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왜 휴대전화 15만대를 불태웠나
등록 :2021-03-02 07:18수정 :2021-03-02 07:27
[시간의 극장]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제35화 삼성 휴대폰
제35화 삼성 휴대폰
<한겨레> 1993년 7월18일치 6면 기사. 1988년 시작한 이동통신 서비스는 1993년부터 조금씩 쓰는 이가 많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휴대폰 시장이 얼마나 커질지 아무도 몰랐다. 당시 예상했던 2000년도 휴대폰 사용자는 약 500만명. 그러나 실제 2000년도 휴대폰 가입자는 약 2500만명이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한겨레> 1992년 5월31일치 16면에 실린 SH-300 휴대폰 광고. 휴대용 무선전화기라고 쓰인 게 인상적이다. 판매량은 모르지만 유럽에 수출도 했다고 한다. 당시 삼성전자는 자체 개발한 휴대폰과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 카폰과 휴대폰 겸용 제품, 무선호출기를 함께 팔았다. 중간에 SH-200 모델도 개발했으나 성능이 떨어져 출시를 포기했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한겨레> 1994년 5월25일치 20면. 독특했던 삼성 휴대폰 SH-700 광고. 휴대폰 대리점 사장님들 얼굴을 모았다. 당시 삼성전자는 무조건 모토롤라를 고집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신문에 휴대전화 할부판매 광고도 자주 실렸던 시대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한겨레> 1995년 1월13일치 24면 광고. 애니콜 광고에서 인기를 얻은 문구는 많지만,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광고문구만큼 판을 바꾼 글은 없다. 당시 휴대폰 이용자들이 불편하게 여기던 통화 품질 문제를 제대로 찔러서 성공했다.(※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휴대폰이 보급되던 초기에는 휴대 공중전화로 많이 쓰였다. 무선호출기로 연락이 오면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는 식이다. 휴대전화로 바로 연락하는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행여 상대방을 방해하지 않을까 조심하기도 했다. 참고로 1997년까진 휴대폰으로 한글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1997년 12월 삼성전자 제공 사진으로 추정된다.
1996년, 한국은 2세대 이동통신 표준으로 시디엠에이(CDMA) 방식을 쓰기로 한다. 당시 세계에서 많이 쓰이던 지에스엠(GSM) 방식과는 달랐지만, 쉬운 길을 버리고 자체 기술력을 쌓는 기회를 택했다. 거꾸로 남들이 안 쓰기에, 외국 회사가 만든 휴대폰이 한국 시장에 들어오기도 어려웠다. 기술 보호 장벽을 친 셈이다. 그저 휴대폰 사용을 보여주고 있을 뿐인데, 신기한 듯 쳐다보는 행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1996년 이용호 기자가 촬영한 비컷이다.
성공한 제품만큼이나 실패한 제품도 많다. 사진은 1998년에 나온 삼성 폴더형 애니콜 전화기. 반으로 접어 크기를 줄인 제품이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분명히 다른 인기 제품과 비슷해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다. 삼성전자 제공 사진.
1999년 9월15일 강창광 기자가 찍은 휴대폰 이용자 비컷이다. 휴대폰 사용자가 많아지고, 더 싸고 작고 가벼워지면서, 점점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연락을 위해 자주 들여다보게 되면서, 예쁘게 꾸미거나 겉으로 보이게 들고 다니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개인 정체성과 연결된 경우는 처음 아닐까?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SCH-3500 전화기. 2001년 미국 소비자전문지 <컨슈머 리포츠>에 의해 최우수제품으로 선정됐기도 했다. 한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얻지 못해, 삼성전자가 미국 출시를 망설인 걸 스프린트에서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일화가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사진.
한국에서 휴대전화가 빠르게 보급된 데에는 1997년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 개인휴대통신(PCS)이 큰 역할을 했다. 휴대폰 가격이 떨어진 점도 있지만, 과도한 단말기 보조금을 지급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공짜폰이 등장했다. 덕분에 무선호출기 사용자가 대거 휴대전화로 넘어왔다. 1999년 장철규 기자 촬영.
2008년 출시된 애니콜 햅틱폰. 전체 화면을 터치로 조작할 수 있는 휴대전화로, 스마트폰이 출시되기 전까지 이런 풀스크린 터치폰이 인기를 끌었다. 사실 기술적인 면에서 언제라도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초기 아이폰의 칩을 만든 회사도 삼성전자다. 박미향 기자 촬영.
예전에는 휴대폰 통화료가 비쌌기에, 통화는 자제하고 문자메시지 단말기로 이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세계에서 드물게, 한글 특성을 반영한 쉬운 문자 입력 방식을 만든 덕에 쓰기도 쉬웠다. 위 사진에 있는 단말기는 애니콜 SCH-X120으로 추정된다. 안팎에 액정 화면 두개를 달고 있으며, 간단한 무선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그때는 무선인터넷 이용료가 매우 비싸서, 보름 정도 썼는데 370만원이란 요금을 청구받은 중학생이 자살하는 일까지 있었다. 2001년 6월 강창광 기자가 촬영했다.
2005년 열린 국제 정보통신 및 이동통신 전시회에서 애니콜 전화기를 이용해 3G 화상통화를 시연하는 모습.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는 원래 화상통신을 위해 장착된 부품이기에, 3G 핵심 서비스가 되리라 다들 생각했지만, 한국에선 널리 쓰이지 못했다. 2020년이 되기 전에는. 이종근 기자 촬영.
이제는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을 사용해 영상을 즐기고 있지만, 예전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 속 기기는 2005년에 출시된 애니콜 위성 디엠비(DMB)폰 SCH-B100. 디엠비는 지상파나 인공위성을 이용해 영상을 수신해 볼 수 있는 서비스다. 디엠비는 무료지만 에스케이텔레콤(SKT)에서 서비스하는 위성 디엠비는 유료 서비스여서, 에스케이텔레콤 이용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류우종 기자 촬영.
휴대전화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많은 문제도 함께 생겼다. 이동통신요금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사안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해괴한 일도 많았다. 위피(WIPI)라는 모바일 인터넷 플랫폼을 강제해서, 해외 휴대전화나 스마트폰을 도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에스케이텔레콤(SKT)에선 지상파 디엠비(DMB)가 탑재된 휴대폰 출시를 막았다. 무선인터넷 요금을 더 받고 싶어서 와이파이도 탑재하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3.5파이 이어폰 단자도 없어서 전용 이어폰을 꼭 써야 했다. 충전기 모양도 통일되기 전까진 제각각이었고, 휴대폰에 엠피스리(MP3) 파일 듣기 기능을 넣었다고 음반업계에서 반대 집회를 열던 시절이기도 했다. 박승화 기자 촬영.
휴대폰은 순식간에 일상을 바꿔버렸다. 빨라진 기술 진화는 비슷한 기술을 쓰던 다른 제품을 한데 모으게 만든다. 사진 속에 보이는 2008년의 터치 휴대전화, 전자사전, 캠코더, 피엠피(PMP)는 이제 스마트폰으로 모두 합쳐졌다. 모든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녹여내는 능력은, 컴퓨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윤운식 기자 촬영.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it/984998.html?_fr=mt1#csidx4b236c038e01f44ab0628d96b0fe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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