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김정일과 산 오바마의 싸움
죽은 김정일과 산 오바마의 싸움
<칼럼>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2012년 04월 09일 (월) 08:49:53 김진환 tongil@tongilnews.com
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드디어 그 주가 밝았습니다. 지난 3월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를 예고한 주가 시작된 것이지요. 예상컨대 이번 주 언론지면은 4.11총선을 제외하면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관련 뉴스로 가득찰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이 벌일 인공위성 공방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요?
이 문제 역시 사실 제가 속해 있는 민족의 문제인데도, 달리 말하면 바로 내 자신의 문제인데도 마치 타자의 문제인양 ‘관전 포인트’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이 문제에 관심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이니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관전 포인트를 정확히 짚기 위해서는 북한이 왜 지금 인공위성을 발사하려 하는지 다시 한 번 따져봐야 합니다. 시간을 되돌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고 공식발표한 직후 나왔던 분석을 살펴봅시다. 당시 분석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대미용으로는 시기가 부적절한데도 불구하고 북한 국내용, 곧 김정은 정권 출범과 강성대국 진입 축포용으로 무리하게 선택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이 분석에는 대개 북한이 이처럼 ‘무리수’를 두는 배경에 김정은 후계체제의 불안정성이나 북한 내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존재할 것이란 추측이 더해졌지요. 다른 하나는 북한 대내용인 동시에 대미용이라는 분석입니다. 향후 북.미 협상이 본격화되기 전에 ‘미사일 카드’를 하나 더 꺼내 놓음으로써 미국의 양보를 더 많이 이끌어내겠다는 게 북한의 의도라는 것이지요.
찬찬히 따져봅시다. 먼저 이번 발사가 대미용이라기보다 대내용이라는 분석은 지금까지 북한의 인공위성 또는 장거리미사일 발사가 ‘예외 없이’ 대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1998년 8월 1차 발사는 바로 다음 달 이루어질 김정일 정권 출범을 축하하는 축포인 동시에 당시 지지부진하던 북.미 기본합의(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이행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006년 7월 2차 발사에는 ‘9.19공동성명’ 이행이 미국의 금융제재로 막혀 있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2009년 4월 3차 발사는 새로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가 대화 의지 대신 대규모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며 전임 부시 행정부와 같은 대결 의지를 드러낸 것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다음으로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 의사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전인 2011년 12월 15일에 이미 미국에 밝혔고(그해 7월부터 밝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김정은 부위원장이 2.29합의 직후인 3월 2일 조선인민군 전략로켓사령부를 시찰했다는 사실 등으로 미뤄볼 때 두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는 인공위성 발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결정했다는 점, 따라서 김정은 체제 안정성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번 인공위성 발사가 2.29합의에 대한 북한 내 강경파의 반발 때문에 즉흥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김정은 부위원장의 전략로켓사령부 시찰은 2.29합의 전부터 ‘준비된 행보’였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끝으로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강행으로 초래될 후과 중에 북.미 협상의 ‘파탄’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북한이 향후 본격화될 협상에서 미국의 더 큰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사일 카드’를 꺼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공위성 발사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계속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북한이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미사일 카드를 꺼냈다는 분석 어디에서도 이번 발사에도 불구하고 북.미 협상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는 대내용이자 대미용이기는 한데 미국에 대한 메시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북한의 지배집단인 조선노동당이 인공위성 발사를 통해 얻으려는 대내 정치적 효과는 분명합니다. 몇 년 전부터 예고해왔던 ‘강성대국’ 진입을 상징하는 축포로 선전함으로써,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직될 김정은 정권과 인민의 결속력을 높이겠다는 것이겠지요. 이에 비해 경제적 효과는 아직 미지수인 게 사실입니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계획을 밝히며 미국에 전달하려 한 메시지입니다. 날카로움과 거리는 멀지만 그래도 정세에 몇 년 째 관심을 가져왔던 제 눈에는, 이번 인공위성 발사가 북한이 오바마 대통령과 대북 협상파에 낸 숙제로 보입니다.
북한이 발표한 2.29합의 내용을 보면 핵실험, 장거리미사일발사, 우라늄농축 활동 중지를 약속하는 문구 전에 ‘조.미관계 개선’과 관련된 문구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미국 언론발표문 순서와는 반대이지요. 그러나 합의 당사자의 이행 ‘의지’와 ‘능력’이 없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듯 2.29합의도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미 기본합의가 그랬고, 9.19공동성명 역시 6자회담이 벌써 3년 넘게 열리지 않으면서 백척간두에 서 있는 상황 아닙니까?
알려진 여러 사실을 종합해보면, 북한은 미국과 고위급회담이 재개된 2011년 7월 또는 2.29합의의 기본 내용이 마련된 2011년 10월 2차 북.미고위급회담 직후에 ‘인공위성 발사 카드’를 내놓았습니다. 언제 내놓았든 상관없이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 카드를 통해 조.미관계 개선에 대한 미국의 ‘의지’와 ‘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이번 인공위성 공방은 ‘죽은 김정일과 산 오바마의 싸움’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들을 ‘솔선수범’ 하듯 3월 19일 IAEA 사찰단 파견 요청 사실을 공개하며 2.29합의 이행 의지를 과시했습니다.
다시 관전 포인트 얘기로 돌아오면,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번 주에 결국 단행될 북한 인공위성 발사와 이후 북.미 공방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오바마 행정부의 초기 대응입니다. 최근 몇몇 논자들이 미국이 과연 북한의 발사를 뭐라고 부를지 관심을 갖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앞에서 설명한 맥락 때문입니다.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 전후 오바마 대통령과 대북 협상파의 행보를 보며 합의 이행 의지와 능력을 판단할 것입니다. 만약 오바마 대통령과 대북 협상파가 2.29합의에 불만을 갖고 있을 대북 강경파에 휘둘리며 강경일변도를 걷는다면, 곧 숙제풀이에 실패하면 2.29합의는 파기되고 북.미 협상은 파탄날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는 유엔안보리 결의 1874호(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모든 발사 금지) 위반은 분명하지만 2.29합의 위반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지난해 북.미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 의사를 밝힌 뒤부터 미국은 인공위성 발사 중단까지 합의하자고 요구했겠지만, 어쨌든 최종 합의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이 2.29합의 파기를 선언한다면, 예를 들어 영양지원 포기, 인적 교류 확대 포기 등을 선언한다면 북한 역시 합의 파기를 선언할 것입니다. 2.29합의가 파기될 경우 북한은 매달 2만 톤 씩 1년에 걸쳐 제공될 것으로 예상되는 영양식품을 포기해야 하고,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확대를 바라만 보아야 합니다. 누가 더 손해 본다고 생각할까요?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현재 공은 미국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2.29합의의 운명을 결정할 오바마 대통령은 일단 3월 25일 한.미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시 영양지원 포기, 추가 제재 등을 시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밝힌 영양지원 포기 논리가 조금 궁색해 보입니다. 긴장이 고조되면 모니터링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추가 제재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고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글을 쓰다 잠시 언론을 살펴보니, 정부 당국자가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이어 핵실험 실시를 반복하는 북한의 행태는 그들의 소위 ‘위성 발사’가 실제로는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은폐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4월 8일자 기사가 있네요. 과거에 그랬으니 현재에도 그럴 것이란 얘기겠지요. 그러나 이 정부 당국자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습니다.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 핵실험은 ‘발사’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보고 나서 결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선례를 통해볼 때 이번에도 ‘발사’ 이후 사태 전개의 열쇠는 오바마 대통령이 쥐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만약 그가 북한이 설정해놓은 마지노선(이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을 넘어 대응한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권력을 놓쳤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으로는 ‘죽은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벌써부터 미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각각 유력한 오바마와 롬니가 본선에서 초박빙 승부를 벌일 것이란 예측이 파다합니다. 몇 달 뒤 치러질 미 대선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핵무장 강화를 방조했다는 공화당의 총공세를 오바마 대통령이 견뎌낼 수 있을까요? 오바마 대통령은 오늘도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전에는 민주노동당 통일외교 정책연구원,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등으로 일해 왔다. 이 밖에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경실련 통일협회 같은 통일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북한위기론: 신화와 냉소를 넘어』(2010), 『민족과 통일』(2010, 공저), 『시련과 발돋움의 남북현대사』(2009, 공저), 『남북관계사』(2009, 공저),『조선로동당의 역사학』(2008, 공저), 『전환기 한미관계의 새판짜기 2』(2007, 공저) 등이 있다. 현재 월간『민족21』에 ‘김진환의 동북아시아 열국지’를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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