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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파견 반대투쟁’ 전술의 한계와 근원

 


  • 기자명 김정호 북경대 박사
  •  
  •  승인 2021.04.1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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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14)

3. 지난 시기 비정규직투쟁에 대한 평가와 전망}
1) 그간 비정규투쟁의 성과와 한계
2) ‘불법파견 반대투쟁’ 전술의 한계와 근원

2) ‘불법파견 반대투쟁’ 전술의 한계와 근원

― 주요모순과 기본모순의 불철저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노선상의 오류

우리는 비정규직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작업을 그동안 제2단계 ‘대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투쟁’을 이끌어 왔던 ‘불파투쟁’ 전술에 대한 평가로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 2012년 11월 16일 한 달째 철탑농성 중인 천의봉(사진 오른쪽)·최병승씨가 손을 높이 들고 있다.[사진 : 노동과세계]
▲ 2012년 11월 16일 한 달째 철탑농성 중인 천의봉(사진 오른쪽)·최병승씨가 손을 높이 들고 있다.[사진 : 노동과세계]

먼저 성과적 측면을 보자면, 무엇보다 비정규직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한 점을 들 수 있다, 불법파견 반대투쟁은 제조업에서의 사내하청 노동이 불법이라는 현행법상 규정을 잘 활용하였다. 하청노조가 아직 실질적인 교섭권을 쥐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기관이 내린 불법파견 판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투쟁에 동참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정규직화가 머나먼 전망이 아니라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적 요구로 보이게끔 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열띤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자동차업종의 일부 대공장을 중심으로 정규직화가 실현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제조업 분야에서 사내하청 형식의 비정규직이 무분별하게 확산되는 추세에 일정한 제동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불파투쟁은 이와 함께 많은 한계를 보였다.

첫째, 투쟁전술의 측면에서 ‘법정투쟁’이라는 합법전술에 지나치게 치우침으로써, 기본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봉사할 수밖에 없는 사법부의 자의적 판단에 투쟁을 종속시키는 우를 범하였다. 사법부는 한편에선 ‘불법파견’ 판정을 내리면서도, 다른 한편 재판기간을 길게 잡고 최종 판결을 연기하는 등으로 불법파견을 자행하는 재벌들로 하여금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재판에 대응하거나 현장탄압을 자행할 수 있도록 방조하였다. 설령 노동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온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예외 규정을 인정하거나 판결에 대한 엄격한 집행력이 뒷받침 되지 못함으로써 그 효력을 크게 반감시켰다.

불법파견과 관련한 한차례 소송이 진행되기 위해선 고용노동부의 불법판정이 나온 후에도 다시 1심 재판에서부터 최종 대법원 판정까지는 대략 5년 이상이 걸린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경우를 보면,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04년 9월에 시작한 법정소송이 2010년 7월 하청노동자 최병승 씨가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판결을 얻기까지는 무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에 소송을 제기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다른 직장을 찾아 자발적으로 떠나든지, 아니면 사측이 제시하는 ‘재입사’라는 불리한 조건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후자의 경우 기존 경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신입사원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집단소송제’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개별적인으로 최종 승소 판결을 받을 지라도 그것이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설령 똑같은 조건일지라도 처음부터 이 같은 소송을 밟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예외 규정과 복잡한 법조항을 통해 자본가들은 조금만 기존의 형식을 바꾸어도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찾을 수 있다. 제조업 사내하청 비정규직이 최근 잇달아 불법판정을 받자, 자본은 최근에는 ‘불법’ 논란을 피하기 위해 ‘촉탁직’ 이라는 형식의 직접고용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실례이다. 촉탁직은 여전히 비정규직이라는 본질을 간직한 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불법파견을 매개로 한 투쟁은 그간 법정투쟁위주로 진행되면서 비정규직투쟁을 ‘정규직화’라는 눈앞의 개량적 요구에만 매달리는 투쟁으로 변질시켰다. ‘정규직화 요구’는 비록 대중성을 높이는데 유리하긴 하지만, 반드시 계급의식을 높일 수 있는 올바른 정치교육과 결합할 때만 조직화에 기여하는 등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결과가 말해주듯, 불파투쟁은 ‘정규직화’ 요구 자체에만 매달림으로써 정작 투쟁에 동참한 대중들의 계급의식을 높이는 데는 별반 기여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오히려 정규직화가 달성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어렵사리 획득한 개량적 성과물을 지키기 위해 전선으로부터 이탈하는 등의 역작용을 낳았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선 정규직화 이외의 다른 모든 요구는 사소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셋째, ‘불법파견’이라는 법정투쟁을 매개로 한 전술은 필연적으로 비정규직투쟁을 1차 ‘사내하청’ 문제만으로 협소화시켰다. 그 밖의 훨씬 광범위한 사외 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소외시키는 단점을 노출한 것이다. 이 전술에 의거할 경우 심지어는 하청노동자가 가장 많은 조선업종 조차 처음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사법기관에 의한 불법파견 판정은 불법성이 가장 명확한 곳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라인 작업을 하는 자동차와는 달리, 팀제로 운영되는 조선소는 사내하청이 합법으로 판정될 가능성이 높게 된다. 거기에다 조선업종은 이직률이 높아서 정규직화 대상이 되는 2년 이상 근속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넷째, 이처럼 비정규직투쟁이 단순히 ‘정규직화’라는 개량적 요구에만 머물면서, 정작 투쟁발전의 관건인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연대를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물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투쟁은 양자가 공동의 적에 맞선 연대의 대상이자 동지가 아니라 ‘경쟁자’로 바뀌도록 만들었다. 정규직화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밥그릇’을 줄일 뿐이라는 인식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자본의 충실한 이익을 대변하는 사법부가 최근 들어 잇달아 제조업 사내하청 고용에 대한 불법판정을 내리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그것은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양산으로 인해 사회질서 전반의 안녕을 해칠 것을 염려한 통치계급 차원의 최소한의 결단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재벌들의 핵심 전략사업장들이 더 이상 노동 분규에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전체 한국경제의 기반을 흔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도 깔려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가보면, 사법부의 이 같은 판결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의 불파투쟁 전술을 역으로 이용한 ‘미혼전(迷魂戰)’을 펼쳤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군사전략 상 나오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암도천창(暗度陳倉)5)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비정규직운동은 이미 이 전술로 인해 15년 이상 본 궤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그동안 비정규직은 더욱 확산되어 산재사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법정소송에 목메는 동안 아까운 시간만 흐른 채 자본과 통치권력은 자신들의 전략적 의도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은 일부 ‘정규직화’라는 사소한 개량의 성과를 챙기긴 했지만, 자본가계급은 더 큰 이득을 챙겼다.

▲ 민주노총이 2018년 9월 2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4층에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투쟁 지지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기아차는 즉각 직접교섭에 나와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 : 노동과세계 변백선]
▲ 민주노총이 2018년 9월 2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4층에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투쟁 지지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기아차는 즉각 직접교섭에 나와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 : 노동과세계 변백선]

이제 이상의 한계를 낳게 한 불파투쟁의 이론적 근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불파투쟁의 전술적 오류는 결코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 뿌리를 찾자면 그것은 초기부터 비정규직운동에 헌신해 오며 그 방향성을 제시해온 일부 좌파 활동가들의 인식과 관련된다.6) 그들은 처음 90년대 초 개별적으로 현대중공업, 아시아자동차 등의 비정규직 투쟁에 개입하였는데, 1998년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이하 ‘전국모임’)을 결성한 이후에는 공동행동을 모색하게 된다.7) 이들의 첫 작품은 한국 최초의 비정규직노조인 ‘한라중공업’ 하청노조의 건설로 나타난다. 이들의 이 같은 활동은 당시에는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1998년 민주노총 2기 집행부인 이갑용 위원장 재임 시 ‘노동2국’이라는 비정규직 담당부서를 민주노총 내에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원래 전국모임은 기본적으로는 비정규직 활동가들의 정보교환과 논의를 위한 협의체였다. 그 때문에 어떤 전국적인 규율을 갖지는 않았으며, 2002년에는 내부 입장 차이로 인해 해산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했던 초기 활동가들과 이후 그들의 영향을 받은 후배 활동가들 사이에는 한국 비정규직운동의 방향과 관련한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2000~2001년 수도권 비정규직투쟁의 경험을 함께 평가하고 공유하였으며, 이후 2001년 대우캐리어와 광주 기아자동차 비정규직투쟁을 계기로 금속 대공장 사내하청 비정규직문제에 주목하면서 의식적인 활동가들의 배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2003년 아산과 울산, 전주 등지에서 일어났던 비정규직투쟁은 사실상 이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비정규직투쟁에 대한 관점을 평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8) 

그들은 애초 2000년대 초기 터져 나오기 시작한 비정규직투쟁을 보면서 상당한 희망과 기대를 품었었다. 비정규직투쟁이야말로 앞으로 대자본에 포섭되어 개량화된 정규직 노동운동을 대신해 새롭게 변혁운동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다. 다음 인용문을 보면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비정규직 운동을 고민하는 전투적 현장주의자들 사이에서 하청투쟁을 통해 정규직 운동질서를 혁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기도 했다. 2003년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건설투쟁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나온 <비정규직운동을 넘어 계급투쟁으로, 대공장운동의 혁명적 전진으로―남한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이란 문서는 대공장에 비정규직 투쟁을 도입함을 통해 해체되고 있는 선진노동자 운동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대공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공통의 이해는 적어도 노동조합 차원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이 벌어질 때 이에 연대하는 정규직 조합원들은 실천적으로 가장 계급적인 의식을 가진 부위일 것이며, 하청노조 건설을 통해 이들을 결집하고 대공장에 새로운 계급적 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일반적 기조로서 한국 비정규직문제를 이해했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전반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기조가 한국에서도 관철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국모임 활동가들은 비정규직 증가를 동시대 한국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인식했다.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를 단순히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라는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에 반대하는 전투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노동운동의 선도부분인 금속대공장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러한 운동의 최전선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10)

이 같은 시각은 비정규직문제를 자본주의의 큰 흐름 속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지는(일시적 현상이 아닌) 추세로 본다는 점에서 인식상의 선진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향후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으로 등장할 것을 일정 정도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이 아직도 비정규직문제를 단순한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들은 한국 비정규직문제를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으로만 치부함으로써 한국적인 비정규직문제가 갖는 특수성에 대해 간과한 한계 역시 지녔다. 

그들이 이처럼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에 대한 반대라는 시각에서 비정규직투쟁을 바라보는 것은, ‘재벌문제’라는 관점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공동이익을 찾는 노력을 제약하였다. 물론 한국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즉 대외의존적인 재벌체제라는 구조적 시각에서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든 자본주의 일반의 문제가 아닌 좀 더 구체적인 한국적 현실 속에서의 계기를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같은 인식상의 한계 때문에 그들은 비정규직투쟁의 전망과 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타격대상과 선동의 초점을 ‘신자유주의’에 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투쟁 대상을 모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선동을 추상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현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전망으로 이들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현장권력 쟁취’ 혹은 ‘총파업’과 같은 추상적이거나 당위적인 대안이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와는 직접 싸울 수가 없고, 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실질적으로 상징하는 ‘자본주의체제 일반’을 타도하자는 것은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투쟁 전망과 대상을 분명히 갖지 못한 투쟁은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성의 획득이라는 명목 하에 ‘정규직화’ 요구라는 자생성에 굴복하게 된다. 왜냐하면 본래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부정 내지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자본주의에 맞서 세계 동시변혁을 주장하는 극좌적 모험주의는, 대중의 눈높이로 자신의 요구를 낮출 수밖에 없는 자생성과 친척지간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상호 전환할 수 있는 변증법적 양극단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그들 좌파활동가들이 애초 높은 이상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불파투쟁을 반재벌투쟁이 아닌 ‘정규직화’ 요구 이상으로 끌어 올릴 수 없었던 근본 요인이다. 

일단 ‘정규직화’라는 대중의 눈높이로 투쟁목표를 낮출 경우 (의식적이든 의식하지 않았던) 그 다음에 ‘정규직’과의 연대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들 좌파 활동가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비정규직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선 정규직과의 연대는 필수 조건이었다.11)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비정규직투쟁에 동정을 보내다가도,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순간부터는 갑자기 냉담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며 심지어는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 이 같은 현상은 대우캐리어(2001년), 기아자동차(2004년), 현대자동차(2005년) 비정규직투쟁에서 공히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와 배치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비정규직운동을 자신들의 고용을 위협하는 ‘경쟁적’ 관계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특히 IMF시기 98년 구조조정을 한차례 겪은 후 정규직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는 당시의 패배주의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정규직이 일정 정도 존재함으로써 언젠가 닥쳐올 구조조정에 ‘방패막’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정규직들에게는 오히려 강하였다. 이 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리’ 앞에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는 추상적이고 창백하기만 하였다. 좀 더 계급의식을 촉발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공동의 이해를 매개로 하지 않는 한, 양자의 강고한 연대는 성사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파투쟁의 필연적 지향점인 ‘정규직화’를 목표로 한 투쟁은 정규직과의 연대를 공동의 계급적 적에 맞선 당당한 연대가 아닌, 한쪽의 ‘동정’과 ‘시혜’에 의한 일방적 행위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어느 선 이상으로 비정규직투쟁이 발전하게 되면 곧 양자는 ‘경쟁관계’로 전환되어 정규직의 견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정규직의 이 같은 예상치 못한 태도 변화는 결국 좌파 비정규직 활동가들을 실망시키고 심지어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렸다. 그들은 정규직들의 이 같은 ‘배신’ 행위에 대해 그들이 ‘노동귀족화’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 이론적 근거로는 한국 자본주의가 초국적 자본주의시대에 들어서 ‘최상층부’에 편입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구조조정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공장 노조의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포섭은 미래의 고용보장을 기제로 한 포섭을 넘어 회사와 실질적으로 이윤을 나누는 형태로 발전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주요한 수출제조업인 조선·자동차·철강·전자 산업은 초국적 독과점체제의 최상층부에 편입되었고, 지난 15년 동안 이들 산업에서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의 임금은 2배 가까이 올랐다. 현대차와 기아차 정규직 조합원들은 수년 전 평균연봉 1억을 넘었으며 다른 주요 제조업의 정규직도 그에 버금가는 상당한 임금 수준에 올랐다. 비록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것이긴 했지만 2000년대 이후 전반적인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확대에 이러한 고임금은 제조업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중산층적인 생활양식과 의식을 확산시키는 기제로 작용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성과급과 잔업·특근 수당이 총임금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임금체계에 의한 것이었지만,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임금은 기형적 임금체계와 그에 기초한 장시간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성과급과 우리사주 등 회사의 이윤과 연동된 임금구조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이해와 회사의 이해를 밀착되게 만들었다.”12)

결국 이들은 절망과 자포자기 상태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편 가르기에 나섰다. 전자를 노동귀족이라고 욕하는 것 외에는 달리 스스로를 안위할 길을 찾지 못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소위 비정규직 활동가임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규직 운동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같은 인식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일부 기회주의로 변질된 노조 지도부/현장정파와 다수 정규직 대중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모두를 싸잡아 ‘노동귀족’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변혁운동 발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전체 비정규직운동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현대자동차의 경우를 들어보자. 현대차노조가 금속노조 산하 지부로 전환한 직후인 2007년 6월 21일 제96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사내 비정규직에 대한 ‘1사1노조 재편’과 관련한 문제를 정식 다루었다. 원래 상급단체인 금속노조의 경우 ‘1사1조직 편재 원칙’을 공식 결정한 바 있다.

그러나 막상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자 내부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조합원이 될 경우 현장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논리였다. 예컨대 “금속노조의 규약은 전체 보편성이 기준이기 때문에 현재의 현자지부에 직대입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2년 후 지역지부로 편재되는데, 명확한 기준 없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으면 혼란이 생길 것이다.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찬성의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금속노조 규약 제정 대의원대회에서 1사1조직 원칙에 따라 비정규직, 사무직 해당 주체의 의견에 따라 조직 형태를 변경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보고안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조직편제안을 투표로 안건을 처리한 결과, 대의원 421명 투표에 211표 찬성, 210표 반대로 2/3인 281표에서 70표가 모자라 부결됐다.13) 지부의 조직 규약 관련한 개정의 경우는 과반수가 아닌 2/3의 찬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1사1노조’ 원칙이 뒤집어질 때도 대의원대회 표차는 그리 크지 않았고 과반수 이상이 찬성표를 던졌다. 적어도 상당수 대의원들과 현장 활동가들은 여전히 건강한 계급적 관점에서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지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약 당시 민투위 출신 활동가인 이상욱 집행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현장 대중들을 설득하였더라면 ‘1사1노조’ 원칙의 관철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그동안 한국 비정규직운동을 이끌어 온 좌파 활동가들의 오류의 근저에는 한국사회 주요모순과 기본모순에 대한 정확한 파악의 실패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들은 비정규직문제가 향후 한국사회에 있어 주요모순이 될 것이라는 올바른 인식을 하였지만, 그 본질과 관련해선 단순히 자본주의 일반의 경향으로 이해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처럼 기본모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비정규직투쟁의 방향을 변혁적인 ‘반재벌투쟁’이 아닌 ‘정규직화’라는 자생적 요구에만 머물도록 하였다. 그 때문에 비정규직투쟁은 각개 약진 상태에서 지리멸렬해질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그것은 한국의 비정규직문제가 과연 변혁운동과 노동운동이 역량을 총집결해야 할 문제인지를 의심케 만들었다. 

이점이야 말로 ‘불파투쟁’이 범한 전술적 오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당 건설의 관점에서 보면, 그동안 비정규직운동을 이끌었던 좌파 활동가들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에 있어 관건이라 할 수 있는 ‘이론 구체화’에 실패한 셈이다. 주요모순과 기본모순에 대한 올바른 파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본문 주석(지난 연재 계속)

5) 성동격서-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습격한다는 뜻으로서, 다른 행동을 통해 상대의 주의를 끈 다음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암도진창-위장을 통해 공격의 주력을 숨기고, 그 사이에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6) 이하에서 불파전술에 대한 비판은 한국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에 대한 공동 책임을 진다는 관점에서 이며, 개별 동지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본 목적은 아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다소 날카로운 비판이 가해지더라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실제 그동안 비정규직운동에 종사했던 활동가들은 다른 정규직 분야의 활동가들보다 훨씬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비주류운동으로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곳에서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배신을 보면서 속앓이를 해야 했다. 그러한 지난한 세월은 개인적인 가정생활의 희생 또한 요구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7) 다음 글은 이 전국모임이 결성되게 된 배경과 이후 경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최초의 하청 활동가들은 대부분 급진적 정파운동과 연결된 전투적인 활동가들이었다. 96-97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장에 잠복하고 있던 이들이 스스로를 하청 활동가로 규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형성되고 있던 대공장의 선진노동자 운동질서는 이들에게 결집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97년 9월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진행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울산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모임과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만나 상호교류를 약속했다. 그 결과 97년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사내하청·파견노동자가 전국의 노동형제에게 드리는 긴급제안서>라는 유인물을 공동으로 발행하여 배포했다. 이 유인물을 본 몇몇 지역 활동가들이 더 결합하고 몇 차례의 논의를 거쳐 98년 1월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준비모임’이 발족했다. 이후 이 모임은 ‘비정규직노동자전국모임’으로 명칭을 개정했다가 다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이하 ‘전국모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초 전국모임의 설립 목적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받아 안도록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전국모임의 초기 활동은 조직 노동자들과 민주노총 및 그 산하 연맹들에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이에 대해 공동의 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이슈 파이팅 활동이 중심이었다. 98년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노조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되면서 비정규·미조직 조직화를 전담할 조직 2국이 설립되고, 민주노총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 후 전국모임은 2000-2001년 수도권 비제조업 부문에서 비정규직 투쟁이 분출하던 시기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2002년 경 사실상 해체되었다. 하지만 “전국모임 회원들은 이후에도 기아차·현대차·현대중공업·GM대우 등 주요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건설 투쟁에 참여하며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이태영,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1)”, 2017년4월27일.   http://blog.jinbo.net/redletters/42.

8) ‘원하청 공동투쟁’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전국모임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자본에 의한 구조조정이라는 정세 속에서 현장으로부터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공세를 저지한다는 의미에서 ‘비정규직 철폐’, ‘원하청 공동투쟁’을 중심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장 전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원청 자본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의 원형을 제공했다.” 이태영,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2)”, 2017년5월5일.   https://blog.jinbo.net/redletters/45

9) 이태영,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6)”, 2017년6월2일.
https://blog.jinbo.net/redletters/49.   
인용문 중 굵은 글씨체 강조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10) 이태영,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2)”, 2017년5월5일.
http:// https://blog.jinbo.net/redletters/45

11) 비정규직투쟁의 승리를 위한 조건이 정규직과의 연대라는 점은 비정규직투쟁을 직접 경험한 많은 활동가들의 보편적 견해인 것 같다. 2001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투쟁 당시 노조위원장을 맡았고 그 후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역임한 홍준표 씨는 2013년 <노동사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비정규직 홀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정규직과 연대할 때만이 해결될 수 있다”. 노동사회, “한통계약직노조 2년이 남긴 교훈”, 2013년5월8일.
http://klsi.org/bbs/board.php?bo_table=B07&wr_id=245

12) 이태영,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6)”,2017년6월6일. 
https://blog.jinbo.net/redletters/49

13) 관련 내용은,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지부, 2009년, <현자노조 20년사>,pp.462-463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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