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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수북통신] 나쁜 시대의 착한 시민

 공선옥 소설가

 수북 할머니들은 ‘노칼푸’라고 부르는 수북 ‘로컬푸드’에 가서 장보고 오는 길에 하교하는 아이들이 때맞춰 데리러 온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다가 한나는 문득, 옛 생각이 났다. 지금 아이들처럼 차를 타고 다니진 않았지. 무조건 걸어서, 십리고 이십리고 걸어서. 산길, 밭둑길, 논둑길을 걸어서. 일부러 더 먼 길, 더 험한 길로 다니길 즐겨했지. 미끄러지면 일부러 더 많이 미끄러져버리고, 자빠지면 더 많이 자빠져버리기도 했지. 더운 여름날 자빠진 곳이 시냇물이라면 더욱 좋지. 시냇물 두 손 모두어 손바닥컵으로 떠 마셨지. 고개 숙이고 시냇물 통째로 마셨지. 흰 구름도, 나뭇잎 그림자도, 산 그림자도, 물과 함께 입속으로 들어갔지. 소나기 내리면 급한 여울. 물여울과 함께 아이 마음도 여울여울. 냇가 우뚝한 미루나무도 여울여울. 비갠 저녁답. 붉은 북새가 꽉찬 길을 막대기 하나 들고 타박타박. 차마 못 버린, 물살 헤적이던 막대기 하나. 그거라도 들고 가면 덜 고적해서 기언씨(기어이) 들고 가는 아무것도 아닌 막대기 하나. 찔꺽이는 신발 소리에 맞춰 막대기 탁탁거리며 막대기 같은 것 진작에 버려 불고 북쪽 도시로 돈 벌러간 동무들 생각, 도시 생각, 서울 생각을 좀 했지. 아주 옛날에.

시냇물은 강물 따라, 세월 따라 멀리멀리 흘러가 버렸다. 시냇물 속 흰 구름도, 푸른 하늘도, 나뭇잎 그림자도, 산 그림자도, 동무들도, 막대기도 다 잃어불고 아이 혼자 남아, 떠먹을 시냇물도 없이, 두레박 우물물도 없이 늙어가고 있다. 남은 생애 다시는 시냇물 먹어볼 일 없겠지. 시냇물도 못 먹으니 두레박 우물물은 더더욱. 두손 모두어 담아낸 시냇물 대신, 두레박 둘둘둘 풀어 퍼 올린 우물물 대신 ‘노칼푸’에서 사온 아무 맛도 안 나는 물이나 마시면서 늙어가겠지. 맘껏 마셨던 시냇물, 맘껏 퍼 올리던 우물물도 못 마시고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인가. 이 맛도 저 맛도 안 나는 ‘사온 물’ 이나 마시고 사는 것이 한나 너는 재미가 있냐, 없냐?

투명 페트병 분리배출 계도기간이 종료된 27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투명 페트병이 분리돼 있다. 지난 26일 계도기간이 종료됨에 따라 아파트 단지 등 공동주택에서 투명 페트병을 분리배출하지 않을 경우 최대 3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 된다. 2021.6.27ⓒ뉴스1

한나는 며칠 전 옛날에 받았던 편지들을 들여다보다가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생애에 누구한테 ‘핀지’ 보낼 일이 있을까? 누가 내게, “성, 보소. 우리가 만나본지 어느덧 석삼년이 다 가는데, 그동안에 소식 한 자 주고받지 못하고 세월만 가고 말았소. 그간 가내 무탈하시고 대소간, 이웃간에 다들 무고하신지 궁금하오....”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내용이나, “동상, 고향 떠나 낯설고 물선 타향에 오니 고향산천이 그 얼마나 푸근한 요람이었는지 실감을 하는 바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노래도 있지마는 술에 취해 해보는 소리에 불과하되, 하루해가 저무니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동상에게 이렇게 몇 자 적어보네....” 사뭇 절박하고 유장한 사연의 편지시대, 그런 편지를 주고받던 마음의 시대는 떠먹을 수 없는 시냇물, 말라버린 우물물 같이 되고 이제 남은 생애 내내 문자질, 톡질이나 하다가 나는..... 늙어서 이빨 다 빠진 호호 할매가 되어서도 문자질 톡질을 하겠지. 어쩌면 졸하는 그날도 스마트폰 들여다보다가, 페북질 하다가, 구정물 같은 세상 잡사들이나 들여다보다가, 그러다가 종내는...

집에 와서 장본 것들을 푼다. 세상은 이제 어디 사나, 시골 사나 도시 사나, 미국 사나, 베트남 사나, 배출되는 쓰레기의 종류는 거의 똑같아진 성 싶다. 생선 싸온 비닐, 고기 포장된 스치로폼 접시, 고기와 스치로폼 접시 사이의 고기 핏물 흡수지. 어디다 버려야 할지 감이 안서는 실리콘 함유 흡착지. 자두 담긴 셀로판곽. 들고 가기 좋으라고 엮은 수박노끈. 떡 스치로폼 접시. 비닐, 비닐, 비닐, 스치로폼, 스치로폼, 스치로폼, 플라스틱, 플라스틱, 플라스틱..... 그럴 때 또 어김없이 아버지가 장날 사온 생선, 지푸라기로 꽁꽁 엮어 사온 갑오징어, 간고등어, 엄마가 장에 내다 판 계란, 지푸라기 계란싸개, 떡 싸온 칡이파리, 감이파리, 호박이파리. 신문지에 싸온 ‘도야지괴기’ 생각이 난다.

그러나 이제, 입에 들어가는 것, 몸에 걸치는 것, 깃들어 살아야 할 집, 앞으로 남은 생을 지탱할 것들이 이 세상에서 쉽게 없어지지 않을, ‘유독가스’ 내뿜는 성질을 가진 것들에 둘러싸여 사는 ‘수’밖에는 다른 수가 없겠지. 인자는 옴도 뛰도 못하겠지. 지푸라기나, 칡이파리나, 호박이파리 같은 것으로 싸올 떡이나 적 같은 것은 먹어볼 수 없겠지, 인자는. 다 ‘비니루’ 벗겨내고 ‘프라스틱’에서 꺼내야 먹을 수 있겠지. 그래서 매주 화요일날 오전까지 재활용 쓰레기장에 내가 벗겨낸 그것들을 들고 나가 버리면서, 졸하는 날이 머지않은 어느 날도 ‘재활용쓰레기’가 정말로 ‘재활용’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면서 착하디 착하게 분리배출하러 나가겠지. 기운이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내 집에 온 비닐, 플라스틱, 스치로폼은 내가. 그 누가 만들어 팔아도 일단 ‘내 집에 온 것은 내가’ 정신으로! 어쩌면 자식들에게 재활용품은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당부를 해놓고나야 안심하고 저 세상으로 갈수 있을 것만 같아. 핸드폰 메모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메모를 남길지도 몰라. 생각하면서도 오싹 한기가 돈다.

전북 군산시 옥구면에서 농민이 모내기를 하며 본격적인 영농철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2021.04.28.ⓒ뉴시스

노칼푸에서 장봐온 것으로 배를 채우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광주전남 뉴스. 광주전남지역에서 농가의 수가 20년 전보다 50프로 감소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는 뉴스. 20년 전이면 2001년. 김대중 대통령 때. 그 전해인 2000년 6월 15일 낮에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공항에 내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향해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가던, 그래서 남북 수뇌가 서로.... 또렷하고도 아스라한 이십년 전. 그 때 광주전남의 농가가, 농부가 이십년 후인 지금보다 배나 더 많았구나. 이십년 후인 2041년엔 지금보다 농부가 더 많아질까, 적어질까. 지금 이십년 전보다 반으로 적어졌으니, 더 적어질 가능성이 많겠지. 농사지을 사람 없으면 재벌이 농사질까. 그래서 쌀이 삼성쌀, 현대쌀, 롯데쌀..... 농부들은 삼성농부, 현대농부, 롯데농부.... 이십년 후엔 이십년 전이었던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하기 싫은,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고마는, 세상이 될까. 이왕 집도 그러한 것처럼 재벌 브랜드의 쌀과 과일을 먹고 살지도 모를 그 때도 분리 배출 잘하는 착한 시민으로 살고 있을까. 착해서가 아니라 힘없어서 조용히는 살겠지, 이미 노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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