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사람과 말

 

[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사람과 말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36-사람과 말’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정진명 시인. 사진=정진명/굿모닝충청

[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앞서, 사람을 살피면서 말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철학을 말할 때는 반드시 ‘말’을 좀 더 깊숙이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철학의 2대 조류가 현상학과 언어철학임을 보면 말을 먼저 자세히 보는 것이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말’이 어떤 뿌리를 지녔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문제는 우리말에서 ‘말’을 가리키는 말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언뜻 뿌리가 연결되지 않는 말들을 살펴보아도 이렇습니다.

“말, 묻다, 떠들다, 주끼다(경상도 사투리), 니르다, 말씀, 가로다, 사뢰다, 넋두리, 묻그리(占), 공수, 푸념, 여쭙다.”

도대체 이 말들에서 어떤 공통점이 보이고, 어떻게 뿌리가 서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연재를 쭉 읽어오신 분이라면 이런 까닭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말이 용광로처럼 뒤섞여 우리말이 만들어질 무렵에 우리 조상들의 삶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변화와 변동이 있었고,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겨레가 한반도로 밀려들어 각자 자기네 말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용돌이가 잠잠해지고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대충 뜻이 통하는 엇비슷한 말을 쓰게 된 시대는 신라 시대 중반을 넘어설 무렵이고, 한 말로 정리되어 두루 쓰이게 된 시대는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시작된 이후입니다. 태조 왕건이 개경에 고려를 세움으로써 그 전의 많은 말들이 고려 수도인 개경 언어로 재빨리 재편되어 일정한 균형과 통일을 이룹니다.

그렇다고 고려 시대에 지금과 같은 통일된 언어가 모든 백성에게 통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최근세까지도 마치 섬처럼 홀로 남아 자신들이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온 성균관에서 허드렛일을 맡은 사람들은 반민(泮民)이라 하고, 이들이 사는 마을을 반촌(泮村)이라고 했는데, 그곳은 마치 치외법권처럼 그들 스스로 자치조직으로 다스리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청에서도 범죄자가 생기면 직접 잡아들이지 않고 그곳 우두머리에게 징계하도록 처리할 정도였습니다.

쇠백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우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섬처럼 고립되어 소를 잡는 천한 일로 제 겨레의 정체성을 삼아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천대를 감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완전히 종적을 감춘 것은 일제 강점기의 뒷일입니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이들은 형평사(衡平社)라는 특수조직을 만들어서 강력한 단결력을 보였고, 신분 해방과 독립투쟁까지 나섰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해방 후에 새로운 사회변화를 맞자, 사회의 천대를 피해 스스로 소 잡는 일을 그만두고 모두 다른 일로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지금 정육점을 하는 사람 중에는 형평사와 관계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 뒤로는 이들의 행적을 찾아볼 길 없이 묘연해졌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보통 백성으로 신분세탁을 한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아주 절실한 문제겠습니다만, 어원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떠받치던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과거 한 단면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언어의 한 갈래를 잃은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아직도 한 가지로 가지런히 정리되지 않은 이런 다양한 말들이 우리 생활 속에 남아서 불쑥불쑥 쓰이곤 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의 뿌리를 찾으려고 하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갈피를 잡아가야 할지 그것부터가 난감해지곤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을 하나씩 걷어내며 그럴듯한 정답을 찾아가는 것이 학문이고, 어원학입니다. 가지런히 정리될지 모르지만, 이제부터 하나씩 혼란을 걷어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맑은 물 밑에 가지런히 놓인 조약돌처럼 우리말의 뿌리가 드러날지도 모르지요.

우선,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이 또렷합니다. 활용할 때 ‘하다’가 붙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의 경우에는 ‘사뢰다, 주끼다, 니르다, 가르다’라고 해서 모두 움직씨의 꼴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말’만큼은 ‘하다’와 결합하여 ‘말하다’라고 움직씨를 이룹니다. 이것은 마치 ‘신’에 서술형 어미 ‘다’다 붙어서 ‘신다’로 쓰이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이런 현상은 ‘말’이 원래 단독형으로 쓰였음을 뜻하는 것이고, 생각보다 더 굉장히 오래 묵은 말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말’은 그 전의 어떤 모습(祖語)에서 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리말에서는 받침이 잘 변합니다. ‘빛’을 뜻하는 말에서도 시대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빛, 빗, 빋, 빌, 별, 벌, 불, 발’과 같은 방식으로 많이 변합니다. 물론 홀소리도 변합니다. ‘붓, 벗, 밧, 볏’하는 식으로 변하죠. 하지만 첫소리는 잘 안 변합니다. 물론 변하는 수가 있기는 합니다만, 말의 변화를 살펴보면 그래도 첫소리는 홀소리나 받침에 비하면 제 본래 모습을 잘 간직하려는 성질이 강합니다.

그러면 ‘말’의 받침을 조금 변형시켜보겠습니다.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맏, 맛, 맡, 맣’처럼 변할 수 있겠죠. 그러면 대번에 비슷한 낱말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묻다’가 있죠. ‘묻그리(占)’도 있고, ‘무당’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묻’입니다. 이제 ‘말’이 어떤 성질을 띤 것인지 또렷이 드러납니다. ‘묻’에서 ‘말’로 꼴을 바꾼 것은 아마도 말의 노릇이 달라지면서 그랬을 것입니다. 캐묻는 형식을 ‘묻’으로, 흔히 하는 말의 형식을 ‘말’로 나눈 것으로 볼 수 있겠죠. 혀로 보는 ‘맛’도, 코로 보는 ‘맡’도  여기서 갈라져 따로 나갔을 것으로 봅니다. 모두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과 또 다른 갈래가 ‘사뢰다’입니다. 옛 모습은 ‘ᄉᆞᆲ다’인데, 터키어로 ‘말하다’가 ‘salva’이고, 드라비다어로 ‘말하다’가 ‘colv’여서 아주 비슷합니다. 이쪽에서 온 말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갈라져 나간 말들이 많습니다. ‘넋두리, 너스레, 넉살, 말씀’ 같은 말이 그런 것입니다.

‘넋두리’는 ‘넋’과 ‘두리’가 엮인 말입니다. ‘넋(魄)’은 ‘혼(魂)’과 짝을 이루어 사람의 정신을 이루다가,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넋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여깁니다.(『고려침경 영추』) 그런데 이 ‘넋’이 원래는 말을 뜻하는 말이었고, 사람의 영혼을 뜻하는 말로도 함께 쓰인 게 아닌가 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존재이니 말과 사람을 동일시한 듯합니다. 하지만 넋이 ‘두리’한다고 하면 굳이 넋을 말의 뜻으로 풀이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리’는 말을 뜻하는 말입니다. ‘떠들다, 투덜투덜’ 같은 말을 보면 그 희미한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이해할 때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영(靈)’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말 중에서 ‘얼’이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영이 혼백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혼과 백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사람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따라붙는 것입니다. 혼은 하늘에서 오고 백은 땅에서 오는 거죠. 이 둘은 우리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해서 우리가 ‘필름이 끊긴다’고 표현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면 혼이 나가고 넋만 남습니다. 우리가 잠들면 혼이 나가죠. 잠꼬대는 넋이 하는 두리(‘넋두리’)입니다. 이 넋을 밀어내고 혼이 들어와서 정상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이 둘이 몸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고 땅으로 흩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들락날락하는 혼백과는 달리 영은 개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사물에 들어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없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러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존재가 내 안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주의 본체이고, 내 안에 깃든 우주의 얼입니다. 이것을 제 안에서 읽고, 부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고,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만 잘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생과 사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죠. 모든 종교에서는 이것을 보려고 기도하고 수련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삶을 마치 헌신짝처럼 버릴 줄 알죠. 성인은 삶을 ‘추구(芻狗:제사 때 쓰고 내다 버리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여긴다고 한 노자의 말도 이런 것입니다.

‘너스레’는 ‘너’와 ‘스레’의 짜임인데, ‘스레’는 ‘삷’의 자취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ᄉᆞᆯ’에 접미사 ‘ᄋᆡ’가 붙은 것이죠. ‘슬+에’의 짜임인데, ‘에’는 ‘멍에’ 같은 말에서 볼 수 있는 접미사입니다. ‘너’는 ‘니르다(謂)’의 어간 ‘닐, 닏’에서 받침이 떨어진 형태죠. 이른바 리을 탈락!

‘말씀’의 ‘ᄉᆞᆷ’도 ‘삷’의 자취입니다. 몽골어로 무당을 뜻하는 ‘saman’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무당을 전라도에서는 ‘심방’이라고 하는데 이 ‘심’도 ‘ᄉᆞᆷ’의 자취입니다. ‘삼, 삳, 살’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형태죠. ‘넉살’도 너스레와 같은 말로 보면 좋겠는데, 좀 께름칙한 면이 있습니다. ‘넉넉하다’가 연상되기 때문이죠. 말을 많이 한다는 뜻으로 보면 이렇게 보는 게 편합니다.

‘수선 떤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선’도 ‘숫+언’의 짜임인데, 이 ‘숫’의 옛 표기가 ‘수ᇫ’이어서, ‘ᄉᆞᆷ’과 같은 뿌리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무당이 신의 뜻을 전하는 말을 ‘공수’라고 하는데, ‘공수’는 ‘곰+수ᇫ’의 짜임입니다. 쓸데없이 말수가 많은 것을 ‘수다’라고 하고, ‘수다스럽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제 눈에는 ‘수ᇫᄋᆞ>수다’로 보입니다.

‘이르다’의 옛말은 ‘니르다’입니다. ‘닐+으다’의 짜임인데, ‘닐’에서 니은이 떨어진 것이 ‘일’이죠. 니은이 떨어진 형태는 ‘여쭙다’를 닮았습니다. ‘엿+잡(존칭)+다’인데, ‘엿, 엳’은 터키어 ‘yât(언급)’와 똑같습니다. ‘노래(歌)’도 여기서 온 말로 보입니다. 노래는 ‘놀다’의 어간에 어미 ‘다’가 붙어서 된 말로도 볼 수 있는데, 말뜻을 살펴보면 어느 쪽으로 볼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양쪽으로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가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자 가라사대’할 때의 그 말입니다. 몽골어로 말은 ‘kele’여서 ‘ᄀᆞᆯ다>가라다>가로다’는 여기서 온 말임을 쉬이 알 수 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에 ‘주끼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떠들어제끼다’ 같은 말에서도 자취를 볼 수 있죠. 또 사람의 입을 ‘주둥이’라고 하는데, 이 ‘줃’이 ‘죽’과 닮았습니다. 때리는 동작을 나타내는 말 중에 ‘죽통을 날리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죽’도 같은 말로 보입니다. 물론 ‘죽통’은 ‘아구통’과 같은 말이어서 입(주둥이=줃+웅이)을 뜻하는 말이지만, 말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갈래의 말로 ‘주접’이 있습니다. ‘줒+업’의 짜임인데, ‘줒’이 바로 말을 뜻하죠. ‘업’은 ‘대접’ 같은 말에도 보이는 접미사입니다. ‘주절주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상을 보면 우리가 쓰는 말을 뜻하는 말은 크게 5갈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말’ 계열 : 말, 묻다, 묻그리(占), 말씀. 
‘살’ 계열 : 사뢰다, 넉살, 너스레, 넋두리, 공수, 말씀. 
‘갈’ 계열 : 가로다, 가로되, 가라사대.
‘닐’ 계열 : 이르다. 니르다, 노래.
‘줒’ 계열 : 주끼다, 주접, 주절주절, 주둥이.

‘불다’ 계열도 있는데, 이것은 바람을 내보낸다는 뜻이 있어서 말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보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 말이 ‘푸념’입니다. 푸념은 무당이 신의 뜻을 단골에게 말해주며 꾸짖는 것을 말합니다. 굿하는 것을 ‘푸닥거리’라고 하는데, ‘푸닥’도 같은 뜻으로 보입니다. 무당이 공수를 주는 것이죠. 푸념은 남이 듣거나 말거나 계속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신이 사람에게 주는 말이 그렇죠. 듣는 사람의 처지를 감안하지 않습니다. ‘푼’과 ‘푿’은 한눈에 보기에도 같은 말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씨부리다’도 이 계열의 말입니다.

이상의 말을 살펴보면 우리 말은 수많은 겨레가 뒤섞여서 만들어진 말이기에 그 뿌리가 각기 다른 곳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계열의 말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웃어른에게 말하는 존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 여쭙다, 사뢰다, 가로다, 푸념’이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처음 우리말은 신에게 뜻을 묻는 일에서 비롯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떠받드는 마음씨가 우리말에 진한 자취를 남겼습니다. 어쩌면 말은 사람이 아니라 신과 대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긴 이런 현상은 꼭 말만의 일은 아닙니다. 춤도, 노래도, 글씨도 모두 신을 떠받들고 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행위일 것입니다.(『우리 시 이야기』) 그것이 일상화로 격을 점차 낮춰온 것이 사람의 삶에 드리운 문명의 자취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신 없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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