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8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8. 박세직의 안기부 이력을 은폐하라!
앞글(7편)에서 박세직이 강제 예편 이후 동자부 자문위원에 이어 한전 부사장이라는 ‘위장 직함’을 갖고 어떤 비밀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라고 봤다. 박세직의 한전 부사장으로서의 행적을 의심하게 하는 어떤 이의 회고 글이 있다. 박 씨의 행적을 고의로 은폐하고 조작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시 일을 이.상.하.게. 회고한다. 글 쓴 이는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번(12대.15대 / 90년, 94~96년) 역임한 핵공학자 정근모(鄭根謨) 씨.
[1983년 미얀마에서 벌어진 아웅 산 묘지 테러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박세직(1933~2009년) 당시 한국전력 수석 부사장과 함께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원자력학회 가을 총회에 참석해야 했다. 미국 원자력학회가 주관하는 ‘태평양 연안 원자력 회의(PBNC)’가 한국의 원전산업을 소개하고 국제협력을 통한 기술자립을 한 차원 높이는 데 중요함을 깨닫고 85년 회의를 유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PBNC는 태평양 연안 국가뿐만 아니라 원자력 연구·개발과 발전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의 전문가 회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연차총회는 주로 핵무기 비확산을 다루지만 PBNC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과학기술과 안전 정책을 다뤘다. 영어 연설에 능한 박 부사장과 과학기술처 원자력 위원과 한국의 IAEA 이사를 역임한 이병휘(1930~2008년) 박사가 회의 유치에 크게 기여했다. ...
미국 원자력학회의 국제협력 위원이자 이사였던 나는 유치 업무를 맡아야 했다. 우리 대표단은 워싱턴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다. 중국도 야심 찬 원자력 개발 계획을 발표하며 PBNC 유치를 신청한 것이다. 당시 소련과 사이가 나빴던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했고,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려고 중국과의 관계 증진을 추구했다. 상황이 미묘해지자 나는 루이스 매닝 먼칭 미국 원자력학회장, 존 그레이 이사 등 미국 원자력학회 간부를 만나 막후교섭을 벌였다. 나는 “이번에 85년뿐 아니라 87년 대회 개최지까지 함께 결정하자”며 “과거 미국이 중국과 ‘핑퐁 외교’를 펼쳤듯 서울 회의에 미수교국인 중국 대표단을 반드시 초청해 한중 ‘원자력과 과학기술 외교’를 펼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먼칭 학회장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제안이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PBNC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85년은 서울, 87년은 중국 베이징을 개최지로 결정했다. [강조]임무를 마친 박 부사장은 귀국하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 차장보로 옮겼다.[강조]](「[남기고 싶은 이야기]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611) <63> PBNC 성공 개최, 중국 누르고 따낸 원자력 국제회의 ... 미국과 막후 협상이 결정타」<중앙일보> 2018.12.25)
우선, 이 글은 박세직 씨가 마치 이 나라 원자력산업 발전의 중핵적 역할을 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수도경비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난 뒤 동력자원부 자문위원이 돼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닐 때 언론이 그의 ‘원자력 임무’를 강조할 때와 비슷하다. 한 평생을 군문에 몸담았던 이가 어느새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가 돼 이 나라 원자력 산업을 좌지우지했단 말인가.
위 회고 글은 박세직의 한전 부사장 이력을 강조하기 위해 고의로 역사적 사실 관계를 뒤섞은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박세직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강제 예편과 한전 부사장으로서의 역할이 위장이 아니었다고 강변하는 듯하다. 정 씨가 미국 원자력학회 가을 총회에 참석한 때는 1984년 11월이다. 그런데 정 씨 글에는 자신이 회의에 참석한 날짜를 명기하지 않았다. 대신 “아웅산 묘지 테러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 ”라는 식으로 썼다.
당시 정 씨는 한국전력 계열사인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이었다. <매일경제신문>은 1984년 11월 7일 자에서 “정근모 한국전력기술(주) 사장은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고속증식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7일 하오 출국 ... 일본 심포지엄에 이어 오는 9일부터 미국에서 열리게 될 미국.유럽 원자력학회 회의에서 참석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 매일경제신문 1984.11.7)
그렇다면 박세직 안기부 2차장은 ‘1983 버마 사건’의 진상조사단장으로 버마에 갔다 온 뒤 1년도 더 지난 1984년 11월에도 한국전력 부사장 직함을 달고 있었다는 이야긴가? 그리고 이 1985년 서울 회의 개최를 확정짓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 안기부 차장보가 됐다고? 아니다. 이야기가 뒤죽박죽이다.
박세직 씨가 한전 부사장 자격으로 미국 원자력학회가 후원하는 태평양연안국 원자력회의(PBNC)에 참석한 때는 1982년 11월이다. 그 해 11.13∼19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미국원자력회의와 원자력학회 동기(冬期)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1일 출국했다는 기사가 있다(<경향신문> <매일경제신문> 1982.11.11.). 또 며칠 뒤에는 11명의 한국 대표단이 워싱턴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핵협회 회의 및 미 원자력산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고(<연합통신> 1982.11.18.), 두 회의는 11월 18일 폐막됐다. 박 씨는 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 그가 이 회의에 실제로 참석했다면 - 안기부 차장보가 됐을 것이다.
[1982년 1월 15일 동력자원부 자문관, 1982년 3월 15일 한국전력공사 부사장, 수석부사장을 거쳐 [강조][1982년] 11월 30일 국가안전기획부 차장보[강조], 1983년 1월 안기부 제2차장 등을 역임했다.](인터넷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정근모 씨는 1982년 11월과 1984년 11월을 헷갈려서 회고 글을 그렇게 썼을까? 핵공학 교수에 대학총장에 장관에 ... 얼마 전에는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한 극우 성향의 기독교인. 조만간 누군가 정 씨를 치매 환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기술부 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의 글이라도 보기 어렵다.
또 위 회고 글 하루 전 신문에 게재된 글에서 그는 “미국 원자력학회 국제협력위원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해 워크숍에 참가”했고, 상하이에서 아웅 산 묘소 테러 소식을 들고는 곧바로 귀국해 친구인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가족들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썼다(「[남기고 싶은 이야기]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610) <62>상하이서 들은 아웅산 테러, 희생자 명단에 친구 김재익이…」<중앙일보> 2018.12.24). 그런데 하루 뒤에 쓴 글에서 2년 시차를 헷갈려?
아니면 고의로 자신이 회의에 참석한 날짜를 누락해 사건의 선후 맥락을 왜곡했을까? 예단은 금물이지만 정 씨가 박세직 씨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려 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1983 버마 공작’은 3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의 진상을 왜곡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사건 관련자들에게 거짓 회고록을 쓰게 하는 것이다.
위 회고록을 액면 그대로 읽으면, 박세직 씨는 아웅 산 묘소 테러가 일어났을 때는 안기부에 들어가지 않았고, 한국전력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진상조사단장으로 버마에 다녀온 뒤 안기부 차장보가 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글로 읽힌다.
이는 박세직의 안기부 경력이 아웅 산 묘소 테러와는 무관한 것처럼, 그는 단지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을 뿐이라는 인상을 유발한다. 결국 박세직의 안기부 이력을 숨김으로써 그와 아웅 산 묘소 테러와의 연관성을 은폐, 소멸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정 씨의 글이 단순히 기억력 착오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박세직의 안기부 이력’을 숨기는 듯한 느낌, 그가 어쩌다 안기부 차장이 돼 버마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을 뿐이라고 강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정근모 씨 글만이 아니다. 박세직 씨 자신의 회고록도 꼭 그러하다. 또 그를 수도경비사령관 직에서 쫓아내 놓고 그를 다시 중용해 동력자원부 자문위원을 거쳐 한국전력 부사장 자리에 앉힌 전두환의 회고록도 마찬가지다.
먼저 박 씨가 1990년 9월에 펴낸 회고록『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박 씨의 회고록에는 자신이 이 나라 원자력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의 회고록이 올림픽과 관련된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라 해도 1981년과 1982년, 동력자원부 정책자문위원과 한국전력 부사장 직함을 달고 세계 각국을 누비며 이 나라 원자력산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 한 줄 쯤 걸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그 이력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그는 화려하고 찬란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시기는 그가 안기부장 특보, 안기부 차장보로 일하며 매우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때다. 그의 회고록은 곧바로 안기부 차장 이야기로 도약한다.
( 박세직 회고록 50쪽)
자신이 언제 안기부에 들어갔는지를 밝히지 않은 채 그저 “안기부 차장으로 있었는데 이 사건(버마 사건)의 현장 조사 책임자로 파견됐다”고만 썼다. 안기부 차장이 돼 버마에 간 이야기를 하려면 자신이 언제 안기부에 들어갔는지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 또 버마 사건을 언급하려면 자신이 육사 12기 동기인 이상규(李相珪) 정보사령관과 함께 모의한 다대포 공작 이야기와 이 작전에 투입될 특수부대를 자신이 몸소 시찰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버마 사건의 전후 맥락을 구성하는 박세직의 수상한 이력을 애써 감추는 것은 전두환도 마찬가지. 물론 전두환의 회고록에 박세직 이야기가 없어도 된다. 그런데『전두환 회고록』2권 제5장 <과학기술의 진흥>에는 <핵무기 개발과 원전 기술의 자립>이라는 별도의 절이 들어있다. 자그마치 20쪽 분량이다. 여기에는, 1983년 한전 사장에 자신의 육사 후배인 박정기(朴正基) 한국중공업 사장을 임명한 이야기를 포함해, 자신이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원자력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실려 있다. 그런데 박정기 직전 한전 사장이 성락정(成樂正)이고 그때 부사장이 박세직(朴世直)이었다는 사실, 그 둘을 자신이 한 날 한시에 임명했다는(1982.3.15) 사실, 바로 그 시기에 박세직이 이 나라 원자력산업을 떠메고 있었다는 - 떠메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전두환 회고록』2권 5장 목차)
박세직의 위장 예편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당시 신문과 방송 톱뉴스를 장식했던 박세직 사령관의 부정 청탁과 그의 강제 예편이 모두 사실이었다면 그 일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 강제예편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면 매우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어야 하고, 박세직의 ‘화려한 부활’을 지켜본 심경도 밝혔을 것이다.
이처럼 박세직이 1982년 동자부 자문위원에 이어 한국전력 부사장 직함을 달고 다닐 때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이력을 모두가 쉬쉬 하니 당시 그의 언동은 육사 12기들이 주도했다는 ‘812 계획’ 등 ‘사전 버마 공작’을 위한 위장이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안기부라는 조직의 특성상 부장이나 차장 등의 임면을 일절 외부에 알리지 않는 관례가 있었을까? 그런 관행이 있었다면 박세직의 안기부 이력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런 관행 따위는 없었다. 1982년 6월 2일, 전두환이 노신영 외교부장관을 안기부장에 앉힐 때 방송과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그 사실을 공표했고, 2년 전인 1980년 9월 6일 당시 공석중인 중앙정보부 제1차장에 김성진(金聖鎭) 중정 기조실장(육사 11기)을 내정할 때나, 한 달 여 뒤인 그해 10월 29일 김성진 중정 1차장을 2차장으로 전보하고 현홍주(玄洪柱) 당시 중정 2국장을 1차장으로 승진, 임명할 때도 여러 신문들이 그 사실을 널리 보도했다.
전두환의 육사 동기인 김성진 씨가 안기부 1차장에 임명될 때는 그가 방위산업 발전에 공이 크다거나, 학식이 풍부하다는 등 그의 학력과 이력, 경력 및 가족관계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신문에 실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전두환 정권의 핵심 포스트인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불명예 예편한 뒤, 다시 부활해 이 나라 원자력 발전의 최전선을 누비는 듯 했던 박세직이 안기부 2차장이 됐다면 그 사실을 쉬쉬할 이유가 없다.
또 아웅 산 묘소 테러 직후 그의 버마행도 사실은 극비였다. 처음에는 진상조사단장을 이원경(李源京) 체육부장관이라고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
[이원경 체육부장관을 단장으로 한 한국정부조사단은 10일 오후 3시 10분(현지시간) 랭군에 도착, 버마 측과 합동조사 1차 회의를 갖고 본격적인 조사 작업에 착수했으며, 버마의 5인 조사위와 협력, 공동조사 작업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동아일보> 1983.10.11.)
이렇게 은폐됐어야 할 박세직 안기부 2차장의 버마 행각이 바로 다음날 <조선일보>의 촉수에 걸려든다. 누군가 기밀을 누출한 것이고 그 덕에 <조선일보>가 ‘한 건’ 한 것이다.
[현지 대사관은 수시로 텔렉스를 보내 박세직 안기부 2차장을 단장으로 한 진상조사단의 수송 문제 등을 보고해 오고 있다.] (「북괴 공관원들 외출 중단」<조선일보> 1983.10.12)
[발견된 증거물 가운데 철제 폭약 용기, 원격조종용 전자수신회로 조종기, 일본 히다치(일립)사 제품의 폭발물 원격조종용 건건지 16개, 불발탄 1개, 소이탄 1개 등이 10일 파견된 한국 측 조사단(단장 박세직 안기부 제2차장)이 이번 사건을 북괴의 소행으로 보는 물증들이다.] (「“북괴 범행” 공식 발표만 남았다」<조선일보> 1983.10.18)
[아웅산 묘소 암살폭발 사건을 수사해 온 한국 측 수사단(단장 박세직 안기부 차장) 11명 중 치안본부 3부장 김상조(김상조) 치안감 등 4명이 20일 오후 7시 45분 태국항공 622편으로 귀국했다.] (<조선일보> 1983.10.21)
박세직이 버마에 머무는 동안(1983.10.10∼11.8) 세 번이나 그의 안기부 차장 직함을 까발린 <조선일보>는 이후 더 이상 박세직 관련 기사를 쓰지 않았다. 기밀 사항인 박세직의 안기부 직책을 계속 기사화되지 못하게 누군가 막은 것이다. 이후 <동아일보>가 두 차례 ‘박세직 진상조사단장’의 동정을 보도했지만 그의 안기부 차장 직함을 명시하지 않았다. 진상조사단장을 이원경 체육부장관이라고 썼다 다음날부터 내리 세 번 <조선일보>에 ‘난타당한’ <동아일보>는 그 보복으로라도 박세직의 안기부 차장 직함을 마구 떠벌렸을 것이다. 그런데 박세직의 안기부 직함을 밝힐 수 없었기에 그렇게 못한 것이다.
[이날 경기장엔 박세직 랭군참사 특별조사단장, 최순영(崔淳永) 축구협회 회장을 비롯, 많은 교민이 나와 한국을 응원했다.] (「오륜 축구 1차 예선..한국 축구 웃음은 언제」 <동아일보> 1983.11.9.)
[버마 아웅 산 묘소 특별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랭군에 파견됐던 한국 측 조사단의 박세직 조사단장이 9일 오후 대한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귀국했다.] (<동아일보> 1983.11.10)
박세직이 버마를 떠난 날(11월 8일) 태국 방콕에 들러 축구 한중(韓中)전을 관람했다는 소식과 다음날 그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동아일보>가 전한 뒤에도 ‘박세직 안기부 2차장’에 대한 ‘기밀’은 계속 유지됐다.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이 일단락된 뒤인 1983년 12월 ‘박세직 안기부 차장’이 다시 거명된 적이 있기는 있었지만 단신(短信)이었다. 12월 17일 당시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에서 열린 의원 세미나에서 ‘박세직 안기부 차장’이 <국내외 정세 전망>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매일경제신문>이 짧게 전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조선일보>가 ‘박세직 안기부 (2)차장’을 기사화하지 않았다라면, 그의 안기부 이력은 어쩌면 영구 비밀이 됐을지도 모른다.
만약 박세직의 강제예편이 분명한 사유에 의한 합당한 처벌이었고, 이후 그가 동자부 자문위원을 거쳐 한국전력 부사장으로 급승진해 - 10개월 동안 - 이 나라 원자력산업 발전을 위해 헌신한 뒤 안기부 차장이 됐다면, 또 안기부장 노신영이 한가로이 목사와 신부들을 만나고 다니다 북한의 기습 작전에 버마에서 테러를 당했다면, 그래서 안기부 2차장인 박세직이 급히 진상조사단을 이끌고 버마에 간 것이라면, 그의 버마행이나 안기부 2차장 직함을 숨기고 감출 이유가 없다.
박세직의 강제예편 이후 안기부 차장으로 버마에 다녀올 때까지의 행적을 둘러싼 온갖 잡설은 그의 강제예편이 ‘안기부장 특보’가 돼 은밀하게 ‘812 계획’을 진행하기 위한 위장이었고, 그의 버마행과 안기부 차장 직함을 은폐하려는 온갖 시도는 ‘1983 버마 테러’가 그가 주도한 ‘812 계획’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와 육사 동기 이상규 정보사령관이 모의한 다대포 작전의 내막이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졌다는 사실은 이 작전이 ‘1983 버마 공작’의 마무리 공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P.S.
전편 글(7편)에서 정보사령관 이름 ‘이상연’은 ‘이상규’(李相珪)의 오기였습니다.
(9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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