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中華)의 암흑을 뚫고 일어난 분노
[특별기고] 백포 서일 순국 100주기 특집① - 김동환
- 김동환
- 입력 2021.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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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인물은 역사연구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또한 특정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인물에 대한 연구만큼 우선하는 것도 없다. 어떠한 인물에 대한 선택과 해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가치관과도 무관치 않다. 백포(白圃) 서일(徐一, 1881-1921)은 일제강점기를 포효한 몇 안 되는 인물에 꼽힌다. 그럼에도 가장 저평가 된 인물 중의 하나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치 수준과 맞물린다.
서일은 일제강점기 종교·철학·교육·무장투쟁 등 여러 방면에서 실로 기적에 가까운 업적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손에 꼽힐 정도다. 무장독립투쟁분야 연구에 있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와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언급된 것이 주종을 이룬다. 그나마도 김좌진이나 홍범도·이범석 등의 명성에 덮여, 그들을 통솔했던 서일의 이름은 너무도 희미하다.
올 해는 백포 서일이 순국한 지 꼭 100주기가 되는 해다. 인간 행동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그 개인의 가치관이다. 정신적 측면을 간과한 행동적 방면에서만의 접근은 본질을 외면한 채 현상구명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일이 수많은 독립군들을 통솔하던 용기와 지혜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수행·연구 속에서도 무장투쟁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수전병행(修戰竝行)의 삶의 토대는 무엇이었는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백포 서일의 삶의 의미를 3회에 걸쳐 매주 월요일 연재하고자 한다. /필자 주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2.26~1921.8.28) 북로군정서 총재. 변변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사진출처 - 대종교]](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6/202373_83769_1059.jpg)
1894년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을 계기로 개화정책론 내지 동도(東道)를 본(本)으로 한 서기수용론(西器受用論)으로서의 동도서기론은 현실적 의미를 잃게 된다. 갑오개혁은 이미 동도를 ‘본’으로 한 서기수용의 범주를 넘어섰으며, 청일전쟁에서 일찍부터 서구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승리하였다는 현실은 서도의 일부 혹은 전부까지 수용하자는 문명개화론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는 20세기에 들어서도 동양과 서양을 도(道, 도덕·정신)와 기(器, 과학·기술)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사고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근래의 아시아적 가치론이란 것도 동양의 정신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도서기론의 범위를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런 점에서 동도서기론은 좁게는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를 지배한 개화의 한 방법론이자 전략이지만, 넓게는 서양 문명 대두 이후 길게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일각에 존재하는 문명 독법의 하나로 이해되어 왔다.
그 동안 동도서기론에 대한 주요 연구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그러나 서구중심주의의 극복에 대한 측면에서만 조명되었을 뿐, 동도의 탈유교적 정체성 부재에 대한 역사적 재구에 대해서는 극히 소홀했다. 당시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우리의 동도서기를 그대로 등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의 중체·화혼정신에 숨어 있는 그들의 고유한 정체성과는 달리, 우리가 내세운 동도는 우리의 정체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당시 우리의 동도는 유교라는 소중화적 가치의 연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탈유교적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자각은, 20세기 일어난 단군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단군에 대한 인식은 1896년에 설립된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의 역할 뿐만 아니라, 1906년에 결성된 서우학회(후일 서북학회로 개편)의 활동과 더불어 『대한매일신보』라는 매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1905년 정교와 최경환이 편찬한 『대동역사』에서는 단군조선을 서술함에 있어, 우리 민족이 단군시대부터 문물제도와 문화를 갖춘 민족이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유근이 원영의와 함께 편찬하고 장지연이 교열한 『신정동국역사』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의 의미를 설명한 후, 「단군조선기」를 맨 앞에 싣고 있음이 주목된다. 여기서는 개국기원을 시작으로 단군 탄생으로부터 도읍과 국호를 정하는 과정을 서술했을 뿐만 아니라, 문물제도를 비로소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마니산 제천단과 삼랑성(三郞城)의 연유를 서술함과 아울러, 태자 부루의 도산회의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며, 구월산 당장경으로 도읍을 옮긴 과정까지도 말하고 있다. 더욱이 단군의 부인인 비서갑뿐만 아니라, 구월산 삼성사와 평양의 단군릉․숭령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1909년 대종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1863-1916).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국하기 며칠 전 사리원역 인근 사진관에서. [사진출처 - 대종교]](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6/202373_83770_1341.jpg)
이러한 단군에 대한 열기는 1909년 대종교가 성립되면서 최고조를 맞게 된다. 그 중심에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나철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을 걷던 인물이었으나 우국의 뜻을 품고 벼슬길을 포기했다. 나철이 벼슬길을 포기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내우외란이 그치지 않고 국운이 쇠망해가던 시기였다. 동학혁명(1984년)·청일전쟁(1984년)·을미사변(1985년) 등 실로 커다란 사건들이 연속되었다.
당시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고위 지도층의 행태는, 관료적 병폐의 고질이었던 가렴주구나 일삼고, 친청파·친일파·친러파 등등으로 갈리어 국가와 민족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철의 벼슬에 대한 염증과 우국적 울분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철 우국운동의 첫 행보는 민간외교적 교섭을 통한 동양평화론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미 국권이 기울어진 뒤였기에 개인의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간외교적 노력에 실패한 나철은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은 매국대신들을 처단하기 위해 오기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적극적 주살(誅殺) 계획을 모의했다. 그리고 모금을 통하여 권총을 구입하고 계획을 실행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거사는 당시 고민하는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감명과 더불어 나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교(鄭喬, 1856-1926)가 평한 다음의 기록이 한 예다.
“(나철은) 세계의 대세를 두루 살펴보면서 나라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일본 도쿄에 가서, 정부와 각 성(省)에 편지를 보냈다. 또 일본 천황에게도 편지를 올렸다. 논한 바가 근엄하고 명쾌하여, 각 신문에서 베껴 보도했다. 세계에서 비로소 우리 한국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조정의 신하들도 모두 감탄하면서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의로운 선비 150명을 모아 박제순 등을 죽이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 사람들도 통쾌해 하며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대한계년사』)
나철은 이 사건으로 인해 내란죄의 죄목을 쓰고 유형(流刑) 10년의 선고를 받지만 고종의 배려로 유형살이 몇 개월 만에 사면되었다.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나철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1908년 11월(음력) 네 번째 도일(渡日)을 시도하여 국운을 돌리려는 노력을 하지마는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나철은 이 네 번째 도일에서 대종교 중흥과 관련된 운명적인 만남을 경험했다. 일본 동경에서 신교(神敎, 전래의 단군신앙) 수행의 우두머리였던 백봉신사(白峯神師)의 제자인 두일백(杜一白) 노인을 만났던 것이다. 두일백은 나철에게 단군신앙 관련 서책들을 전해주며, 미래의 사명이 이 정신의 중흥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다. 나철은 민족의 절망적 현실 앞에서 새로운 선택을 모색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나철은 1908년 12월 9일(음력) 밤, 다시 찾아온 두일백 노인으로부터 단군교 의식을 통해 기꺼이 영계(靈戒)를 받고 귀국 길에 올랐다. 나철이 1905년 12월 30일(음력) 단군교에 입교한 지 꼭 3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새긴 것이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이다. 나철은 국망(國亡, 일제의 강점)이라는 절망감 속에서 도존(道存, 단군사상)으로써 미래의 희망을 찾고, 그 구체적 방법으로 단군신앙의 중광(重光, 다시 일으킴)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철 개인으로 본다면 과거의 족쇄였던 유교적 자아의 껍질을 벗고 민족적 자아로 변모하는 것이며, 민족적인 면에서는 단절되었던 민족정체성의 거대한 줄기를 재건하는 역사(役事)이기도 했다.
마침내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오기호·최전·유근·정훈모·이기·김인식·김윤식 등,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고 단군신앙을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나철을 비롯한 그 중심인물들은 과거의 몰민족적 자아를 탈각하는 종교적 통과의례의 하나로, 과거의 이름을 외자로 모두 개명(羅寅永은 羅喆, 崔東植은 崔顓, 姜錫華는 姜虞, 金敎獻은 金獻, 申圭植은 申檉, 趙琬九는 趙亮, 曺成煥은 曺煜으로 바꿈)했다.
![중국 화룡시 청파호 인근에 백두산을 향해 안장된 대종교 3종사 묘역. 왼쪽 묘부터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 서일, 대종교 중광자 홍암 나철, 대종교 2대 도사교 무원 김교헌. [자료사진 - 통일뉴스]](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6/202373_83771_1615.jpg)
대종교의 중광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북돋워 준 사건으로, 우리 민족사의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역사 속에 침잠되어 오던 단군신앙의 부활을 통해, 당시 주권을 잃어버린 암울한 민족사회 전반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한 민족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우국지사들과 동포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국망(國亡)이라는 수모를 당하게 된 역사적 원인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함께 도존(道存)이라는 정신적 일체감을 통한 치유방안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정체성 재건의 당위적 방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나철이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重光)을 선택함도 눈길을 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자 단군신앙의 원형인 전래 신교(神敎)의 계승의식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동학의 최제우나 증산교의 강일순처럼 창교주로 화려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군교에 입교한 일개 교인으로써 단군신앙의 연결자로 스스로를 낮추었다.
이것은 몽고 침입 이후 단절되었던 배달민족 고유신앙에 대한 부활로써, 나철이 민족사적 명분 앞에 개인의 욕심을 기꺼이 양보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종교라는 중광의 사건이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족사의 전반에 우국적 반향을 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대종교 무장항일투쟁의 기반 역시 이러한 중광 정신과 맞닿는다. 그 중심을 이룬 인물이 서일이다. 그는 만주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다. 만주 왕청현(汪淸縣)에서 조직된 중광단은 만주 무장투쟁의 효시로 꼽히는 항일단체였다. 당시 서일은 31세의 나이로 단장에 추대된다. 그 중심인물들은 서일을 비롯한 현천묵·백순·박찬익·계화·김병덕·채오·양현·서상용 등,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백포 서일 북로군정서 총재가 이끈 청산리 전투의 승전을 기념해 중국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2001년 건립된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자료사진 - 통일뉴스]](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6/202373_83772_2718.jpg)
중광단의 거점이었던 왕청현은 1910년 국내 대종교에서 시교사(施敎師) 박찬익(朴贊翊)을 파견하여 포교의 거점을 잡은 곳이다. 이 시기에 이미 만주로 이주해 살던 한인(韓人)들의 수가 20만 명이 넘었고, 이 중 많은 인구가 이미 대종교를 직·간접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단체의 명칭을 중광단이라 칭한 것도 남다르다. 우리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부활을 의미하는 대종교의 중광에서 따온 명칭이다. 중광단이 독립운동단체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으로 뭉쳐진 종교적 결사임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후일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이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 그리고 신민부(新民府)로 이어 가면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서일의 무장투쟁 역시 중광의 정신을 떼어 놓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과거 중화의 그늘을 뚫고 일어난 분노의 외침인 동시에, 일제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저항의 구호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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