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을 시작하며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페이스북 연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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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내년은 마르크스가 탄생한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5일 태어났다. 게다가 올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 되는 해이다. 러시아 혁명이 ‘10월 혁명’이라 하지만 그건 러시아 달력에 따른 것이고, 요즈음 달력으로는 11월7일이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나는 몇 해 전에 마르크스가 태어난 독일 트리에로 가서 그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잊혀서 별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곳이 되었다. 모스크바에 레닌의 동상이 쓰러진 이후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오직 중국의 관광객만이 모스크바 혁명 기념 행진이 거행되었던 광장을 찾는다고 한다.
누구 말대로 이미 망해버린 사상가와 혁명가를 다시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1990년대 서구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진 이후 그런 견해가 일반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후 사회주의 체제가 의외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기왕의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중국과 베트남은 개방을 통해 살아남았다. 완강하게 사회주의를 고집했던 쿠바와 북조선은 한때 위기를 겪은 듯하다. 그래도 쿠바와 북조선은 경이적인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 세계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려는 움직임도 그치지 않는다. 그 가운데 특히 남미에서의 운동은 괄목할 만하다.
반면 서구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다음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서 패권을 휘둘렀다. 그런 신자유주의는 30년이 지난 지금 비틀거리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는 발광(發狂) 전략으로 과거의 패권을 유지하려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패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해줄 뿐이다.
2)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한다면 다시 과거 60년대 복지국가 체제로 되돌아가자는 말인가? 사실 복지국가 자신이 80년대 파산에 이르러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이 아닌가? 복지국가에 대해 인간 소외, 관료주의 등 비난했던 것이 엊그제 같다. 복지국가라 하지만 사실은 독점자본의 발전 전략에 불과했던 그런 사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의 형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어떤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가능할지 아무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신자유주의 이후에 관해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에 다시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최근 신자유주의 체제로 복귀하는 흐름도 등장한다. 프랑스나 독일은 신자유주의를 다시 강화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신자유주의 탈출의 몸부림도 지지부진 각종 장애에 부딪히고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대체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고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살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버려도 되는 것은 무엇인가?
3) 자주적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 사상이 낡았다고 이미 파산했다고 내버리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르크스 사상 이상으로 노동자와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억압받고 착취 받는 민중을 대변해왔던 사상은 없었다.
그 사이 수많은 오류와 실패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오류나 실패는 억압과 착취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부딪혔던 한계가 아닌가? 오류나 실패를 비판하더라도 그 몸부림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억압과 착취를 목표로 하면서도 한두 가지 시혜를 베푸는 사상과 비록 오류와 실패를 했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억압과 착취를 넘어서려 노력한 사상을 동일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나는 이미 마르크스 사상의 한계를 제시했다. 내가 지은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에서 나는 서구 사회주의가 붕괴한 근본 이유를 진단했다. 그리고 나는 <자주성의 공동체>에서 인간의 자주적 의지의 가능성에 관하여 서술했다.
지금까지 나의 주장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는 않다. 나는 마르크스 사상은 사회과학이고 그 결론은 사회주의 체제라고 본다. 나는 사회과학적 이론의 차원에서 한 번도 마르크스 이론을 부정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실천적 차원에서 마르크스 사상은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보았다. 마르크스 사상은 새로운 인간론이 필요하다고만 말했을 뿐, 그것이 인간의 자주적 의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론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 가치나 이념의 판단 영역과 의지와 행동의 영역, 사회과학의 영역과 철학사상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내 주장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나는 이론적 영역에서 마르크스 사상을, 그리고 실천의 영역에서 자주적 인간론을 주장하니 굳이 말한다면 누구 표현대로 자주적 마르크스주의 정도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마르크스 사회이론을 전제로 하고 자주적 인간론을 설명해 왔다. 나는 이제 거꾸로 자주적 의지를 전제로 하면서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의 측면에 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당장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자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이념은 우리에게 마치 별빛과 같은 것이다. 그 별빛은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길을 가르쳐 준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 사회 개념의 역할은 우리에게 신자유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한 전망을 투시해 준다는 점에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혼란 속에 처해 있다. 여기서 한 걸음 앞으로 가는 것이 두 걸음 뒤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은 불투명하다. 그러니 이런 혼란 속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는 데 사회주의 이념은 그 길을 지시하는 별빛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미리부터 말하지만 나는 현 단계로서는 자본주의적 질서와 민주주의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런 가운데 사회주의적 요소, 즉 정치적으로 자치와 경제적으로는 국가적 소유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나는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세계 인민의 국제적 연대를 지지한다.
나는 지금까지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관해 설명해 왔다. 그저 청년들에게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의도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이제 마르크스 사상을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후일 청년들에게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계단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혁명가로서 마르크스 사상을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다. 후일 청년들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 마르크스 사상을 참조하기를 바라는 학자적 태도에서 내가 배운 마르크스 사상을 소개하려는 것일 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이광수 교수가 페이스북에서 ‘인도 100문 100답’을 한다. 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도에 관한 여러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어서 늘 관심을 가지고 읽어본다. 이제 마르크스 사상을 설명하면서 그의 흉내를 좀 내보고자 한다. 나는 사실 마르크스 사상에 관해 100가지 물음을 던지고 답할 능력은 없다. 사실은 겨우 십여 개 정도가 될 것이다. 과장을 섞어서 100문 100답이라 했으니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병창 명예교수 :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동아대 명예교수이다. 인간의 심층적 내면을 분석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전공이다. 서울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행한 의식을 넘어(헤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 주해)>(2012), <지젝 라캉 영화, 두 죽음 사이>(2013) <굿바이! 아메리카노 자유주의>(2014),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2015) 등 저서가 있으며 공저는 <영화로 생각하기>(2005), <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2012),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2013)가 있다.
이병창 명예교수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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