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우크라이나는 펜데믹에서 다음 국면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설정된 매우 흥미로운 지정학적 요소이면서도 딱 부러지게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인과관계의 실타래를 들이밀고 있다. 영미는 겉으로는 징징 짜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러시아가 자신들의 한쪽 뺨을 제대로 잘 때렸다는 눈치다. 게다가 다른 쪽 뺨도 때려줬으면 하는데 러시아가 두 번째 손을 들어 올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읽힌다. 이것은 설정된 각본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몇 달간 내게 커다란 의문점으로 남아있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3월에 썼던 <혼돈의 가운데에서>에서 이야기한 <러시아의 남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영미는 왜 우크라이나에서 불장난의 강도를 높여갔는가?>라는 의문점이다.
1. 나쁜 일과 좋은 일의 원인
반복되는 실수를 통해 성장해가는 한 인간을 가정해보자. 내가 결혼한다고 하자. 결혼식장에 친구들이 많이 왔다. 좋은가? 좋다. 친구들이 하나도 안 왔다. 좋은가? 안 좋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결혼식에 친구들이 많이 오면 왜 좋고 하나도 안 오면 왜 안 좋은가? 내 결혼식에 많은 친구들이 왔다면 그 친구들 중 어떤 이는 아주 먼 곳에서 힘들게 찾아온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왜 내 결혼식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참석했을까? 시간을 내고, 옷을 차려입고, 복잡한 전철을 타고, 축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생활비의 일부를 쪼개고 하는 삶의 저항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가 결혼하는 장소와 시간에 맞춰 이동하게 만드는 그 이유가 뭘까? 아마도 내가 그들에겐 해롭기보다는 이롭거나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반대로 내가 매번 친구들을 속이고, 경제적 손해를 끼치고, 그들의 개인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면 그들은 내 결혼식을 축하해줄 마음이 없어 하나도 참석하지 않을지 모른다. 참석한 친구가 단 한 명에 불과할지라도 그가 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지구를 반 바퀴 돌아왔다면 내가 살아온 과거의 삶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나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과거에 그 좋은 일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땅에 좋은 씨앗을 심고 그것이 자라 결실을 본 것이다. 결혼식에 참석한 많은 친구들은 내가 심은 말과 행동이 낳은 열매와 같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집 현관 앞에 칼을 들고 죽이겠다는 아이들이 버티고 있고,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내 몸이 병들어 아프고, 내 재정상태가 좋지 않다면 그런 많은 일도 마찬가지로 과거 내 행동의 오롯한 결과물이다. 이런 험악하고 고통스러운 그림들은 과거에 내가 어떤 행동을 한순간에 신비롭고도 정교하게 이미 그려지기 시작했던 그 그림들이다. 내게 고통스럽고 험악한 풍경이 펼쳐진다면 그때는 그게 조금씩 조금씩 화폭을 채우다가 완성되어 이제는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된 것이다.
따라서 내게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그것은 모두 내가 싸질러 놓은 결과물이다. 그래서 놀라거나 화를 낼 수 없다. 만약 놀라거나 화를 내거나 그 원인을 내가 아닌 외부로 돌린다면, 나는 미성숙한 인간이 된다. 내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가 초래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게 자기반성 또는 성찰의 알맹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화를 낼 일이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놀랄 일도 차츰 없어진다. 감정의 기복이 잦아들고 내 스피커의 이상적인 주파수 특성처럼 들쭉날쭉하지 않고 평탄해진다. 놀라거나 화를 내는 건 현상의 원인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내가 WEF(세계 경제 포럼)의 젊은 지도자로 설정되었다가 지금 영미 벨트의 요직에 앉아 설정된 반인륜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수많은 꼭두각시들의 생각을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들이 전 세계 수많은 민중들의 생각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 이건 제한적이지만 가능하다.
2. 할 수 있는 것의 한계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집사람에게 줄 속옷을 살 수 있는가? 있다. 우리 집 아이에게 야단을 치고 싶지만 “요즘은 무슨 음악이 좋아?”하고 물어볼 수 있는가? 있다. 아직 살아계신 이모에게 전화할 수 있을까? 있다. 40년 피운 담배를 끊을 수 있는가? 있다. 오늘부터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는가? 있다. 위에 열거한 이런 행동들은 내가 마음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나는 40년을 함께한 친구일지라도 그의 생각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는 없다. 특정한 사안에 대해 친구에게 <그건 이렇게 이렇게 생각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이 보통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뚜렷한 경계다. 따라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며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미는 내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하겠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다. 왜 그럴까? 그들은 내가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그럼 뭔가? 서방이 만들어낸 선전물(영화)을 유심히 관찰하면 은연중에 드러나는 그들의 <세상을 보는 창>이 있다. What do you want? 또는 Tell me what you want?과 같은 대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 말 속에 그들이 이해하는 세상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선 인간은 반드시 목표지향적으로 행동한다는 전제가 있다. 두 사람이 동일한 시공간 상의 좌표에 위치해 있다. 이때 백색 유전자는 그 우연한 조우를 즉각적으로 목표물(원하는 것)에 대한 경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즉, “니가 지금 이 장소로 온 것은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겠지? 만약 니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것과 같다면 나는 너에게 그걸 빼앗기고 싶지 않아. 만약 니가 그걸 꼭 원한다면 너는 그 대가를 내게 지불해야 해.” 백색 유전자들의 사고의 기저엔 이런 관점이 깔려있다. 즉, 삶은 제한된 수의 <원하는 것>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의 경쟁과 거래의 연속 같은 거라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필수적으로 원하는 것들을 선점하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3. 영미는 뭘 원하는가?
식량 위기, 경기침체, 2차 펜데믹에 따른 대규모 인구감소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목표는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달성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식량 위기, 경기침체, 2차 펜데믹이 인위적으로 발생해야만 할 어떤 설정된 목표물이라는 걸 의미한다. 이 위기는 1차 펜데믹처럼 영미에서 출발해서 서방권으로 점차 확대될 운명이고 이 위기 상황에서 영미의 영향권에 묶여 있는 꼭두각시 국가들은 영미의 뒤를 이어 동참하여 모두가 끙끙 앓고 엉엉 우는 연기를 해야 한다. 이것은 적도 북쪽에 있는 대부분의 선진산업 국가들을 <위기에 처한 국가>로 탈바꿈하겠다는 것이다. 이 위기는 없어도 될 위기이며 노력해서 얻은 위기다. 원하는 것을 얻은 다음 백색 유전자가 추구하는 것은 그 대가를 받아내는 것이다. 그 대가는 광범위한 인권 탄압과 자유의 박탈, 그리고 인구의 지속적인 소멸이다. 그렇다면 이 해괴한 파괴적 위기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영미가? 희생양이 필요하다.
4. 책임 전가
책임 전가는 영미의 상투적 수법이다. 한반도를 점령 약탈한 존재이면서도 한국전쟁을 일으켜 자신을 침략자에서 구원자로 신분을 세탁함과 동시에 조선을 악마화한 사례는 우크라이나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즉, 그때 조선의 역할을 지금의 러시아가 정확히 반복하고 있다. 러시아가 이 모든 위기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만들겠다는 것이 영미의 계획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놈을 찾아가 직접 때린다. 그러나 영미는 제 3자에게 돈을 주고 때리라고 시킨다. 그 대가로 자신이 사주했다는 것을 비밀에 부치거나 비밀이 탄로 날 경우엔 제 3자(증거)를 제거해버린다. 영미가 선호하는 방식은 무대를 만들고 무대 뒤에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데 있지, 절대 자신을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배우로 등장시키지 않는 방식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이 배우역을 맡은 집단은 마리우폴 제철소 지하에 웅크리고 있다. 이걸 제거해버리면 증거도 증발해버린다. 따라서 러시아는 이 증거물이 온전히 수중에 들어올 때까지 제철소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전쟁범죄의 증거는 꼭 살아 움직이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그들은 마리우폴에서 고립되기 전에 빠져나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기에 웅크리고 있었다면 전쟁범죄의 증거물(인간)이 탈출이 지연되는 것을 감수해야만 할 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전쟁범죄의 증거물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어떤 시설물의 형태일 수도 있다. 러시아에겐 매우 흥미로운 결과물이 눈앞에 드러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투항한 잔챙이들에게선 큰 소득이 없을 것이다. 시간은 러시아의 편이다. 고립된 공간에선 증거를 인멸해도 인멸한 증거가 남는다. 영미는 1차적으로 우크라이나 내부의 준군사조직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러시아의 개입을 유발했고 2차적으로 러시아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유발한 대규모 식량 위기와 경기침체의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5. 러시아는 이길 수 있을까?
이기고 지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크라이나는 본래 지 땅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작전을 전면전을 동반한 전쟁으로 가정하는 순간 러시아는 늪에 빠지게 된다. 현재 러시아는 영미의 계획과 의도를 이해하고 전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정한 것처럼 보인다. 마리우폴에서 오데사에 이르는 흑해로 통하는 지역을 이어 우크라이나를 내륙국으로 만들면 우크라이나는 내부 붕괴국면에 접어든다. 야금야금 전선을 압박하는 한 100%의 확률로 러시아는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절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 러시아는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선을 관리하는 국면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것은 영미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제2편을 서둘러 상영하고 싶은 영미에게 계획의 차질은 불가피해 보인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초기엔 러시아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고 영미에겐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러시아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영미의 계획은 헝클어지고 있다.
6. 맺음말
우크라이나 내에서 불거지게 될 실질적 변곡점은 “왜 러시아 군대는 우리를 다 포위하고 있고 우리의 보급로와 주요 병참기지를 다 파괴했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한 점령을 위해 총진군하지 않는 걸까? 정밀무기로 외부로부터 우크라이나 내부로 유입되는 물자들만 이따금 파괴할 뿐 왜 충분히 점령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멀찍이 물러나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때다. 러시아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거나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괴되는 것은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우크라이나의 병사와 국민들과 그들의 자산이다. 이 군사작전이 계속될수록 손해를 보는 것은 우크라이나 내부다. 우크라이나에 어떤 일이 생기든,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일은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지 절대 외부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내 결혼식에 친구들이 한 명도 오지 않는 것이 친구들이 아니라 내 행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현재 우크라이나에 찾아온 불행은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미가 우크라이나 내부에 손을 댄 것, 그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불행의 씨앗이다. 이것은 그 어떤 선전 문구나 궤변으로도 부정되지 않는다.
탁류 / 서프라이즈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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