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7)
할아버지의 항일혁명운동 |
나의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 항일광복운동과 노농대중의 혁명운동에 헌신하셨다. 망국의 시기에 대한제국 정부의 전라남도 순찰사로 계셨던 종조부와 무관학교 시위연대 보병참위로 활동한 숙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할아버지는 한성학교에 입학했지만 중등과를 중퇴했다.
고향을 떠날 당시 할아버지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서울로 올라갔다. 집안의 노비문서를 몽땅 불태우고, 그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땅까지 나누어주고는 그 시간부로 모두 해방을 선언했던 것이다. 또한 수산으로 가서는 상투머리를 잘라 백지에 싸서 왜놈 이발사에게 주고는 두암집 어른(아버지)에게 갖다드리라고 했다. 이 때문에 집안은 물론 고향 마을 전체에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근대수학교육을 받은 할아버지는 한때 측량기사로 호구지책을 마련했으나, 3.1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할아버지의 항일혁명 활동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연구한 학자들의 기록과 일제식민지 고등계 경찰의 수사기록문서와 검찰 행정사무의 수사기록과 증거자료, 당시 동아일보 등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1924년 12월6일 창립된 사회주의자동맹회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또한 적박단(赤雹團)이란 항일테러단체에도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생이나 지식인 출신과는 달리 자생적인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사회주의계열 운동의 파벌로 분류하자면 서울파 계열에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서울파는 1921년 창립된 서울청년회 내부에서 김사국, 이영 등을 중심으로 해서 자생한 사회주의운동 세력으로 북풍회, 화요회, 조선노동당 등과 경쟁했던 그룹이었다. 할아버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을 강조했고, 또 평생을 그 원칙에서 항일혁명운동을 해오셨다. 그런 면에서 서울파가 내세운 자주적인 통일전선 노선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20년대 중후반의 사회주의운동은 극심한 종파주의로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 좌절하고 실망한 할아버지는 이후 형평사(衡平社)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을 위해 1923년 4월 진주에서 결성된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계급해방투쟁과 반일 민족해방투쟁이란 두 가지 투쟁을 함께 벌여나간 조직이었다. 할아버지는 조선형평사 총본부에서 발간한 잡지 <정진(正進)> 창간호(1929년 5월1일 발간)에 ‘형평운동의 정신’이란 글을 게재할 만큼 형평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당시 할아버지가 쓴 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체 형평운동이라 함은 어떠한 의미로 어떠한 일을 하는지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이제 우리 동족이 조선 각지에 대개 40만명이나 있다. 조선 전 인구를 2천3백만이라 하면 2천3백만 분의 40만이라는 민족은 즉 우리 형평계급의 민족일 것이다. 하면 다 같은 조선민족이지마는 ‘백정’이니 ‘피쟁이’니 ‘갖바치’니 ‘천인’이니 하여 그 무엇이 특별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왜 천대를 주며 학대를 주며 멸시를 하는가. 하고 또 우리로서는 그 어떠한 조건이나 있는 것처럼 천대와 박대에 슬픔에 신음하면서 억울한 한을 가지고도 의연히 짓밟히고 살아온 것은 무슨 이유일까?(중략)
조선 각지의 우리 계급 40만이 한 몸뚱이와 같이 되는 단결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의미로서 형평사라는 조직이 생겼다. ‘형평(衡平)’이라 함은 이 인간세상을, 이 인간사회를 저울대로 달아서 평탄하게 고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 형평사가 남병산에 동남풍이 불 듯 비온 뒤에 죽순처럼, 곳곳마다 자유를 부르짖고 평등을 요구하며 정의의 함성으로 자유를 찾자, 평등을 찾자, 행복을 찾자 하는 것이 즉 형평운동이다.”
또한 할아버지는 일제 경찰의 분열 공작과 잔혹한 고문에 굴복하고 변절하는 등 도탄에 빠진 항일혁명운동 진영에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며 허무당(虛無黨)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허무당은 러시아에서 유래된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운동이었다. 허무당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1926년 1월4일 허무당 선언문을 전국적으로 배포했다. 당시 선언문에서는 “혁명은 결코 언어와 문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 합법적으로 현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저능아”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 구속된 할아버지는 신분이 노출되어 더 이상 서울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종파분열로 점철된 운동에 실망감도 커졌다. 할아버지는 결국 다시 밀양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밀양에서도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27년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해 결성한 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에 적극 참여했다.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검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중단 없는 항일혁명운동을 지속해나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의 할아버지는 일제의 혹독하고 살인적인 폭압에 맞서 단 한 번도 적들에게 굴복한 일없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줄기차게 해방투쟁을 하셨다. 또한 억압받는 무산대중들을 위해 한 생애를 온전히 해방투쟁으로 일관하셨다. 그런 모습을 통해 내게도 대를 이어 민족해방, 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에 일관하도록, 해방투쟁의 전사로 살도록 가르치셨다.
할아버지는 왜놈들의 혹독한 사상전향공작을 끝까지 이겨내고 일제 말기에는 식민지 해방을 우리 민족의 역량으로 전취하기 위해 청년들과 함께 밀양의 북부산악지대로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적의 무기를 탈취해 우리 손으로 해방을 맞이하려고 준비하셨다.
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해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자는 여운형 선생의 호소에 따라 밀양에서도 건국동맹 지부를 조직하셨고, 일제의 최후 발악적인 징용·징집에 반대해 산으로 들어온 청년들을 이끌고 밀양의 북부 화악산 밀림과 계곡에서 해방의 날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산 속의 청년들과 밀양의 북성거리로 입성했다.
그 길로 할아버지는 겨레의 원성으로 찌든 밀양경찰서를 접수했다. 치안대를 조직해 우리 조선 사람의 손으로 치안을 회복했다. 또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를 조직한 뒤 항일운동의 선배인 김병환 선생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할아버지는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할아버지는 환중인 위원장을 보좌하며 행정을 확보해 일제가 물러간 뒤의 혼란을 정리해나갔다. 일제의 만행을 피해 고향 땅을 떠났던 동포들이 일본에서, 중국과 동북 만주에서, 또 남양에서, 노령 땅에서 돌아오자 그들을 보살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말로 하는 애국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애국이 무엇인지, 운동가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무엇이 참다운 운동가의 모습인지를 할아버지를 통해서 배웠다. 이제 팔십을 훌쩍 넘긴 내가 오늘날까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온 것도, 또 앞으로 여생을 어떻게 마감해야 할 것인지도 바로 할아버지의 지난한 삶을 통해 배운 셈이다. 아직도 내 눈가에는 해방되던 날, 청년들의 무등을 타고 밀양 거리로 들어오시던 할아버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13살 때의 바로 그 기억이 오늘까지 나를 이끌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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