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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나는 전두환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10-18 11:49:02
수정 2020-10-18 11:4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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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소식을 듣고 1980년대 독서실에서 들었던 유쾌한 농담이 하나 생각났다.

“전두환이 에이즈에 걸릴 위기에 처했다. 이걸 여섯 글자로 줄이면?”
“힘내라 에이즈!”

나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누군가를 때리고 어쩌는 일에 관심이 조금도 없지만, 만약 딱 한 놈을 붙잡아 그를 흠씬 패야 한다는 미션을 받는다면 그 한 놈은 단연 전두환이다. 이 미션이 허락된다면 나는 정말 난생 처음 혼신의 힘을 다 해 그 한 놈을 팰 것이다. 노태우? 안타깝게도 너는 2순위로 밀렸다. 일단 전두환 너부터 좀 어떻게 해결하자.

이토록 전두환을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전두환이 코로나에 감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1980년대 에이즈 씨는 힘을 좀 내셨어야 했는데, 지금 코로나 씨는 나의 응원을 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트럼프를 몹시 혐오하지만, 그의 코로나 감염을 조금도 반기지 않았다.

사회와 협동

지금부터 잠깐 사회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참인데, “사회주의 어쩌고 하는 거 보니 역시 저 자식은 빨갱이였어”라는 저주가 들릴까봐 조심스럽다. 그런데 이 저주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나를 두고 빨갱이 운운하면 그건 빨갱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혹시 대한민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빨갱이를 만나면 꼭 물어보시라. 이완배가 빨갱이냐고. 그들이 피식 비웃으며 “그딴 허접한 개량주의자가 뭔 빨갱이야?”라며 정색을 할 것이다.

지금부터 본론. 반(反)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이념의 이름이 왜 사회주의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에 들어간 ‘사회’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인류는 7,000년 동안 ‘사회’라는 것을 이루고 살았다. 이 말인즉슨, 인류는 사회 속에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인류의 협동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2019년 옥스퍼드 대학교 인지진화인류학연구소 연구진이 전 세계 60개 문명(여기에는 우리나라 문명도 포함돼 있다)의 가치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전 세계 모든 문명이 반드시 지켜왔던 7가지 가치가 발견됐다.

▲가족을 돕기, ▲소속 집단에 충성하기, ▲호의를 갚기, ▲용감하기, ▲윗사람을 따르기,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기,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연구팀은 “이 7가지 가치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협동이다”라고 단언했다.

옥스퍼드 연구팀은 협동을 인류의 도덕이라고 불렀다. 도덕이 뭔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인류 사회의 합의를 뜻한다. 즉 협동은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살아온 이래 반드시 지켜야 했던 불문율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국 런던에서 공장이 생기면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시작됐다.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지켜본 지성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자기들이 관찰했던 인류 문명의 역사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이따위로 세상을 운영했던 기록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말한다. “사회가 뭐가 중요해? 지금부터는 각자도생의 시대야. 네 옆 사람과 경쟁해! 경쟁에서 이기려면 이웃의 몰락을 기뻐해!”라고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가 “사회? 그딴 거는 없다. 있는 것은 개인과 가족뿐이다”라고 선언한 데에는 다 이런 철학적 기반이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출현 당시 몇몇 지성인들이 고안한 체제가 사회주의였다. 지금 사회주의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 전복을 기도했던 카를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의 문건을 보면 그 어디에도 자본주의를 전복하자 류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

추석연휴 끝난 5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버스정류장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서울시 방역요원이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
추석연휴 끝난 5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버스정류장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서울시 방역요원이 방역작업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그들은 단지 7,000년 동안 유지됐던 협동의 사회가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했을 뿐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각자의 문제를 혼자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해결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협동은 인류 사회의 유일한 도덕이었다.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

코로나19가 뒤바꿔놓은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새삼스레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는 “네 이웃과 네가 뭔 상관이야?”라고 질타하지만 이런 주장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우리는 이웃과 당연히 상관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이웃이 병에 걸리면 내가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의 건강을 염려해야 한다. 한 번도 배송 노동자의 건강을 걱정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 쿠팡 물류센터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자 내 배송박스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묻었을까봐 걱정하지 않았나?

그게 내 건강을 위한 이기적 마음에서 시작된 염려라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모두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점이다.

전두환이 밉다고 “힘내라 코로나!”를 외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전두환 같은 개똥같은 인간과도 연결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바이러스와 싸울 때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힘으로 맞서야 하는 이유다.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는 “이웃(경쟁자)의 몰락이 나의 기쁨이다”라고 가르쳤지만,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이웃의 몰락은 너의 몰락의 전주곡이다”라고 말이다.

대관식과 새로운 세상

내가 애정하고 존경하는 선물(膳物) 경제학의 창시자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몇 달 전 자신의 블로그에 ‘대관식’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보고 안 사실인데 바이러스의 이름인 코로나(corona)가 왕관을 씌워주는 대관식(Coronation)이라는 단어와 뜻을 공유한다고 한다.

이 글에서 아이젠스타인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식견을 자랑한다.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의 글을 옮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관점을 넓힐 기회를 제공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을 더 신성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젊은 사람이건, 늙은 사람이건, 아픈 사람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모든 개개인을 신성하고,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여기라고 말이다.

우리, 서로를 돌보는 일에 대해 진지해지자. 우리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함께 기억하자. 전 세계에서 연대와 치유에 관한 소식이 들려온다. 어떤 사람은 곤경에 처한 낯선 사람 10명에게 100달러씩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며칠 전까지 던킨도너츠에서 일했던 내 아들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5배 넘는 팁을 줬다고 말한다. 의사들, 간호사들, 그리고 필수 인력들은 공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한다.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위험에 던진다.

레베카 솔닛이 자신의 책 『지옥에서 건설된 파라다이스』에서 적었듯, 재난은 종종 연대를 해방시킨다. 수면 아래에서 일렁이던 훨씬 더 아름다운 세계는, 그것을 붙잡고 있던 시스템이 느슨하게 풀릴 때마다 불쑥 물 위로 나타난다.

아이젠스타인은 코로나 이후 전 세계 민중들이 보여주는 연대와 협동에서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발견한 듯하다. 만약 그의 예견이 적중한다면, 우리는 300년 동안 자본주의가 오염시켰던 연대와 협동의 도덕을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코로나(corona)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대관식(Coronation)에 비유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새삼 이 나라 곳곳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 농민, 민중들의 건강을 걱정한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런 걱정과 염려가 인류를 지탱해온 도덕임을 깨닫는다.

코로나 사태 초기 마스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 나의 페이스북 친구 몇 분은 힘들게 구한 마스크를 주저하지 않고 배송노동자들에게 건넸다. “안전하게 배송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말이다. 이 어찌 인류의 본성에 걸맞은 아름다운 도덕이라 하지 않겠나?

아이젠스타인의 글을 읽은 뒤 나도 아주 작은 무언가를 모르는 이웃에게 나누는 습관을 만들었다. 그들이 건강하게 살아줘서 고맙고, 함께 숨 쉬고 있어서 고맙다. 아이젠스타인의 말처럼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을 더 신성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돌보는 일에 진지해져야 한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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