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노무현 고문이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후 ‘승부사 기질’은 정치인을 평가하는 주요한 한 요소가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성 정치권에서 이 승부사 기질을 잘 발휘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꼽힌다. ‘바보’로 불리는 것을 감수하고 부산에 반복 출마해 낙선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규모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반대의 사례로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꼽을 수 있다. 오세훈 전 시장은 대권 잠룡의 하나로 분류되기까지 했지만 무상급식 찬반투표에 자신의 시장직을 거는 승부수를 통해 패배하고 사실상 정치적 은둔상태로 들어가야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최근 행보를 보면 문재인 대표의 승부사 기질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표는 6일 최고위원회에서 자원외교 국정조사 증인 채택 문제에 대해 “새누리당은 제가 증인으로 나가면 이 전 대통령도 증인으로 나온다고 한다”면서 “내가 나가겠다. 이 전 대통령도 나와달라”고 발언했다. 새누리당은 “전직 대통령과 비서실장은 체급이 맞지 않는다”라고 반응했지만 김무성 대표가 진의를 알아본 후 대응하겠다고 말하는 등 다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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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6일 국회 도서관 앞에서 열린 정책엑스포 개막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문재인 대표의 이러한 입장은 6일 자원외교 국정조사가 소득없이 끝나는 상황이 우려된다는 지적 속에 나온 것이다. <한겨레>는 이날 1면에 청문회 증인 채택 문제 등에 대한 여야의 이견으로 자원외교 국정조사특위가 용두사미로 끝날 판이라고 보도했다. 의혹을 제기해 정치적 책임을 분명히 하겠다는 새정치민주연합과 결국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정치공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새누리당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린 탓이다. 특히 새누리당은 감사원이 지난 3일 자원외교사업에 대한 감사결과를 발표하는 상황에서 청문회 등의 절차는 불필요하다는 입장 역시 내비치고 있지만 <한겨레>는 이날 사설을 통해 “감사원 발표를 보면 해외자원개발 실패의 주범이 이명박 정부임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주장해 새누리당의 논리를 반박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 논조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겨레>의 이러한 반응은 예상 가능한 수준의 것이지만 보수언론까지 자원외교 국정조사 무산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동아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자원외교 국정조사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에 대해 “새누리당 측 간사인 권성동 의원의 책임이 무겁다”면서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법무비서관을 지냈고 18,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았다. 그가 보은을 위해 증인 채택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자원외교 국정조사가 소득없이 막을 내릴 위기에 처한 상황의 책임이 여당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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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6일자 사설 |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표가 자신이 증인으로 출석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또 하나의 ‘승부수’라고 평가할만 하다. 여야 원내지도부는 자원외교 국정조사의 일정을 연장하자는 협의를 진행할 예정인데, 이것이 무산될 경우 여당의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협의가 잘 돼서 일정이 연장되는 경우에도 문재인 대표의 입장이 정치적으로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자원외교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자원외교를 추진하지 않았느냐”며 양비론을 제기하는 목소리와 이를 정파적으로 활용하는 행태에도 제동을 거는 효과도 있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한 승부수다.
2012년 대선 무렵의 문재인 대표는 승부사라기 보다는 좋은 태도를 갖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미숙한 인물처럼 회자된 바 있다. 분명 시원시원한 성격을 갖고 있는 정치인이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원숙하게 풀어내 자신의 장점으로 어필하는 데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미숙한 면모가 있다는 식의 평가는 문재인 대표가 2012년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고 이 점에서 발전을 이루지 못하면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을 거라는 진단에는 일리가 있다. 문재인 대표가 이완구 총리 인준 여부를 여론조사로 결정하자는 발언을 한 이후 비판을 받았던 것에도 이런 맥락이 작용했다. 그런 문재인 대표가 ‘유능한 경제정당, 안보정당’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기 시작하면서 뭔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 긍정적이다.
문재인 대표의 정치력과 리더십에 관해서는 최근 동교동계와의 갈등관계가 불거지면서 이런 저런 뒷말들이 나온 바 있다. 어찌됐건 문재인 대표가 소위 친노그룹의 수장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2월 전당대회 이후 주승용 최고위원 등 비노그룹 일부 인사들이 문재인 체제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식의 불편함을 공개적으로 피력했는데 문재인 대표는 일부 당직 인선 등에서 이들의 불만을 일단은 잠재우는데 성공한 상태다. 우려됐던 동교동계의 반발도 문재인 대표와 박지원 의원간의 만남이 성사되면서 일단은 봉합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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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원외지역위원장협의기구 출범식에서 인사말을 마친 박지원 의원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물론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른바 친노그룹과 동교동계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출과 열린우리당 창당 때부터 부딪쳐온 역사를 갖고 있다. 4·29 재보궐선거에서 동교동계가 지원에 나서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되더라도 친노 대 비노라는 새정치민주연합의 고질적 갈등관계는 해소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2016년 총선 준비 과정과 2017년 대선후보 선출이라는 정치일정이 가까워지는 과정에서는 이런 상황은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진행될 가능성마저 있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가 이 균열을 느슨한 수준에서나마 봉합하면서 당 내 계파들을 이끌고 대외적으로는 적절한 승부수를 던지면서 정국을 영리하게 이끌고 가면 2012년의 ‘정치적으로 미숙한 인사’라는 평가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4·29 재보궐선거에서 2개 이상의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문재인이 변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원숙해진 승부사 문재인’이라는 수사는 2012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야권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서 문재인 대표의 위상 강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현재의 이 스탠스를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우유부단해도 실패하고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해도 실패한다. 이 미묘한 줄타기는 2016년 총선에서의 공천과 201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의 경쟁에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야권 지형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치인으로서 얼마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가에 문재인 대표의 성공이 달려있다. 문재인 대표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치인으로서의 시험대에 올랐다. 이제 실수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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