째 번역서는 1461년에 을해자로 간행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이다. 이 책은 줄여서 『수능엄경언해』라 부르는데, 나는 이 책의 권제4, 7, 8 등 3책을 1984~5년에 2차에 걸쳐 입수한 후 1988년 12월 28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973호로 지정하여 상당 기간을 소장하다가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양여한 바 있다.

이 『수능엄경언해』를 보면 현대식 띄어쓰기는 되어 있지 않으나 의미의 정확한 전달에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있다. 초기의 이러한 번역서는 한문 원문과 번역문을 교차하여 사용함으로써 띄어쓰기가 없음에도 어느 정도 띄어쓰기의 효과를 내고 있다.

일본어나 중국어에서는 현대의 한글과는 달리 띄어쓰기가 없다. 한글에서의 띄어쓰기 문제는 조선어학회에서 정한 것이지만, 그 원류는 서지학적(書紙學的)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고찰된 바가 전혀 없었다.

다만 최근 한때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에서는 “한글 띄어쓰기는 호머 비 헐버트에 의하여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중에 현대 형식의 띄어쓰기를 한 문헌은 1877년에 영국인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목사가 쓴 조선어 교재인 『Corean Primer (조선어 첫걸음)』로 확인된다. 존 로스의 『Corean Primer』 이전에 서양에서 나온 조선어 문법서는 리델 신부의 『한불문전(GRAMMAIRE COREENNE)』이 있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고, 1881년에야 요꼬하마에서 초판본이 나왔다. 따라서 헐버트도 존 로스의 『Corean Primer』를 통하여 조선어를 배웠을 것이고, 당연히 존 로스의 띄어쓰기를 보았을 것이다. 존 로스 목사의 『Corean Primer』는 아래 주소의 ‘Internet Archive’에서 볼 수 있다.

『Corean Primer』 

『Corean Primer (조선어 첫걸음)』.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사진제공 - 이양재]  1877년. 영어로 된 최초의 조선어 교재로서, 조선어 단어와 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대비하여 수록하고 있다. 조선말을 가르치는 데 필요에 의하여 띄어쓰기를 하였고, 이는 이 교재를 가지고 조선어를 배운 당(當) 시대의 선교사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Corean Primer (조선어 첫걸음)』.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사진제공 - 이양재]  1877년. 영어로 된 최초의 조선어 교재로서, 조선어 단어와 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대비하여 수록하고 있다. 조선말을 가르치는 데 필요에 의하여 띄어쓰기를 하였고, 이는 이 교재를 가지고 조선어를 배운 당(當) 시대의 선교사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존 로스 목사는 『Corean Primer』를 낸 후에, 최초의 영어판 한국어 역사서 『A History of Corea(조선역사)』를 1879년에 펴냈다. 이 『A History of Corea』의 출판은 미국의 개신교가 조선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존 로스 목사가 처음 번역하여 1882년에 내놓은 『누가복음』에는 최소한의 조선식 띄어쓰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서양식 단어의 띄어쓰기는 아니었다. 이제 필자는 존 로스 목사 이전에 국내에서 최소한의 조선식 띄어쓰기가 부분적으로나마 시도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국가에 관한 고서나 고문서에 ‘대두법(擡頭法)’이 흔히 보이는데, 대두법이란 고문헌에서 왕을 지칭할 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 글자를 올려 쓰거나 줄을 바꾸어 쓰는 것을 말한다. 교지나 공신록 등등의 고문서와 국가적 차원에서 발행한 고서에서 그러한 대두법이 흔히 보인다.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 1756년, 목판본. 4권4책.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제공 - 이양재]  ‘왕(뎐하)’이나 ‘하늘(하ᄂᆞᆯ)’ 등등을 지칭할 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 글자를 올려쓰거나 줄을 바꾸어 쓰는 대두법을 쓰고 있다. 이 대두법은 부분적으로나마 문장의 판독을 확실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 1756년, 목판본. 4권4책.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제공 - 이양재]  ‘왕(뎐하)’이나 ‘하늘(하ᄂᆞᆯ)’ 등등을 지칭할 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 글자를 올려쓰거나 줄을 바꾸어 쓰는 대두법을 쓰고 있다. 이 대두법은 부분적으로나마 문장의 판독을 확실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한글 고서의 경우 『천의소감언해』를 예로 들고자 한다. 『천의소감(闡義昭鑑)』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형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경위와 그 정당함을 밝히고, 이를 회의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을 엄단해 나간 30여년 동안의 사실들을 들어, 그 뒤의 반역(反逆)을 경계하려는 목적으로 1755년 김재로(金在魯)·이천보(李天輔)·조재호(趙在浩) 등 39명의 신하를 시켜 편찬하게 하였고, 동시에 한글로 번역시켜 『천의소감언해』 4권4책을 1756년(영조32)에 『천의소감』과 함께 간행하게 하였다. 국가에서 관판(官版)으로 발행한 한글로 된 이 책에서도 대두법을 쓰고 있다.

『국됴고ᄉᆞ(국조고사)』, 1802년 중하(仲夏, 음력 5월), 궁체본(宮體本).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대두법이 사용되고 있고, 띄어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1778년경에 홍낙춘(洪樂春)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궁체본 『풍산홍시셰계』 보다도 진일보한 띄어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궁체본 『풍산홍시셰계』는 2021년에 국립한글박물관으로 양여하였다.
『국됴고ᄉᆞ(국조고사)』, 1802년 중하(仲夏, 음력 5월), 궁체본(宮體本).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대두법이 사용되고 있고, 띄어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1778년경에 홍낙춘(洪樂春)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궁체본 『풍산홍시셰계』 보다도 진일보한 띄어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궁체본 『풍산홍시셰계』는 2021년에 국립한글박물관으로 양여하였다.

이러한 대두법은 1778년경에 홍낙춘(洪樂春)이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풍산홍시셰계』 궁체본(宮體本)과 1802년 중하(仲夏, 음력 5월)에 궁체(宮體)로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국됴고ᄉᆞ(국조고사)』에서는 띄어쓰기의 초보적 형식으로 발전하는데, 이를 보면 띄어쓰기는 19세기 초에 궁중의 여성들 사이에서 대두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1882년에 존 로스 목사에 의하여 번역된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최소한의 조선식 띄어쓰기도 『풍산홍시셰계』 궁체본과 『국됴고ᄉᆞ(국조고사)』 궁체본 수준의 초보적인 띄어쓰기이다.

한편 1895년 중동(仲冬, 음력 11월)에 학부에서 발행한 『소학독본(小學讀本)』에는 방점(傍點)을 찍어 띄어쓰기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물론 조선시대 전 기간 여러 종의 한글 고서에서 한글 띄어쓰기 이상의 고심한 흔적들이 보인다.

「야고보의 공변된 편지」, 1897년(쪽 복음). 『신약성경』의 ‘야고보서’.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1893년에 5월에 조선어 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조직된 ‘상임성서실행위원회’ 산하의 ‘성경번역자회’ 위원들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야고보의 공변된 편지」, 1897년(쪽 복음). 『신약성경』의 ‘야고보서’.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1893년에 5월에 조선어 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조직된 ‘상임성서실행위원회’ 산하의 ‘성경번역자회’ 위원들이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필자는 이상의 관점에서 띄어쓰기가 외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편의에 따라 적어도 정조조(正祖朝)부터는 간헐적으로 시도되어 왔다고 정리한다. 이후 로스 목사의 『Corean Primer』로 한글을 배운 대한제국 시기의 선교사들이 1893년 5월에 조선어 성서를 번역하기 위한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치하며 그 위원들이 조선에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거의 비슷한 시기인 1896년에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일반 대중들을 위하여 띄어쓰기를 사용하였고 이후 띄어쓰기는 우리의 한글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확산하였다. 물론 헐버트 박사는 조선어 성서 번역 위원으로 선정되지도 않았다.

『샛별전』,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 安愛理) 저. 1899년,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서양인이 지은 기독교 선교를 주제로 한한글 소설이새지만, 문체가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의 형식을 갖고 있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다.
『샛별전』,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 安愛理) 저. 1899년, Ⓒ필자. [사진제공 - 이양재]  서양인이 지은 기독교 선교를 주제로 한한글 소설이새지만, 문체가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의 형식을 갖고 있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다.

참고로 1889년에 헐버트가 편저한 『사민필지』에는 띄어쓰기가 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영어와는 전혀 달리 우리의 현대 띄어쓰기는 명사나 동사 및 형용사에 조사(助詞)가 붙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글 띄어쓰기의 원류를 탐색할 때 어느 한 면만을 보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한글 띄어쓰기는 단순한 띄어쓰기 이전의 현상에서 시도가 목격되고 있고, 그 초보적인 시작은 한글을 많이 쓰던 조선 왕실과 관련한 인물들에 의하여 시도되었으며, 조선어 성서 번역에서 본격적으로 확산하였음은 확실하다.

아울러 수많은 필사본 한글 가사에서 4자 가사체(歌辭體)의 율(律)를 적고 있으며, 띄어쓰기한 한글 가사 필사본들도 다수 전전(傳存)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评论

此博客中的热门博文

[인터뷰] 강위원 “250만 당원이 소수 팬덤? 대통령은 뭐하러 국민이 뽑나”

‘영일만 유전’ 기자회견, 3대 의혹 커지는데 설명은 ‘허술’

윤석열의 '서초동 권력'이 빚어낸 '대혼돈의 멀티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