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구 해산을 토의 결정한 요영구 회의 장소
▲ 1935년 3월 정세에 따라 유격대를 대부대로 선회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계획아래 유격구를 해산을 할 것을 요영구 회의에서 토의 결정하였다.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맨 마지막까지 존재하였다가 해산을 하고 내두산 유격근거지로 이전하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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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대사하치기전투 전적지 답사를 끝내고 다음 여정을 위해 출발하였다. 이미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대사하치기전투, 로금창전투 전적지답사를 하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대사하를 건너는 다리 공사로 인해 차가 다닐 수가 없어서 택시를 되돌려 보냈다. 택시를 되돌려 보냈기에 로금창전투 전적지 답사는 포기하였다.
우리는 차편이 없기에 대중교통수단을 타기 위해 대사하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왔다. 택시를 타고 갈 때 느꼈던 것보다 거리가 의외로 더 가깝다. 우리 일행을 걸어오면서 대사하 전투, 대사하치기 전투 그리고 로금창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필자는 이송덕 선생에게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고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투쟁을 한 조상들이 한 없이 존경스럽다고 말하였다. 아니 존경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그런 조건과 상황 속에서 어떻게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과 만주괴뢰 위만군 그리고 조선인들로 조직된 간도특설대나 신선대들에 맞서 싸웠는지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침략자인 외세에 맞서 싸웠던 이와 같은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항일투쟁사를 남쪽의 후손들에게는 아예 가르치지를 않았다. 아니 가르치는 걸 떠나서 그 시기 항일무장투쟁사에 대해 스스로 배우고 연구하는 것조차 범죄시 하면서 민족구성원들을 법정에 세우는 민족사에 있어 천추에 용납 못 할 반역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남쪽의 이러한 반민족적(反民族的)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내릴 것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민족사 최대 수치스러운 시대였다고 평가를 내릴 것이다. 또 이에 앞장선 자들은 그가 비록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민족의 역사에서 반드시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그의 가문과 후손들은 영원히 민족앞에서 머리를 들고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일행은 약 20여 분 걸어서 대사하(현 영경)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이송덕 선생이 또 신명이 나게 대사하전투에 대해 해설을 하였다. 특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언덕위로 나 있는 소사하방향의 소사하고개를 가리키면서 더욱더 신명이 나서 해설을 한다. 그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더 듣고 싶은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단 명월구까지 가기로 하고 명월구행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15분 정도 서서 기다리는데 건너편 소사하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한 대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버스 창문이 열리더니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한다. 우리 일행을 보고 그 차를 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가고자 하는 명월구 방향과는 반대방향이라서 타지 않았다. 한참을 타라는 손짓을 더 하다가 우리가 타지 않으니 문을 닫고 버스는 소사하 방향으로 갔다. 그런데 한 5분 정도 되니 그 버스가 우리 앞에 와서 선다. 필자는 그런 풍경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신기하기만 하다.
그 버스문이 열리고 버스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면서 친절하게 명월구로 가는데 어서 타라고 한다. 이송덕 선생은 아마도 아까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라고 한 것은 우리가 명월구로 간다는 것을 알고 그 버스 역시 곧바로 돌아서 명월구로 가니 타라고 한 것 같았다고 말 한다. 아무튼 버스 승객들에 대한 배려와 친절함이 얼마나 고맙고 마음이 뿌듯했는지 모른다. 필자가 비록 한번밖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연변조선족자치주 사람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졌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도 선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대하는 자세 역시 친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네 60년대의 깨끗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사람들의 깨끗한 인간미를 잊을 수가 없다.
필자는 생면부지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가자고 하고 머물러본 기억은 1965년 8월 초에 전라북도 임실군 회침이라는 동네에서 경험을 해본 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소사하 무주촌 김명규씨댁에서 50년 만에 처음 이었다. 솔직히 필자는 그러한 경험을 두고 상당히 놀랐었다. 그리고 마음이 얼마나 푸근하고 좋았는지 모른다. 연변조선족자치주만 해도 아직까지 우리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품성과 풍습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면서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모른다.
남쪽에서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밤 묵어가자고 하면 두 말 없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민족은 지나가는 나그네가 묵어가자고 함에도 거절을 한다면 그 집은 동네에서 크게 비판을 받았었다. 어찌 사람이 하룻밤 묵어가자는 데도 거절 할 수가 있는가. 이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크게 비판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우리 고향 동네에서는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겨레는 모든 사람을 한 없이 사랑하고 무한정 믿었던 불신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깨끗한 품성과 풍습을 지니고 살아왔다. 비록 50여 년이라는 짧은 세월이 흘렀지만 현재 남쪽에 살아가고 있는 민족구성원들의 인간성과 풍습 그리고 품성을 보노라면 억장이 무너진다. 50여년 만에 선계(仙界)에 살던 선남선녀(仙南仙女)들이 아수라에 살고 있는 악귀(惡鬼)들로 변하고 말았다. 참으로 비통함을 참을 수 없는 남쪽의 현실이다. 필자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서 하루라도 이른 시기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겨레 하나가 되어 그렇게도 아름답고 깨끗하기만 하던 겨레의 얼과 넋을 되찾고 후세에 오게 될 후손들은 이 땅에서 사람을 한 없이 사랑하기만 하는 품성으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야기가 다른 편으로 빠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필자가 역사를 연구하고, 우리 조상들이 벌인 항일무장투쟁사를 연구하여 연재를 하는 것도 모두 남과 북으로 갈라져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민족의 아픔을 미약하나마 조금이라도 덜기 위함이다. 또 이른 시기 하나가 되어 겨레의 얼과 넋을 되찾아 후세들은 다시는 민족분단의 아픔을 겪지 않고 우리민족 고유의 아름답고 깨끗한 품성을 되찾아주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된 《우리세상》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이다.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그 여성 안내원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미소를 보낸다. 선녀(仙女)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바로 그 안내원이 선녀이다.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따뜻하고 푸근하게 해주는 이 그가 신선(神仙)이요 선녀인 것이다. 과거 우리민족 모두가 그렇게 신선이었고 선녀들이었다. 그 여성 안내원 덕에 버스를 타고 명월구로 가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푸근했는지 모른다.
버스를 타고 얼마동안 가니 연길에서 안도현으로 답사를 갈 때 지나갔던 만보 즉 대전자를 지나간다. 지난 항일연재 제8회에서는 대전자를 다룰 때 대전자전투에 대해서는 몇 줄로 간단히 하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필자가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있는 전적지들과 그 전적지에서 벌인 항일전투에 대해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대전자전투부터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대전자전투는 항일투사 최현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들이 1934년 6월초 제1차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에 벌인 제2차 전투를 말한다. 대전자전투는 처창즈 유격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항일투사 최현이 벌인 전투이다.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동만일대 여러 곳에 있었던 유격근거지를 해산하고 안도현(현 화룡현) 처창즈로 이전을 하기로 한 방침에 따라 건설되었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기로 한다.
또 대전자전투는 항일투사 최현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반일구국군과 합동작전을 벌인 최초의 전투이기도 하다. 최현 항일 투사는 대전자전투에 대한 회상기에서 당시 구국군과 합동작전을 벌인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친히 대원들을 인솔하고 구국군부대에 찾아가시여 그들을 반일전선에로 인입하여 련합작전을 훌륭히 실현하시였다. 동녕현성전투에서 유격대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구국군부대들에게 정치, 군사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영향에 의하여 우리 독립련대도 구국군인입공작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부대는 대전자에 있는 적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구국군부대와 련합작전을 하게 되었다.”
라고 하여
1934년 6월 초에서 7월 사이에 벌인 대전자전투는 김일성 주석이 1930년 카륜회의 주요결정사항인 《반일통일전선》의 기치아래 반일사상과 감정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가 누구이던 함께 손을 잡고 반일 · 항일투쟁 길에 나서야 한다는 전략을 실천한 전투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대전자전투는 전투를 했던 시간도 매우 길었다. 그만큼 대전자전투를 승리로 결속하기까지 매우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그럼 아래에서 최현 항일투사가 쓴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중에서 최 현 《안도현 대전자전투》 중에서 전투상황에 대해서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참고로 대전자전투를 다룬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나 남쪽의 자료는 없다. 따라서 대전자전투에 대해서는 북측자료만 인용하기로 한다.
❝ 안도현 북부 산지대의 중심지인 대전자에 당시 8백여호의 중국인 주민들이 거주하고있었는데 안도현성에 본거를 둔 위만군 600여명이 이곳을 강점하고있었다. 대전자는 고동하를 중심으로 동서로 갈라져있었다. 거리의 중심은 서쪽이였고 거기에는 적들의 병영과 포대가 있었다.
아군지휘부에서는 수리날전으로 대전자를 해방하고 그곳에 주둔할 계획이였다. 이 전투에는 조선인민혁명군 150여명과 구국군 800여명이 동원되였다.
우리는 대전자의 북쪽 약 30리지점에 있는 이합호에서 출발하여 대전자에 접근했다.
1934년 6월초순 어느날 밤 2시경 아군은 드디여 적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산굽이를 돌아 동쪽시내에 돌입한 아군은 불의에 적들에게 맹렬한 사격을 하였다.
원쑤들의 탄압하에 신음하던 암흑의 거리는 깊은 잠에서 깼다. 총성은 거리를 뒤흔들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적들은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적들은 10여명의 사상자를 내자 동쪽시내를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서쪽시내에로 도주한 적들은 성벽과 포대에 의거하여 완강한 저항을 시도했다. 적아간에는 치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는사이에 날이 훤히 밝았다.
우리가 점령한 동쪽시내에는 의지하여 싸울만한 진지가 없을뿐만아니라 전투가 낮까지 계속되면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여 아군지휘부에서는 동쪽시내에서 일단 부대를 철수하였다.
첫날 전투에서 화룡현유격대의 녀대원 장정숙동무가 전사했다. 장정숙동무는 나어린 처녀대원이였다.
그는 돌격명령이 내리자 다른 대원들과 함께 대렬의 앞장에서 적들에게 육박하면서 명중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던중 그는 적탄에 맞았다. 순간 몸을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진 그는 온몸의 힘을 모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나 원쑤들을 향해 계속 사격했다.
적을 소탕한 그는 심한 출혈로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동지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마지막순간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과 같이 혁명대렬에서 끝까지 싸우지 못하는것이 분합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혁명이 승리하여 동무들이 광복된 조국땅으로 돌아가리라는것을 굳게 믿습니다. 모두 잘 싸워주세요.》 그리고 그는 《조선독립 만세!》, 《조선혁명 만세!》를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전우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원쑤에 대한 불타는 증오로 백배천배 복수할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다음날 밤 아군부대는 다시 행동을 개시하였다. 우리는 동북쪽으로부터 적의 본거지인 서쪽시내에 강력한 타격을 주어 그를 점령한 다음 동쪽시내까지 장악할 계획이였다. 인민혁명군부대는 서쪽시내의 동쪽병영과 포대를 점령하고 구국군은 서쪽병영과 포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다.
아군은 대전자시내 동북쪽 약 3km지점에서 은밀히 강을 건너 서쪽시내 가까이에 있는 고려성에 도착했다. 고려성에서 대전자시내에 접근한 우리 인민혁명군부대는 성밑으로 하여 동쪽에 있는 적병영가까이에 갔다. 부대의 돌격에 앞서 작탄수들이 먼저 적병영에 작탄을 던졌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적병영 한모퉁이가 공중에 날아올랐다.
전체 대원들이 적들을 향하여 맹렬한 집중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함성을 올리며 적진에 돌입하였다. 당황한 적들은 지하포대에 들어가 대항했다. 그러나 놈들은 아군의 위력앞에 견딜수 없음을 타산하고 지하포대에서 빠져나와 동쪽시내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놈들은 두손을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하여 인민혁명군부대는 동쪽병영과 포대를 완전히 점령했다. 일부 병력은 강을 넘어가는 적을 추격하였다. 적들은 물에 들어가 허우적거리며 연거퍼 쓰러졌다. 강물로는 원쑤들의 시체가 너저분히 떠내려갔다. 이때에 구국군들은 아직 서쪽병영을 점령하지 못하고있었으므로 인민혁명군의 일부는 그들을 지원했다.
인민혁명군의 지원에 구국군부대는 새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아군부대는 서쪽시내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원쑤들의 병영에서는 그때까지 연기가 무럭무럭 오르고있었다. 이날 전투에서 적들은 80여명이 살상되였다. 그런데 패주한 적들이 몰켜든 동쪽시내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며 총소리가 간단없이 났다.
동쪽시내를 빨리 해방시켜야만 하였다. 아군은 대렬을 정돈한후 돌격대를 조직하여 밤 10시에 동쪽시내를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대전자는 완전히 해방되였다.
우리 정치공작원들은 대전자시내 인민들에게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는 일본놈들이라는것과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이 이와 같이 가난하고 무권리한것도 일본놈들때문이요, 우리를 리간시키려는것도 그놈들이라는것을 해설하면서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에 궐기할것을 호소했다.
자유를 찾은 거리는 활기를 띠였고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인민들은 모든 성의를 다하여 우리를 원조했다.
대전자의 방어를 위하여 아군은 대전자남쪽 대사하방향에 독립련대 2중대와 구국군부대 100여명을 배치했다. 주력부대는 대전자를 해방한후 안도, 돈화현간의 적의 요새지인 다푸챠허로 진공했다. 대전자에는 많지 않은 대원들과 부상병들만이 남아있었다.
대전자가 아군에게 점령된후 약 한달이 지나서 적들은 이곳을 탈환하려고 대사하방향으로부터 대병력으로 공격하여왔다.
놈들은 박격포의 엄호하에 발악적인 공격을 했다. 적아간의 력량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정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였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완강한 방어로 적들을 쓸어눕혔다. 대전자를 사수할것을 결의한 유격대원들의 용감한 투쟁은 퇴각하자고 하던 구국군들을 고무했다. 이미 동쪽시내를 점령한 적들은 아군진지에 맹렬한 포사격을 하여왔다. 우리는 감시병만 남기고 지하포대에 들어가 은페하였다가는 포사격이 뜸해지면 다시 밖에 나와 싸웠다.
이렇게 몇번 거듭하였는지 몰랐다.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되였다. 어느덧 밤이 되였으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적들은 수적우세를 믿고 아군의 병영쪽으로 몰려왔다. 긴박한 순간이였다. 이때에 한 유격대원이 적들이 몰려오는쪽을 향하여 《제4중대는 가운데로! 제5중대는 좌로! 제6중대는 우로!…》하면서 놈들을 기만하여 크게 구령을 쳤다.
이와 동시에 전체 동무들이 적들의 무리복판에 일제사격을 가했다. 적들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할수없이 퇴각하고말았다.
이틀, 사흘, 나흘… 간고한 전투의 나날은 계속되였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굳은 결의를 다진 우리는 조금도 굴함없이 계속 싸웠다. 적탄은 비발치듯 쏟아졌다. 그속에서도 인민들은 식사를 날라주며 전호를 굴설하는 등 일심단결하여 우리를 도왔다. 우세한 적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인하여 우리는 고려성방향에 진지를 이동하였다.
적아간에 판가리싸움이 벌어진지 벌써 13일이나 되였다. 전투는 날이 갈수록 더욱 가렬해졌다. 이때 우리가 보낸 통신을 받고 다푸챠허쪽에 진군하였던 아군의 일부 부대가 증원하여왔다. 지원부대의 우렁찬 나팔소리가 적진에까지 울려퍼지였다. 우리는 아군력량의 증강을 시위했다.
전투가 벌어진지 16일만이였다. 우리는 또 돌격대를 조직하여 동쪽시내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련이어 그 남쪽고지의 적진지를 후면으로부터 돌격했다. 질풍같이 돌진하는 돌격대의 위력에 질겁한 적들은 여기저기다 저주로운 시체를 버리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놈들을 계속 추격하며 쓸어눕혔다. 이 마지막날 전투에서만도 적들은 100여명의 손실을 보았다.
이리하여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대전자의 거리에는 다시 새 생활이 시작되였다. 이곳 인민들은 우리에 대하여 경탄하면서 《뾰족모자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국경경비대가 쓰던 모자와 같은 모자를 통일적으로 만들어썼는데 그 모양을 보고 뾰족모자라고 하였다. 그들의 이 순박한 말속에는 유격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지지의 정이 스며있었다.
그들은 성의를 다해 전투승리를 축하했다. 이 전투후 우리는 그해 9월까지 대전자에 주둔하였다.
대전자전투의 승리는 안도지방으로 유격근거지를 확대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으며 조중인민들간의 전투적우의와 친선단결을 강화하며 이 지방 구국군부대와의 공동투쟁을 더욱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안도현지방에 진출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전자, 대사하북방 다푸챠허를 련결하는 광활한 지대를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처창즈를 중심으로 한 안도북부지대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 ❞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최현 대전자전투 중에서>
인용문을 보면 대전자전투는 1934년 6월 초 제1차 전투가 벌어졌다. 제2차 전투는 1차 전투가 결손된 한 달 후인 1934년 7월 초에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제 1차 전투도 가열처절했지만 제 2차 전투는 무려 16일이나 걸릴 정도로 치열했다. 그렇지만 그리도 악착같이 덤벼들던 적들을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물리치고 대 승리를 안아온 전투가 대전자전투였다.
우리는 대전자전투에 대한 인용문에서 몇 가지의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조국광복과 혁명의 길에 자신의 한 몸을 서슴없이 바친 어린 여투사의 조국과 민족사랑 그리고 혁명성에 대해서이다. 또 1930년 6월 30일 카륜에서 있었던 《카륜회의》의 주요결정사항인 반일사상과 감정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들이 비록 민족이 다를지라도 손을 잡고 함께 반일 · 항일투쟁에 나선다는 《반일통일전선》 전략을 최현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실전에서 처음으로 적용하여 중국인 반일부대 구국군과 연합하여 합동작전을 벌인 첫 전투라는 점이다. 다음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감이 대단했었다는 점과 그에따라 중국인민들이 대전자전투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적극적으로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대전자전투를 조직하게 된 이유이다. 인용문을 보면 대전자전투를 조직하게 된 것은 연길과 화룡 등 동만지방에 있던 유격구를 해산하고 안도현(현 화룡현) 처창즈에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
인용문에 나타난 대전자전투가 가지는 의미들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분석해보기로 한다.
첫째.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혁명수행을 위해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한 몸 서슴없이 바친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에 대해서 보도록 하자. 인용문을 보면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는 대전자전투가 벌어지던 때는 20살도 안 된 어린 처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정도의 나이라면 오늘 날 남쪽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나이이다. 그런데 그런 나 어린 처녀가 생사를 판갈이 하는 적들과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적을 향해 앞장에 서서 돌진을 했다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필자로서는 상상이 안 간다. 하지만 1934년 6월 안도현 대전자라는 고장에서 적들과 벌인 실재했던 전투에서 있었던 사실이니 필자가 믿지 못한다고 하여 없었던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우리 조상들이다.
인용문을 보면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는 대전자전투에서 돌격명령을 내리자 돌격대열의 선두에 서서 적들을 향해 명중탄을 날렸다니 그 기개와 용감성은 비록 어린 나이의 처녀이기는 하지만 20대의 젊은 청년을 능가하는 여 투사였음이 틀림없다.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첫날 전투에서 화룡현유격대의 녀대원 장정숙동무가 전사했다. 장정숙동무는 나어린 처녀대원이였다.
그는 돌격명령이 내리자 다른 대원들과 함께 대렬의 앞장에서 적들에게 육박하면서 명중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던중 그는 적탄에 맞았다. 순간 몸을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진 그는 온몸의 힘을 모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일어나 원쑤들을 향해 계속 사격했다.”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적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니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과연 현대 남쪽사회에서 고등학교 저학년의 여학생들이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처럼 그렇게 투쟁을 할 수 있겠는가? 단언하건데 불가능하다고 본다. 현재 남쪽사회에서 나이 어린 처녀들이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처럼 그렇게 조국사랑과 민족사랑 그리고 그 조국을 지키고 민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칠 만큼 용기를 내고 용맹성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어린 처녀들은 고사하고 청년들조차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처럼 한 목숨 던지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용맹성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동지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다니 놀랍기만 하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에 대해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후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적을 소탕한 그는 심한 출혈로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동지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마지막순간 이렇게 말했다. 《동무들과 같이 혁명대렬에서 끝까지 싸우지 못하는것이 분합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혁명이 승리하여 동무들이 광복된 조국땅으로 돌아가리라는것을 굳게 믿습니다. 모두 잘 싸워주세요.》 그리고 그는 《조선독립 만세!》, 《조선혁명 만세!》를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전우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원쑤에 대한 불타는 증오로 백배천배 복수할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동지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싸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니 나이 어린 처녀이지만 그의 조국사랑, 겨레사랑 그리고 혁명의 길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또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는 유격대가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을 물리치고 반드시 승리를 하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 동지애, 혁명승리에 대한 굳은 믿음 등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후손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신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독립 만세!》, 《조선혁명 만세!》를 외쳤다니 놀랍고도 존경스럽기 그지없는 역사의 큰 발자국을 남긴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도 이와 같은 장정숙 항일의 여 투사의 조국사랑, 겨레사랑, 동지애, 믿음의 정신 그리고 용맹성과 투쟁성을 철저하게 배우고 계승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최현 항일투사가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중국 반일부대인 구국군과 연합하여 첫 전투를 벌여 대 승리를 거둔 대전자전투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강조했지만 어차피 중국인들의 지배력이 미치는 만주땅에서 항일혁명투쟁을 벌여나가자면 중국인들과의 연합전선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중국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함께 손을 잡고 항일투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민족이기는 하지만 반일감정과 반일사상을 가지고 항일투쟁에 나서겠다고 하는 중국인들이라면 그가 누구이던 함께 손잡고 항일투쟁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전 김일성 주석은 량강구에 주둔하고 있던 반일구국군 부대인 오의성 사령과의 담판을 통해 조-중반일연합을 맺었다. 그 기조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날까지 변치 않는 《반일통일전선전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조-중공산주의자들이 맺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여기서 말한 《반일통일전선전략》은 비록 사상과 그 탄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이 반일감정과 사상을 가졌다면 주의주장과 사상을 뛰어넘어 함께 손을 잡고 반일 · 항일투쟁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대전자전투에서 반일구국군부대와 협동작전을 벌인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 독립련대도 구국군인입공작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부대는 대전자에 있는 적들을 공격함에 있어서 구국군부대와 련합작전을 하게 되었다. …… 아군지휘부에서는 수리날(단오날)전으로 대전자를 해방하고 그곳에 주둔할 계획이였다. 이 전투에는 조선인민혁명군 150여명과 구국군 800여명이 동원되였다.”
라고 하여
당시 최현이 이끌던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 주석의 《반일통일전선전략》의 영향을 받아 중국 반일구국군부대와 협동작전을 벌였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이러한 반일감정과 사상을 가진 중국 반일구국군부대와의 연합작전을 통해 최현 항일투사가 이끌던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전자전투를 대 승리로 결속할 수가 있었다.
세 번째. 당시 대전자전투가 벌어졌던 안도현 대전자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이 중국인들이었다. 인용문을 보면 당시 대전자에 거주하는 주민구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안도현 북부 산지대의 중심지인 대전자에 당시 8백여호의 중국인 주민들이 거주하고있었는데 안도현성에 본거를 둔 위만군 600여명이 이곳을 강점하고있었다. 대전자는 고동하를 중심으로 동서로 갈라져있었다. 거리의 중심은 서쪽이였고 거기에는 적들의 병영과 포대가 있었다.”
고 하여
대전자전투가 벌어졌던 당시 대전자에는 주로 중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대전자에 거주하는 주민들 구성이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 역시 극단적인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전자주민들인 중국인들 역시 극단적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다 보니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전자를 점령한 후에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대전자를 쉽게 안정화시킬 수가 있었고, 또 한 달 후에 대전자 탈환을 위해 공격하는 적들에 맞서 비록 전투기간이 길기는 하였지만 승리로 마무리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중국인들에게 벌인 정치공작과 중국인들의 협조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우리 정치공작원들은 대전자시내 인민들에게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는 일본놈들이라는것과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이 이와 같이 가난하고 무권리한것도 일본놈들때문이요, 우리를 리간시키려는것도 그놈들이라는것을 해설하면서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에 궐기할것을 호소했다.
자유를 찾은 거리는 활기를 띠였고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인민들은 모든 성의를 다하여 우리를 원조했다.”
인용문을 보면 1934년 6월 조선인민혁명군이 대전자를 해방을 시키니 주민들은 대부분이 자유를 찾은 해방감에 기쁨이 넘쳐흘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인용문을 봐서 알 수 있지만 당시 대전자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는 만주괴뢰군인 위만군이었다. 위만군 역시 그 구성이 중국인들이었지만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에 충성하고 복무하는 군대 이다보니 중국인들이 대부분인 대전자 거주자들은 위만군을 전혀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대부분 조선인들인 조선인민혁명군이 대전자전투를 통해 중국인들로 구성된 만주괴뢰군인 위만군을 물리치고 대전자를 해방시키자 중국인 주민들은 해방과 자유를 찾은 기쁨에 넘쳐흘렀다니 비록 민족은 같아도 그 군대가 침략자들에게 복무하는가 아니면 자국민에게 충성하는가에 따라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투에서 주민들이 누구에게 협조를 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대전자전투가 이를 분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결국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 중국인 주민들과 반일구국군부대와의 협동작전으로 제2차 대전자전투 역시 승리로 결속되었다. 이에 중국인 주민들은 또 다시 활력을 되찾고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을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이리하여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대전자의 거리에는 다시 새 생활이 시작되였다. 이곳 인민들은 우리에 대하여 경탄하면서 《뾰족모자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은 쏘련국경경비대가 쓰던 모자와 같은 모자를 통일적으로 만들어썼는데 그 모양을 보고 뾰족모자라고 하였다. 그들의 이 순박한 말속에는 유격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지지의 정이 스며있었다.
그들은 성의를 다해 전투승리를 축하했다. 이 전투후 우리는 그해 9월까지 대전자에 주둔하였다.”
인용문을 보면 비록 민족은 다를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민족자주와 평화 그리고 안정이다 보니 전투가 끝난 후에 중국인 주민들 대부분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역시 정치나 군대 등이 지향하는 바가 정의와 진리의 세계인가 부정의와 불의의 세계인가에 따라 일반백성들의 지지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전자전투 역시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었다.
넷째.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해서이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하겠지만 당분간 다룰 수 없기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따라서 처창즈 유격근거지의 창설배경과 과정에 대해 연변조선족자치구학술자료와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대전자전투는 처창즈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조직된 전투였다고 인용문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대전자전투에 대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최현편을 보면 대전자전투를 조직하게 된 주요한 이유가 바로 처창즈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적들을 소멸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당 자료를 아래에서 인용한다.
❝ 동만 여러 현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고 항일무장투쟁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적들은 유격근거지를 없애버리려고 발광하였다. 적들은 각처에 집단부락을 설치하여 유격대와 인민들간의 혈연적련계를 끊어버리려고 갖은 흉책을 다했다. 그리하여 놈들은 1933~1934년에는 련일 대병력을 동원하여 유격근거지에 대한 발악적인 《토벌》을 감행하여왔다. 이러한 결과에 우리는 근거지의 일부 구역을 내여놓게 되였다.
그러나 적들의 어떠한 발악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 항일유격대를 굴복시킬수는 없었다. 우리의 무장대오는 가렬한 전투과정을 통하여 초기보다 비할바없이 강대해졌다.
이러한 형편에서 유격대앞에는 협소한 지역에 머물러있으면서 공격해오는 적을 격파하는 방어만 진행할것이 아니라 종전보다 활동범위를 넓혀서 기동적으로 적극적인 유격투쟁을 전개할 과업이 나섰다.
이를 위하여 김일성동지께서는 1934년 봄 동북방향으로는 라자구지방에, 서남방향으로는 안도현방면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시였다. 이때 왕청, 연길, 화룡 등 여러 현에서 활동하던 유격대에서 선발된 동무들로 편성된 조선인민혁명군 독립련대는 안도현지방에 진출하여 유격근거지를 창설할 임무를 맡았었다.
우리는 연길현 삼도만지구에 집결하였다. 거기서 새군복과 무장을 갖추고 출발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중 5월하순 어느날 드디여 행군명령이 내렸다. 우리는 붉은 기발을 휘날리며 유격대행진곡 나팔소리에 맞추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두메의 밭에서는 농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누데기옷을 걸친 그들은 축력이 없어 소처럼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있었다. 이런 참담한 광경을 볼 때마다 우리들의 가슴은 원쑤에 대한 격분으로 떨렸다. 농민들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었다. 도목구, 신선동을 지나서는 밀림이 우거진 안도땅이였다. 깊은 산간에도 간혹 가다가 마을이 있었다.
우리는 이 산간부락에 들렸을 때에도 언제나 그러했던바와 같이 군중규률을 철저히 지키면서 인민들을 적극 도와주고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는 선전사업을 진행하였다.
우리가 안도현 처창즈에 도착하니 거기에는 이미 왕청현과 화룡현유격대에서 선발된 대원들이 와있었다. 각 현유격대는 여기서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가 주둔한 지대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대전자에는 위만군들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이 지방에 근거지를 만들려면 바로 대전자에 있는 적들을 소멸해야 하였다. …… 대전자전투의 승리는 안도지방으로 유격근거지를 확대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으며 조중인민들간의 전투적우의와 친선단결을 강화하며 이 지방 구국군부대와의 공동투쟁을 더욱 강화할수 있게 하였다.
안도현지방에 진출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대전자, 대사하북방 다푸챠허를 련결하는 광활한 지대를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처창즈를 중심으로 한 안도북부지대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다. ❞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최현 대전자전투 중에서>
인용문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1933년 말 1934년 들어서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유격구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김일성 주석은 동만 여러 지역에 있는 유격구를 해산하고 안도현 처창즈(현 화룡현)로 유격구를 이전하기로 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처창즈에 유격구를 창설하기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대전자전투를 조직하였다. 인용문에서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연길, 화룡, 왕청 등의 유격구들이 처창즈 유격구를 창설하고 전이해왔다.
이송덕 선생이 처창즈 유격근거지를 현지 조사 후 요약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1. 답사내용: 화령현위, 연길현 각 구기관 및 동북인민혁명군2군 군부 유격지 2. 동남차병기공장 3.피복공장 등을 재확인 4. 처창즈 유격근거지 등
답사시 참고내용: 1933년 말부터 원 화룡현위 서기 김일환 등이 처창즈에 와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 후 1934년 말에서 1935년 초 연길현 참도만유격구의 기관과 군민들이 신선동을 경유하여 이 곳에 이전하였다. 한편 화룡현의 군민들도 천수동과 오도영자에서 이 곳에 이동하여 새로운 항일유격구를 건설하였다. 당시 이 곳에는 약 1천여 명의 군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유격구를 보위하기 위한 수많은 전투를 진행하였다. 유격구내에는 병기공장, 피복창, 병원 등이 있었다. 1935년 4월 독립사 1퇀은 림승규의 령솔하에 돈화, 액목으로 진군하였고, 1사2퇀의 두 개 련은 리학충의 령솔하에 동연 8월 무송, 몽강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1935년 10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처창즈에서 대두산근거지로 정의하였다. ❞
〈이송덕 연변조선족자치주 항일투쟁사 답사 로정, 화룡현 처창즈 유격구편 중에서〉
처창즈 유격구는 이송덕 선생의 자료를 봐서도 알 수 있지만 연길의 삼도만과 화룡현 오도양자, 그리고 왕청의 일부 유격구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악랄한 탄압에 의해 해산되면서 이전해온 유격구이다. 그 후 처창즈 유격구도 온갖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1935년 10월 해산을 하고 안도현 내두산 유격근거지로 이전을 하였다.
인용문을 보면 처창즈 유격근거지에는 병기공장(무기공장), 피복창, 병원 등을 갖추어놓고 유격대원들이 손에 들고 적들과 싸울 무기를 만들고 무기수리도 했으며, 피복창에서는 유격대 군복을 새로 만들거나 군복 수리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록 그럴듯한 시설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병원을 차려놓고 전투중에 부상을 당한 유격대원들이나 유격구 주민들의 병을 치료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일단 유격근거지가 마련되면 그 곳에 기본적으로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 등을 만들어놓고 유격대원들이 기본적으로 항일무장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을 하였다. 또 항일아동단학교나 인쇄소 등도 꾸려놓고 주민계도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도 하였다.
그럼 처창즈 유격근거지에서 유격대와 유격근저지 주민들이 어떤 삶을 살면서 항일무장투쟁을 했었는지를 다른 자료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1935년 5월에 시작된 유격구해산사업은 그해 11월초에 결속된 처창즈유격구역의 해산을 마감으로 하여 완료되였다. 처창즈에서 유격구해산사업이 다른 고장보다 반년 정도 뒤늦게 진행된것은 우선 이 근거지주변에 이중삼중의 포위망을 형성하고 모든 주민들이 굶어죽기를 고대하고있던 적들의 집요한 봉쇄작전의 결과였고 이 구역의 생활을 책임진 일군들의 무책임성과 무능성이 낳은 귀결이였다. 명월구회의에서 유격구후보지를 선정할 때 처창즈를 적지라고 제일 강하게 주장한 사람들은 화룡현출신들이였다. 안도현대표 김정룡도 처창즈가 명당자리라고 하였다. 토지가 비옥하고 산림이 울창하고 산세가 험한 이 고장이야말로 적아가 다같이 눈독을 들이는 리상적인 천연요새였다. 간도의 다른 고장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쓸쓸한 산골이였으나 유격전쟁을 하는 과정에 군사물계를 좀 아는 신식풍수쟁이들의 덕으로 처창즈의 금새가 부쩍 올라갔다. 지명의 유래를 들어보아도 군사와 관련된 신비한것은 아니였다. 그 고장 토배기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처창즈란 달구지를 거는곳이라는 뜻을 담고있다고 하였다. 화룡사람들은 처창즈가 유격대의 군사요충지로 될수 있다는것을 증명하느라고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을 고동하기슭으로 유인하여다가 청산리에서 소멸한것도 이 지대가 가지고있는 특이한 매력때문이였을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처창즈유격구역 건설을 무력으로 뒤받침해주기 위하여 1934년 봄에 독립련대를 안도지방에 파견하였다. 김일환, 김일을 비롯한 정치공작원들도 처창즈로 들어갔다. 독립련대는 처창즈근처에 주둔하고있던 위만군 1개 중대를 손쉽게 쫓아버리고 이고장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였다. 이 무력을 배경으로 어랑촌유격구의 주민들이 처창즈에 쓸어들어와 고동하건너편에 화룡현인민혁명정부건물을 세웠고 뒤미처 왕우구와 삼도만의 주민들이 신선동을 거쳐 이곳에 연줄연줄 나타나 동남차골짜기입구에 연길현인민혁명정부기발을 게양하였다. 그리하여 처창즈에는 두개의 현에서 온 인민혁명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이 1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처창즈유격구역은 마치 두개의 발동기를 가진 자동차나 두필의 청총말을 메운 쌍두마차와도 같이 기세충천하여 돌진하였다. 초기에는 식량형편도 그다지 궁색하지 않았다.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따라 처창즈유격구역해산사업에 대한 지도는 안도에서 파견된 당지도부가 하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이 성원들은 군대와 인민에게 유격구해산방침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지어 처창즈에 있던 특파원을 《민생단》으로 몰아 처형하려고까지 하였다. 후에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처창즈는 간도의 혁명군중, 특히는 연길, 화룡, 안도 지방의 혁명군중이 마지막으로 의지하고있던 최후의 지탱점이였다. 최후의 지탱점이라는데로부터 이 지구의 해산을 책임진 일군들이 우유부단한 립장을 취했을수도 있다. 숨막히는 봉쇄속에서 처창즈인민들이 군대와 함께 1935년 11월까지 유격구를 지켜낸것은 참으로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앞에서도 얼마간 말한바가 있지만 당시의 처창즈는 공기가 평온치 못하였다. 좌경이 반《민생단》투쟁을 코에 걸고 유격구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놓은데다가 기아로 하여 수많은 혁명군중이 곡경을 치르었다. 우리가 백두산지구에서 대부대련합작전을 벌리기 시작했을 때 김평, 류경수, 오백룡, 박영순이들은 처창즈에서 겪은 그 기아에 대하여 자주 회상하였다. 김명화, 김정숙, 황순희,김철호,전희와 같은 녀성동무들은 해방후에도 음식상앞에 마주 앉으면 처창즈시절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군하였다. 김명화와 김정숙은 그 당시 군부에서 작식대공작을 하였다. 이 유격구의 정상은 군부의 식탁에도 그대로 반영되였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콩단만큼한 송기 두단을 해와야 군부의 하루식량이 되였다. 매운재물에 송기를 넣고 3시간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후 돌우에다 놓고 방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섞어 죽을 쑤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창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송기떡을 먹으면 홍문이 메였다. 아이들이 그때 뒤를 보느라고 여간만 고생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들이 울면서 꼬챙이로 뒤를 파주었다. 어른들도 홍문이 메여서 고통을 자주 겪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이면 또 송기음식을 먹었다. 소금도 없어서 싱거운 음식을 그대로 먹었다. 죽이나 떡 같은것은 싱거운대로 참고 먹을수 있었지만 산채나 나물국 같은것은 소금이 없으면 먹기가 곤난하였다. 간혹 통신원들이 이따금씩 처창즈에 들려서는 괴춤에 차고다니는 자그마한 주머니에서 소금알을 몇알씩 꺼내주고 가군하였다. 소금알 한알을 여럿이 순번으로 한번씩 혀끝에 살짝 대보고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군하였는데 그야말로 목안에 털이 날 지경이였다. 송기마저 떨어지면 방아간에 가서 겨를 가져다가 죽을 쑤어 먹었다. 그래도 그 겨죽이 묵은 풀로 쑨 죽보다는 먹기가 한결 나았다고 한다. 묵은 풀로 쑨 죽은 껄껄하고 굳어서 먹을 때마다 따끔따끔 목을 찔렀다. 그런 죽마저도 없어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봄을 기다리였다. 춘삼월만 되면 자비롭고 풍만한 대지가 불쌍한 생령들을 기아에서 구출해줄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봄도 아사를 없애지는 못하였다. 봄이 사람들을 위해 선사한것은 눈밑에서 돋아난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새 싹들이였다. 그 싹만으로는 유격구주민들의 생명을 이어갈수 없었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뱀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쥐를 잡아먹었다. 처창즈에서는 설치류가 멸종되였다. 개구리와 개구리알도 주민들의 끼니감으로 되였다. 개구리알을 삶으면 기장밥처럼 풀기가 있고 차분차분해서 맛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고 김철호가 회상할 때 나는 오히려 그 찐득찐득한 음식물이 목에 와닿는것만 같아 섬찍한 감촉마저 받았다. 대원들과 함께 별의별 잡식을 다해온 나도 삶은 개구리알의 맛에 대해서만은 좀처럼 그럴듯한 표상을 가질수가 없었다. 씨붙임을 할 때 신고 일하던 도로기도 작식가마에 들어갔다. 도로기를 우린 즙쯔레한 물을 한공기씩 마시고 병사들이 포복전진을 하듯이 배밀이를 해가며 유격구주민들은 봄파종을 하였다. 오늘 씨를 뿌리고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기도전에 그 씨를 파먹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대중단체들에서는 씨붙임이 끝난 밭들에 보초를 세우고 종자를 파먹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보초들마저도 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씨앗을 파먹었다. 밤이면 아이들이 군부 부엌에 몰래 기여들군하였다. 군장이하 모모한 간부들이 식사를 하는곳이니 먹다가 남은것이라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것이였다. 그것은 엉터리없는 공상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굶을 때 왕덕태도 굶는다는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부엌에 가마치라도 있을것이라는 기대마저 가지지 못했다면 아이들은 절망에 빠져 죽음앞에 굴복당하였을것이다. 작식대원들이 가마치를 주면 아이들은 흐느껴울면서 그것을 단숨에 먹어버리군하였다. 그리고는 수치감에 사로잡혀 다시는 오지 않겠어요, 다시는 오지 않겠어요 하고 맹세하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작식대원들은 부엌문밖에서 먹을것을 그리며 어슬렁거리는 조무래기들을 발견하군하였다. 이런 기아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땅을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지라지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두알 입에 따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처창즈사람들이 이런 아사지경에서도 순수한 인간으로 그냥 남아있을수 있은것은 여러해동안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온 공산주의적리념, 집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킬줄 아는 공산주의적도덕이 간도의 모든 혁명군중을 성인군자로 만들어준 덕이였다고 할수 있다. 사람이 사람의 팔다리를 삶아 먹는것과 같은 비인륜적인 현상이 처창즈에서는 감히 자기의 무대를 가질수가 없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남자들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의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차례졌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들을 관도 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하였다. 처창즈가 당한 기아의 책임은 전적으로 이 구역을 봉쇄하고 야수적인 《토벌》을 거듭한 일본침략군에 있었다. 유격구를 책임진 일군들도 인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지휘부에 기여든 반동들과 불순분자들은 덮어놓고 《배고파도 견뎌내야 한다. 절대로 굴복하지 말라! 죽는것은 투항이다!》라는 초혁명적인 언사로 대중을 우롱하였다. 처창즈인민들은 《민생단》으로 몰려죽고 굶어죽으면서도 적구로 내려가지 않고 끝까지 유격구를 지켜싸웠다. 그들이 발휘한 견인불발성과 백절불굴의 혁명적기개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유격구해산문제가 일정에 올랐던 1935년 10월에 김일네 집안, 남창수네 집안, 리계순네 집안, 권일수네 집안을 비롯한 20여명에 달하는 《민생단》련루자가족들은 단합살림이라는것을 뭇고 동남차골짜기 막바지에서 1936년 여름까지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민생단》루명을 벗어던지자는것이였다. 단합살림이라는것은 여러 세대가 하나의 살림으로 합치여 생활도 유지해가고 투쟁도 해가는 그런 특이한 생활방식을 말한다. 그들은 귀틀집 한채에 세간들을 합치고 책임자도 정하고 매일, 매주, 매달 각자에게 알맞는 분공도 주고 그 분공수행정형을 총화도 하면서 조직적인 생활을 하였다. 단합살림에 망라된 그 가정들은 마지막까지 처창즈를 지킨 최후의 방위자들이였다. 적들은 수천명병력을 동원하여 군경들에 의한 종전의 초토화식 《토벌》일변도의 전술로부터 군사,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치는 종합적인 대봉쇄전술로 이행하여 처창즈를 완전히 압살해버리려고 《토벌》에 《토벌》을 거듭하였지만 그때마다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1935년 10월의 대《토벌》에는 수천명의 적이 투입되였다. 처창즈의 용감한 방위자들은 이번에도 적들의 침공을 영웅적으로 격퇴하였다. 그들은 저격무기로 유격구를 공습하는 비행기까지 쏴떨구는 전공을 기록하였다. 그해 11월 처창즈인민들은 유격구를 해산하고 군대와 함께 대부분 내도산쪽으로 이동하였다. 적의 봉쇄속에서도 오래동안 인민들과 함께 굶어도 보고 앓아도 보고 싸워도 본 처창즈방위자들중의 한사람인 백학림은 지금도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처창즈사람들이 겪어온 항일전쟁시기의 참상을 모른다면 그 무슨 생활난에 대해서 감히 입밖에 내지도 말라. 처창즈의 군민이 봉쇄속에서 어떻게 기아를 이겨내고 추위를 이겨내고 적의 〈토벌〉을 이겨냈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 어떤 곤난극복에 대해서도 감히 자랑하지 말라!》 ❞
〈세기와 더불어 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중에서〉
☞☞☞ 글이 길어져서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분석은 다음 회에 계속한다. 처창즈 유격근거지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으로 다음 회까지 다루면서 상세하도록 한다.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학술자료도 다음 회에 함께 다룬다. ☜☜☜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6년 10월 11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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