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 일백이주년의 각오
기자명 전덕용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승인 2021.03.01 09:57 댓글 0 바로가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본문 글씨 키우기 SNS 기사보내기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 다른 공유 찾기 기사스크랩하기 ▲ 덕수궁앞 만세시위 [사진 : 위키백과] 1910년 8월 이른바 한일합방 이후 10년 만인 1919년 3월1일 조선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거족적인 민중봉기가 폭발했다. 동학혁명이 발발한 지 실로 25년 만이었다. 일제는 동학혁명 진압을 내세워 그들의 군대를 조선 땅에 상륙시켰다. 청나라의 출병을 문제 삼아 이에 대항, 조선 침략 야욕의 첫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그 후 청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조선을 강점 무력으로 겁박 사실상 식민통치를 감행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일합방조약은 하나의 요식 행위이고 국권 강탈을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대양문화시대이고 육지와 바다를 가릴 것 없이 항공기나 선박을 이용해서 쉽게 접근하고 왕래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만해도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둔 원거리 접근이나 인적 물적 소통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좁은 섬나라에 갇혀 있던 일본으로서는 바다 건너 대륙 진출이 유사 이래 종족적 꿈이었고 국가적 숙원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설(說)에 의하면 조선반도를 통해 대륙에서 건너간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일본인의 주류이고, 그들의 조선땅에 대한 향수유전자가 두고두고 늘 조선 진출 침략형태로 분출 발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이 강대해지면 항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