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시베리아 2016 동해에서 바이칼까지 테마여행을 가다

겨울 시베리아 2016 동해에서 바이칼까지 테마여행을 가다

강태호 2016.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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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을 시작하며

  어디나 그렇듯 우리가 가는 곳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또 그곳을 일컫는 말(지명)에는 그곳을 살아가던 이들의 숨결이 스며 있습니다. 신화도 그냥 허구가 아닌 먼 옛날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한겨레>가 2016년 2월 3번에 걸쳐 기획한 이번 겨울 시베리아 테마여행은 대륙으로 북방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건 미국의 록키산맥, 그랜드 캐년이나 일본의 사찰이나 온천, 또는 유럽, 동남아의 어느 관광지나 명소를 가는 것과는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동해에서 바이칼까지 우리의 시베리아 여정을 저는 ‘오래된 미래’로의 여행(영어로 말하면 Back to the Future 인가요)을 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그 얘길 하고자 합니다.
  또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을 뒤적이다 보니 누군가 이런 말을 썼더군요.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서서하는 독서’로서의 여행을 조금 미리 떠나보고자 합니다. ‘앉아서 하는 여행’으로서 시베리아에 관한 책에서 본 것들을 얘기하려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리하면 시베리아 아니 바이칼도 그 짧은 시간에 우리가 못 본 것들까지 느끼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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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해에서 바이칼까지 시베리아대장정 출발
 

  앞서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1년 7월말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평화연구소장으로서 동해에서 바이칼까지라는 시베리아 대장정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기획했던 적이 있습니다. 2011년 지난 7월 31일부터 8월 7일까지 100여 명이 참가했는데 여행과 전문가 포럼을 결합한 행사였습니다. 주제는 시베리아횡단열차 대장정 ‘동해에서 바이칼까지-남·북·러 협력의 길을 찾아서’였습니다. 그 보름 뒤인 8월2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특별열차를 타고 우리가 갔던 길을 따라 바이칼호 인근 울란우데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었습니다. 김정일-메드베데프 두 정상은 이 회담에서 사할린 가스관 사업의 북한 통과에 합의했습니다. 동해에서 바이칼까지라는 시베리아 대장정 프로그램이 다뤘듯이 시베리아에서 남북러 협력의 길이 열리고 그래서 한반도 가스관 사업으로 남북관계의 극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를 낳기도 했습니다만,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당시를 돌아보면 차창 밖 시베리아 대륙의 숲을 따라 우리의 눈도 푸른색으로 물들었습니다.  덜커덩 거리는 횡단열차 기차 칸에서 무릎을 맞대고 살아온 얘기들을 풀어놓으며 애틋한 마음으로 지나간 청춘을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부산서 오신 중년의 한 부인은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을 혼자 보내며 잘부탁한다고 했고, 아빠와 함께 온 대학생 딸은 알혼섬에서의 캠프 파이어 자리에서 20여년을 살았지만 3박4일의 기차여행에서만큼 아빠와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이칼의 파란 물과 맑은 하늘,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과 야생화가 흐드러진 초원을 보며 영혼이 푸르고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었다면 조금 과장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하얀 백색의 시베리아와 바이칼을 만나게 되겠지요. 시베리아를 보려면 겨울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더 설레이는 마음입니다. 지난 5년 뭐가 달라졌을까요? 지금의 제가 5년전의 제가 아니듯이 다 달려졌겠지요.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기에 더 기억에 남았던 여행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길잡이라 할만한 자격으로 내세울 게 없고 여행 경험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강사도 아닙니다. 지난 20여년을 남북관계와 한반도를 다룬 기자로서 책을 통해서 그리고 2011년 여름 시베리아 기행의 경험, 그때 준비를 하며 공부했던 것들과 2~3년전부터 했던 대륙에 대한 공부 등을 바탕으로 몇가지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번 테마 기행을 공지하면서 강의를 해야 한다기에 그동안 썼던 글과 기사들을 묶어서 <1강 : 일대일로를 묻다 - 신대륙주의와 북방의 길>, <2강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북방3각관계 - 환동해 협력의 네트워크>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 포럼의 주제발표도 아니고 이번 여행을 지루하고 딱딱한 것으로 만들까 덜컹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1차 기행 공지가 나가자 불과 1주일 안에 신청이 마감됐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강의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뿐더러 적어도 동행인을 보고 신청을 하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안심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약속한 강의 공지를 무시할 수는 없기에 그동안 썼던 글과 기사에 바탕해 강의 자료로 첨부했습니다. 그러나 열차에서 또는 차량에서든 파워포인트를 쓸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이 강의자료는 학습 참고자료로 하고, 두 주제를 묶어서 <대륙에 대한 지정학적 인식과 북방통로>라는 하나의 주제로 지도와 그래픽 사진을 중심으로 한 파워포인트 강의를 하고자 합니다.

 북방 오래된 미래로의 여행

 우리에게 북방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오래된 미래’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왔던 곳임과 동시에 이제 새롭게 가야할 곳이기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대륙은 이제 더 이상 낯선 변방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고 나아가려 했으나 갑자기 단절된 길 너머에서 열리고 있는 거대한 협력의 공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에게 분단은 북과의 단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유라시아 대륙과의 단절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한의 북쪽 끝 비무장지대 앞에서 북쪽으로 가는 방향을 상실했습니다. 그러기에 통일은 남북이 하나가 된다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건 유라시아로 가는 길이자, 세계로 가는 온전한 방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분단의 극복은 우리들이 잃었던 북쪽으로 가는 방향감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쪽은 아주 오래전 우리의 조상이 온 방향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그 쪽은 똑바로 달려가 북극을 넘어가면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지름길이 뚫린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건 대륙과 해양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한반도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륙으로 가는 반도도 아니고 대양으로 열린 섬도 아닌 외딴 섬의 고립된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는 의미의 교량이자 가교라는 인식 말입니다. 그러기에 통일이 우리의 소원이라면 북방으로 가는 길은 희망으로 가는 길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시베리아 바이칼 기행을 통해 북방으로 가는 길이 그러한 꿈과 희망을 이루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길 바람니다.
   중국의 문인이며 사상가인 루쉰은 “희망은 길과 같다” 고 했습니다. 그는 왜 희망이 길과 같은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앞서간 이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함께 했기에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길을 만들 듯이 희망 또한 지금 없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가 말하려 한건 희망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길 그 자체가 희망입니다. 루쉰은 희망을 말하려 했지만 저는 길을 말하고 싶습니다. 북방으로 가는 길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 2015년 초 제가 펴낸 <북방루트 리포트>라는 책은 화두를 “길은 희망과 같다”로 삼았습니다. 그 얘기로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북방루트로 가는 길을 만들어야

  한반도는 그 자체가 ‘거대한 단절구간’으로 존재해왔습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북방은 늘 금기시 돼 왔으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곳은 길이 끊어지고 철마는 멈춰서 있는 막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그 길을 열었습니다. 그는 2000년 6월 12일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처음으로 북녘 땅을 밟았습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6월15일 방북성과 대국민 보고에서 경의선을 연결해 ‘철의 실크로드’를 건설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끊어진 철길 위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가 분단의 상징이었듯이 그건 통일로 가는 우리의 희망이자,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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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기차가 왜 런던을 못가고 왜 파리를 못갑니까? 경의선, 경원선이 끊어졌기 때문에 못 갑니다. 만주에서는 기차들이 자유롭게 가지 않습니까? 경의선은 불과 25킬로 정도밖에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이으면 곧 갈 수가 있습니다. 물류비용이 30%가 절감되고 수송날짜가 훨씬 줄어듭니다. 북한하고만 해결되면 우리는 유럽까지 승승장구 뻗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단계가 오면 일본은 한일간의 해저 터널을 놓아서 일본 기차가 한국을 거쳐서 북한을 거쳐서 유럽까지 가려고 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철의 실크로드’가 생겨납니다. 이런 새로운 시대를 열어서 남북 양측이 크게 경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명명한 철의 실크로드는 ‘길이 희망’임을 보여줍니다. 그건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의 남북 화해 협력이 경의선 동해선의 철길로 이어져 대륙으로 가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취임사에서 그 희망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사서 평양, 신의주,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한복판에 도착하는 날을 앞당겨야 합니다.”
  그리고 2007년 10월2일 이번엔 그가 평양에서의 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이번엔 비행기가 아니고 직접 걸어서 넘었죠. 군사분계선(MDL) 앞에 선 노 대통령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이었습니다” 라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제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며,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마치 루쉰의 “희망은 길과 같다”는 말을 생각하며 한 말씀처럼 보입니다.  길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이고 장벽은 그렇게 사라질 것으로 우리는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되면서 남북은 그 희망과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꿈만큼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2008년 9월 취임 후 첫해에 러시아 방문을 해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습니다. 시베리아 천연가스를 남북을 경유하는 가스관을 통해 들여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남북 가스관 사업은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때부터 꿈꾸던 사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 남북은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과 그해 11월의 연평도 포격 도발등 극도의 대결상태에 빠졌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가스관 사업만큼은 추진하고자 했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지만 한겨레가 기획한 동해에서 바이칼까지의 시베리아 대장정이 7월말에서 8월초까지 있었고, 불과 보름 뒤인 그해 8월24일 김정일 위원장은 울란우데에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시베리아 사할린 가스관의 북한 통과에 합의했습니다.
  철도와 도로 그리고 가스관으로 남북을 이어 대륙으로 가려는 세 대통령의 꿈은 같았습니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2013년 10월 신유라시아 건설 구상(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을 밝혔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어 2014년 3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아시아리더쉽 컨퍼런스에서의 인사말을 통해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한반도 북쪽. 불빛으로 반짝이는 남쪽은 마치 섬처럼 놓여 있습니다. 새로운 한반도를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해서 동아시아 전체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번영의 불빛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제가 꿈꾸는 한반도 통일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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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한반도 지역 야간위성 적외선 영상 모습 한반도의 불빛

  그러나 지금 그 희망들은 어디에 있는 건가요?
 2000년 9월18일은 경의선 복원과 도로 건설을 위한 착공식이 열린 날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일간지 <디벨트>는 이를 두고 남북한에게 베를린 장벽 붕괴에 비견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썼습니다. 그런가요?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2007년 5월17일은 어떤가요? 이 날은 완공된 남북의 경의선 동해선 철도(문산-개성 구간은 26.8킬로미터였으며, 금강산-제진 구간은 비슷한 25.5킬로미터) 구간에서 적어도 남쪽에서는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며 떠들썩하게 열차 시험운행의 개통식을 한 날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분단과 대결, 단절의 연속입니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과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으로 가는 길은 막혔고 오는 길은 끊어졌습니다.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길 위에 포탄이 날아오고 대북 확성기의 선전전이 벌어지며 긴장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개성공단이 실낱같이 열려 있고 하산에서 나진을 통해 러시아산 석탄이 오는 것 말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거창한 구호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북방의 대륙은 엄청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주 시베리아를 넘어 몽골, 신장 위구르를 넘어 카자흐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낯선 지명의 국경도시들은 이제 서로 문을 열며 대륙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철도와 고속도로, 석유 가스 파이프라인과 전력망 등 에너지와 교통망은 자본 노동 상품의 수요와 공급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이런 지정학적인 변화를 전문가들은 ‘신대륙주의’로 부릅니다. 중국에 의해 이는 신실크로드 경제벨트로, 바다로의 21세기 해상실크로드를 포함하여 ‘일대일로’의 거대 프로젝트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꿈꿔왔고 나아가려 했으나 그러나 갑자기 단절되고 끊어지려 하는 길의 너머에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북방 루트’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건 중국이 철도와 도로, 가스 석유 등의 에너지 인프라 건설을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협력과 통합의 거대한 흐름과 만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2. 시베리아 바이칼과의 대화

  정성일이라는 꽤 유명한 영화평론가가 중국의 영화감독인 지아장커를 인터뷰한 지아징커와의 대화 편에서 지아장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론집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171쪽에서)
 “중국은 도시를 찾아가면 거기에 공간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의 말을 빌리고 싶습니다. 안토니오니는 어떤 장소에 도착하면 일단 5분 동안 그 장소와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어떤 장소에 가든지 그 공간만의 대화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느껴야합니다. 그런 다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느끼고 대화합니다. 나에게는 공간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똑같이 중요합니다.”
 시베리아와 바이칼 그리고 더 나아가 대륙과의 대화를 나누는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베리아의 소수민족-러시아판 북미 인디언

  민속학자이자 해양학자로 시베리아를 여러번 답사하고 소수민족에 대해 연구해 온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왜 지금 시베리아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베리아 종족은 우리의 상고사와 관련을 맺는다. 나나이족·유가키르족 같은 소수민족은 우리 역사의 부여·고구려·발해·여진족·말갈족 등과 무관할 수 없다. 몽골시대에 초원에서 습래해 제주도까지 거느렸던 엄청난 초원의 파동까지 생각한다면! 연해주로 넘어간 한말의 조선인들이 함께 살았던 사람들도 바로 시베리아 소수민족이었다. 국민국가와 무관하게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공생공존하면서 시베리아에서 살아갔다. 그런 질서와 공생 원리를 깨부순 것은 역시 러시아 제국주의였다.”
  시베리아를 러시아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현재의 시베리아가 러시아라고 해도 역사를 통해 오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강현 교수에 따르면 시베리아는 정복당했으며, ‘러시아제국의 시베리아’이자 부인된 역사, 매몰된 역사입니다. 엄연히 다양한 민족들이 살아온 땅임에도 마치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이 쫓겨나고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땅’으로 치부됐다는 인식이 바탕이 된다면 시베리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서구 열강이 대항해 시대를 열어 신대륙과 섬을 ‘발견’하고 도륙을 냈듯이, 러시아제국 역시 동일한 궤적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시베리아 원주민이 러시아판 북미 인디언으로 일컬어지는 이유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과 시베리아의 소수민족들은 인종적으로도 역사적 운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처럼 시베리아도 러시아 제국의 식민과 약탈로 인한 고난의 역사가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님의 강의가 없었다면 샤먼이든 시베리아의 소수민족이든 그냥 자작나무나 시베리아의 야생화처럼 풍경에 불과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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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의 코트>
  2011년 시베리아횡단열차 기행 및 포럼을 기획하면서 <샤먼의 코트- 사라진 시베리아 왕국을 찾아서(안나 레이드 미다스북스 2003년 7월 The Shaman's Coat 2002년)>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의 책에 등장하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마치 북미 인디언들이 그랬듯이, 고통과 살육의 쓰린 역사를 거쳐 가까스로 살아 남은 ‘식민지 백성’(백인과 인디언, 슬라브족과 시베리아 원주민의 관계는 상당히 유사하다)입니다. 시베리아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오래된 미래>에서 다룬 티베트처럼, 원주민끼리만 살았으면 가능했을, 잃어버린 낙원일지 모릅니다.
책 제목 ‘샤먼의 코트’의 ‘코트’는 시베리아 샤먼이 의식을 집전할 때 입는 옷으로 온갖 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전체 무게가 20kg이 넘으며, 코트의 임자는 진짜 영험한 샤먼임을 보여주는 증표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기술한 시베리아의 현재에 대해 ‘코트 위에 다른 옷을 걸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시베리아의 소수 민족들도 아메리카의 인디언 보호구역의 그 인디언들과는 좀 다르지만 점점 사라져가며 옛 것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샤먼의 코트> 가운데는 이런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 사라져가고 있는 민족들 가운데 하나인 한티족의 예쁜 언어에 관한 얘기입니다.
  우선 한티어에는 새나 물고기로 번역할 수 있는 낱말이 없다고 합니다. 물고기도 없지는 않을테고 새라는 말이 없다는 건 의외입니다. 그 대신 한티어는 80% 정도가 동사라고 하네요.
예컨대 앉다라는 단어를 보면 통나무 위에 앉다, 땅위에 앉다, 그루터기에 앉다가 다 다르다고 합니다, 또 곰이 크랜베리 숲을 걸을 때 내는 소리, 오리가 물 위에 조용히 내려 앉는 소리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삶과 언어가 얼마나 자연과 함께 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책의 저자인 안나 레이드는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였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타타르족과 한티족, 부랴트족과 투바족, 사하족 등 아홉 개의 대표적인 민족을 찾아가 인터뷰와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6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들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러시아에는 모두 195개의 민족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한티족에게 ‘풍부’라는 단어는 ‘산딸기가 많다’는 뜻이고, 행복은 ‘내 맘이 스스로 즐겁다’는 뜻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뜻풀이도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코사크족을 앞세워 정복에 나서면서 이들에게도 서쪽의 문물이 들어옵니다. 언어도 새롭게 생겨나죠 그 가운데 하나인 모자는 한티족에게 이런 의미입니다.
 "비를 맞지 않게 해주는 위쪽이 넓은 나무"
그럼 여기서 퀴즈 하나. 한티족이 말하는 “물이 고요히 고여 있는 웅덩이”는 뭘까요?
 답: 사진(고요한 웅덩이에 비친 모습이나 풍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텐데 한티족에겐 거울도 같은 뜻일지 모르겠네요)

 인디언들은 이름을 어떻게 짓나

 시베리아 소수민족과 인디언의 운명 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한뿌리에서 왔다고 하니 그 인디언의 언어 그리고 이름에 대한 얘기를 잠깐 더 할까 합니다. 
 라코타 인디언의 문화와 정신 지혜를 담고 있는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 (지은이 조셉 M. 마셜3세) 책이 있습니다. 지은이 마셜 3세는 라코타 인디언으로 책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조상들의 삶과 지혜를 얘기해주는 형식으로 돼 있습니다. 책 제목은 이런 뜻이 있습니다.
  “만일 네가 그 바람이 너를 그냥 스치고 지나가게 하는 방법을 익히기만 한다면 너를 쓰러뜨릴 수도 있는 그 말들의 힘을 없애버릴 수 있어. 바람 같은 그 말들이 너를 화나게 하고  자존심을 건드리게 하는 일 없이 그냥  지나가게 하면 그것들은 네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할 거야.”
 “겸허한 사람은 대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걷기에 앞길을 잘 볼 수 있어서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는 일이 드물다 . 그런 반면,  순간의 영광에 도취해서 턱을 바짝 세우고 걷는 오만한 사람은 앞에 펼쳐진 것들보다는 찰나적인 것들에만 신경을 쓰기에 종종 땅바닥에 자빠질 것이다.”
 그 마셜 3세의 또 다른 책 <Keep Going>에는 인디언들이 이름을 갖게 되는 과정에 대한 얘기가 있다고 합니다.  <늑대와 함께 춤>(케빈 코스트너 주연 1990년)을 이라는 영화를 통해 인디언들의 이름을 알게 됐습니다만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이름은 매우 색다르고 재미 있습니다.
 예컨대 '늑대와 함께 춤을' 처럼 ‘늙은 매’,‘붉은 잎’ 등을 보면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존재가 자연의 지배자이기보다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그런가 하면 ‘주먹 쥐고 일어서’ ‘오래 걷는 자’와 같은 이름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지어주는 고유한 이름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있는 '호'같은 것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점은 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이름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는 칭호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예시 중에 하나를 보면 ‘붉은 잎’ 이라는 한 인디언은 나중에 ‘오래 걷는 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거기엔 나름의 유래가 있습니다. 붉은 입은 어느날 외부의 질병에 죽어가는 마을 사람들을 살리고자 이웃마을로 급히 약을 구하러 갑니다. 그는 눈폭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아주 먼 길을 걸어 치료약을 가져와 많은 마을 사람들의 질병을 낫게 했습니다. 그는 그 뒤 마을 사람들로부터 ‘오래 걷는 자’란 이름을 새로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공동체를 위해 자기 희생을 감내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존경의 의사를 이름에 담아줍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이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끊임없이 인정받고 깨우치는 과정 중에 얻게 되는 영광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치만 그건 아주 평범한 이름입니다. ‘우리들의 영웅’과 같은 결과론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래 걷는 자’라는 이름에는 자연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그 행위의 과정을 소중히 보는 그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붉은 잎’의 새로운 이름은 그가 한 일을 보자면 오히려 '생명을 준 사람'이나 '사람을 살린 자'가 더 어울릴 수도 있을텐데 그들은 그저 '오래 걷는 자'란 이름을 붙여준 겁니다. 그게 더 영광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부족민에게는 그가 약을 구해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보다 눈폭풍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왔다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과 언어는 이처럼 그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사라지고 있듯이 언어들 역시 대부분은 사라졌습니다. 다만 그 인디언의 말들은 미국의 일부 주 이름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와이오밍은 대평원이란 뜻의 인디언 말이고, 텍사스와 다코타는 친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네브라스카는 잔잔한 물결이란 뜻이고, 오클라호마는 붉은 사람, 켄터키는 미래의 땅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세계에 알려진 언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자연에 깊이 뿌리내린 아주 풍부한 내용을 자랑하던 문화, 지역 생태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지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자연 속에서 자연의 한계 안에서 살 수밖에 없던 생태적 삶도 사라져 버렸으니 그 언어, 그 이름을 통해 그 역사와 오늘의 모습 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현실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바이칼과 훕스굴이라는 말과 그 신화

  바이칼은 시베리아와 몽골의 접경지에 있는 바다 같은 호수입니다. 바이칼은 약 2천5백만-3천만년 전에 형성된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담수호(淡水湖)입니다. 시베리아를 러시아라고 보는 건 3~4백년 전의 일이니, 바이칼의 역사에서 보면 어찌보면 하룻밤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베리아에는 많은 민족들의 흥망성쇄가 있었고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이칼은 저마다의 이름으로 그에 맞는 뜻이 있었을 겁니다. 예컨대 바이칼은 몽골어로는 바이깔이고 깔은 바다라고 합니다. 바이깔은 ‘밝은 바다’이며 ‘빛나는 바다’라고 하네요.  시베리아의 또 다른 유목민족인 타타르족들의 언어로 바이칼은 바이쿨이고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바이칼은 담수호의 호수이지만 그건 오히려 바다입니다. 그에 비하면 동해는 바다이지만 남북한 일본 러시아 등에 둘러싸인 호수 같습니다. 바이칼이 바다 같은 호수라면, 동해는 호수 같은 바다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은 뭘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한자의 이름 명(名)자가 만들어지게 된 뜻 풀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명이라는 글자는 저녁 석(夕)에 입 구(口) 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저녁이 돼 어두워지면 서로 얼굴을 분간하지 못하니 입으로 말해 자기가 누군지를 알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란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로 알리는 것입니다.
  그럼 스스로를 알리지 못하는 것들은 어떨까요?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줘야 합니다. 잘 알려진 시로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없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불러줘야 합니다. 따라서 실체는 하나이지만, 누가 그걸 불러줘야 하는지에 따라 다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는 원래 초모랑마였습니다. 티베트어로 그 말뜻은 세 번째 여신(대지의 신들인 네 봉우리 가운데 세 번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에베레스트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858년 인도의 측량국장이었던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에서 따온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측량국장의 이름인 에베레스트는 알아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초모랑마는 모릅니다.
  백두산도 그리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현지 여행 안내인들 사이에 백두산이라는 이름을 두고는 여러 우스갯 소리가 있습니다. 실제는 봉우리가 늘 눈에 덮여 있거나 구름에 가려 있어 하얀 머리산(白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지만, 백 번 가서 두 번 본데서 백두산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관광객들이 백두산 날씨가 어떠냐라고 물을 때가 제일 곤혹스럽다고 합니다. 백두산 날씨는 가보기 전엔 누구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름엔 천지 보기가 쉽지가 않다는데 그래서 하루에도 날씨가 ‘백두’번 변한다고 백두산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천지를 못 본 사람도 ‘천지’고 본 사람도 ‘천지’라서 천지라고 한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러나 백두산에 가면 백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長白山, 창바아산 일색입니다. 백두는 과거의 기억이 되고 있으며 이제 중국인들에 의해 장백산(창바이산)이 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사물은 언어 이전에 존재하고 독립적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명칭은 그 사물을 지배합니다. 영토주권을 둘러싼 국제 분쟁에서 이름을 부르는 지명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되는 이유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라 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저 창바이산을 백두산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을까요?

 바다와 같은 호수 바이칼과 어머니의 바다 흡수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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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_ 훕스굴 바이칼 국경통로

  바이칼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바이칼 할아버지는 336명의 아들과 어여쁜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다. 바아칼은 앙가라를 이르쿠트라는 청년에게 시집보내려 마음을 먹었는데 , 바이칼에 사는 갈매기들은 앙가라에게 멀리 북쪽에 있는 예니세이라는 멋진 용사가 있다고 속삭여주었다. 그때부터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 챈 바이칼은 딸을 감시하였고, 마침내 그녀는 아버지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을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칼은 잠에서 깨어나 놀라서 큰 바위를 집어던져 앙가라의 하얀 목에 맞혔고, 그녀는 그만 죽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앙가라강은 늘 예니세이를 그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이칼 호수는 336개의 하천(강)이 바이칼 호수로 유입되는 데 호수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은 오직 앙가라강이라고 합니다. 이 앙가라강은 이르쿠츠크 시를 관통해 예니세이에 합류해 긴 여정을 북극해의 카라해에서 마친다고 합니다.
   바이칼로 가는 길은 여럿이 있습니다.  우리처럼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몽골종단 열차를 타고 울란우데를 거쳐 바이칼로 오는 코스도 있습니다. 하루 여정의 몽골 종단열차로 몽골 북부의 수흐바타르-캬흐타(알탄불락-나우시키) 국경을 넘어 4~5시간을 달리면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만나는 브리야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입니다. 여기서 이르쿠츠크로 오는 길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오는 길과 같습니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가면 3시간이면 울란바타르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바이칼과 몽골은 좀 멀게 느껴집니다. 그건 지금의 국경을 불변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브리야트족도 넓게 보면 몽골족의 하나입니다. 울란우데, 울란바타르라는 지명을 보더라도 현재의 국경이 인위적으로 이들 지역을 갈라놓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울란은 붉다라는 뜻이고 바타르는 영웅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울란우데는 우데가 문(관문)이라는 뜻이라 하니 ‘붉은 문’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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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을 통해 보이는 훕스굴의 모습
  
  제가 몽골의 아름다운 호수 훕스굴과 그 신화를 얘기하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붉은 영웅의 도시 울란바타르 중심에는 툴(Tuul)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툴 강을 거슬러 가면 그곳엔 바이칼 대신 또 다른 더 이국적인 이름의 웁스(Uvs), 훕스굴(Khövsgöl), 멋톨 등 2천개가 넘는 누르(nuur 호수)들이 투명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다고 합니다. 흡수굴은 웁스 누르에 이어 몽골서 두 번째로 큰 제주도의 1.5배 면적의 호수로, 해발 1,645m의 높이에 있으면서도 아시아에서 가장 깊은 호수라고 합니다.
 물론 바이칼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 풍광만큼은 놀랄만큼 뛰어난 듯합니다. 거대한 타이거 숲지역이며 수정처럼 맑은 호수와 초원이 잘 어우러진 천혜의 원시자연을 가진 곳에 말과 양떼 그리고 수많은 야크들을 볼 수가 있는 데 몽골의 스위스로 불린다고 합니다. 지난 2003년 김인자라는 시인이 몽골을 거쳐 바이칼까지 배낭여행을 하면서 쓴 기행기는 이 훕스굴을 ‘낙원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부르더군요. 이 분은 몽골을 한달여 그것도 지도 하나 들고 지프 타고 돌아다녔으며, 그 가운데 일주일동안은 몽골서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넘어와 이르쿠츠크와 바이칼을 둘러보고 갔습니다.
  인터넷을 기웃거려 보니 몽골인들은 흡수굴을 ‘어머니의 바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훕스굴에도 강과 연관된 말 그대로 바이칼의 신화와 같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강으로 서로 연결된 두 호수의 신화는 서로 이웃한 마을들의 얘기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실제로 몽골 사람들은 바이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훕스굴을 ‘작은 바이칼’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옛적에 100개의 강이 흘러들던 훕스굴이 바다가 되려고 강의 신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아흔아홉의 신들이 모였으나 한 신이 오지 않아 끝내 바다가 되지 못하였다.
 그때 오지 않았던 한 신의 강이 에끄인 골(Egiin gol)이며, 현재도 홉스굴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강으로 남아 있다. 아흔아홉의 강이 모여 하나의 강으로 빠져나가 어디로 가는가. 이곳에서 400㎞ 떨어진 바이칼로 간다. 바이칼은 바다인가. 아니다. 홉스굴의 맑은 물은 에끄인 골을 통해 무려 1,500㎞를 돌아 ‘풍요로운 호수’ 바이칼로 흘러드는데,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호수 바이칼 역시 한 줄기의 강(앙가라)로 물을 내어놓는다.”
 이처럼 예니세이, 셀렝가 같은 시베리아의 주요 강들 또한 몽골에서 발원하는 것이니 그동안 몽골하면 초원과 고비사막만을 떠올렸는데 몽골은 호수의 나라인 셈이고, 시베리아와 몽골은 다른 나라로 구분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으로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지금 시점의 시각에서만 현실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무지했던가!! 저만 그런지도 모릅니다)

 몽골을 얘기하면 징기스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알혼섬에 대해서는 샤먼의 고향이자 징기스칸이 묻혀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김인자 시인의 기행기 31번째 글에는 징기스칸에 대한 이런 글이 나옵니다.  많이 들어본 얘기입니다만 좋은 글이기에 인용했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그림자 외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배운 것이 없고 힘없다고 탓하지 말라./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쓸어버렸다./나를 극복하자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김인자 시인의 32편의 여행기는 경인일보에 연재됐습니다. 2003년에 있었던 기행인지라 지금 오늘의 몽골과는 시간의 변화를 감안해야 할 듯 합니다만 맛깔스런 글 솜씨와 사진이 곁들여진 그 분의 기행기를 읽노라면 몽골에 대한 꿈을 꾸게 됩니다.
  다음 주소 (http://www.isibada.pe.kr/)에 가면 그 내용을 볼 수 있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없어졌더군요.

 또 다른 북방으로의 여정-오호츠크해

  우리의 북방으로 가는 길의 여정이 바이칼에서 머물 수는 없습니다. 동해에서 북쪽을 향해가다 서쪽으로 가지 말고 더 북쪽으로 아니 북동쪽으로 갈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다른 강제징용의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사할린을 넘어서면 오호츠크해 그리고 캄차카입니다. 그 아래로는 길게 늘어선 56개의 섬(islands)과 바위섬들. 슬픈 열대가 아닌 슬픈 열도 쿠릴 열도가 있습니다. 이제 ‘동해에서 바이칼까지’가 아니라 ‘동해서 오호츠크해까지’를 꿈꿔 봅니다.
 그곳은 또 어떤 곳인가요. 세계에서 화산이 가장 많은 곳, 살아 숨쉬는 땅이라는 캄차카.  강원도민일보의 대기자였던 함광복 선생은 사할린을 비롯해 캄차카와 쿠릴열도 그리고  오호츠크해가 있는 북방의 그곳을 이렇게 말합니다.
 “태평양과 오호츠크해 두 대양의 경계선, 늘 화산 연기가 피어올라 ‘스모그’란 뜻 이름을 갖고 있는 쿠릴열도, 그 가운데 가장 먼 섬. 한 탐험선 선장이 ‘지구상에서 가장 지구적인 땅’이라고 항해일지에 기록한 - 질식시킬 듯한 안개, 찬 물보라를 안고 달려드는 쉴 새 없는 폭풍우, 쉬지 않는 화산 폭발과 부글거리는 유황 벌판, 끊임없는 지진과 해일, 맹독성 해초와 역겨운 냄새, 극성스런 흡혈 모기떼 - 불과 얼음의 섬.”
 인터넷에서 주저리 주저리 주워 담아도 시베리아를 몰랐듯이 우리는 그곳을 알 수 없을 겁니다.  가봐야 합니다. 갈 수 있으려나? 어떻게 가지? 망설임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인 이홍석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용기가 없다면 가슴시린 만남도 없다”

3.  유라시아 대륙의 역동적 변화 

  우리가 가려는 북방, 좀 더 구체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변화가 거대한 흐름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을 전후해서입니다.
  남쪽이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5.24조처를 통해 북으로 가는 문을 걸어 잠근 그 때 대륙은 바다로의 길을 열고 또 스스로 대륙으로의 길을 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후진타오 4세대 지도부가 지역균형발전 정책인 동북노후 공업기지 진흥계획을 수립한 것은 2003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동북진흥 전략이 북중 경제협력으로 본격화한 것은 2009년 8월부터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중앙정부는 지린성정부가 여러해 전부터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검토해 온 창지투(창춘 지린 투먼) 개발개방 계획을 수용해 두만강지역 합작개발 계획 요강(창지투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때부터 창지투 개발개방 선도구는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됐습니다. 아울러 동북진흥 전략 초반부터 연해지역 경제벨트를 구축해 온 랴오닝성도 2010년부터 지린성과 협력해 압록강 경제벨트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5월, 2010년 8월 그리고 2011년 5월까지 1년여 사이 3번에 걸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은 이런 동북진흥 전략의 구체화를 북중 협력과 결합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합의의 결실이 2011년에 6월에 정식으로 가동된 북한의 황금평, 위화도 특구 설치와 나선경제특구의 공동개발, 공동관리였습니다.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던 그는 1년 동안 세 차례씩 국경을 오가며 열차 안에서 숙식을 하며 6000㎞의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2011년 8월의  러시아 울란우데에서의 북러 정상회담은 4천여km에 이르는 장거리 열차여행이었습니다. 2011년 갑작스럽게 사망했기에 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대장정이 됐습니다. 그의 중국, 러시아와의 4번에 걸친 이 정상회담은 그가 젊은 후계자에게 남겨주려는 미래가 ‘북방 협력’이었음을 웅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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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바다로 가는 길을 열어놓은 북방협력은 이제 변방의 바다 동해를 새로운 변화의 물결로 출렁이게 하고 있습니다. 분단은 비무장지대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땅만 아니라 바다도 갈라놓았습니다. 동해를 갈라놓고 대륙으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중·러의 대륙세력과 미·일의 해양세력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분리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해는 이제 대륙과 해양을 연결시켜주는 입구이자 출구인 북중러의 두만강 삼각지역을 핵심거점으로 삼아, 새롭게 열리는 북극해 항로의 또 다른 관문이 되면서 변방의 바다에서 새로운 미래의 공간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북의 동해안 지역, 중국의 지린성,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 일본의 서쪽 지역이 서로 협력하는 환동해 경제권을 전망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중국의 일대일로와 북방협력

  이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북방 협력의 거대한 흐름 중심에는 중국이 있습니다.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구 13억을 넘어선 중국과 육지에서 국경을 접한 국가는 14개국입니다. 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해상 이웃국가’는 6개국입니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 등의 서부 대개발, 중부 6개 성(省)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한 ‘중부굴기(中部崛起) 및 동북 3성의 동북진흥전략 등 내부의 균형발전을 위한 전략과 이들 주변 20여개 이웃국가들과의 국경협력을 지역적 협력의 틀로 묶어내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일대일로입니다. 대륙루트는 신실크로드 경제벨트, 해양루트는 21세기 해양실크로드입니다.
 중국은 중앙아시아 5개국의 최대 무역파트너이자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 최대수입국입니다. 또 시진핑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14년 5월 ’세기의 딜’로 불리는 동부라인 천연가스공급 협상에 합의했습니다. 11월에 원칙 합의한 서부라인까지 포함하면 러시아가 앞으로 중국에 공급할 천연가스는 연간 128 bcm(10억 입방미터)입니다. 이는 러시아가 유럽연합에 공급하는 물량의 절반에 맞먹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미 2013년 중국과 이웃 주변국가의 무역액은 1조3천억 달러에 육박해 중국과 미국 및 유럽의 무역총액을 앞질렀습니다.
 중국 동부 연안지역에서 전개된 점→ 선→ 면으로의 이른바 중국식 개혁 개방의 발전과정은 서부, 중부, 동북부 개발로 확산되고 이제 중국의 시진핑 5세대 지도부에 의해 신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구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상으로는 중앙아시아, 몽골, 러시아, 북한 등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해상으로는 동남아 스리랑카 인도 등 서남아를 거쳐 중동으로 이어지는 육지와 바다를 연결해 세계경제의 커다란 순환구조를 형성하겠다는 전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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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질서의 미래를 좌우할 지역주의

 유라시아 대륙의 이런 변화와 새로운 패권국가로서의 중국의 등장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핵심적인 요소일 겁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을 지내고 러시아대사를 하셨던 정태익 외교협회 회장은 <남북관계를 넘어선 새로운 북방협력모델의 모색>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0∼30년 후 동북아 미래를 좌우할 추세와 변수는 무엇일까? 단순히 북한의 체제변화인가? 아니면 중국의 팽창과 그에 따른 동북아 신질서일까?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추세로 본다면 동북아의 미래는 정치와 경제라는 두 가지 상호 연관된 요인에 의해 좌우될 터인데 먼저 지정학적 측면에서 성장 국면에 있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불가피한 추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주변국과 어떤 갈등을 야기할지 또는  어떤 협력을 만들어 갈 것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화해서 본다면 동북아에서 민족(국가)주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의 갈등과 대결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는 중국을 포함해 한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 내에서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지역주의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인가에 의해 좌우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되풀이해온 역사와 영토 문제로 인한 민족주의의 부상은 지역주의 탄생을 저해할 것이기에 그는 동북아의 미래는 민족주의인가, 지역주의인가의 향배에 따라 다른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북방으로 가는 길, 북방과의 협력을 생각할 때 또는 북방협력으로의 길을 열어가는 남북한의 통합과 통일을 얘기할 때 그것은 닫혀 있는 민족주의가 아닌 열려 있는 지역협력의 과정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태호 선임기자 kankan@naver.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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