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의 선생님, 이재명의 아버지…그 따뜻하고 슬픈 이야기
등록 :2020-10-04 10:37수정 :2020-10-04 11:18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34
집으로 불러 고기 구워주며 제자 격려하던 이낙연의 선생님
공부하지 말라고 검정고시 합격증 찢어버린 이재명의 아버지
고향·성격·노선 등 대조적인 두 사람 대선주자 양강구도 형성
경쟁과 협력으로 민주당 이끌어가야···정권재창출은 공동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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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7월 경기도청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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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2003년 출판한 책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에 나오는 프로필
나는 선생님 복이 많은 사람이다 . 학생 시절의 중요한 고비마다 선생님들의 큰 도움을 받았다 . 선생님들께서는 나에게 바른길을 제시해 주셨고 , 내가 조금이라도 빗나가지 않게 배려해 주셨다 . 나에게 거의 정기적으로 고기를 먹여 주시기도 했다 .나는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 . 그곳에는 삼덕초등학교라는 조그만 학교가 있었다 . 지금은 폐교돼 법성초등학교로 통합됐지만 ,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전체 학생 수가 200명 남짓밖에 안 됐다 . 각 학년에 한반 씩 , 학생 수도 30~40명 정도였다 . 그런 곳이어서 광주 같은 대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한다든가 하는 것은 거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 주변에도 그런 전례가 별로 없었다 .나도 대도시로 진학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 그렇게 6학년이 됐다 . 그런 때에 광주 출신의 박태중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 여드름투성이의 스물 두살 총각이셨다 .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군대를 마치신 뒤에 맨 처음 부임하신 곳이 우리 삼덕초등학교였다 .부임하시자마자 박 선생님은 나를 지목하셨다 . 광주서중으로 진학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셨다 . 그리고는 과목별로 목표점수를 지정해 주셨다 . 국어 95점 , 산수 90점 하는 식이었다 . 그 점수에서 1점이 모자랄 때마다 회초리를 한 대씩 때리셨다 . 나는 공부를 가장 잘하면서도 선생님한테 회초리를 가장 많이 맞았다 . 회초리가 너무 아파서 “내가 언제 광주서중 간다고 했습니까?”라고 항변도 했지만 , 소용이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박 선생님은 며칠에 한 번꼴로 밤에 우리 집에 오셨다 . 수련장이나 전과를 갖다 주시기도 하고 , 과자를 사다 주시기도 했다 . 그러면서 “공부 잘해 ”하고 격려하시곤 했다 . 대도시 진학이나 입학시험이라는 개념 자체를 갖지 못했던 나도 조금씩 달라졌다 . 그래도 나는 공부보다는 아버지와 농사 심부름을 하거나 친구들과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 나는 전기였던 광주서중에 합격하지 못하고 후기였던 광주북중에 합격했다 . 광주에서 입학시험을 보는 기간에도 나는 박 선생님의 자택에서 먹고 잤다 .광주북중 (현재의 북성중 ) 1학년 때의 담임은 국어를 가르치신 정종선 선생님이셨다 . 정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나를 자택에 불러서 밥을 먹여 주셨다 . 그때 선생님 댁에서 먹었던 쇠고깃국과 고소한 김 , 그리고 따뜻한 놋그릇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 선생님은 밥상에 나와 단둘이 앉아 나에게 이것저것을 먹게 하시고 인생에 보탬이 될 만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 선생님은 나의 가정사정도 자주 물으셨다 .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아신 선생님은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아버님께 갖다 드려라 ” 하시면서 김이나 쇠고기를 싸주셨다 .광주북중 3학년 때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 성적으로 보면 광주일고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 일고에서는 장학금을 받기가 어려웠다 . 일고를 졸업한 뒤에 대학에 가려 해도 , 아버지는 나를 대학에 보낼만한 재산을 갖고 있지 못했다 . 그래서 나는 광주고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 광주고에 가면 장학금을 받기가 쉬웠고 , 광주고에서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진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들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 3학년때 담임 위후량 선생님께서 ‘주동 ’이 되셨고 다른 선생님들이 동조하셨다 . 정종선 선생님도 동조자의 한 분이셨다 . 위 선생님은 나에게 “일고로 가거라 ” 하시면서 “학비 걱정은 말라 ”고 말씀하셨다 , 내가 머뭇거리자 위 선생님은 “아버님을 학교에 모시고 오라 ”고 하셨다 . 며칠 뒤에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교무실에 갔다 . 위 선생님 등은 아버지에게 “낙연이 학비는 우리 선생님들이 모아서 댈 테니 낙연이를 일고에 보내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셨다 .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셨다 . 아버지는 즉석에서 동의하셨다 . 선생님들이 실제로 학비를 모아 주시지는 않았지만 , 아버지나 나는 선생님들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광주일고 3학년때 담임은 국어를 가르치신 김정수 선생님이셨다 . 김 선생님께서도 나를 몇 사람의 학생들과 함께 간간이 자택에 불러서 돼지 불고기를 먹여 주시곤 했다 . 선생님께서는 늘 “너희들 나이에는 잘 먹어야 하는데 내가 가난해서 이것밖에 못 준다 ”며 미안해하셨다 . 옆에서 고기를 구워주시던 사모님께서는 “당신이 검사나 변호사를 했더라면 돈도 더 많고 학생들에게 고기도 많이 먹게 했을 텐데 ···”라고 거드셨다 .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내가 선생이 아니었으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겠지 ”하고 되받곤 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우리는 교련반대 데모 열풍에 휩싸였다 . 나도 때로는 친구의 자취방에 찾아가 데모를 모의하곤 했다 . 학교로서는 큰 고민이었다 . 대학입시를 몇 달도 안 남긴 시점에 데모라니 ···. 그런 고민들을 하셨던 모양이다 . 선생님들은 고민 끝에 ‘묘안 ’을 내놓았다 . 3학년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다시 가자는 것이었다 . 데모 열기를 다른 데로 돌리려는 아이디어였던 셈이다 . 그러나 데모를 모의하던 친구들은 수학여행을 거부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무렵 나의 하숙방은 좁은 골목으로 손바닥만 한 창문이 나 있었다 .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 창문을 열어보니 김 선생님이 서 계셨다 . 선생님은 “응 , 공부하냐 ?” 하시더니 “수학여행 가거라 . 이번에는 술을 마셔도 좋다 ”고 하시는 것이었다 .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멋있어서 나는 “예 ,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 그리고 데모를 모의하던 친구들을 설득해 수학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 수학여행 2박 3일 동안 나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시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 .그 후로도 밤에 하숙방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면 김 선생님이 서 계시곤 했다 . 선생님은 “응 , 공부하냐 ? 나 간다 ”하시며 그냥 가시곤 했다 . 고 3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나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뒤에 내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는 동안에 김 선생님은 정년퇴임하셨다 . 선생님은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해 살고 계셨다 . 선생님은 간간이 신문사에 찾아오셔서 “자네 글 잘 읽었네 . 열심히 하게 ”하시며 그냥 가시곤 했다 . 그리고 내가 2000년 4·13 총선거에 출마하자 선생님은 과천에서 전남 영광까지 내려오셔서 얇지만 따뜻한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선생님들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백만분의 1도 보답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허둥지둥 살고 있다 . 선생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솟구친다 . 이 글이 선생님들에 대한 나의 작은 속죄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
나를 단련시킨 것은 아버지와 가난이었다 .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내게 큰 선물을 준 셈이다 . 나의 성장기는 아픔의 연속이었지만 그 아픔이 없었다면 ,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 이 모든 과정 속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프게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를 싫어한 이유는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장의 역할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5남 2녀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 위로 형이 셋 , 누이가 하나 있었고 ,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 이렇게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도 아버지는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 가사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길러낸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아버지도 한때는 대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학에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중퇴를 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꾼이 되었다 .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어쩌면 논밭 하나 없이 화전을 일구어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 그때부터 아버지는 ‘공부 ’라는 말만 나오면 표정이 일그러졌고 , 자식의 교육에도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 아버지는 심지어 내가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조차 반대하며 번번이 훼방을 놓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 아버지는 돌연 집을 나가버렸다 . 말도 없이 무기한 가출을 한 것이다 . 어머니와 7남매의 생계 따위는 아버지의 안중에 없었다 .혼자서 7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이렇다 할 돈벌이를 찾기도 어려운 시골에서 어머니는 남의 집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날품팔이 삶을 살았다 .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위태로운 나날들이었다 . 심지어 어머니는 그 당시 불법인 줄 알면서도 몰래 막걸리를 빚어 팔기도 했다 .퉁퉁 불어터진 어머니의 손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 힘겨울 때마다 이 모든 시련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저주의 감정마저 들었다 .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 경기도 성남이라는 곳에 터전을 마련해놨으니 모두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들뜬 마음을 안고 고향을 떠나 성남으로 향했다 . 하지만 이내 절망하고 말았다 .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 성남시에 정착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아버지는 성남시 상대원동 공단지역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 집이라는 것도 달랑 단칸방 하나여서 여덟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 자야만 했다 . 들어본 적도 없는 성남이라는 도시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성남시는 서울에서 이주해온 이른바 ‘달동네 ’ 출신들로 북적였다 . 서울의 청계천 ·창신동 ·금호동 일대 판자촌에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그곳 서민들을 이주시켜 만든 황량한 도시가 바로 성남시였던 것이다 . 맨주먹으로 살기엔 차라리 고향인 안동 산골보다 못해 보였다 . 고향에서는 그나마 열심히 땅을 파면 입에 풀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 그러나 내가 살던 공단지역에서는 먹고살기 위해 누구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 내가 12세의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도 생존을 위한 필수 코스일 뿐이었다 .공장 생활은 산재 사고와 중노동 , 그리고 무수한 구타로 점철된 시련의 시간들이었다 . 어릴 때부터 폭력은 이미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 고향인 안동의 초등학교에서도 교사들에게 수없이 매를 맞으며 자랐다 . 집이 가난해서 학습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한 아이들은 무조건 매를 맞아야 했다 .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 억울하고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그때는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까지 교권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 하루가 멀다 하고 매를 맞아야 했던 나는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기에 이르렀다 . 실컷 때려보고 싶었다 . 하지만 그 꿈은 공장 생활을 하면서 변했다 . 교사에서 공장 간부로 꿈이 바뀐 것이다 .공장 간부가 되려면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 그런데 그 꿈을 가로막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버지였다 .“공장에서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공부는 무슨 공부 !”아버지는 내가 공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매일 같이 구타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 공부를 해서 바꿀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 아니면 자식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하는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가 뼛속 깊이 절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최소한의 긍정도 , 한 줌의 희망도 없는 삶 . 그런 인생을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이었던 걸까 . 나는 공장에서 간부들이 휘두르는 주먹보다 아버지의 그 절망이 몇 곱절 더 아팠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주변 사람들까지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 어떻게 보면 내가 정말로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과 시련이 아니라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 마음 하나로 독하게 공부를 해나갔다 . 그리고 중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 마쳤다 . 나는 ‘해냈다 ’는 심정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증을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보였다 . 아버지는 합격증을 받아들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 ‘수고했다 ’, ‘잘했다 ’는 말 따위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 최소한 고개 정도를 끄덕여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공단 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울분을 삭였다 .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 방바닥에 합격증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받은 합격증인데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렇게 켜켜이 쌓여갔다 .대학 재학 시절 나는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 졸업 후에 다시 도전해서 1차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 지병인 위암이 재발한 것이다 . 그때 문병을 온 친척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가 자네 자랑을 많이 하더군 .”알고 보니 아버지가 친척들 앞에서 ‘우리 재명이를 내가 법대에 보냈네 ’라며 자랑하더라는 것이었다 . 나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 검정고시로 중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고 , 공장에서 일하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내게 한마디 격려조차 없었던 아버지가 무슨 낯으로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 내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도움을 전혀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법고시 공부를 위해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몇 달 치 월세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 그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여서 매월 학교에서 20만원씩 받던 생활보조금이 끊어진 상태였다 . 그 사정을 알고 내 통장으로 돈을 넣어준 것이다 . 고시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라 한두 푼이 절실했던 나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돈이었다 . 한편으론 그것이 아버지와 나눈 최초의 화해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사법고시 2차에 합격했다 . 최종 합격 발표 후 어느 날 아버지와 마주했다 . 그 무렵 아버지는 말을 단 한마디도 못 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집에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나는 병상에 누워 잠든 아버지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내 목소리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 잠시 후 아버지가 천천히 눈을 떴다 .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 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느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곧이어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는가 싶더니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 나는 아버지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버지 , 사실은 제가 잘되기를 바라셨죠 ? 모른 척하면서도 저를 쭉 지켜봐 주신 거죠 ? 제가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가기를 바라신 거죠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그 큰 과거의 아픈 벽을 허물고 화해했다 .그 후 아버지는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한마디 유언도 없이 영원히 잠들었다 . 어쩌면 그 눈물 속에 모든 말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 당신의 한 많은 인생에 대하여 , 부자의 정을 한 번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는 회한에 대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날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 그리고 돌아가신 시간도 내가 태어난 시와 똑같았다 .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그날 , 그 시간에 맞춰 생을 마감한 것이다 . 그날의 임종은 결국 아버지와 나만을 위한 마지막 화해의 순간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가슴 속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 오랫동안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원망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로 여러 해가 흐르면서 나는 한동안 아버지를 잊고 지냈다 . 하지만 문득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 인권 변호사로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수배자로 몰려 수난을 당할 때 , 정치에 입문해 정적들이 나를 함부로 겁박할 때 , 가족 문제로 큰 시련을 겪을 때 , 답답하고 억울하고 마음이 지칠 때마다 어김없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 그리고 매번 거짓말처럼 오기와 투지가 솟아나곤 했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 앞에서 눈물 흘리던 그 얼굴이 나에게는 용기의 원천이 된 것이다 .비록 오랫동안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 돌이켜보면 그 증오심은 오히려 불과 물과 망치가 되어 나를 담금질해온 셈이었다 . 덕분에 내 의지는 강철같이 단단해질 수 있었다 . 아버지는 이 거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진정한 토양을 내게 길러준 것이다 .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선물이자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다 . 한 해 , 두 해 ,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그 선물의 진정한 가치를 뼈저리게 실감하곤 한다 .
병력을 잘 다룬다는 것은 마치 솔연 ( 率然 )과 같이 하는 것이다 . 솔연 ( 率然 )이라는 것은 상산 ( 常山 )에 사는 뱀으로 그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달려들며 그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달려든다 .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964285.html?_fr=mt1#csidx141e33e05b76e9d8ca834adcff1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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