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31)

[항일연재31]이상촌을 혁명촌화를 위한 지도자의 공작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31)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04/27 [09:21]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31)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8.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전후 만주 각지 유격대창건

3) 동북만·남만 각 지역에 창건된 항일유격대에 대한 북측자료

(5) 파괴된 조직복구를 위한 동만과 조선북부지대 공작


사진1. 젊은 지도자가 혁명촌화를 위해 머물렀던 집
▲ 1930년 10월 중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항일세력의 지도자는 당시 조선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였으며, 기층민중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농촌을 혁명화하지 않으면 그 어떤 혁명도 항일무장투쟁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오가자를 먼저 혁명촌으로 만들고 이를 중심축으로 하여 간도와 조선북부국경일대의 농촌을 혁명화 반일·항일무장투쟁의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이상촌건설이란 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논하였다하지만 사람들의 심리라는 것이 자신들이 지향하던 누리를 얻지 못하면 마음속에 존재하는 세상을 마치나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이에 메어 달린다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이상촌을 건설하여 그 곳에서 나오는 재부를 가지고 독립단체도 만들고독립운동도 하여 나라를 되찾겠다는 꿈은 이름 그대로 이상촌(理想村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저 이상향(理想鄕)을 향한 꿈에 불과할 뿐이다.

젊은 조선인 지도자가 찾아간 오가자(五家子)》 마을이 이상촌이라고 부르면서 비교적 마음 편히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다물론 오가자 마을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을 이상촌이라고 부르고 있으며그렇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정말 이상촌이 옳기는 한 것인가이에 대해 북측자료를 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내가 동만에서 오가자로 간것은 1930년 10월이였다나는 원래 동만에서 무장투쟁준비와 관련된 큰 회의를 소집하려고 하였는데 당시 정세로 보아 그곳이 회의장소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여 장소를 오가자로 변경시키였다몇달동안 오가자에 눌러앉아 회의준비를 하면서 겸하여 마을의 혁명화도 다그치자고 결심하였다가보니 듣던대로 풍속도 좋고 인심도 좋았다.

……

오자가를 개척한 유지들은 자기들의 리념이나 주의주장과 맞지 않는 이색적인 사상조류가 마을에 들어오는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들과 합심하여 진펄을 논으로 개간하고 마을에 학교도 세웠다농우회니청년회니소년학우회니 하는 대중조직도 내오고 촌공회라고 부르는 자치기관도 내왔다일본이 한일합병을 선포한 8월 29일이 오면 마을의 주민들을 모여놓고 국치일가를 부르게 하였다일본군경들과 중국반동군벌의 마수가 잘 미치지 못하는 자기네고장을 오가자사람들이 천국으로 여기게 된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가자의 주민구성에서 대다수를 이루는것은 평안도사람들과 경상도사람들이였다경상도사람들은 남만청총계통의 엠엘파의 영향밑에 있었고 평안도사람들은 주로 정의부의 영향을 받고있었다.

나는 평안도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오가자에 가서도 카륜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상도사람들의 집에 자주 머물러있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상도사람들이 신경을 쓸수 있었다.

우리는 카륜에 있을 때 조선혁명군대원들을 공작원으로 몇몇 파견하였지만 그들이 오가자에 와서 크게 맥을 추지 못하였다고집이 세고 지반도 확고한 마을의 유지들을 설복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동무들의 소개로 그해 겨울을 보냈다한두주일도 아니고 몇달동안이나 한 고장에 그처럼 오래 붙박혀있은것은 우리가 오가자를 그만큼 중시하였기때문이였다.

우리는 오가자를 중부만주일대에서의 민족주의세력의 마지막보루로 보았다여기에서 사업을 잘하면 오가자를 농촌혁명화의 본보기로 만들수 있었으며 그 경험에 토대하여 만주전역과 북부국경일대에서 농촌마을들을 우리의 영향하에 둘수 있었다.

우리가 혁명의 기본동력을 로동자농민근로인테리로 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의 혁명화에 많은 힘을 기울인것은 우리 나라 계급구성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된다농민은 우리 나라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있었다간도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인구의 80%이상이 조선사람이라면 그중 90% 정도는 농민이였다군벌들의 박해와 지주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한 가혹한 수탈로 하여 그들은 최악의 빈궁과 무권리속에서 살고있었으며 지대를 통한 착취와 함께 노비라든가 노예들에게 가해지는것과 같은 경제외적착취에 의해 사정없이 혹사당하였다.

국내에 사는 농민들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였다이것은 농민대중이야말로 로동계급과 더불어 혁명에 가장 절실한 리해관계를 가지는 계급이며 우리 혁명에서는 농민이 로동자와 같이 주력군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농촌의 혁명화는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서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고리였다

세기와 더불어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중에서



인용문에는 중요한 몇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첫째인용문의 내용 속에 들어있는 스스로 이상촌이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삶 속에 그 마을이 이상촌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농우회니청년회니소년학우회니 하는 대중조직도 내오고 촌공회라고 부르는 자치기관도 내왔다일본이 한일합병을 선포한 8월 29일이 오면 마을의 주민들을 모여놓고국치일가를 부르게 하였다일본군경들과 중국반동군벌의 마수가 잘 미치지 못하는 자기네고장을 오가자사람들이 천국으로 여기게 된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고 하여

위 내용 속에 이미 그 마을이 이상촌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즉 각종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촌이 아니라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이상촌이라고 한다면 그 어떤 조직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하지만 오가자(五家子마을에는 농우회청년회소년학우회 등의 대중조직이 있으며 심지어 촌공회라고 부르는 자치기관도 내왔다자치기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의에 의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당연히 이상촌이라고 한다면 굳이 이런 타율적 관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각종 단체를 조직하였고촌공회라는 자치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상촌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또 나라를 빼앗긴 날인 8월 29일 한일합병일에는 마을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국치일가(國恥日歌)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자신들 조국을 빼앗긴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국치일이라고 기억하면서 이를 잊지 않기 위해 기념가가 아닌 치욕의 날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는 것은 사실 그 마을 지도자들 마음속에는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쌓여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즉 정작 자신들의 이상은 그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이 이상이 아니라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이상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따라서 그 마을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건그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건 그들 모두의 진정한 이상향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조국 고향산천에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이상향인 것이다.

둘째위 인용문에는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향 후 항일투쟁을 전개함에 있어 그 기본적인 토대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당시 새로운 사조 즉 공산주의이론과는 배치되는 혁명의 구성성분에 대해서도 반일·항일투쟁과 혁명과정에서 어떻게 구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그동안 앞서 공산주의 혁명의 길에 들어선 나라들이 혁명의 주력으로 노동계급 즉 공산품을 생산하는 일터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들로만 규정을 한 것과는 달리 농업노동에 종사를 하는 노업노동자들도 공업노동계급과 함께 혁명의 주역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즉 당시 조선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따른 우리 실정에 맞는 혁명의 주력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북측 자료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혁명의 기본동력을 로동자농민근로인테리로 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의 혁명화에 많은 힘을 기울인것은 우리 나라 계급구성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된다.농민은 우리 나라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있었다간도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인구의 80%이상이 조선사람이라면 그중 90% 정도는 농민이였다군벌들의 박해와 지주,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한 가혹한 수탈로 하여 그들은 최악의 빈궁과 무권리속에서 살고있었으며 지대를 통한 착취와 함께 노비라든가 노예들에게 가해지는것과 같은 경제외적착취에 의해 사정없이 혹사당하였다.

라고 하여

젊은 지도자는 당시 조선의 산업구조와 그에 종사하는 기층 민중들의 구성성분과 분포 그리고 절대적 수적 구성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을 하고 그에 따른 혁명의 주력군을 구성한다는 계획을 하고 있다이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업노동자들을 배제하고는 그 어떤 반일·항일투쟁과 혁명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이 말을 반일·항일무장투쟁도 나라의 혁명화도 민족의 구성원들 중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업노동자들을 혁명의 주력으로 내세워야 승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또 지배계급으로부터 가장 큰 박해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계층 역시 농업노동에 종사하는 농민들이라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의 현실이었다조국본토에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착취와 억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빼앗긴 나라를 떠나 이국 땅에 정착을 하여 살아가는 간도의 조선인들 역시 지주계급과 지배계급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여 고총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북측자료는

군벌들의 박해와 지주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한 가혹한 수탈로 하여 그들은 최악의 빈궁과 무권리속에서 살고있었으며 지대를 통한 착취와 함께 노비라든가 노예들에게 가해지는것과 같은 경제외적착취에 의해 사정없이 혹사당하였다.

라고 하여

당시 간도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에 억압과 착취가 얼마나 심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따라서 일본제국주위 침략자들에 맞서 무장투쟁을 하고 또 투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고조국경내와 간도에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인간해방을 이룩하기 위한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공업노동자들 뿐 아니라 구성원 다수를 이루고 있는 농업노동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주력으로 내세워야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농민을 혁명의 주력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당시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이는 항일무장투쟁도 혁명도 우리식대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셋째위 두 번째 항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농민들을 공업노동자들과 함께 반일·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의 주역으로 내세우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거점이 있어야 한다인용문에는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농민들을 혁명의 주력으로 내세우겠다고 결정을 한 것은 1930년 10월 오가자(五家子)마을에 가기 훨씬 이전인 반일과 혁명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초기부터이다이는 앞선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26년 10월 17일에 있었던《ㅌ · ㄷ》 즉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또 《ㅌ · ㄷ》 즉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결정한 혁명도 항일무장투쟁도 우리식으로 수행을 하자는 것이다또 나라를 해방시킨 후에도 모든 것을 우리식대로 해나가자는 철학을 정립하였고이를 이루기 위해 카륜회의에서 실천적 강령으로 무장을 하고 일와 싸워 조국을 해방시키고채택한 당을 창건하며반일사상을 가진 모든 조선인들을 묶어세우기 위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채택하였다.

이와 같은 투쟁과 혁명의 진로에 따라 농촌을 혁명화 하여 든든한 반일·항일투쟁과 혁명의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이는 다음과 같이 인용문에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혁명의 기본동력을 로동자농민근로인테리로 보고 그중에서도 특히 농민의 혁명화에 많은 힘을 기울인 것
……
국내에 사는 농민들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였다이것은 농민대중이야말로 로동계급과 더불어 혁명에 가장 절실한 리해관계를 가지는 계급이며 우리 혁명에서는 농민이 로동자와 같이 주력군으로 되여야 한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농촌의 혁명화는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서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고리였다.

라고 하여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농촌혁명화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말 해주고 있다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이상촌 오가자를 혁명화하고자 한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농촌혁명화는 바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항일무장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다시 찾은 조국을 혁명화하여 억압받고 착취를 받으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대다수 백성들에게 인간해방의 참된 세상을 안겨주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따라서 오가자를 혁명촌으로 만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넷째오가자(五家子)를 혁명화 하는 것은 당시 만주일대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혁명화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로서 혁명화된 오가자를 간도와 조선국내에 혁명화시키는데 거점으 삼자는 것다이에 대해서는 인용문에서는 여기에서 사업을 잘하면 오가자를 농촌혁명화의 본보기로 만들수 있었으며 그 경험에 토대하여 만주전역과 북부국경일대에서 농촌마을들을 우리의 영향하에 둘수 있었다.”라고 하여 오가자를 혁명의 거점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또 여기에서 사업을 잘하면 오가자를 농촌혁명화의 본보기로 만들수 있었으며 그 경험에 토대하여 만주전역과 북부국경일대에서 농촌마을들을 우리의 영향하에 둘수 있었다.”고 하여 오가자를 농촌혁명의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젊은 조선인들의 지도자가 오가자를 찾아갔음을 말 해주고 있다.


다섯째오가자는 비록 다섯 성씨들이 모여서 만든 이상촌이라고는 하지만 주민구성이 매우 복잡했음을 알 수 있다인용문을 보면 우선 오가자는 민족주의가 매우 강한 곳이었다.민족주의경향이 강하다 보니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해 공작원들을 파견해도 사업을 펼쳤지만 그 어떤 효과도 보지 못하였다오가자를 혁명촌으로 만드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는데 대해서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오자가를 개척한 유지들은 자기들의 리념이나 주의주장과 맞지 않는 이색적인 사상조류가 마을에 들어오는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
우리는 카륜에 있을 때 조선혁명군대원들을 공작원으로 몇몇 파견하였지만 그들이 오가자에 와서 크게 맥을 추지 못하였다고집이 세고 지반도 확고한 마을의 유지들을 설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당시 오가자(五家子)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아집이 대단했으며그 어떤 다른 사조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음을 말 해주고 있다.

오가자(五家子)마을은 사상 즉 민족주의만 강했던 것이 아니었다즉 오가자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출신지역 역시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있었다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오가자주민들은 평안도 출신과 경상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그러다 보니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지역만이 지니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물론 이를 현시대에는 지역감정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폄하를 하지만 이를 잘 살리고 또 지역간 특성을 잘 조화시키면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즉 지도자가 이를 어떻게 이끄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지역적 특성을 조화롭게 융화시키기 위해 지도자는 아래와 같이 행동을 했다고 인용문은 말 하고 있다.

오가자의 주민구성에서 대다수를 이루는것은 평안도사람들과 경상도사람들이였다.
……
나는 평안도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오가자에 가서도 카륜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상도사람들의 집에 자주 머물러있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상도사람들이 신경을 쓸수 있었다.

라고 하여

오가자가 평안도와 경상도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를 조화롭게 이끌어가기 위해 지도자가 세심하게 노력했음을 전해주고 있다자칫 일반인들은 이를 간과하고 자신들이 태어난 지역사람들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대다수이다하지만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역으로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 아닌 경상도 출신들이 거주하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역적 감정을 악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잘 조화를 시켜 하나로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오가자는 지역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변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출신 지역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상 역시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즉 경상도 사람들은 공산주의계열의 남만청총계통의 엠엘파를 따르고 있었고평안도 사람들은 민족주의독립운동계열인 정의부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엠엘파와 정의부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상조류였다.이렇듯 복잡한 주민구성과 그 구성에 따라 달리하는 사상의 차이점 때문에 오가자에 대한 혁명화는 그만큼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섯째오가자(五家子)마을을 혁명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는지에 대해 인용문은 여기서 내가 동무들의 소개로 그해 겨울을 보냈다한두주일도 아니고 몇달동안이나 한 고장에 그처럼 오래 붙박혀있은것은 우리가 오가자를 그만큼 중시하였기때문이였다.”라고 기록하여 놓았다인용문에도 밝히고 있듯이 오가자 마을을 혁명화하기 위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주일도 아닌 무려 몇 달 동안 오가자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니 오가자에 대한 혁명화 사업이 얼마나 어려웠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조선의 젊은 지도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 금이라는 말을 절감하는 시기였었다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 무장대를 조직하는 것은 일분일초가 급한 일이었으며반일운동을 벌이고 있는 서·북간도와 조선북부국경지대에 대한 혁명화는 더는 미룰 수 없는 대단히 시급한 상황이었다이러한 때 오가자(五家子)마을을 혁명화 하기 위해 몇 달씩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오가자에 대한 혁명화가 어려웠었다는 것을 증명해고 있다.

이와 같이 오가자(五家子)마을에 대한 혁명화가 어려웠음에도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앞으로 있을 항일무장투쟁대오를 내오기 위해 농촌혁명의 핵심기지 건설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주민구성도 복잡하고 사상적으로도 공산주의사상과 민족주의사상을 따르고 있으며,외부사상이 오가자에 스며들어오는 것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이상촌을 혁명화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이렇듯 혁명화가 어려움에도 지도자가 오가자마을을 혁명화를 기어코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오가자마을을 농촌혁명화의 핵심기지로 꾸리기 위한 것이다또 복잡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내세우려면 모든 주민들을 아우르며 하나의 사상으로 묶어 세워야 하였기 때문이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반일·항일투사들의 젊은 지도자가 오가자마을을 혁명화하려는 것은 결국 《ㅌ · ㄷ》의 정신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며또 《ㅌ · ㄷ》의 정신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적 강령인 카륜회의의 주요 결정사항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이는 반일·항일정신을 가지고 있는 모든 주민들을 우리식으로 항일혁명투쟁에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오가자마을을 혁명화 하는데 얼마나 어려운 고비들을 넘겼는지에 대해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 공작원들의 활동으로 청년들속에서 우리의 지향을 따르려는 열망이 급속이 높아지게 되자 오가자의 유지들은 대통을 휘두르며 요새 젊은것들의 머리에 딴물이 들어간다고 하면서 료하벌에 사회주의를 끌어들이는 놈팽이들은 뼈가 성하지 못할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간도는 공산당때문에 다 망했다는데 그 미친 바람이 오가자에까지 들어오면 료하농촌도 무사치 못할것이라고 말하는 유지들도 있었다.

서뿔리 서두르다가는 유지들의 대통에 얻어맞을수 있었다.

청년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공산주의행진곡에 발을 맞추어야겠는데 령감들의 눈에 날것 같아서 망설이였다.
……
촌공회를 뒤에서 조종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총찰하는 사람은 변대우라는 로인이였다그가 마을의 실권자로서 유지들을 조종하였다마을에서는 그를 변뜨로쯔끼령감이라고 불렀다사람들이 그런 별명을 붙인것은 그가 뜨로쯔끼에 대한 말을 자주 하였기때문이다.

변로인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국내와 만주각지를 떠돌아다니였다초기에는 고향 한천(평안남도)과 자성도청거우(림강현)등지에서 학교들을 세우고 교육활동을 하였다그가 무장활동에 관여한것은 1918년 림강의 모아산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독립군부대에 들어가있을 때부터였다.
……
대한독립단 선전부장과 민족독립군 부총재광복군 군법부장 겸 제1영장직을 거쳐 통의부의 실업부장직까지 차지하고 독립군운동을 추켜세우려고 동분서주하던 그는 1926년부터 군직에서 물러나 리상촌건설에 몰두하였다.

이 로인이 한때는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면서 쏘련의 원동지방에도 드나들었다그에게는 고려공산당에 관여했을 때 받았다는 푸른 뚜껑의 당증도 있었다.

변대우로인을 돌려세우지 않고서는 완고한 유지집단을 돌려세울수 없었으며 마을을 혁명화할수 없었다.
내가 오가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농우회사업을 책임지고있던 변로인의 아들 변달환이 나한테로 왔다그는 나에게 민족주의자들을 제끼고 오가자를 리상촌으로부터 혁명촌으로 만들어야겠는데 자기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유지들때문에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하면서 김선생이 왔으니 이제는 완고하고 쓸모없는 령감들을 타도하자고 하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변달환에게 물었다.

타도라니그건 어떻게 하자는겁니까?

변달환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였다.

령감들이 뭐라건말건 우린 우리끼리 조직들을 내오고 딴가마밥을 먹으면서 오가자를 사회주의동네로 만들자는거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그러면 오가자가 둘로 쪼개질수 있습니다그건 우리의 로선과도 맞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오가자를 저 락후한 령감들에게 맡길수는 없구.

문제는 유지들이 우리를 지지하게 만드는겁니다내가 회장선생네 아버지와의 사업을 좀 해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달환은 그 누가 접근해도 소용없다고 하였다그동안 국민부에서도 오고 상해림시정부에서도 오고 엠엘계의 공산당재건위원회의 인물들도 와서 저마다 오가자에 발을 붙이려고 애를 썼지만 모두 아버지한테서 랭대를 받고 돌아갔다어지간한 사람은 만나주지도 않고 설사 상대가 록록치 않은 민족주의거두라고 해도 훈계를 해서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회장선생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친분관계가 있고 또 회장선생과 나도 구면이니 생판 모르는 남남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고 했더니 변달환은 벽창호같은 자기 아버지한테는 연고관계도 통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몹시 난처해하였다변달환은 10년전에 우리 아버지에게 보내는 변로인의 편지를 가지고 림강에 온적이 있었다.

나는 마을의 유지들이 늘 모여앉군하는 변달환이네 집에서 여러날 변뜨로쯔끼령감과 담화를 하였다.

첫날에는 주로 변대우로인이 말을 많이 하였다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려대는데 기상이 아주 도도하였다김선생의 아들이 와서 반갑다고는 하면서도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였다말끝마다 너희들,너희들하면서 훈시만 하였다인물이 잘나고 기상이 칼칼한데다가 리론수준도 상당해서 처음부터 위압을 느끼게 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중에서


좀 길게 인용을 하였다인용문을 보면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가 들어오는 데 대해서 얼마나 경계심이 강하였으며또 이를 막아내기 위해 유지들이 강력하게 대처를 했는지 알 수가 있다인용문에 공작원들의 활동으로 청년들속에서 우리의 지향을 따르려는 열망이 급속이 높아지게 되자 오가자의 유지들은 대통을 휘두르며 요새 젊은것들의 머리에 딴물이 들어간다고 하면서 료하벌에 사회주의를 끌어들이는 놈팽이들은 뼈가 성하지 못할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언급이 되어 있듯이 이 정도면 감히 외부로부터 사상이나 사조가 스며들거나내부로부터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를 받아들인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특히나 우리겨레의 얼과 넋에는 윗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다른 민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윗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건 없건 일단 긍정을 하고 후에 설득을 하였다이와같은 민족정서가 있기에 오가자 마을에서 유지들이라고 하는 웃어른들의 완고함을 감히 아랫사람들이 거부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본다.

또 하나는 1930년 10월 중순경이면 아직 1930년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양대 폭동의 후과가 전 간도지역을 휩쓸고 있던 때였기에 더욱더 새로운 사조가 오가자 마을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인용문에도 간도는 공산당때문에 다 망했다는데 그 미친 바람이 오가자에까지 들어오면 료하농촌도 무사치 못할것이라고 말하는 유지들도 있었다.”라고 하여 1930년 대폭동의 악영향이 오가자 마을에도 강하게 미쳤음을 말 해주고 있다.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를 내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인용문의 농우회사업을 책임지고있던 변로인의 아들 변달환이 나한테로 왔다그는 나에게 민족주의자들을 제끼고 오가자를 리상촌으로부터 혁명촌으로 만들어야겠는데 자기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유지들때문에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하면서 김선생이 왔으니 이제는 완고하고 쓸모없는 령감들을 타도하자고 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함축적으로 말 해주고 있다.

오가자 마을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사상과 사조가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그들의 의지를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꺾어버렸으면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유지들을 타도하자고 했겠는가사실 우리민족의 예의범절에는 절대 아버지는 고사하고 웃어른들을 타도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수수천년 혹은 수수만년 내려온 우리민족의 절대선(絶對善)인 윗사람을 공경하여야 한다.” 가치를 어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그럼에도 아버지를 포함한 유지들을 타도하자고 할 정도였으니 새로운 사조가 오가자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마을 어른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반대를 했겠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를 받아들이는데 대해 위세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력하게 반대를 하기에 자연히 오가자 마을의 젊은이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이는 인용문의 서뿔리 서두르다가는 유지들의 대통에 얻어맞을수 있었다청년들속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공산주의행진곡에 발을 맞추어야겠는데 령감들의 눈에 날것 같아서 망설이였다.”고 하는 내용을 보아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를 내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도 이다지도 어려운데 다른 고장사람인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과연 어떤 방법을 써서 오가자 마을 혁명화 했는가인용문을 보면 처음부터 다가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즉 변대우 노인의 아들 변달환이 아버지를 포함하여 지역 유지들을 타도하자고 하니 나는 어이가 없어 변달환에게 물었다.타도라니그건 어떻게 하자는겁니까?하면서 깜짝 놀라는 장면이 바로 오가자 마을 혁명화하기 위해 파견된 공작원들이나 내부의 젊은이들이 다가가는 방법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어른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또 자신들의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가 절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합한다는 것을 공감하고 스스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설득과 실천으로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지도자의 접근방법이었다.

오가자 마을을 혁명화 하기 위해 다가가는 방법중 또 다른 특징은 지역의 좌상(座上)즉 핵심지도자를 설득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인용문의 내용을 보면 그 일이 그리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오가자 마을을 이끄는 핵심지도자를 설득하지 못하면 오가자 마을에 대한 혁명화는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따라서 조선의 젊은 지도자를 이를 정확하게 꿰뚫고 접근을 한 것이다.

오가자의 핵심지도자인 변대우 노인의 이력을 보면 어지간한 젊은이들이 접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변대우 노인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일찍부터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인 선진적인 사람이다민족주의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사상 모두를 섭렵한 후 더구나 극단적 좌경모험주의자들이 일으킨 1930년 양대 폭동의 후과가 전(간도지역을 휩쓸던 때였으니 변 노인의 공산주의사상을 대하데 있어 그가 가지는 거부감은 능히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이러한 변 노인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이론실천가가 아니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변대우 노인의 이력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촌공회를 뒤에서 조종하는 실권자
◆ 마을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좌상노인(座上老人)
◆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공산당에 가입한 공산당원 이자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노인
◆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 교육자
◆ 무장투쟁가
◆ 대한독립단 선전부장과 민족독립군 부총재광복군 군법부장 겸 제1영장직을 거쳐 통의부의 실업부장

비록 당시 나이가 든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변대우 노인의 이력이 얼마나 화려한가이러한 화려한 이력자인 변대우 노인을 설득하고 조선의 젊은이들이 받아들인 새로운 사조에 동조를 하고 자신들의 투쟁방법에 동참을 할 수 있게 하려면 지도자의 이론실천력민족성,인간성품성미래에 대한 설계와 구체성… 등을 두루 겸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특히 민족성과 진실성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포용력은 그 핵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어설픈 이론만 가지고는 절대로 변대우 노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그의 이력이 이를 말 해주고 있다.

인용문을 보면 이에 대해 젊은 지도자는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연히 지도자가 위에서 열거한 능력과 자질을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변대우로인을 돌려세우지 않고서는 완고한 유지집단을 돌려세울수 없었으며 마을을 혁명화할수 없었다.”라는 인용문의 내용이 이를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또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오가자 마을의 유지들을 타도하자고 하는
변달환의 다음과 같은 제안에

령감들이 뭐라건말건 우린 우리끼리 조직들을 내오고 딴가마밥을 먹으면서 오가자를 사회주의동네로 만들자는거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그러면 오가자가 둘로 쪼개질수 있습니다그건 우리의 로선과도 맞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오가자를 저 락후한 령감들에게 맡길수는 없구.
문제는 유지들이 우리를 지지하게 만드는겁니다내가 회장선생네 아버지와의 사업을 좀 해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하여 오가자 마을을 혁명화 하기 위해 발걸음을 한 젊은 지도자는 변달환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타도가 아닌 설득과 감화감복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또 타율이 아닌 자율 즉 자신해서 자신들의 혁명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이다.

하지만 완고하기 그지없는 변 노인을 돌려세운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인용문의 아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첫날에는 주로 변대우로인이 말을 많이 하였다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려대는데 기상이 아주 도도하였다김선생의 아들이 와서 반갑다고는 하면서도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였다말끝마다 너희들,너희들하면서 훈시만 하였다인물이 잘나고 기상이 칼칼한데다가 리론수준도 상당해서 처음부터 위압을 느끼게 하였다.”

라고 하여

시작부터 변 노인에게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말 해주고 있다인용문을 보면 김선생의 아들이 와서 반갑다고는 하면서도 나를 어린아이 대하듯 하였다말끝마다 너희들,너희들하면서 훈시만 하였다.”고 하여 젊은 지도자를 어린 아이 취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어른들이 어떤 아랫사람을 어린 아이 취급한다는 것은 아예 대화의 상대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대화의 상대 혹은 마주할 대상으로도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그를 설득해낼 수가 있겠는가두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진2. 오가자 마을의 좌상 변대우 노인
▲ 오가자 마을의 좌상노인이자 실질적 지도자였던 변대우 노인이다. 변대우 노인은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여 한 때는 공산주의운동까지 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그럼 이처럼 완고하고 고집불통이이며 다른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변대우 노인을 어떻게 설복하고 오가자 마을을 혁명화 했는지에 대해 북측 자료를 보면서 분석하도록 하자중요한 내용이 있기에 될 수 있으면 전문을 길게 인용한다.


❝ 나는 변로인이 리치에 어그러지는 말을 하는 경우에도 반박하거나 중단시키지 않고 례절을 차리면서 참을성있게 들어주었다.

로인은 요새 젊은이들은 남이 열마디를 하면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봉건이요뭐요 하면서 트집만 잡는데 성주와는 말할 재미가 있다고 하였다.

하루는 그 로인이 저녁을 차려놓고 나를 청하였다.
……
로인은 나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이런 질문을 하였다.

너희들이 우리리상촌을 허물어버리려고 왔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자기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들을 제일 경계한다고 하던 변달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리상촌을 허물다니요우리가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로인님들이 공을 들여 꾸려놓은 리상촌을 왜 허물어버리겠습니까우리에겐 그런 힘도 없습니다.

그런가그런데 우리 달환이를 필두로 해서 오가자의 젊은 녀석들은 밤낮리상촌이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늙은것들을 타도하고 우리 동네에 붉은기를 날릴 생각만 하고있지소문을 들어보면 오가자의 청년들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성주라는데 길림청년들도 그 녀석들처럼 리상촌이라는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어디 한번 우리리상촌에 대한 견해를 솔직히 터놓아보아라.

나는 리상촌을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이국에 쫓겨와서 방황하던 조선동포들을 한곳에 모여놓고 오붓이 살아보자고 꾸린것이 리상촌이겠는데 왜 나쁘다고 보겠습니까아무것도 없는 료하진펄에 이런 정도의 조선동네를 만들어놓은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로인님들이 마을을 꾸리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변로인은 그 말을 듣자 흡족해서 코수염을 쓰다듬었다말투도 너희로부터 자네로 변하였다.

그러면 그렇겠지자네도 이제 알겠지만 우리 마을에는 경찰도 없고 감옥도 없고 관청도 없네촌공회라는 자치기관을 통해서 조선사람들끼리 만사를 민주주의적으로 풀어나가고있단 말일세이런 리상적인 동네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나는 이때야말로 리상촌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립장을 명백히 밝혀야 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로인님자치기관을 꾸려놓고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의 생활상 편의를 도모하는 마을을 건설한것은 애국적인 소행이라고 봅니다그렇지만 이런 마을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독립할수 있겠습니까?

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리며 위엄을 뽑던 로인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눈섭만 씰룩거리였다그러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였다.

독립은 못해자네가 내 아픈곳을 면바루 건드렸네리상촌이라고 만들어는 놓았지만 독립운동에 보탬은 못주고있지그래서 나도 고민하고있네리상촌을 건설해서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리상촌건설의 허황성을 론증하였다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이국땅에다가 리상촌을 건설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로인님들의 노력으로 오가자가 다른 고장에 있는 조선인부락보다 더 살기가 편한 동네로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조선사람들의 리상이 해결되였다고 볼수는 없다우리 민족의 리상은 왜놈도 없고 지주도 없고 자본가도 없는 독립된 조국에서 착취와 압박을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것이다그런데 지주한데 빚을 지고 살면서 리상적으로 산다고 말할수 있는가왜놈들이 만주로 쳐들어오면 오가자도 무사치 못할것이다일제가 만주를 먹는것은 시간문제이다왜놈들은 조선민족이 리상적으로 사는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리상촌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는건가?

변로인은 초조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였다.

우리는 이 마을을 현상유지나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마을이 아니라 조국광복을 위해서 싸우는 마을로혁명하는 마을로 개조하자는것입니다.

그러니 오가자에 사회주의를 퍼뜨리겠단 말이지그건 안되네난 사회주의라면 질색이야기미년 여름에 관전에서 자네 아버지가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말씀했을 때 우리는 다같이 그 뜻을 지지했네그런데 그후 고려공산당을 따라다니면서 보니까 공산주의자들이라는게 말짱 미친놈들뿐이더란 말일세그놈들이 하는짓을 보면 전부 종파질뿐이야그 다음부터는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오한이 나더군.

변대우로인이 고려공산당에서 받은 푸른 당증을 꺼내보인것이 이때였다.

성주가 혁명을 하느라고 아무리 애를 쓰며 돌아다녀두 이런 당증이야 없겠지?

로인인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나는 그 당증을 펼쳐보다가 양복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었다.

뜻밖에 그런 일을 당한 로인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나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종파질을 하다가 망한 고려공산당 당증인데 좀 두고보겠습니다.

로인이 당증을 돌려달라고 할것 같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세기와 더불어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중에서


좀 길게 인용을 하였다위 인용문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이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도록 한다.

첫째세대간의 갈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를 한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세대를 바뀌게 된다생리적인 세대만 바뀔 뿐만 아니라 사고의 세대도 역시 바뀌게 된다는 진리를 말 해주고 있다위 인용문에는 변대우 노인의 대화에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다만 우리는 세대간에 벌어진 사고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을 하고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데 그 중점이 있다고 본다위에서 지도자의 대화에 임하는 자세와 대화의 접근법에서 이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가 있다.

먼저 지도자는 세대간의 갈등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윗세대의 세대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윗세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을 하고 긍정을 해주면서 동시에 젊은 세대들의 세대감정을 자연스레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간 것이다또 윗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대를 제시하면서 양 세대 간에 합일점을 찾아서 공유하도록 하였다.이에 대해서는 인용문의 다음 문장이 답을 주고 있다.

❝《〈리상촌을 허물다니요우리가 도와드리지는 못할망정 로인님들이 공을 들여 꾸려놓은 리상촌을 왜 허물어버리겠습니까우리에겐 그런 힘도 없습니다.
……
지도자가 성주라는데 길림청년들도 그 녀석들처럼 리상촌이라는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어디 한번 우리리상촌에 대한 견해를 솔직히 터놓아보아라.
……
나는 리상촌을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이국에 쫓겨와서 방황하던 조선동포들을 한곳에 모여놓고 오붓이 살아보자고 꾸린것이 리상촌이겠는데 왜 나쁘다고 보겠습니까아무것도 없는 료하진펄에 이런 정도의 조선동네를 만들어놓은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로인님들이 마을을 꾸리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변로인은 그 말을 듣자 흡족해서 코수염을 쓰다듬었다말투도 너희로부터 자네로 변하였다.

자신들이 지향하는 세계에 대해 뜻밖에도 외부에서 온 젊은이 그것도 간도지역에서 젊은 세대들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이 긍정을 해주니 흡족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또 자신들의 선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대화 상대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우리는 여기서 상대방과 진행하는 대화법에 대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으로 본다.

둘째세대 공감은 과연 무엇인가그건 곧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는 일이다위 인용문의 대화에서 결정적으로 세대 간 공감대를 찾았고 대화를 실마리를 가지게 된 것을 바로 조국의 독립에 대한 대화였다이는 인용문의 다음 문장에서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그러면 그렇겠지자네도 이제 알겠지만 우리 마을에는 경찰도 없고 감옥도 없고 관청도 없네촌공회라는 자치기관을 통해서 조선사람들끼리 만사를 민주주의적으로 풀어나가고있단 말일세이런 리상적인 동네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나는 이때야말로 리상촌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립장을 명백히 밝혀야 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로인님자치기관을 꾸려놓고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의 생활상 편의를 도모하는 마을을 건설한것은 애국적인 소행이라고 봅니다그렇지만 이런 마을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독립할수 있겠습니까?

올방자를 틀고앉아 대통을 연방 두드리며 위엄을 뽑던 로인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눈섭만 씰룩거리였다그러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였다.

독립은 못해자네가 내 아픈곳을 면바루 건드렸네리상촌이라고 만들어는 놓았지만 독립운동에 보탬은 못주고있지그래서 나도 고민하고있네리상촌을 건설해서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결국 인용문에도 나와 있지만 지도자는 변 노인이 진정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곡을 찌른 것이다이미 이상촌을 혁명촌으로에 대한 분석 초기에 언급을 했듯이 오가자 마을을 꾸려놓고 스스로 이상촌이라고 했지만 진정 이상촌은 아니었다는 것을 위 대화 내용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오가자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진정한 이상촌 이상향은 다름 아닌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 조국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세대 간 공감대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고양 세대 간 이상향은 바로 조국의 독립에 있었다지도자는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평소 지도자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도 빼앗긴 나라를 우선 되찾는 것이었다그런 다음 해방된 조국에서 혁명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세대 간 공감대를 찾았으니 이제는 서로간에 존재하는 간극만 조절하고 조합을 하면 되는 것이다일단 대화의 실마리 혁명화의 첫 꼬투리는 잡은 것이다.


※※※ 글이 길어져서 인용문에 대한 분석은 다음 편에 계속한다※※※


→ 《계속

자료제공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이 창기 기자

2015년 4월 26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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