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남북공동선언이 위험합니다

<칼럼>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2013년 04월 29일 (월) 08:42:26 김진환 tongil@tongilnews.com 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지낸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갑니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게 마음과 몸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도 절감했습니다. 덕분에 북한 주민들의 심정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군사 위협을 생생히 느끼며 지내온 그들의 마음과 몸 역시 참 많이 지쳐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강경하게, 마치 ‘끝까지 가 보자’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나 봅니다. 그런데 북한이 지난 1월부터 미국을 향해 내놓은 수많은 성명, 담화 등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한 가지 요구로 모아집니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된 군사 위협,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전략적 인내’ 등을 중단하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북.미 대화 재개될까? 미국은 북한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할까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4월 12~15일 한.중.일 순방 이후 북.미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4월 말 한.미합동군사훈련(독수리연습)이 끝나고 5월 초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뒤 북.미 대화 재개를 기대해보자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북.미 대화가 그렇게 빨리 시작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견해입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존 케리는 4월 12일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면서 지금까지 북.미가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이행하기로 했던 여러 의무 중에서 ‘오직’ 북한의 의무 이행만을 요구했습니다. “국제적인 의무, 국제적인 표준, 자신들이 수용한 약속을 받아들여야 하며, 비핵화의 방향으로 나가야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케리의 12일 발언이 현재 미국 대북정책의 기조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2005년 9.19공동성명부터 2012년 2.29합의까지 이어져 온 동시행동 원칙에 전면적으로 반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대단히 모욕적인 언사였을 것입니다. 심지어 올해 봄 내내 미국의 군사 위협에 강력하게 맞대응하며 나름대로 대미항전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자부하고 있을 북한으로서는 꽤나 힘 빠지는 미국의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4월 16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이 우리가 먼저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어야 대화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 당의 노선과 공화국의 법을 감히 무시하려 드는 오만무례하기 그지없는 적대행위”라며 미국의 대화 제안을 일단 거부했습니다. 무엇보다 북.미 대화를 막는 구조적 장벽이 존재합니다. 첫째, 동북아시아에서 중.미 세력대결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압박에 밀려 ‘조선반도 비핵화’가 의제조차 되지 못할-현재까지 북한의 입장은 ‘조선반도 비핵화’는 협상탁자에 의제로 올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협상에 나선다면, 이는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고 중국과의 영토분쟁에 대처하려던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좋지 않은 신호가 될 것입니다. 둘째, 미국의 군수기업들은 한창 영토분쟁이 격화되고 있는 아시아 시장을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무기판매상에게는 갈등과 대결이 생명의 젖줄입니다. 미국의 군사 위협에 대응한 북한의 군사력 시위는 자국 군수산업의 활로를 찾으려는 미국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며칠 동안 북한의 추가적인 군사력 시위(예를 들면 중거리미사일 시험발사) 없이 5월 초를 지나 북.미 대화가 재개된다면 한반도 긴장이 빠르게 완화될 테니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믿으며 ‘버티기’에 나선다면, 북한도 지금처럼 밀어붙일지 대화 재개를 위해 다른 방법을 찾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 경우 무작정 밀어붙이기보다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하지 말아야 할 말 이와 관련해 아쉬움이 많은 부분이 바로 최근 북한의 대남정책입니다. 남북관계 진전은 한반도 평화정착에 언제나 긍정적 작용을 하는 변수입니다. 특히 김대중 정부 이후 역사는 남북관계 진전이 미국의 대북정책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포용기조를 담은 페리보고서가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끼쳤고, 노무현 정부는 북한과 공조해서 9.19공동성명에 한반도 평화포럼 관련 내용을 담아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 입장에서는 당장은 남한이 마음에 안 들어 다투더라도, 향후 남북관계 진전의 ‘여지’만큼은 남겨 놓는 게 이득입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대남정책은 비록 박근혜 정부, 일부 언론, 탈북자 단체 등의 행동에 자극 받은 측면이 크지만 ‘나가도 너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로 신규투자가 금지되기는 했지만, 개성공단은 그래도 6.15시대의 ‘마지막 상징’처럼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4월 3일 개성공단 통행제한 조치, 4월 9일 북측 인원 출근 중단 조치 등을 단행하면서 잠정폐쇄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또한 박근혜 정부가 4월 25일 ‘중대조치’를 운운하며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대화 제안을 하자,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은 “남측인원들에 대한 강제추방과 개성공업지구의 완전폐쇄와 같은 중대조치”를 북한이 먼저 취할 수도 있다고 맞불을 놓아버렸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중대조치’의 하나로 개성공단 체류 남측 인원 126명을 귀환시킨 27일에 나온 북한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 발언은 북한의 대남 감정이 얼마나 격앙되어 있는지, 북한이 격앙된 대남 감정을 얼마나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6.15의 옥동자로 태여난 개성공업지구를 소중히 여기지만 덕도 모르고 은혜를 원쑤로 갚는자들에게 은총을 계속 베풀어줄 생각이 없다. 개성공업지구가 페쇄되면 막대한 손해와 피해를 볼것은 남측이며 우리는 밑져야 본전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동안 내주었던 개성공업지구의 넓은 지역을 군사지역으로 다시 차지하고 서울을 더 바투 겨눌수 있게 되며 남진의 진격로가 활짝 열려 조국통일대전에 더 유리하게 될것이다.” 일단 “은혜”, “은총” 같은 표현은 남한에서 자주 쓰는 ‘북한 퍼주기’라는 표현이랑 비슷하게 들립니다. 가능하면 남북 모두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개성공단이던, 금강산관광이던 남북 경제협력사업은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의 시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이런 말을 자주 쓸수록 남한에서도 정당한 대북투자를 ‘북한 퍼주기’로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북한이 ‘조국통일대전’을 말 그대로 군사력을 동원한 통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쟁통일’을 함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해외의 한 통일운동가는 최근 어느 글에서 “나는 북이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을 무력이 충돌하는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통일을 이루자는 절박한 심경의 표현으로 해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3월 30일 ‘정부․정당․단체 특별성명’에서 남북관계가 “전시상황”에 들어섰다면서 ‘조국통일대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우리의 조국통일대전은 3일대전도 아니며 미국과 괴뢰호전광들이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없이 단숨에 남조선 전지역과 제주도까지 타고앉는 벼락같은 속전속결전, 하늘과 땅, 바다는 물론 전방과 후방이 따로없는 립체전으로 될것이다.” 4월 27일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도 개성공단이 폐쇄된다면 “남진의 진격로가 활짝 열려 조국통일대전에 더 유리하게 될것”이라며 북한이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이 ‘전쟁통일’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습니다. 만에 하나 북한이 앞에서 소개한 통일운동가의 해석처럼 실제 전쟁 의사는 없으면서 단지 “통일을 이루자는 절박한 심경”을 드러내기 위해 조국통일대전이라는 말을 썼더라도, 한국전쟁의 상처와 기억을 아직도 안고 지내는 동포들을 향해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 북한이 전쟁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딴 통일 싫다”고 북한에 단호하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남한도 이미 ‘적 지휘부 타격’을 공언했고 개성공단 남측 인원을 철수시켰으니, 북과 남 모두 앞뒤를 다투며 6.15남북공동선언을 위반하고 있는 셈입니다. 남북은 2000년 6월 첫 정상회담에서 ‘전쟁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대원칙으로 삼고,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자고 합의했습니다. ‘전쟁통일’을 입에 올리고, 개성공단을 고사시키는 건 변명할 여지없이 합의정신에서 벗어난 행위입니다.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자 6.15남북공동선언이 태어난 지 13년 만에 남북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으면서, 미국이 남북관계에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위 선언 1항이 무색해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예를 들어 남북이 한창 으르렁거리고 있던 27일, 윤병세 외교부장관을 만난 윌리엄 번스 미 국무부 부장관은 개성공단 남측 인원 철수 조치에 전적인 이해와 지지를 밝혔다고 합니다. 미국은 남북이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간 현재 상황이 괴로울까요, 즐거울까요? 답은 환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박근혜 정권과 김정은 정권은 비록 6.15남북공동선언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이 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중시한다면, 지금 당장 입에 담기도 불편한 거친 말들을 서로에게 쏟아 붓는 행태부터 중단해야 합니다. 1994년 봄 ‘서울 불바다’ 발언의 여파로부터 남북관계가 벗어나는데 무려 6년이 걸렸습니다. 2013년 봄 남북이 쏟아낸 험구들의 여파에서 벗어나는 데는 몇 년이나 걸릴까요? 자고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개성공단도 하루 빨리 정상화해야 합니다. 이참에 금강산관광까지 묶어서 정상화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북.미가 조만간 협상장에 앉던, 앉지 않던 간에 남북 사이에 꼬인 매듭은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대승적으로 풀어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6.15남북공동선언이라는 귀한 아이를 구해내는 어른들의 모습입니다. 누가 더 거친 말을 쓰는지, 누가 더 겁을 주는지 시합하듯 다투는 건 아이들이나 할 일입니다. 아이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계속 무기판매상 배만 불려줄 겁니까? 이제 그만 싸우고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기 바랍니다. 대화는 비겁한 자가 아니라 용감한 자의 갈등해결 수단입니다.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전에는 민주노동당 통일외교 정책연구원,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등으로 일해 왔다. 이 밖에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같은 통일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동북아시아 열국지 1: 북․미 핵공방의 기원과 전개』(2012), 『코리언의 생활문화』(2012, 공저), 『문화분단: 남한의 개인주의와 북한의 집단주의』(2012, 공저), 『구술사로 읽는 한국전쟁』(2011, 공저), 『북한위기론: 신화와 냉소를 넘어』(2010), 『민족과 통일』(2010, 공저), 『시련과 발돋움의 남북현대사』(2009, 공저) 등이 있다. 현재 월간『민족21』에 ‘김진환의 동북아시아 열국지’를 연재 중이다.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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