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의 역사적 문맥과 정치적 논리 ①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란?
김종익 | 2022-05-13 08:46:14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우크라이나 침공의 역사적 문맥과 정치적 논리

한국 언론의 보도와는 다른 문맥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글입니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2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시오카와 노무아키鹽川伸明
1948년생. 도쿄 대학 명 예교수.
『다민족 국가 소련의 흥망』 『민족과 nation – 내셔널리즘이라는 難問』 『역사 속의 러시아 혁명과 소련』 등의 저서가 있다.

■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란?

- 러시아가 인접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에 이르리라고는, 바로 전날까지, 대부분의 시민이 예상도 못 했지 않았을까요. 오늘은, 왜 이런 사태에 빠져버린 건지, 그 역사적 문맥 같은 것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먼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말씀해 주실까요.

시오카와鹽川伸明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벨라루스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동슬라브계 언어를 구사하고, 동방 정교를 받든다는 점에서 느슨한 공통성을 지녔지요.

동슬라브 최초의 국가 키예프 루스Kievan Rus가 13세기에 몽골 타타르 세력에 의해 멸망한 후, 동東루스, 나중의 러시아는 다수의 공국公國 분립 상태가 되고, 서西루스, 나중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그 결과, 서루스에는 가톨릭의 영향이 미치게 되고, 언어 면에서도 서슬라브계인 폴란드어의 요소가 침투했다는 경위가 있어요.

16세기에 대두한 모스크바 대공국, 나중의 러시아 제국은, 18세기 폴란드 분할로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치하에 두게 됩니다. 이리하여, 동슬라브계 주민이 사는 지역의 대부분이, 가장 서쪽을 제외하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온 겁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러시아를 형, 우크라이나를 동생으로 여기는 형제 관계로 자주 비유되기도 해요. 형제라고 하더라도, 늘 항상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기 살기로 상대를 타도하려는 투쟁을 반복할 리 없지요. 싸우기도 하는가 하면 화해도 하는 관계를 오래 계속해 왔어요.

푸틴 대통령은, 이번 침공 전 연설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여서 뗄 수 없다”고 진술했어요. 이러한 발상은, 많은 일본인의 눈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난폭한 언사로 비치겠지요. 확실히 억지스러운 심한 말이며, 그대로 동의할 수 없지요.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이런 종류의 발상은 결코 드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와 솔제니친도, 이와 유사한 발상이 있었어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가족의 일원이며, 다른 국가가 되는 건 이상하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관에 더해, 푸틴을 비롯한 현대 러시아의 지배층에는,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는 애당초 소련이 만들어 낸 존재라는 견해가 있어요.

왜냐하면, 러시아 제국 시대에서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은 몇 개의 현 또는 주로 나뉘어져 있고, 그것들을 통합한 단일 행정 단위는 없었던 겁니다. ‘민족’이라는 범주도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고, 인구 조사에서 ‘민족’이 기록되는 적도 없었어요. 그 대신에 자라면서 배운  ‘母語’라는 항목이 있어, 우크라이나 주민의 상당수가 ‘러시아어 원주민’으로 기록되었어요.

여기에 대해, 러시아 혁명 후의 소련에서는 ‘민족 자결’의 구호 아래, ‘우크라이나 공화국’이라는 영역적 단위가 생성되었어요. 또한, 소비에트 시기의 인구 조사에서는 ‘모어’와는 다른 ‘민족’이라는 항목이 마련되었는데, “모어는 러시아어지만, 민족으로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범주가 등장하고, ‘우크라이나인’의 수는 ‘우크라이나어 원주민’보다도 많다는 꼴이 되었어요.

그런데 소련 시대 초기의 민족 정책은 ‘현지화’ 정책으로 불렸어요. 특정 지역에 ‘기간基幹 민족’을 정하고, 기간 민족 언어와 기간 민족 문화를 진흥하고, 또 기간 민족 엘리트를 양성해, 대학에 우선적으로 입학시키거나, 행정직에 우선적으로 채용하거나 하는 일종의 차별 철폐 정책affirmative action입니다. 이 비유는 미국의 연구자 Terry Martens이 제창한 겁니다.

차별 철폐 정책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긍정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정책은 차별 극복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새로운 대항과 은밀한 차별을 재생산하는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기간 민족’이라는 개념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민족’ 귀속을 고정화하는 효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특혜 정책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군가라는 점을 둘러싼 다툼이 ‘민족 분쟁’이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련 시대의 민족 정책은, 새로운 모순과 혼란을 불러왔다는 의미에서, 꼭 잘 된 것은 아니었어요. 그것은 어쨌든 이러한 민족 정책으로 ‘우크라이나 민족’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는 인식은, 아주 도리에 어긋난 언사라고 할 수 없는 측면도 분명히 있어요, 물론 그렇기는 해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완전히 일체라고 할 수도 없어요. 한 마디로는 명쾌하게 표현할 수 없는 매우 미묘한 관계예요.
 
지금 말한 것은 소련의 민족 정책 일반에 해당하는 것이고요, 우크라이나의 경우, 인구 면에서 러시아 뒤를 이어 두 번째이며, 경제력도 크고, 언어 기타 면에서 러시아인과의 공통성도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소비에트 엘리트를 배출하고, 지배자 계층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른바 ‘맏형’으로서의 러시아에 비하면 상대적 열위라고 해도, 다른 민족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위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인도 우크라이나인도 슬라브계의 ‘지배자’로서 동일시됩니다.

현대 러시아의 지배층은, 러시아 혁명으로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말해 왔는데, 이런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푸틴 등의 인식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소련 시대와 크게 거리를 두고 있어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명확히 부정적이죠. 일본에서는 가끔 소련 시대의 연장으로 현대 러시아의 강권 정치를 이해하는 경향인데요, 소련보다도 러시아 제국의 영광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이데올로기와는 별도로, 공산주의 시대에 형성된 행동 양식, 사회학자가 말하는 아비투스habitus 같은 것은 연속되고 있겠지만, 이데올로기는 단절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소련과 공산주의가 만든 ‘우크라이나 공화국’도, 그 후신인 현재의 우크라이나 국가도, 청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셈이요.

이런 우크라이나관觀은 일정한 근거를 가지면서도, 극단적인 단순화로 내달리고 있는 까닭에, 러시아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미묘해요. 지식인 사이에서는, 상당히 큰 유보를 붙이지 않는 한 수용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다른 한편으로, 정권의 선전을 그대로 나이브하게 받아들이는 국민도, 양적으로는 다수고요. 다만 보통의 러시아 시민에게, 우크라이나인은 가까운 동료이거나 친척이라는 인식은 있어도, ‘적’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겁니다. 동료일 터인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적’ 쪽에 붙은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패거리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전쟁으로까지 이르면 곤혹스럽기 마련이지요.

■ 왜 대립적 관계에 빠졌을까?

- 형제 관계에 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이렇게까지 대립적 관계에 빠지고 만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대립과 불신의 상징적 언설로, 푸틴 대통령의 침공 전 연설이 있는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극우 네오 나치’가 되었다는 등으로 비난하고 있어요.

시오카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권을 네오 나치 취급을 하는 것은, “적은 네오 나치이지 우크라이나가 아니다”라는 일종의 수사修辭인데요, 이것이 지나치게 억지스러운 선전인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인인 젤렌스키가 네오 나치일 수 없는 것은 확실해요.

그러나 무리한 선전이라고는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라는 말을 빌려 비유적으로 말하면, 자그마한 불씨를 최대한으로 키워서, 많은 연기로 만들어낸다는 겨냥이 아닐까 해요. 이 ‘자그마한 불씨’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의 우크라이나 정치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독립 후 처음 수십 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내부에 다양한 방향성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격렬한 무력 충돌이나 내전의 형태를 취한 것은 아니며, 느슨한 통합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초대 및 제2대 대통령 크라우추크와 쿠치마는 둘 다 원래는 공산당원으로, 선거 때에는 동부‧남부의 러시아어계 우세 지역의 표를 많이 모았지만, 당선 뒤에는 서부의 내셔널리스트를 통합하기 위해 서쪽 편의 정책을 받아들여, 동서 균형을 취하려고 노력했어요. 의회도, 전체 국민의 다양성을 반영한 온건한 다당제로, 다양한 혼란을 품었지만, 합종연횡을 통한 연립 내각을 만들 수 있었어요.

이런 정세가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은, 2004년의 ‘오렌지 혁명’과 유셴코 정권 성립입니다. 통상, ‘오렌지 혁명’은 ‘민주화’ 혁명으로서의 측면만 주목되었지만, ‘혁명’의 주체가 된 ‘오렌지 연합’은 이질적인 세력이 모인 집단으로, 승리 뒤 바로 분해되기 시작했어요. 유셴코 대통령을 떠받치는 여당은 의회 소수파가 되고, 경제 부진도 있어, 정권은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렸어요. 이런 가운데, 유셴코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대항을 전면에 내세운 정체성 정치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 구체적인 발현의 하나로, 독일과 소련의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입장에서 반소 파르티잔 전쟁을 수행한 스테판 반데라를 ‘민족적 영웅’으로 삼은 일이 있어요.

반소 투쟁을 한 사람들을 민족 영웅으로 삼는 것은, 일견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독․소 전쟁 중에 소련에 대항해 싸운 사람들은,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것은 아닐까, 라고 의혹이 제기되기 마련입니다.

반데라파가 정말로 친나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요. 러시아에서는 ‘반데라파는 나치’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이에요.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 반데라를 ‘민족적 영웅’으로 삼는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스트는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러시아에 퍼진 것은 놀라울 것도 없어요.

또 하나는, 스탈린 시절인 1930년대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대기근을 둘러싼 선전전입니다.

이 기근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르바초프 시대에 많은 역사가의 주목을 받고, 종종 자료가 밝혀져서, 뜨거운 토론 대상이 되었어요. 그 무렵은, “스탈린 체제하에서 여러 민족 공통의 비극”으로 파악되는 견해가 우세했어요. 이것에 대해, 유셴코는, 이 기근을 ‘홀로도모르Holodomor’로 명명하고, 우크라이나인을 표적으로 삼은 제노사이드라고 하는 선전을 반복했어요. 실제로는, 기근의 희생자는 우크라이나인만이 아니라, 많은 러시아인․카자흐인․벨라루스인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인만을 표적으로 한 민족적 제노나이드라고 하는 견해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유럽과 미국의 역사가 사이에서도 다수 견해지만, 유셴코 시대의 선전은 “민족적 제노사이드”라는 관점을 강렬하게 내세웠지요.

홀로도모르Holodomor는,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쳐 소련의 자치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250만 명에서 350만 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로 “기아로 말미암은 치사”라는 뜻이다. - 역주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반러시아적인 기분의 우크라이나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반면, 나라 전체로서는 균열을 심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유셴코의 지지율은 회복되지 않고,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는 결선 투표에도 오르지 못 하는 참패를 당했어요.

이때 결선 투표에 오른 인물들은, 예전 ‘오렌지 혁명’에서 패배한 야누코비치Yanukovych와 ‘오렌지 혁명’의 또 한 명의 리더였던 티모셴코Tymoshenko 두 사람이었어요. 결과적으로, 동부․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야누코비치가 서부를 기반으로 하는 티모셴코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되었어요. 부정 선거라는 설도 나왔지만, 부정의 규모는 결과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유럽 국가들과 미국도 인정했어요. 원래 우크라이나 정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것은 아니며, 동서의 미묘한 균형 속에 미세한 동요를 특징으로 해왔는데, 그때그때의 정세로 승자와 패자가 바뀌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해 발족한 야누코비치 정권은, 통상 ‘친러파’로 불렸지만,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러시아와 서구라는 쌍방과의 유대를 가지려는 것이 원래의 자세였어요.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배경으로 한 국제 긴장 격화 속에서, 그런 양다리 걸치기 정책의 유지가 곤란해지고, 말기에는 점점 러시아 의존 쪽으로 흘러갔어요. 게다가 각종 부패가 널리 지적받게 되어, 정권 전체가 막바지에 처한 양상을 짙게 내보였어요. 이런 흐름 속에서, 2013년 말부터 2014년 초반에 걸쳐 반정부 운동(수도 키이우 중심에 있는 마이단 광장과 연관지어 ‘마이단 운동’으로 불린다)이 고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어요.

그런데 이 운동은 2014년 2월 갑자기 폭력 혁명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고, 야누코비치는 국외 도망으로 내몰렸어요. 그 배후 사정은 명확하지 않지만, 정연한 시민운동 속에 과격한 폭력을 가지고 들어오는 극우 세력이 섞여 들은 모양이며, 그 속에는 네오 나치적인 사람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마이단 운동’의 폭력 혁명은, 러시아어계 주민이 많은 크리미아와 돈바스 두 주州의 주민을 자극해, 크리미아의 러시아 이행, 돈바스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야기했어요. 이것은 국가 질서의 비헌법적인 변경이며, 외국들로부터 강하게 비난을 받았어요. 하긴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앞에 키이우에서 비헌법적인 폭력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정당화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그 후, 우크라이나는 네오 나치 분자로 지목되는 세력 – 그 상징적 존재가 스스로 나치 상징을 내거는 ‘아조프Azov 연대’입니다 -  이 여러 외국에서 흘러들어, 군대에 준하는 행동을 시위하게 됩니다. 그게 어느 정도 규모인지, 활동 실태는 어떤지, 정권은 이것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둘러싸고는,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어, 확정하기가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가령 소수라고 해도, 그런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현재 우크라이나 정권은 네오 나치다”라는 선전의 바탕이 된 셈입니다. 상당히 억지스러운 과장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러시아 국민 가운데는 “네오 나치가 있다면, 배제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오는 이유입니다.<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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