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천국 남녘으로 홍범도 장군 유해송환?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4/08/17 [11:5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장군 묘역 기념비, 카자흐스탄 almatykim이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한 사진이다. 출처: http://blog.daum.net/haninilbo/15962534 © 자주민보 ▲ 홍범도 장군의 전적비가 새워진 만주의 봉오동 밀림지대, 나무판 전적기념비는 이미 삭풍에 다 거스러졌을 것이다. 물론 조선인 항일유적에 대해 민감한 중국 정부의 눈총을 받으며 저런 전적비를 세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우리 항일선조들의 업적을 잘 기념할 날이 올 것인가. © 자주민보, 리함 조선족 역사학자 제공 ▲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현장 봉오동골짜기 © 자주민보, 리함 조선족 역사학자 제공 1945년 8월 15일로 크게 변한 고장들이 많으나, 이제 와서 제일 굉장하게 기념하는 건 반도의 남반부라, 8· 15를 전후하여 오만가지 글들과 사진, 주장들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13대 종손 이종옥(1887~1941)이 무장투쟁을 벌린 사실이 처음 확인되었다는 보도를 15일에 보면서 광복 69년 뒤에야 이런 연구 성과가 나온다는 게 정상인가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6월에 보았던 글들이 떠올라 생각이 착잡해졌다. 6월 초에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를 언제까지 이역에 방치할 것인가’라면서 한국으로 옮겨오자는 주장이 나왔다. 6월 7일 봉오동전투 94돌에 즈음하여 국민들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제기한 것이다. “... 항일무장투쟁의 전선에서 꽃잎처럼 산화한 수많은 독립군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고, 역사는 이들을 잊었다. 그런가 하면 부인과 두 아들까지 항일전에서 잃고,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지금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황량한 묘소에서 망향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서거 70주년이던 지난해 10월25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회장 이종찬)는 해방 후 처음으로 현지에서 조촐한 추모제를 지내고 위령하였다. 필자는 졸저 <빨치산대장 홍범도평전>을 영전에 헌정하면서, 장군의 유해를 언제까지 천만리 먼 이역에 방치할 것인가, 북한이 평양 출신이란 연고권을 주장한다면 이 기회에 남북이 공동으로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하는 길이 없겠는가를 생각하였다. 봉환된 유해가 남쪽이면 어떻고 북쪽이면 어떤가. 장군의 고국이면 될 것 아닌가. 내년이면 해방 70주년을 맞게 되는 우리나라가 독립군 대장의 혼령은 이역을 헤매고 일본군 장교들은 생시나 사후에나 호사한다면, 내일의 주인공이 될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애국심과 정의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 답을 묻는다.“ 김 전 관장의 호소가 큰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데, 반일, 항일역사를 이용하여 외교활동을 벌리기 좋아하는 현 정부가 정말 마음먹고 애를 쓰면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반도 남반부로 돌아올 가능성은 있겠다. 중국의 시안시(西安市)에 광복군 기념물을 조성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던가. 별로 해놓은 일도 없이 명목이나 유지하던 광복군도 중국에서 그럴 듯하게 기념하는데 카자흐스탄에서 무덤 하나 옮기는 것쯤이야 뭐 어렵겠는가. 6월 중순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인민군 포로로 억류됐다가 북에서 사망했다는 손동식의 유해가 2013년 10월 큰 소문을 만들어내면서 남으로 간 뒤 8개월 째 안장되지 못해 아파트 베란다에 보관된다 한다. 국방부와 유가족 간 보상금 이견 때문이라는데, 관건은 ‘사망자를 사망자 가족에서 생환포로에 준하는 보상금 6억 원을 지급할 수 있느냐’란다. 유골 송환비용 보상과 보상금 지급, 유해송환과정에서 발생한 비용, 훈장수여, 국가유공자 인정, 가족정착금 상향 등 유족들의 요구에 국방부가 이견을 제기하여 질질 끌어왔다는데, 1953년 4월 당시 육군 9사단 소속 이등중사(병사)로서 전투 중 포로로 끌려가 지난 1984년 북한에서 숨졌다는 손 씨는 그야말로 무명소졸이라 유족들과 후원자들을 내놓고는 관심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홍범도 장군이야 공적이 분명하니 유공자인정이 쉽고 유족이 없으니 보상금 따위 문제가 생길 수 없고, 정착금을 늘여줄 필요도 없다. 훈장이나 유해이장비용쯤이야 이장해 얻을 효과에 비기면 새발에 피쯤이 아니겠는가. 일단 정치적 수익을 판단한 자들이 유해이장을 강력추진해 실현시킬 수도 있겠다만, 이미 돌아온 시체마저 냉대하는 상황에서 중앙아시아에 묻힌 유해를 옮겨온다는 건 모순 중의 모순으로 되겠다. 죽은 사람들이 냉대 받는 건 둘째 치더라도 반일, 항일활동에 참가해 한국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사람들의 후대들마저 한국에서 어렵사리 산다는 보도들이 꾸준히 나오는 터이다. 워낙 한국에서 살던 사람들 가운데도 가난한 이들이 적지 않거니와. 중국 등 해외에서 살다가 “독립유공자”조상 덕분에 한국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도 얼마 안 되는 돈을 받은 뒤에 생활전선에 내버려져 찬밥신세가 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고생도 3· 1절이나 8· 15가 되어야 언론들에 잠깐 거들어지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에는 “친일매국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있다던데, 몇 해 전 “친일파 할아버지, 고맙습니다”(시사IN Live, 정희상 기자·이재덕 인턴 기자)라는 글을 보면서 실감했다. 매국형 친일파 10여 명과 그 후손, 및 임시정부 요인과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33인 대표,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의 선각자들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조사했더니 3대 이상 흥한 '대표 친일파' 후손은 '대표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훨씬 많았다 한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잖은 친일파 후손이 사회 각계에 포진해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계, 재계, 교육계, 예술계, 법조계, 금융계, 기업계에서 활약한 사레들을 거들고, 매국형 친일파 중 당대에 쌍벽을 이루었던 이완용과 송병준 후손의 집요한 '땅 찾기'를 재조명하는 등 폭 넓은 소개에 이어 글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친일파 후손의 사회 진출에서 특징은 학계·경제계·관료·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이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 진출도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이는 후손이 선거운동 등에서 자기의 집안 내력이 노출되는 정치권 진출을 꺼렸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이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잘 나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조상의 친일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 비해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 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친일파 후손까지도 경제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아직도 조상이 친일 대가로 조성해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광복 63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민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6년이 지난 이제 와서 개선된 게 뭐냐고 질문한다면 말문 막힐 한국인들이 꽤나 될 것이다. 중국의 경우 한간(漢奸, 친일파와 비슷한 개념)에 대한 청산이 상당히 잘 이뤄졌으므로 근년에 일부 사람들이 일부 대표적인 한간들이 옳았다는 식으로 떠들어대긴 하지만 대중 속에 기반이 없고 대중의 호응을 끌어내지도 못한다. 항일전쟁시기의 물건들을 전문 모으는 한 수집가의 말은 중국의 민의를 잘 보여준다. 항일전쟁시기 중국 대지에는 일본침략군을 내놓고 중국공산당의 부대, 국군(중국국민당 부대와 지방군벌부대), 일본에 붙은 괴뢰군들 및 토비들이 있었는데, 공산당부대의 물품들은 각종 박물관과 기념관으로 들어간지 오래다. 그 수집가가 은근히 놀란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몇 십 년이 지나서도 국군의 항일관련물품들을 상당수 얻은 점이었다.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나라에서 국민당이나 지방군벌출신들은 정치적으로 억눌렸으나 본인들도 후대들도 항일부분물품들에는 자부심을 갖고 갖은 방법으로 보존해왔다는 게 그 수집가의 해석이었다. 허나 오랜 수집역사에서 내가 아무개의 후손이요, 아무개의 친척이요 하면서 유명한간들과 관계되는 물건들을 갖고 와서 팔려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다. 일본에 붙어먹고 살았던 일을 자랑거리로 삼지 못한다는 게 중국 대중의 심리방어선이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친일파들이나 그 후손들이 친일행위를 합리화하거나 지어 미화하는 일이 흔했고, 가짜 독립유공자들도 숱해 생겨났었다. 정말 용감하게 잘 싸웠고 깨끗하게 죽은 사람들은 찾기가 하도 어렵다나니 “일본섬놈들은 패망한다”는 글을 바위에 썼다가 일제 경찰에 잡혀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15살에 죽은 주재년(朱在年, 1929-1944)이 2006년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2012년 고향 여수에 기념관이 개관되었을 정도이다. 관련보도에는 “우리나라 최연소 항일열사”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조선(북한)이 크게 기념하고 아이들의 본보기로 내세운 항일아동단원 김금순 열사(여러 가지 사정으로 구체적인 정보는 줄인다. 간단한 정보는 김금녀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자주민보 기사를 참조바람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906)에 비기면 “최연소”가 무색하거니와, 자기 집 목화밭 돌담장의 가운데 큰 바윗돌 앞쪽에 “朝鮮日本別國(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日本島鹿敗亡(일본섬놈들은 패망한다), 朝鮮萬歲(조선만세), 朝鮮之光(조선이 빛난다)”라고 썼다는 사적도 너무 평범하다. 일제 강점기 침묵했던 사람들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 정도는 반일활동으로나 쳐야지 항일이라는 거창한 말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란 결국 인간들에 대한 평가인데, 독립운동가들 자신이나 후대들이 뒤늦게 인정을 받거나 어렵사리 살게 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적으로는 이승만의 친일파 기용이고, 학술적으로는 친일사학가들과 그 계승자들의 사학계차지였다. 2012년 2월 '제12회 이승만 포럼'에서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이 이승만의 독재는 불가피했다면서 “한국 역사에 이승만만 한 인재는 거의 없지 않았는가. (중략) 이승만은 그 세종대왕하고 거의 맞먹는 그런 유전자를 가졌던 인물 같아요"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이듬해 가을 언론에 알려져 물의를 일으켰었다. 금년 2월 14일에는 서울 충정도 한국공인회계사회관에서 '선진국을 향한 바람직한 국정의 방향을 주제로 이뤄진 강연에서 새누리당의 김무성 의원이 5· 15군사정변을 “혁명”으로 부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5·16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보라”고 강조해 파문이 일어났었다.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의 주장이야 나이 먹은 학자의 망설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다만, 차기 대권까지 넘본다는 김무성 의원이 친일경력자의 군사정변을 미화한 건 심각한 현실적 위험을 내포한다. 이러루한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반도의 남반부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옮겨온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더욱이 친일경력들이 누워있는 묘지에 옮긴다는 걸 안다면 홍범도 장군이 무덤 속에서라도 뛰쳐나와 총을 갈길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경력에 비춰볼 때 한국이 결코 그가 바라던 세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김삼웅 전 관장은 반도의 남쪽이면 어떻고 북쪽이면 어떤가고 고국이면 될 것 아닌가고 선택의 범위를 넓혀놓았다. 허나 지금 반도는 남북이 갈라져있고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성 높은 지역이다. 괜히 옮겨왔다가 전쟁에 파괴나 되면 어쩌겠는가? 언젠가는 홍범도 장군이 나서 자란 고장으로 유해를 옮기는 게 좋겠다만, 지금은 시기상조이다. 적어도 평화체제가 이뤄져 전쟁위험이 줄어든 뒤에야 바람직할 것이다. 홍범도 장군을 높이 평가하고 연구도 많이 해온 조선이 지금껏 이장을 언급하지 않은 점을 음미해볼 만하다.[2014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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