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혁명,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의 패배 이병진 교수 기사입력: 2013/12/24 [22:36]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인민무장투쟁 노선을 접고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이 2013년 11월 19일에 치러진 제2기 제헌의회(Constitute Assembly) 선거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는 네팔 인민들의 혁명투쟁에 커다란 시련을 의미한다.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인민해방군을 조직하여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무장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다. 네팔 인민들은 낡은 봉건주의 체제에 맞서 싸우는 인민해방군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였다. 특히 민주적인 토지 개혁과 사회적, 문화적으로 차별받던 하층 카스트들과 여성들의 평등을 위해서 과감하게 낡은 제도들을 철폐하여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런 이유로 인민해방군에 대한 여성들의 지지와 참여가 높았는데, 전체 네팔 인민해방군의 35퍼센트를 여성들이 차지하였다. 물론 주요 간부들 중에는 여성도 많았고 그 만큼 정부군에 의한 여성들의 희생도 많았다. 마침내,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2006년에 네팔 봉건왕국을 쓰러뜨리는 혁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우려하는 인도와 미국 그리고 서구 나라들의 압력으로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2008년에 ‘무장혁명투쟁’ 노선을 접고 네팔민주공화국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에 참여한다. 이 선거에서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전체 의석의 37%를 얻어 지배적인 정당이 되었다.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네팔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 정부를 만들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그러나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며 기회주의로 빠진 네팔공산당(통합 맑스-레닌주의)과 인도의 지지를 받고 있는 네팔회의당의 방해와 그들 사이와의 갈등으로 헌법을 제정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2012년에 제헌의회가 해산되었다. 큰 정치적 혼란에 빠진 네팔은 대법원장인 끼일 라주 레그미(Khil Raj Regmi)가 이끄는 임시정부에서 다시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협상을 하였다. 이 초헌법적 협상기구가 ‘고위급정치위원회(High Level Political Committee)이다.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듭한 결과, 2013년 3월 13일에 열린 고위급정치위원회(HLPC) 회의에서 제헌의회 의원 수를 601명에서 491명으로 줄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줄어드는 의원수에 따라서 선거구 조정을 놓고 또다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현재 네팔에 등록된 정당수가 139개 일 정도로 네팔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각하게 본다. 네팔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도의 웃따르 쁘라데시, 비하르, 서벵갈 주가 네팔의 정세에 직접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도는 힌두 봉건왕국을 쓰러뜨리고 ‘반인도’ 성향을 보이는 네팔공산당의 재집권을 막아야만 했다. 특히 인도 국민회의당은 내년 5월에 치를 총선거를 앞두고 집권세력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면 외교적 성과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인도는 친인도 성향의 네팔회의당 고위지도부를 뉴델리로 불렀다. 네팔회의당 총재인 스우스힐 코이랄라(Sushil Koirala)와 고위 간부들이 2013년 8월 4일부터 10일까지 무려 6일 동안 뉴델리에 머무르면서 인도 국민회의당의 고위급 간부들을 만나 선거 전략을 기획하였다. 인도는 2006년에 일어난 네팔 혁명 후, 국경 무역을 봉쇄하여 네팔의 물가를 폭등시키는 방법으로 네팔을 길들이고 있었다. 인도 국민회의당과 네팔회의당 관료들은 두 국가들의 자본가들의 이익과 정치적 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국경무역의 확대가 필요하다는데 공감하였다. 그런 서로의 이해관계에 기초하여 인도는 네팔회의당을 적극 밀어주기로 하였다. 인도에서 돌아 온 네팔회의당은 이런 인도의 강력한 지지를 배경으로 네팔의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정치세력을 결집한다. 그러면서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제2기 네팔 제헌의회 선거를 올해 안에 마치자고 적극 밀어붙였다. 그러나 네팔공산당을 중심으로 선거를 연기할 조짐이 나타나자 인도는 외교안보수석(Foreign Secretary)인 수자따 싱(Sujata Singh)을 2013년 9월 14일에 네팔로 급히 보냈다. 그는 네팔의 주요 정당 지도자들을 만나 최후통첩을 하였다. 네팔공산당 계열의 정치지도자들은 인도의 간섭에 반발하였지만, 나머지의 지도자들은 그 동안 네팔 ‘고위급정치위원회’에서 논의하였던 모든 합의들을 모두 무시하고 일사천리로 선거준비에 들어갔다. 주요 쟁점이었던 의원 수 정원축소는 취소하였다. 처음대로 601석으로 되돌려 놓았다. 임시정부 대통령은 제2기 제헌의회 선거일을 2013년 11월 19일로 결정하여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렇게 막무가내 식으로 선거를 치르려하자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선거 참여를 주장하는 쪽과 ‘선거거부’ 뿐만 아니라 다시 ‘무장투쟁노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강경파로 분열되었다. 결국 혁명 강경파들은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을 나와 독자적인 네팔공산당(마오주의)을 창당하였다. 네팔공산당(통합 맑스-레닌주의)은 마오주의자들과 함께 봉건왕국을 쓰러뜨리는 혁명에는 함께 했지만, 농민군 중심의 전위조직인 ‘인민해방군’ 조직에는 철저히 반대하고 있다. 이들의 실제 정치적 행보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친미, 친서방을 걷고 있으므로 이름만 맑스-레닌주의 공산당일 뿐 우익기회주의 세력에 불과하다. 이처럼 네팔공산당은 봉건왕국을 쓰러뜨리는 데 힘을 모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 ‘오합지졸’이 되었다. 이런 정치혼란 속에서 인도의 지원을 등에 업은 네팔회의당이 이번 선거에서 제1당으로 크게 약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네팔 제헌의회 선거는 ‘직접선거(first-past-the-post)'로 240명을 뽑고 각 정당의 ’비례대표율(proporotional representation)'에 따라 335명을 뽑는다. 그리고 수상이 26명을 지목한다. 그래서 모두 601명을 선출한다. 이번 선거 결과는 직접 선출하는 240명 의원 가운데 네팔회의당이 105석, 네팔공산당(맑스-레닌주의)이 91석,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이 26석을 얻었다. 그리고 각 정당의 비례득표율에 따라 네팔회의당이 242만표로 유효투표의 34%를 얻어 91석을 확보했고 네팔공산당(맑스-레닌주의)은 224만표를 얻어 유효투표의 30%인 84석을 얻었다.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143만표로 유효투표의 14%를 얻어 54석을 얻었다. 선거 결과만 본다면 친기업가 중심의 네팔회의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기회주의 정당인 네팔공산당(맑스-레닌주의)과 연정을 구성해야 한다. 또한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의 대략 30%가 나와서 창당한 네팔공산당(마오주의)은 이번 선거를 거부하여 선거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잠재적인 정치역량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에 구성된 제2기 제헌의회가 반드시 순탄하게 성공적으로 네팔민주공화국의 헌법을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또한 1기 제헌의회 보다는 우익화 되었지만, 대중들의 정서를 고려한다면 네팔이 어떤 성격을 갖는 민주국가로 만들어질지는 좀 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네팔의 인민들은 낡은 봉건지배체제를 쓰러뜨리고 민주공화국 건설이라는 힘찬 행진을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인도와 미국, 그리고 서구 선진국들의 간섭과 압박을 받으며 정치적 혼란에 놓였다. 네팔의 민주 혁명이 좌절에 빠진 근본원인은 외부 세력의 압박에 스스로 혁명노선을 포기하고 인민해방군을 해체한 기회주의적인 지도부의 오류가 결정적이라 할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킨 결정적인 힘이었던 혁명무력을 바보같이 스스로 해체하였다가 몰락한 통합네팔공산당(마오주의)의 실패는 진보적인 네팔 인민들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고 있다. 나는 이것이 자주적인 힘을 키워 싸워 나가고 있는 네팔 인민들의 ‘2보 전진’하기 위해 ‘1보 후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50년 동안 네팔 인민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던 봉건 왕조를 쓰러뜨린 네팔 인민들의 혁명정신은 여전히 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며 그들을 민주 혁명의 승리로 이끌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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