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39)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8.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전후 만주 각지 유격대창건
5) 항일무장대결성 시험대 추수투쟁에서 대승리
사진. 추수투쟁이 처음으로 일어났던 연길현 로투구
▲ 1931년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벌어졌던 추수투쟁이 처음 시작되었던 연길현 로투구 전경. 추수투쟁은 1930년 《5·1폭동》 《5·30폭동》 《8·1폭동》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추수투쟁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항일세력들이 이끌어간 투쟁이었다. 치밀한 투쟁 전략과 전개과정에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진행을 하였으며 타도대상들과의 주도권 싸움에서도 언제나 주동을 쥠으로서 추수투쟁은 대 승리를 거두었다. © 이용섭 역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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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독립투사들의 지도자는 1930년 《5 · 1폭동》 《5 · 30폭동》 《8 · 1폭동》의 후과를 극복하고 새로운 높은 단계의 반일 · 항일투쟁을 벌이기 위해 동북만과 조선북부국경일대를 쉼 없이 다니면서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고 새로운 조직을 내오는데 모든 걸 다 바쳤다.
1930년 10월부터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할 때까지 젊은 지도자의 노력으로 파괴된 조직들은 거의다 복구가 되었으며, 오히려 이전보다도 훨씬 더 광대하고 튼튼한 지하조직을 꾸렸다. 앞서 수도 없이 강조를 했지만 지도자의 이와 같은 조직복구 및 새로운 조직의 결성은 새로운 단계의 높은 반일 · 항일투쟁에 돌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전 세대들과는 달리 반일 · 항일투쟁을 함에 있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젊은 지도자의 이와 같은 조직복구 및 새로운 조직을 결성해가는 과정에서 《만주사변》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물론 《만주사변》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이미 지도자가 동북만과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 드넓은 지대에 지하조직을 꾸리는 사업은 거의 마무리가 된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안도현에 들러 조직사업결성을 마친 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아무리 조직사업을 마무리 했다 해도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에게 있어 《만주사변》의 발발은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초기에만 당황하였지만 어쨌건 일시적 난관이 조성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북측 자료에서 조선의 젊은 지도자도 분명하게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높은 단계의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나아가는 조선의 젊은 항일투사들에게는 그 정도의 난관이 닥친 것은 극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큰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무장대오를 내오는 시기를 더욱더 앞당겼다.
동북만과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일대에 조직에 망라되었던 젊은 조선인 반일 · 항일투사들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한 항일투쟁의지를 다졌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이전 장들에서 살펴본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만주사변》으로 부닥친 위기와 난관 앞에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반일 · 항일투사들은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서 북측 자료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 9.18사변으로 하여 우리에게는 항일전쟁을 시급히 개시해야 할 절박한 과업이 나서게 되였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부정의의 포성에 정의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온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가들은 모두 지하에서 나와 자기 진지를 차지하였다. 대륙을 뒤흔드는 포성에 만주지방사람들이 그해 가을 단단히 정신이 들었다고 할수 있다. 그 포성은 사람들을 위축시킨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시키고 분발시키였다. 적의 폭압으로 초토화되였던 만주지대에는 또다시 새로운 투쟁기운이 태동하였다.
우리는 군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킬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도래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솔직히 말하여 그 당시 만주지방사람들은 폭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때문에 누구나 고민하였다. 혁명을 다음단계에로 상승시키자면 그들에게 신심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격문이나 뿌리고 빈말공부나 해가지고서는 그것을 해결할수 없었다.
실패에 습관된 군중에게 힘을 주고 신심을 주자면 새로운 투쟁에로 그들을 궐기시키고 그 투쟁을 반드시 승리로 결속지어야만 하였다. 오로지 승리한 투쟁만이 대중을 악몽과 같은 침체상태에서 건져낼수 있었다. 대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키지 않고서는 설사 몇몇 선각자들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고 하여도 크게 은을 낼수 없었다.
9.18사변의 발발은 동만지방인민들이 다시한번 투쟁에 일떠설수 있는 계기를 지어주었다.국내인민들의 폭동적진출이 또한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반일폭동이 련이어 일어나고있었다. 고원동척농장소작쟁의, 룡천불이농장소작쟁의, 김제다목농장소작쟁의가 그 대표적인 실례였다.
룡천지구에서는 1929년이후에도 농민들의 투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그곳 조직들이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투쟁을 잘하였다. 룡천땅에는 우리 공작원들이 많이 나가있었다.
영흥의 3,000여명 농민들과 삼척의 2,000여명 농민들은 9.18사변후 《비상시국》을 표방하며 파쑈적인 폭압과 략탈을 강화하고있는 일제를 반대하여 큰 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세기와 더불어 무장에는 무장으로 중에서〉
인용문을 봐서도 알 수 있지만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조작하여 벌인 《9 · 18만주사변》은 역설적이게도 반일의식이나 감정을 가진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항쟁의지를 꺾어버린 것이 아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투쟁의지를 북돋아주었다. 또 《9 · 18만주사변》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투사들이 이미 전부터 준비해왔던 무장대오결성을 앞당겨오게 하였다. 결론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조작을 통해 일으킨 《9 · 18만주사변》은 겉으로는 강대성의 신화를 보여주었으며, 만주라는 넓은 땅을 점령함으로서 그들이 늘 꿈꾸어왔던《대동아공연권》의 실현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침략만행은 식민지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에게 반일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독립투사들이 《9 · 18만주사변》이 발발하게 되자 이를 정면으로 맞받아쳐 나가 그 난관을 극복하고 거세차고 가열차게 항일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떨쳐일어난 당시의 상황은 인용문은 “9.18사변으로 하여 우리에게는 항일전쟁을 시급히 개시해야 할 절박한 과업이 나서게 되였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부정의의 포성에 정의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온것이다.”라고 하여 그 의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의지인가. “부정의(不正義)의 포성(砲聲)에 정의(正義)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왔다”고 하여 악의 폭력에는 선의의 폭력으로 대응하여 악을 쓸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불타고 있다. 항일무장투쟁 당시부터 가졌던 이러한 기조는 오늘 날까지도 북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즉 1930년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 8월15일까지 벌였던 부정의의 폭력에 대한 정의의 폭력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가한 포성이었다면 오늘 날에는 온 누리를 부정의의 세상을 만들고 온갖 전횡을 부리고 있는 제국주의 연합세력과의 부정의의 폭력에 정의의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형식적으로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본질적 측면에서는 그때나 현재나 제국주의자들의 부정의의 폭력에 정의의 폭력으로 대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똑같다.
인용문을 보면 《9 · 18만주사변》이 발발하게 되자 조용히 지하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반일 · 항일투사들이 전면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일제가 만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가들은 모두 지하에서 나와 자기 진지를 차지하였다. 대륙을 뒤흔드는 포성에 만주지방사람들이 그해 가을 단단히 정신이 들었다고 할수 있다. 그 포성은 사람들을 위축시킨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시키고 분발시키였다. 적의 폭압으로 초토화되였던 만주지대에는 또다시 새로운 투쟁기운이 태동하였다.”
라고 하여
《9 · 18만주사변》의 발발은 지하에서 투쟁을 하고 있던 투사들의 반일 · 항일투쟁의지를 꺾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북돋아 주었음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인용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동북만과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 조직되어있던 조직원들 뿐 아니라 일반 조-중인민들의 반일감정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가 되었으며, 이는 곧 새로운 높은 단계로 반일 · 항일투쟁을 준비하던 젊은 조선인 항일투사들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커다란 효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볼 수 있다.
《9 · 18만주사변》의 발발이 아무리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항일투사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하여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는 반일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욱더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인민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는 군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킬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도래하였다고 판단하였다.”라고 하여 당시 폭발직전의 일반대중들의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반일 · 항일투쟁으로 이끌어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당시 어떻게 일반 민중들을 불러일으킬 것인가에 대해 인용문을 보면 “솔직히 말하여 그 당시 만주지방사람들은 폭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때문에 누구나 고민하였다. 혁명을 다음단계에로 상승시키자면 그들에게 신심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격문이나 뿌리고 빈말공부나 해가지고서는 그것을 해결할수 없었다.”라고 하여 당시 처해있던 어려운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전에 대투쟁(폭동)의 대실패의 후과가 《9 · 18만주사변》이 발발했다고 하여 사람들의 감정 속에서 하루아침에 가셔지는 것 또한 아니다. 《9 · 18만주사변》으로 반일감정이 폭발직전에 있기는 하지만 실패의 연속과 좌절 속에서 쉽게 일반 민중들이 투쟁으로 일어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인용문에서는 지도자의 이러한 고민과 그에 대한 정확한 분석 그리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단계의 투쟁전략을 수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어떻게 그 대응책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실패에 습관된 군중에게 힘을 주고 신심을 주자면 새로운 투쟁에로 그들을 궐기시키고 그 투쟁을 반드시 승리로 결속지어야만 하였다. 오로지 승리한 투쟁만이 대중을 악몽과 같은 침체상태에서 건져낼수 있었다. 대중을 투쟁속에서 단련시키지 않고서는 설사 몇몇 선각자들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고 하여도 크게 은을 낼수 없었다.”
라고 하여
당시 대투쟁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실패에 대한 극복방안은 바로 승리의 신심을 주는 것이다. 실패 → 새로운 투쟁 → 투쟁의 승리라는 도식이 바로 실패의 좌절 속에서 투쟁의지를 잃어버린 일반민중들을 새로운 높은 단계의 투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인용문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9 · 18만주사변》을 조작하여 전격적으로 만주를 침략이 대투쟁의 실패에 좌절하여 침체해 있던 만주지역의 일반민중들의 투쟁의지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9.18사변의 발발은 동만지방인민들이 다시한번 투쟁에 일떠설수 있는 계기를 지어주었다. 국내인민들의 폭동적진출이 또한 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하고 하여 일제의 만주침략은 중장기적으로 볼 때 악수를 두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9 · 18만주사변》의 발발은 비단 만주지역에만 투쟁의지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식민지에서 온갖 탄압과 압박을 당해오는 조선의 일반 민중들도 주눅이 들어 투쟁을 멈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이끌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인용문을 보면 당시 조선 국내에서 벌어졌던 투쟁을 이끌어간 조직들 역시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룡천지구에서는 1929년이후에도 농민들의 투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그곳 조직들이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투쟁을 잘하였다. 룡천땅에는 우리 공작원들이 많이 나가있었다.”고 하여 조선 국내의 투쟁에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 이끌어갔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모든 투쟁이나 항쟁은 그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다. 이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다.
인용문을 보면 1931년 당시로서는 상당히 많은 인원들이 투쟁이나 폭동(폭동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에 떨쳐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지역도 조선북부에서부터 남부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대투쟁의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국내에서는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반일폭동이 련이어 일어나고있었다. 고원동척농장소작쟁의, 룡천불이농장소작쟁의, 김제다목농장소작쟁의가 그 대표적인 실례였다.
룡천지구에서는 1929년이후에도 농민들의 투쟁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때 그곳 조직들이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투쟁을 잘하였다. 룡천땅에는 우리 공작원들이 많이 나가있었다.
영흥의 3,000여명 농민들과 삼척의 2,000여명 농민들은 9.18사변후 《비상시국》을 표방하며 파쑈적인 폭압과 략탈을 강화하고있는 일제를 반대하여 큰 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라고 하여
당시의 상황을 인용문은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1931년 당시 동원된 인원이 한 지역단위에서 2천 ~ 3천명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히 많은 인원들이 반일투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9 · 18만주사변》이 조선인들에게 투쟁의지를 꺾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활활 타오르게 했다.
그렇다면 《9 · 18만주사변》으로 폭발직전에 있었던 당시 일반민중들의 투쟁의지를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과 지도자는 이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는지에 대해 북측 자료를 인용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당시 상황을 북측자료를 통해보면 만주 각지역의 일반 민중들을 1931년 가을 추수투쟁과 1932년 봄 춘황투쟁으로 이끌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구체적이고도 상세하게 분석해보기로 한다. 물론 추수 · 춘황투쟁에 대해서 이전 장들에서 간간히 분석하기는 했지만 이를 무장투쟁과 연결해서 분석하지는 않았다. 투쟁 자체에 대해서만 살펴보았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추수 · 춘황투쟁이 《9 · 18만주사변》과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항일무장투쟁과는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에서 북측 자료를 인용하도록 한다. 추수 · 춘황투쟁이 만주사변과 무장투쟁이 어떻게 연관 지어지는지에 대한 자료로는 북측자료만 인용하도록 한다. 연변조석족자치주자료나 남측 자료에는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방향에서 기술되어 있지 않다. 추수 · 춘황투쟁 자체에 대해서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 이런 때 우리는 간도지방에서 추수투쟁을 조직하였다.
각지의 투쟁위원회는 자기 산하에 선전대, 규찰대를 두고 삐라와 격문을 찍어내며 투쟁구호를 제정하는 등 준비작업을 빈틈없이 한 다음 혁명조직구별로 추수투쟁에 들어섰다. 초기의 투쟁은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합법적인 경제투쟁이였다.
한때 어떤 력사가들은 이 투쟁에 《추수폭동》이라는 이름을 붙이였는데 나는 그런 명명을 적중한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추수투쟁은 5.30폭동의 모방도 아니고 재판도 아니였다. 이 투쟁은 리립삼의 좌경망동적인 사상여독을 완전히 청산한 기초우에서 새로운 전술적원칙에 의하여 전개한 승리한 대중투쟁이였다. 5.30폭동에서는 종파분자들이 주역을 놀았지만 추수투쟁에서는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키를 잡고 군중을 지휘하였다.
추수투쟁은 폭력을 기본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5.30폭동이 변전소와 교육기관에 불을 지르고 지주, 자산가일반을 타도하면서 방화와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면 추수투쟁참가자들은 소작료의 3,7제, 4,6제와 같은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린접과의 보조를 맞추면서 질서정연하게 행동하였다.
소작료를 낮추라는 요구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의 처지로 볼 때 결코 무리한것이 아니였다. 그 요구가 정당하기때문에 길림성정부도 소작료를 3,7 ~ 4,6제(지주 30~40프로, 소작인 60~70프로)로 한다는것을 선포하지 않을수 없었다.
농민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주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폭력이 사용되지 않았다.폭력이 발동된것은 투쟁위원회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해나서는 악질지주들과 농민들의 투쟁을 총검으로 탄압하는 군경들에 한해서였다.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완고한 지주들에 대하여서는 량곡을 밭에서 3,7제나 4,6제의 비률로 소작인의 몫을 실어가거나 창고를 헤치고 나누어가졌다.
략탈적인 동척금융부와 고리대금업자들, 일제의 통치를 협조하는 조선인거류민회와 같은 반동단체들도 투쟁의 과녁이 되었다. ❞
〈세기와 더불어 무장에는 무장으로 중에서〉
인용문에도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1931년 가을에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반일 · 항일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추수투쟁은 이전 1930년 벌어졌던 《5 · 1폭동》 《5 · 30폭동》 《8 · 1폭동》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들에서 분석을 했기에 여기서는 몇 가지로 아주 간략히 언급하는 선에서 그친다.
첫째. 1930년 《5 · 1폭동》 《5 · 30폭동》 《8 · 1폭동》은 폭동을 이끄는 주체들이 일반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일으킨 것이 아니고 폭동을 주도하는 일부사람들의 사적 목적달성을 위해 벌였다.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에는 《일국일당제》라는 원칙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지도력이 미치는 만주에는 중국공산당만이 유일한 당으로 인정을 할 뿐 조선인의 공산당조직은 허용일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만주에 조선인들의 공산당이 조직이 되게 된다면 중국에는 《일국이당제》가 됨으로서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제》 원칙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만주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비록 그가 조선인일지라도 중국공산당에 가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에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큰 공을 세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는 강하게 작용을 하였다. 따라서 만주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이전 공산주의 세대들은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제》 원칙을 교조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이 큰 공을 세워 중국공산당에 가입을 하고자 하는 사적(私的)인 목적 실현에만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내모는 폭동은 당연히 시작단계에서부터 대 실패를 예고해주는 것이었다.
둘째. 그들은 폭동을 이어가는데 있어 치밀한 계획 그리고 폭동후의 처리문제 등에 있어 전혀 그 어떤 대안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본 문제는 폭동의 후과가 얼마나 컸었는지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셋째. 폭동의 정당성확보의 문제였다. 물론 당시 폭동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그 정당성을 대외적으로 인정을 할 수 있도록 폭동을 이끌지 못하였다. 비록 정의의 폭력을 사용한다 해도 대외적인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정당성은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그 폭동 자체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넷째. 당시 폭동은 극히 일부 공산주의 세력들의 좌경모험주의적 책동에 의해서 벌어졌다.즉 중국 공산당 간부 이립삼의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아무런 비판이나 자체적 분석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데 그 심각한 오류가 있었으며 이는 폭동의 시작단계부터 대실패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폭동의 주체성의 결여에 있다. 1930년 대 폭동에 참여한 시위자들 대부분은 조선인들이었다. 그럼에도 폭동을 이끄는 상층부에서는 조선인을 위한 시위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중국공산당 극히 일부의 노선에 맹종하여 시위를 이끌다보니 누구를 위한 시위였는지 도대체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여섯째. 폭동 후에 이를 어떻게 반일 · 항일운동과 연결을 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는 결국 폭동의 자주성에 관한 문제였다. 이는 다섯째 항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의 시위 혹은 폭동이었다면 당연히 폭동 후에 반일 · 항일투쟁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치밀한 계획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폭동에는 이에 대한 아무런 대안이나 대책이 없었다. 결국 폭동 주체의 자주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1930년 《5 · 1폭동》 《5 · 30폭동》 《8 · 1폭동》은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처음부터 안고 있었기 때문에 필히 실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31년 가을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이끈 투쟁은 이와 같은 단점들을 완전히 극복하고 치밀한 계획과 투쟁 이후에 시위에 참여한 일반민중들은 새로운 높은 단계의 반일 · 항일투쟁으로 이끌어갈 대응방안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아래에서 분석하도록 한다.
그럼 1931년 가을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읜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 이끈 추수투쟁이 1930년에 있었던 대 폭동과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인용문을 분석하여 구체적으로 밝혀보기로 한다.
첫째 추수투쟁의 계획성에 있다. 인용문은 보면 “각지의 투쟁위원회는 자기 산하에 선전대, 규찰대를 두고 삐라와 격문을 찍어내며 투쟁구호를 제정하는 등 준비작업을 빈틈없이 한 다음 혁명조직구별로 추수투쟁에 들어섰다. 초기의 투쟁은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합법적인 경제투쟁이였다.”라고 하여 이미 꾸려놓은 각 지역의 조직원들을 총동원하여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투쟁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30년 벌어졌던 대 폭동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인용문은 “리립삼의 좌경망동적인 사상여독을 완전히 청산한 기초우에서 새로운 전술적원칙에 의하여 전개한 승리한 대중투쟁이였다.”라고 하여 투쟁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 치밀한 전술이 수립되어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좌경모험주의적인 무모한 시위투쟁을 벌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이 투쟁은 리립삼의 좌경망동적인 사상여독을 완전히 청산한 기초우에서 새로운 전술적원칙에 의하여 전개한 승리한 대중투쟁이였다.”고 하여 1931년 가을에 벌인 추수투쟁은 1930년의 대폭동의 좌경모험주의적인 경향과는 그 어떤 연도 가지지 않고 주도가 되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셋째. 투쟁의 주역의 문제이다. 이전 1930년의 대 폭동은 겉으로는 일반 민중이 주역인 듯 보였지만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 주역들은 좌경모험주의와 사적 목적실현을 위해 대중을 폭동으로 내몬 극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1931년 가을 추수투쟁의 주역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세대들이었다. “5.30폭동에서는 종파분자들이 주역을 놀았지만 추수투쟁에서는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키를 잡고 군중을 지휘하였다.”라고 하여 당시 추수투쟁은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세대들이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넷째. 투쟁을 함에 있어 승리를 쟁취했느냐의 문제이다. 1930년 대폭동은 대 실패를 가져왔고 그로인해 반일 · 항일전선에 얼마나 큰 후과를 미쳤는가. 하지만 1931년 가을에 벌어졌던 추수투쟁은 분명하게 승리를 한 투쟁이다. 인용문은 “새로운 전술적원칙에 의하여 전개한 승리한 대중투쟁이였다. ”다고 하여 당시 추수투쟁이 승리를 한 투쟁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섯째. 투쟁에 사용하는 폭력의 정당성 문제이다. 1930년 극히 일부 조선인 좌경모험주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이끌어졌던 폭동에서는 사용된 폭력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즉 타도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던 어떤 상황에 있던 상관없이 무조건 폭력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 세대들이 이끌었던 추수투쟁에서는 폭력을 사용함에 있어 그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경우에만 행사가 되었다. 인용문을 보면 “추수투쟁은 폭력을 기본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5.30폭동이 변전소와 교육기관에 불을 지르고 지주, 자산가일반을 타도하면서 방화와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 농민들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주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폭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폭력이 발동된것은 투쟁위원회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해나서는 악질지주들과 농민들의 투쟁을 총검으로 탄압하는 군경들에 한해서였다.”라고 하여 당시 추수투쟁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이고 무제한 적이며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정당성을 확보한 정당한 폭력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인용문은 당시 사용된 폭력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전해주고 있다.
“폭력이 발동된것은 투쟁위원회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해나서는 악질지주들과 농민들의 투쟁을 총검으로 탄압하는 군경들에 한해서였다.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완고한 지주들에 대하여서는 량곡을 밭에서 3,7제나 4,6제의 비률로 소작인의 몫을 실어가거나 창고를 헤치고 나누어가졌다.
략탈적인 동척금융부와 고리대금업자들, 일제의 통치를 협조하는 조선인거류민회와 같은 반동단체들도 투쟁의 과녁이 되었다.”
라고 하여
1931년 가을에 벌어졌던 추수투쟁에서는 폭력의 사용이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폭력을 꼭 동원하여야만 하는 경우에 동원되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폭력의 사용은 위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부정의한 대상에 대해서만 정의의 폭력이 사용되어야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만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그 투쟁이 성공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폭력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도 온당한 처사 역시 아니다. 개인이건 집단 혹은 국제질서에서건 필히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하게 있다. 소위 “인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미화하는 것은 온 누리 백성들을 우민화시키기 위한 더러운 선전선동일 뿐이다. 이는 제국주의자들 자신들에게 압박을 받는 백성들이 그 어떤 폭력적인 대응을 해서도 안 된다는 논리를 설파함으로서 투쟁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음모일 뿐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압박을 받는 백성들에게 서슴없이 끔찍한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이를 잘 반증해준다. 자신들은 무자비한 폭력을 사용하면서 그 폭력에 내몰린 일반 민중들은 절대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어불성설일 뿐이며 자신들의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벌이는 비열한 선전선동일 뿐이다. 따라서 꼭 필요할 경우에는 폭력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쟁취하는 것이다.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 투쟁에 내건 목적성의 명확성과 정당성을 들 수 있다. 아무리 투쟁이 옳다고 해도 목적성이 뚜렷하지 않으면 그 투쟁은 빛을 잃게 된다. 또 투쟁의 명확성이 확보되어야 그 투쟁이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1931년 가을 투수투쟁을 벌일 당시에 내걸었던 요구조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용문을 보면 “추수투쟁참가자들은 소작료의 3,7제, 4,6제와 같은 정당한 요구를 내걸고” 투쟁했다고 되어있다. 추수투쟁당시 내걸었던 요구조건이 정당성을 가졌다는 것은 “그 요구가 정당하기때문에 길림성정부도 소작료를 3,7 ~ 4,6제(지주 30~40프로, 소작인 60~70프로)로 한다는것을 선포하지 않을수 없었다.”라는 인용문의 내용을 봐서 더욱더 잘 알 수 있다. 투쟁에 내건 요구조건이 정당하지 않았다면 길림성정부 차원에서 소작료 3,7 ~ 4,6제를 인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추수투쟁에 내건 요구조건은 누구도 시비할 수 없는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일곱째. 투쟁지도부의 단일성과 시위대의 질서정연함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투쟁위원회의 통일적인 지도밑에 린접과의 보조를 맞추면서 질서정연하게 행동하였다.”라고 하여 당시 추수투쟁이 지도부가 단일화되어 일사분란하게 투쟁을 이끌어갔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또 지도부의 투쟁지도에 대해 시위참가자들 역시 질서정연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덟째. 투쟁이후의 투쟁열의를 어떻게 반일 · 항일무장투쟁으로 연결하여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분석하도록 한다. 본 문제는 추수투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홉째. 투쟁의 자주성과 주체성 그리고 투쟁성과를 누가 쟁취하는 가의 문제이다. 앞서 살펴본 1930년의 대 폭동의 폭동을 주도한 극히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적 목적 실현을 위해 일반민중들을 동원하였다. 그렇다면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은 최종적으로 누구를 위한 투쟁이었는가. 이는 여덟째 항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바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그 투쟁의 최종목적지향을 가지는가 아닌가에 따라 완전히 그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투쟁승리를 조국해방투쟁으로 이끌어간다면 이는 당연히 투쟁승리의 성과가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또 투쟁승리성과가 일반민중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그 투쟁은 당연히 자주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조선백성들이라면 누구라도 주체적으로 투쟁에 참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쟁의 자주성과 주체성 그리고 투쟁승리의 성과배분문제는 따로 따로 떨어진 별개의 문제가 아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용문을 보면 이러한 점에서 1931년 가을에 벌어졌던 추수투쟁은 당연히 조선민중들에게는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투쟁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본 문제에 대해서는 북측 자료에 나와 있는 다음 내용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최동화는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이 다 그러했듯이 인민대중의 힘에 대하여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있었다.
그는 인민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못하였으며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과소평가하였다.
나는 그때 혁명의 퇴조기를 운운하는 최동화의 모습을 통하여 전 세대 공산주의자들과 우리와의 근본적차이를 느끼였다. 그들과 우리와의 모든 차이는 결국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데서부터 산생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같은 리상과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와 그들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남남처럼 지낸것은 바로 그 차이때문이였다.”
라고 하여 이전 공산주의 세대들은 내건 구호는 프롤레타리아혁명승리였지만 실제로 그들은 일반민중들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주도하는 혁명의 종속변수로 본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심각한 자체모순을 가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혁명승리를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 구성원인 일반민중들을 종속변수로 본다는 것은 심각한 모순이다.이러한 관점은 결국 혁명이나 항일투쟁에 있어 필해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결국 이러한 이전 공산주의세대들의 사고는 결국 극소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제국주의 세력들이나 부르조아사상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리르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이를 과감하게 배제하고 일반민중들을 혁명과 항일투쟁의 주역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당연히 추수투쟁에서도 그 주역 즉 주인은 일반 민중들이었다. 따라서 추수투쟁의 승리를 시작부터 예고되어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그들과 우리와의 모든 차이는 결국 인민대중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데서부터 산생되였다고 말할수 있다.”하여 분명하게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결국 같은 사상을 가졌다고 하나 그 해석이 달랐기에 엄밀히 말하면 같은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같은 사상을 배우고 읽혔어도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완전히 다르다.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젊은 세대들의 관점은 혁명과 항일투쟁의 승리를 담보하는 첫째가는 이전과는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사상인 것이다.
또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이전 공산주의 세대인 최동화라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실제 사상적 관점이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역설이라고 판단하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민대중이 일제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폭력으로 진출하고있는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고조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고조기를 놓치지 않고 추수투쟁을 끝낸 다음에는 곧 대중을 더욱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서 항일투쟁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세가 어떻게 되여가든 이 결심은 변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을것입니다.”
라고 하여
선배 공산주의자인 최동화에게 혁명과 반일 · 항일투쟁에서 일반 민중들을 주역으로 내세우겠다는 것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밝히고 있다. 또 중요한 점은 추수투쟁을 승리로 결속하고 그 여세를 반일 · 항일무장투쟁에로 이끌어가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는 것이다.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결국 추수투쟁은 항일무장투쟁에로 넘어가는데 있어 일반민중들을 불러일으켜 세우고 향후 조직될 무장대오에 주역으로 내세우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추수투쟁을 끝낸 다음에는 곧 대중을 더욱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서 항일투쟁을 더욱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대세가 어떻게 되여가든 이 결심은 변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을것입니다.”라고 최동화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1931년 가을에서부터 겨울 사이에 벌어졌던 추수투쟁은 대 승리를 안아왔다. 또 추수투쟁에서의 승리는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으며, 이때 참여를 한 투쟁가들 다수가 후일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으로 참여를 하였다. 이에 대해 북측 자료를 더 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 10여만명의 간도농민들은 1931년 9월부터 그해말까지 일본군경들과 반동군벌의 야만적인 탄압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피어린 투쟁을 벌리였다.
이 투쟁과정에 조선민족의 영웅적기개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일화들이 수많이 창조되였다.개구지방인민들이 시위도중 두만강얼음우에서 일만군경들과 벌린 육박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만주지방사람들의 심혼을 흔들어놓은 화제거리가 되여 돌아갔다.
녀성투사 김순희의 극적인 최후에 대한 일화도 추수, 춘황투쟁의 불길속에서 태여났다. 김순희는 약수동의 적위대대원이였고 추수투쟁위원회의 위원이였다.
약수동에 나타난 《토벌대》놈들은 만삭이 된 그의 배를 총끝으로 쿡쿡 찌르며 배속에 있는것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김순희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일본수비대원들과 령사관 경찰들을 쏘아보면서 《잘 낳으면 임금이구 못 낳으면 대문전거리를 지나다니는 너 같은것들이다.》라는 유명한 대답을 하여 적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중에는 조직의 비밀을 고수하기 위해 자기의 혀까지 끊어버리였다. 그는 적들이 싸지른 불속에서 22살의 아까운 꽃나이를 마치였다.
추수투쟁은 농민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 투쟁을 통하여 동만지방인민들은 신심을 얻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투쟁의 승패가 대중자신의 불굴의 의지와 지도방법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는것을 심각하게 깨닫고 추수투쟁을 승리에로 인도한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을 경이적인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그들의 주위에 굳게 결속되였다.
대중은 추수투쟁의 승리를 통하여 5.30폭동이 실패한 원인을 스스로 찾아냈으며 폭력의 량이 결코 투쟁전과를 결정하는 기본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확고히 믿게 되였다. 5.30폭동이 실패한 원인이 폭력이 적게 투하된데 있지 않았던것처럼 추수투쟁이 승리한 요인 역시 폭력이 많이 투하된데 있지 않다는것을 모두가 다 잘 알게 되였다. 폭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였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뿐이였다.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정당하고 분별있는 시기적절한 폭력만이 그것을 틀어쥔 사람들에게 승리를 기약해줄수 있다. 오직 그런 폭력만이 사회를 개조하고 력사발전을 추동하는데 참답게 이바지할수 있는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폭력만을 지지할뿐이다.
문제는 대중을 어떻게 동원하고 조직하며 지휘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하나의 모범을 창조해놓은셈이였다. 추수투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고 평화적방법과 폭력적방법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시종일관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은 독특한 투쟁이였다. 다음해 봄에 있은 춘황투쟁도 이런 투쟁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추수투쟁을 통하여 조중인민들의 단결이 강화되고 조중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뉴대가 공고화되였다.
추수투쟁은 인민대중을 각성시키고 단련시키는 훌륭한 계기로 되였다. 이 투쟁대오에서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투사로, 혁명가로 자라났다.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추수투쟁에서 훈련된 수많은 핵심들로써 자기의 대오를 튼튼히 꾸려나갈수 있게 되였다. 그런 핵심들이 마련된것은 미구에 도래하게 될 무장투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였다.
추수투쟁과정에서 배출된 수많은 청년혁명가들이 후날 동만의 각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의 골간으로 되였다.
나는 추수투쟁을 지도하면서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을 계속 심화시켜나갔다. 투쟁속에서 발현되고있던 동만인민들의 대중적영웅주의와 불굴의 투쟁정신은 새로운 단계의 혁명로선을 모색하고있던 나를 무한히 고무해주었으며 우리가 일단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리게 되면 대중이 반드시 우리를 지지성원해나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다. ❞
〈세기와 더불어 무장에는 무장으로 중에서〉
인용문에는 소설 같은 투쟁사도 담겨있다. 1931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벌인 추수투쟁은 여러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었으며,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용문 붉에 표시된 내용은 앞서 언급된 내용 즉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일반민중들을 동원하고 그들이 자각을 하여 승리의 신심을 가질 수 있는가를 가름하는 투쟁이었다는 내용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인용문을 보면 민중들의 승리의 신심과 스스로 주인이 되어 투쟁한다면 그 어떤 시련과 압박 심지어 목숨을 담보하는 위험한 싸움일지라도 가열차게 투쟁을 하여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한다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비록 일개 평범한 백성들일지라도 그들이 분발하여 떨쳐 일어선다면 잘 훈련된 전문가들 못지 않은 혁명가가 되고 투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개구지방으 평범한 백성들과 비록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가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처녀티를 채 벗지 못했을 김순희 투사의 투쟁사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비장감마저 들게 한다. 결국 이러한 굴하지 않는 투쟁이 1931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동북만과 남만 일부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벌어진 추수투쟁을 대 승리로 결속할 수 있었다.
한편 추수투쟁이 가져다주는 교훈과 그 의미 그리고 후일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간략히 정리하도록 한다.
첫째. 추수투쟁의 승리는 동만지방 민중들에게 승리의 패배자의 좌절과 한탄으로부터 벗어나 승리자의 신심을 안겨주었다. 이미 여러번 강조를 하였지만 1930년의 대 폭동의 실패는 동만지방의 백성들을 패배자의 좌절을 안겨주는 혹심한 후과를 가져왔다. 이로인해 비록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조작한 《9 · 18만주사변》이 발발하고 순식간에 만주땅을 일제에게 빼앗겼지만 어떻게 그들과 투쟁을 하여 다시 자유를 찾아야 할지를 몰라 헤메고 있었다. 이때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이 치밀하게 기획하고 조직하고 이끈 추수투쟁이 승리를 함에 따라 또 다시 동만지방의 백성들의 승리의 신심을 불러일으킴으로서 향후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게 될 때 그들이 떨쳐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둘째. 추수투쟁이 승리로 결속됨으로서 투쟁을 이끌었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새 세대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을 동만의 백성들이 새로운 긍정적 시각으로 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로 인해 후일 조선의 젊은 세력들이 조직한 항일무장투쟁에 그들이 직접 참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항일무장투쟁은 곧 일반 민중들 자신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모든 투쟁에는 민중들 자신들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투쟁이 되었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 그들은 처음으로 투쟁의 승패가 대중자신의 불굴의 의지와 지도방법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는것을 심각하게 깨달았다.”라고 하여 추수투쟁이 동만에 거주하는 민중들의 주인의식을 깨우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넷째. 추수투쟁을 통해 동만의 백성들은 1930년 벌어진 각종 명목의 시위들이 왜 실패를 했으며 폭동이라고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뼈저린 교훈을 찾았다. 1930년의 대 폭동은 추수투쟁시기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참여한 인원으로 봐도 훨신 많았다. 또 당시 타도대상들에게 가해진 폭력 역시 추수투쟁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많았고 또 심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참여인원도 많았고 폭력의 사용도 훨씬 많았음에도 왜 실패를 했는가. 그것은 바로 사용하는 폭력의 량이 투쟁의 승리를 좌우할 수 없다는 교훈을 추수투쟁은 동만의 백성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당시 동만의 백성들이 추수투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대중은 추수투쟁의 승리를 통하여 5.30폭동이 실패한 원인을 스스로 찾아냈으며 폭력의 량이 결코 투쟁전과를 결정하는 기본요인으로 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확고히 믿게 되였다. 5.30폭동이 실패한 원인이 폭력이 적게 투하된데 있지 않았던것처럼 추수투쟁이 승리한 요인 역시 폭력이 많이 투하된데 있지 않다는것을 모두가 다 잘 알게 되였다. 폭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였다. 그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뿐이였다.”
라고 하여
당시 추수투쟁때 사용된 폭력의 량이 이전보다 많았기에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 해주고 있다. 투쟁승리의 관건은 폭력의 양이나 참여인원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미 위에서 분석을 한 바와 같이 사용목적의 정당성과 이를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가에 달려있으며, 이는 투쟁을 이끌어가는 지도세력들의 지도력에 달려있다. 인용문은 정당한 폭력의 사용이 승리의 요인이라는 것을 아래와 같이 전해주고 있다.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정당하고 분별있는 시기적절한 폭력만이 그것을 틀어쥔 사람들에게 승리를 기약해줄수 있다. 오직 그런 폭력만이 사회를 개조하고 력사발전을 추동하는데 참답게 이바지할수 있는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런 폭력만을 지지할뿐이다.”
라고 하여
투쟁을 함에 있어 폭력사용의 적절성과 분별성 그리고 정당성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적절하지 않은 폭력의 사용은 결국 투쟁실패의 주요한 요인이다. 이는 과거나 현재나 변할 수 없는 사회과학적 법칙이다. 물론 위에서 이니 언급을 했듯이 모든 투쟁을 함에 있어 폭력불사용 역시 능사가 아니다. 오늘 날 남쪽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일반 민중들의 투쟁에 있어 승리를 가져오는 예가 전무하다시피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필자는 본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촛불시위투쟁에 대해 동의를 하지 않고 있다. 광우병시위투쟁에 수백만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또 그 기간 길었지만 결국 그 투쟁은 실패를 했으며 남쪽의 소고기 시장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개방이 되고 말았다. 인용문은 바로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폭력사용의 적절성, 분별성, 정당성에 대해 커다란 교훈을 말 해주고 있다.
다섯째. 모든 투쟁은 이끌어가는 지휘집단의 영도력에도 투쟁의 전개와 어떻게 승리를 할 것인지를 좌우한다고 보고 있다. 이전 1930년의 대 폭동의 실패는 이를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한 이전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었다는 것은 여러 번 강조를 하였다. 하지만 이를 추수투쟁을 이끈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들은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과 또 이를 어떻게 승리로 결속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주도를 하였다. 인용문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 하고 있다.
“문제는 대중을 어떻게 동원하고 조직하며 지휘하는가 하는데 달려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하나의 모범을 창조해놓은셈이였다. 추수투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고 평화적방법과 폭력적방법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시종일관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은 독특한 투쟁이였다. 다음해 봄에 있은 춘황투쟁도 이런 투쟁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라고 하여
당시 투쟁을 이끌었던 조선의 젊은 지도집단이 얼마나 현명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을 하였으며, 이에 잘 대처를 했는지 말 해주고 있다. 인용문을 보면 투쟁의 단계와 조합, 그리고 투쟁 상대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주도권을 틀어쥘 수 있는지 그 전략이 얼마나 탁월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힘으로 밀어부친다고 하여 승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투쟁과정의 변수들을 고려하여 임기웅변의 전술이 적용되어야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을 말 해주고 있다.
여섯째. 1930년의 대 폭동의 후과로 소원한 상태를 넘어 적대관계직전에까지 치달아 올랐던 조-중 양 민족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서로 동지적 관계로 함께 반일 · 항일투쟁을 할 수 있는 대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추수투쟁을 통하여 조중인민들의 단결이 강화되고 조중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뉴대가 공고화되였다.”라고 하여 당시 추수투쟁이 양 민족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 단결하여 반일투쟁과 혁명화에 있어 동지적 관계를 맺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일곱째. 1931년 가을부터 겨울 사이 벌인 추수투쟁은 일반백성들을 대오 각성시키고 단련을 시킴으로서 투사로서 태어날 수 있게 하였다. 결국 추수투쟁은 추수투쟁에만 머무르지 않고 후일 벌일 새로운 높은 단계의 반일 · 항일무장투쟁의 투사로, 사회의 혁명가들을 무수히 배출해내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추수투쟁은 인민대중을 각성시키고 단련시키는 훌륭한 계기로 되였다. 이 투쟁대오에서 소박한 보통사람들이 투사로, 혁명가로 자라났다. 동만의 혁명조직들은 추수투쟁에서 훈련된 수많은 핵심들로써 자기의 대오를 튼튼히 꾸려나갈수 있게 되였다. 그런 핵심들이 마련된것은 미구에 도래하게 될 무장투쟁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였다.
추수투쟁과정에서 배출된 수많은 청년혁명가들이 후날 동만의 각 현들에 조직된 유격대의 골간으로 되였다.”
라고 하여
1931년 가을에 벌인 추수투쟁이 후일 항일무장투쟁대오를 창설하는데 있어 그 주축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말 해주고 있다. 당시 벌인 추수투쟁은 참으로 많은 교훈을 주었으며, 항일혁명투사들을 배출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 당시 벌어진 추수투쟁의 승리는 1932년 초부터 동북만과 남만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창설되기 시작한 《반일유격대》의 주축들을 수도 없이 많이 배출하였다.
본 인용문을 보면 1932년 당시 만주 일대 각 현들에서 창설된 《반일유격대》는 결코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며, 더구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의 서신 한 장으로 창설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전해주고 있다.
여덟째. 추수투쟁은 1930년 대 폭동의 후과로 참혹하게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고 새로운 단계의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조선의 젊은 지도자에게도 커다란 승리의 신심을 불러일으켰으며, 향후 항일무장투쟁과 혁명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인용문은 당시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추수투쟁을 어떻게 대하고 받아들였는지를 결론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나는 추수투쟁을 지도하면서 무장투쟁에 대한 구상을 계속 심화시켜나갔다. 투쟁속에서 발현되고있던 동만인민들의 대중적영웅주의와 불굴의 투쟁정신은 새로운 단계의 혁명로선을 모색하고있던 나를 무한히 고무해주었으며 우리가 일단 무장을 잡고 일제와의 혈전을 벌리게 되면 대중이 반드시 우리를 지지성원해나서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다.”
고 하여
당시 벌어진 추수투쟁은 새 사조를 받아들인 조선의 젊은 반일 · 항일세력의 지도자가 어떻게 커다란 고무를 받았으며,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으며, 이를 통하면 필히 승리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이는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항일무장투쟁조직을 하루라도 이른 시기에 꾸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5년 6월 28일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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