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10.19사건(여순항쟁)을 돌아본다

동포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던 항거
신상철 | 2019-10-16 17:50:01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여수·순천10.19사건(여순항쟁)을 돌아본다동포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던 항거

1. 1980년 광주 - 故 안병하 치안감
지난 10월10일 동작동 국립묘지 경찰묘역에서 故 안병하 치안감 31주기 추모식을 가졌습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사살 진압 명령을 받은 안 치안감께서는 “시민에게 발포할 수 없다”며 군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광주시민의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그로인한 고통은 너무나 컸습니다. 안 치안감께서는 신군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 했고 8개월간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들 또한 이어진 고통을 오랜 세월 감내해야만 했고 삶 또한 처절하게 망가져야만 했습니다.
민주정권 출범 후 뒤늦게나마 고인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여전히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계신 가족 분들을 뵐 때마다 ‘국가란 무엇인가’하는 생각과 함께 저미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그 당시의 독재권력자들의 후예들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고 정치권 중심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하늘나라에 계신 안 치안감님 영전 앞에 서 있기가 무척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슬픔에 젖은 안호재 아드님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 무척 송구합니다.
찢기운 가슴 안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안 치안감님, 부디 저희가 이 세상을 올곳게 세울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

2. 1948년 여수·순천 – 의로운 시민들
1948년 10월 19일 제주4.3항쟁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받은 14연대 소속 군인들은 “양민토벌 명령에 반대한다”며 출동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러자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한 정부의 진압명령에 따라 정부군이 출동합니다.
이에 여수·순천 시민들과 학생들이 14연대 군인들 편에 서서 정부군과 맞서 싸웠고 무려 여러 차례나 정부군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하지만 전력과 화력이 열세일 수밖에 없는 14연대 군인들, 시민, 학생들과 함께 여수·순천의 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합니다.
오랜 세월 독재세력은 우리의 의식 속에 ‘여순반란사건’이라는 명칭을 주입시켰고 그렇게 인식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당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던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무려 7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 굴레를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작년 전남 여수·순천 등 동부6개 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꾸려진 ‘여순항쟁 7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여·순 10.19 사건은 ‘여순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듯 ‘동포를 학살하라는 명령에 거부한 항거’였던만큼 ‘여·순항쟁’으로 우리 가슴에 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실의길은 오는 10.19일 ‘여순항쟁 71주년’을 맞아 오늘부터 1주일간 ‘여·순10.19사건(여순항쟁)’을 집중 조명하고자 합니다.   
신상철 (진실의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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