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시대가 끝나가지만 이건희 체제의 악습은 여전했다. 이번에는 사찰이다. 삼성의 사찰은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삼성은 그간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신세계나 CJ 등 범삼성가 고위임원을 사찰하다 들통 났다. 1995년 이재현 CJ회장 사찰부터 최근 삼성물산의 민원인 사찰까지 삼성의 집요한 사찰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1. 사찰하려고 주택까지 샀다?이재현 CJ 회장은 삼성의 주요한 사찰 대상이었다. 삼성이 이 회장을 사찰하다 들통난 것만 두 번이다. 1995년 삼성은 이재현 CJ 회장이 살던 바로 옆 주택을 사들여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설치했다. 이 회장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펴보려는 목적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삼성은 “경비용”이라고 답했다. 논란이 되자 CCTV는 철거됐다.
이 회장에 대한 사찰은 17년이 지난 2012년에 다시 불거졌다. 삼성물산 김아무개 차장이 이 회장을 미행하다 이 회장 수행원들에게 붙잡힌 것. 당시 CJ그룹은 며칠 전부터 미행 사실을 눈치 채고 일부러 접촉사고를 냈다고 밝혔다. 접촉사고 이후 경찰이 출동하면서 김 차장의 신원이 밝혀졌다. 삼성은 “이 회장 자택 근처에 필지 개발사업을 컨설팅하기 위해 갔다”고 해명했지만 검찰은 대포폰과 렌터카를 이용한 미행이라고 결론 내렸다.
1995년과 2012년 모두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던 때였다. 1995년은 삼성과 CJ그룹의 계열분리가 진행되고 있었고 2012년에는 이재현 회장의 아버지인 이맹희 전 재일비료 회장이 동생 이건희 회장에게 소송을 걸었다. 이병철 전 회장이 남긴 삼성생명 주식 등 차명 재산을 이건희 회장이 단독으로 가지고 있다며 법정 상속분대로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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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노컷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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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법 복제 휴대폰으로 위치추적“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고 했던 선대 회장의 뜻 탓인지 노조에 대한 사찰도 끊이지 않았다. 2004년 삼성SDI 노동자들은 약 1년간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누군가가 불법 복제 휴대전화를 이용해 ‘친구찾기’ 서비스에 가입한 다음 이들의 위치를 추적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은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검찰도 이 같은 사실은 인정했다. 삼성을 내부고발한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도 “구조본 인사팀장이 나에게 삼성 쪽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위치추적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노동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아직 처벌 받은 사람은 없다. 위치 추적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중지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 ‘누군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3. 미행 들키자 차에 사람 매단채 달리기도2011년에는 삼성SDI 직원들이 해고자를 차에 매단 채 달리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한겨레에 따르면 미행을 눈치 챈 해고자 김아무개씨는 일부러 근처 아파트로 들어간 뒤 시동을 끄고 의자를 뒤로 젖힌 다음 운전석에 누워 밖을 살폈다. 그러자 미행 의심 차량에서 사람이 내려 김씨의 차량을 살피다 누워있는 김씨를 발견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직후 김씨가 미행 차량을 가로막고 “누구냐. 신분을 밝혀랴. 왜 미행했냐”고 소리지차 미행 차량은 그를 차량 보닛에 매단 채 도주를 시도했다. 이는 이를 목격한 택시운전사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삼성 SDI는 미행 사실은 인정했지만 고의로 김씨를 사찰한 것은 아니며 해고자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밝혔다. 김씨는 노조를 설립하려다 2000년에 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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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그룹의 노조파괴 전략을 규탄하는 노동시민사회법률단체 참가자들이 지난 2012년 10월 22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오른쪽 두번째가 조장희 삼성지회 부지회장. 사진=이하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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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낮의 추격전, 도착한 곳은 삼성본관비슷한 시기 에버랜드에서 노조를 설립한 이들도 미행을 당했다. 노조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 근처에 못 보던 차량이 계속 보였다. 조장희 금속노조 삼성지회 부지회장은 “(미행 의심 차량에) 사람이 타고 있어서 창문을 내리게 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바로 도주했다”며 “(감시라는)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추격전이 시작됐다.
조 부지회장은 미행 의심 차량을 따라가며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해당 차량을 두들기고 소리를 높이며 욕을 했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화를 내야 한다. 그런데 화를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추격전 끝에 도착한 곳은 삼성전자 본관이었다. 차에 타고 있던 이들은 삼성 직원이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이후 재판에서 이들은 에버랜드 신문화팀 직원임이 밝혀졌다.
5. 범삼성가인 이마트에서도 사찰은 일어났다이 같은 일은 범삼성가인 신세계 이마트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2013년 초 이마트가 전수찬 이마트 노조 위원장과 주변 인물 34명의 사생활까지 감시하고 이들의 데이터를 정리해 내부 보고한 문건이 발견됐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이마트는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노조 사이트 회원가입을 조회하는가 하면 ‘문제인물'(MJ)’ 세 명을 지목해 그들과 친한 사내 주변 사람들까지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A: 전수찬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며, 두 명이 점포 외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자주 목격됨.
B: □□□와는 사이가 좋지 않으며, 전수찬과는 개인적인 자리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됨.
C: △△점에서 □□□와 같은 팀에서 근무했으며 △△점에서 사이가 급진전됨.
D: □□□의 영향으로 회사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으며 부정적인 성향으로 변함.
6. “차들 주차장에 세워놓고 OO주변에 모이는 것 같습니다”삼성의 협력업체 직원들도 사찰에서 자유롭지 않다. 원청의 지시라는 근거는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삼성의 무노조 경영 방침이 어디 가겠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경북에 위치한 한 삼성전자서비스 센터 박아무개 팀장은 지난 2013년 말께 누군가에게 보냈어야 할 문자를 조합원에게 잘못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차들 주차장에 세워놓고 OO(조합원 이름)차 몰고 어디간 것 같습니다. OO주위에 모이는 것 같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조합원이 “니 누고. 내 사장 아닌데 문자 어디로 보냈어요?”라고 묻자 “미안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잘못 보낸 것 같습니다. 수고하세요”라고 답한다. 삼성전자서비스 지회는 이 같은 일이 증거만 없을 뿐이지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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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관.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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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노동자를 납치한 적이 있다”는 전 삼성 직원의 고백삼성은 사찰에 대해 늘 직원 개인의 일탈이라는 식의 사과만 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2010년대 들어서는 회사 지시로 사찰을 했다는 ‘가해자’들이 나타났다. 삼성SDI 부산사업장에서 노사업무를 맡았던 최아무개 차장은 2012년 권영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을 만나 이 같은 내용을 증언했다. 녹취록을 보면 그는 울산SDI에서 노조를 설립하려던 송수근씨 미행을 담당했으며 도청 또한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씨는 이후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모두 거짓이라며 말을 바꾸었다.
하지만 최씨와 함께 근무했던 차아무개 삼성SDI 전 총무차장은 2013년 미디어오늘과 만난 자리에서 “모두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이 2001년 논란이 됐던 ‘삼성SDI 부산사업장 납치사건’의 당사자라고 증언했다. “(노동자를) 잡아서 차에 태워 2박 3일을 데리고 다녔다. 중간중간 어디 도착하면 ‘도착했습니다’고 보고했고 회사 쪽 상무와 인사부장도 와서 면담을 했다.”
8. 하다하다 이제는 민원인까지?최근 논란이 된 사찰은 삼성 노동자도 아니고 범삼성가 사람도 아니다. 삼성에 민원을 제기한 일반인이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삼성물산 최아무개 대리는 지난 13일 새벽부터 민원인의 집 근처를 서성이며 “(대상자의) 불이 아직 안 커져 있음” “현재 민원인 세대 불이 커졌습니다” “민원인 이동중, 하얀점퍼 검은바지 흰 운동화” 등의 내용을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 공유했다. 대화방에는 삼성물산·에스원 등 삼성 계열사 직원 27명이 있었다.
9. 삼성의 사찰본능, 왜 때문에?이쯤 되면 ‘사찰본능’이라 할 만하다. 사찰이 발각될 때마다 삼성은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삼성은 사찰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삼성인권지킴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는 삼성의 불법 행위에도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삼성 장학생’을 들었다. 삼성 장학생은 삼성의 ‘떡값’을 받은 정치인·검찰 등을 일컫는다. 사법부에 삼성 장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사법부는 삼성 비자금은 물론이고 이재용 남매에게 경영을 승계하기 위해 에버랜드 주식형 사채를 발행한 것도 모두 무죄로 판결했다”며 “그러니 삼성은 더 대담하게 불법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 말처럼 삼성 사찰만 해도 강하게 처벌받은 사례는 없다. 이재현 CJ회장을 미행한 이들이 ‘불안감 조성’ 혐의로 벌금 10만원씩을 부과받은 게 그나마 손 꼽히는 처벌 사례다.
류하경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 모임 변호사는 이 같은 ‘봐주기’가 수십 년에 걸쳐 죽 이어져왔다고 지적했다. 류 변호사는 “사카린 밀수사건부터 불법적인 경영승계까지 삼성은 늘 국가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있었고 심지어 민주정부도 삼성을 감쌌다”며 “이런 역사를 보면 삼성의 초헌법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정황이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사건만 해도 기업이 민간인을 사찰했음에도 경범죄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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