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종에서 유해동물로, 제주노루의 슬픈 운명

보호종에서 유해동물로, 제주노루의 슬픈 운명

조홍섭 2016. 08. 24
조회수 4597 추천수 0
멸종위기 몰려 1987년 사냥 금지
2010년 2만여 마리로 늘어
 
농작물 피해와 교통사고 원성 높아
2013년부터 한시적으로 포획
 
현재 7600여 마리 살지만
적정량보다 1천 마리 과잉 추정
 
빙하기 때 한반도 내륙 노루와 분화
고립 진화해 고유아종으로
 
그만큼 유전다양성도 낮아져
새로운 감염병이나 환경변화에 취약
 
포획 위주로 과도하게 조절하면
자칫 노루 생태계 회복에 ‘치명상’

04646756_P_0.JPG» 노루 두 마리가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사려니오름 인근 목장 초지 위를 달리고 있다. 서귀포/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송곳니가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고라니와, 뿔과 함께 엉덩이에 흰 무늬가 있는 노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형 야생동물이다. 흥미롭게도 고라니는 육지에 흔하지만 제주에 없고, 노루는 육지에는 드물지만 제주에선 너무 많아 골치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고라니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부에만 서식하는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이고, 제주의 노루는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진 노루와는 많이 다른 제주 고유의 아종이다.
 
이 두 초식동물은 개체수가 지나치게 많아 농업에 피해를 주고 교통사고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 결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돼 해마다 수천 마리씩 잡아내고 있다. 

세계적인 보호가치를 지니면서 왜 대량으로 솎아내는 대상이 된 걸까. 3년 동안 한시적인 유해동물로 지정됐다가 7월부터 다시 3년 동안 유해동물 지정이 연장된 제주노루를 대상으로 그 역설의 내막을 알아본다.
 
■ 부족한 먹이 과도한 경쟁으로 작아져

04646761_P_0.JPG» 제주노루. 고라니에 송곳니가 있다면 노루는 뿔을 가지고 있고 꼬리에 흰 반점이 두드러진다. 강재훈 기자
 
사슴과에 속하는 노루는 200만~300만년 전에 덩치가 작은 유럽노루와 시베리아노루로 종이 갈라졌다. 시베리아노루는 다시 지역별로 3가지 정도의 아종으로 나뉜다. 우리나라 노루는 톈산산맥, 몽골, 극러시아 노루와 함께 하나의 아종을 이룬다.
 
제주노루가 육지 노루와 겉모습이 다르다는 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박용수 국립생태원 생태평가연구실 박사는 “제주노루는 짤막하다는 느낌을 주고 다 자라도 육지 노루의 절반 크기에 불과해, 외부 형태로만 보면 유럽노루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한국환경생태학회지> 2월호에 실린 그가 주 저자인 논문을 보면, 제주노루의 머리뼈가 부위별로 의미 있게 작고 형태도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치아의 크기와 형태는 서식지의 먹이자원과 직결돼 종 분화의 중요한 지표인데, 제주노루의 이는 육지 노루와 구별되는 특징을 지녔다. 
 
논문은 “형태적 특징으로 볼 때 제주노루는 세계적으로 제주도에만 서식하는 고유 아종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호랑이 가운데 벵골호랑이와 아무르호랑이(시베리아호랑이, 한국호랑이)가 다른 아종이듯이 한반도 내륙의 노루와 제주의 노루는 다른 아종이라는 것이다.
 
박용수 박사는 “제주노루는 시베리아노루 3개 아종 가운데 머리뼈가 가장 작았는데, 이는 제주도라는 특수한 환경에 오랫동안 적응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먹이가 한정된 섬에서 개체수가 늘어나면 과도한 경쟁으로 크기가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
 
■ 멧돼지·족제비 등도 유전적으로 독특
 
NO1.jpg» 시베리아노루의 3개 집단 분포. 한반도 내륙과 몽골, 연해주의 노루가 비슷한 형질인 반면 제주노루는 많이 다르다. 이윤선 외<비엠시 유전학>

새로운 아종으로 구분되려면 형태뿐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달라야 한다. 국내에도 2000년대 이후 노루에 대한 분자계통분류학 연구가 시작돼 제주노루의 유전적 독창성을 보여주는 결과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윤선 ㈔한국야생동물 유전자원은행 박사 등 국제 연구진은 우랄산맥부터 제주까지 10개 지역 노루 표본에서 디엔에이를 추출해 집단유전학 측면에서 분석했다. 지난해 과학저널 <비엠시 유전학>에 실린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시베리아노루를 알타이산맥을 경계로 우랄산맥에 이르는 북서 집단과, 몽골과 러시아 연해주, 한반도 내륙을 포괄하는 남동 집단, 그리고 제주 집단 세 개로 나눴다.
 
제주노루를 별개의 집단으로 본 것은 그만큼 유전적으로 독특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 유전적 거리로 따진다면, 한반도 내륙의 노루는 제주노루보다 오히려 연해주나 몽골의 노루에 가까웠다. 제주에는 노루 말고도 멧돼지, 족제비, 등줄쥐 등이 유전적, 형태적으로 독특하게 진화했다.
 
연구자들은 2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소수의 대륙 노루가 육지로 연결된 제주로 이동했다 해수면이 상승하자 고립돼 독특하게 진화했을 것으로 보았다. 제주노루가 고립된 시점을 두고는 논란이 있다. 박용수 박사는 마지막 빙하기 때 제주가 육지와 이어졌지만 노루의 이동은 거의 없었다며, 제주와 내륙 노루의 분화 시기를 약 45만년 전 빙하기로 보았다.

04646754_P_0.JPG» 제주노루는 개체수가 많지만 시베리아노루 아종 가운데 유전다양성은 가장 낮다. 그만큼 유전적 보호가치가 높다는 뜻이다. 강재훈 기자
 
어쨌든 제주노루의 이런 고립은 중요한 결과를 빚었다. 시베리아노루 가운데 제주노루의 유전다양성이 가장 낮아진 것이다. 이윤선 박사는 “빙하기 때 소수의 내륙 노루가 제주에 들어와 선구자 집단을 이뤄 애초 유전다양성이 낮았는데, 이후 남획과 고립 영향으로 다양성이 더욱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며 “제주에 노루 개체수가 단기간에 급증했다고 다양성도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의 교신저자인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유전다양성이 낮으면 새로운 감염병이나 환경변화에 취약하기 때문에 노루 집단의 건강과 개체수 변화, 유전다양성 상태를 면밀히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노루의 유전다양성이 낮다고 해서 내륙 노루를 제주에 도입해 다양성을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윤선 박사는 "제주노루는 육지 노루와 이미 유전적으로 달라져 있고 앞으로도 달라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별도로 관리해야 한다"며 "같은 이유로 제주노루를 개체수가 많다고 육지로 이주시켜서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두 집단을 섞으면 이른바 '유전자 오염'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대부분 식용 처리해 연구와 연계 안돼

04646746_P_0.JPG» 제주노루는 한라산의 상징으로 사랑받지만 동시에 농업 피해와 교통사고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노루보호 교통 표지판. 강재훈 기자
 
제주노루는 남획으로 1970년대에 멸종위기에 몰렸다. 1987년 사냥이 금지되고 보호활동이 벌어지면서 개체수가 늘기 시작했다. 

박용수 박사는 “화석기록을 보면 제주에는 사람이 살기 전 불곰과 늑대가 있었다. 또 대륙사슴도 있었지만 고기 맛이 떨어지는 노루만 남고 다 사라졌다. 포식자와 경쟁자가 다 없어졌다.”라고 설명했다.
 
제주도는 노루 개체수가 2010년 2만여 마리로 늘어나고 농작물 피해 목소리가 높아지자, 2013년 7월부터 3년간 노루를 한시적 유해동물로 지정해 약 5천마리의 노루를 잡아냈다.
 
제주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은 현재 제주노루 개체수를 7600여 마리로, 먹이 양으로 추산한 적정 개체수를 6110마리로 추정했다. 제주도는 지난달부터 ‘과잉 노루’ 1천여 마리를 솎아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포획 위주의 관리 대책은 합리성이 떨어지고 제주노루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지적도 많다. 이영웅 제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노루의 적정 개체수를 산정하면서 산림의 순생산량을 근거로 했는데 정작 노루의 먹이터인 방대한 초지를 빼 적정 개체수를 너무 적게 잡았다”며 “노루 생태계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줄 우려가 있는 포획 위주 정책 대신 농민에게 실질적인 피해보상을 하고 피해를 막을 시설 개선 등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YH2013071304320005600_P2.jpg» 지난 7월 제주노루가 다시 3년 동안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되면서 합법적인 포획이 가능해졌다. 사진은 2013년 처음 유해동물로 지정돼 포획되던 모습이다. 연합뉴스

포획 뒤 처리도 문제로 지적됐다. 매매만 금지할 뿐 자가소비를 허용해 잡은 노루를 대부분 식용으로 처리하고 일부는 건강원에 맡겨 약제로 만들어 소비한다. 이 사무국장은 “제주 고유의 자연유산이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은 유해동물로 지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용수 박사는 “조절이 불가피하다면 과학적·합리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5000마리를 잡았다면 연구자료가 풍부하게 나왔어야 하는데 고기 말고 나온 게 뭐가 있냐”며 “개체수 조절이 연구와 연계돼야 나중에 제주노루를 관리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이항 서울대 교수는 “유전다양성이 낮은 제주노루를 과도하게 조절하다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다”며 “고라니도 마찬가지지만 세계적인 희귀 유전자원은 개체수가 많더라도 조절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유해동물 지정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제주의 유전자원 가치는 국가적 차원에서 검토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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