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36)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8. 《반일인민유격대창건》 전후 만주 각지 유격대창건
4)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조작사건 - 9·18사변(만주사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아시아 대공영권 실현이라는 야망을 품고 전 아시아대륙을 침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가 주어지기만을 노리는 단계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그 계획을 조작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전 조선반도를 완전히 식민지화 한 다음 단계로 만주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또 조선반도와 만주를 점령한 다음 단계로 시베리아를 점령할 계획을 수립하여놓았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반도, 만주, 시베리아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까지 침략하여 점령을 함으로서 《아시아 대공영권》의 실현을 한다는 망상(妄想)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치밀한 계획아래 선 조선반도 점령 후 만주점령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1931년 9월 18일 만주 심양역(당시 봉천역奉天驛, 현재 심양은 봉천奉天) 류조구에서 일본만주철도회사 소유의 철도를 폭파하는 벌인 자작극을 벌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만주침략의 명분이 된 《9 · 18사변》 이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9 · 18사변》이 장학량 군대가 자신들 소유인 만주철도회사 철도를 폭파하여 일어난 사태라고 몰아붙이면서 그 책임을 만주의 장학량 군대에 뒤집어 씌웠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1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일사천리로 심양을 점령하였다.심양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는 길림과 장춘 등을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주둔 일본군과 연합작전을 벌여 순식간에 점령을 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대동아공연권의 두 번째 단계인 만주를 총 한 방 쏘지 않고 순식간에 점령을 하였다.
《9 · 18사변》을 빌미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만주를 점령하게 됨으로서 빼앗긴 조국을 등지고 남의 나라 땅에서 어렵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였던 조선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사태였다. 즉 이제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남은 것은 절망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부는 독립을 포기하였고, 또 극히 일부는 변절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투항하여 반민족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이 시기 만주지역에서 독립투쟁을 벌여 조국을 해방할 수 있다고 여기는 우국지사들은 그 수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렇게 엄혹한 상황이 오히려 조국을 독립하는데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새로운 반일투쟁의 호기로 삼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었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주를 점령한 것은 조-중 양인민들간의 유대를 더욱더 강화시킬 수 있으며,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백성들을 불러일으키는데 결정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만주까지 집어삼킨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강대성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역량이 분산됨으로서 허느 한 지역만을 집중하여 지배를 할 수 없다는 분산의 원리를 간파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약점을 파고들면 충분히 승산이 있고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 당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들의 생각이었다. 역설적이게도1931년 9월 18일에 벌어졌던 《9 · 18만주사변》은 기존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세력들에게는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지만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반일·항일독립투쟁에 나선 젊은 조선인들에게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강대성의 신화를 각인시킨 것이 아니고 약점만을 노출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참으로 대단한 혜안을 가진 조선의 젊은이들이었다. 《9 · 18만주사변》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약점을 간파한 젊은 조선인들은 반일·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기회로 삼았다. 이에 따라 조선의 젊은 세력들은 동북만 각 지역에서 반일유격대 창설의 호기를 만들어갔다.
그럼 《9 · 18만주사변》에 대한 북측 자료를 통해서 그 진상과 그 위기를 어떻게 반일·항일무장투쟁의 호기로 삼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9 · 18만주사변》에 대해서는 남쪽에서도 수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그 본질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그리 만족스러울 만한 것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이는 우리겨레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살아가야 하는 통한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기에 벌어지는 비극적 현상이다.
❝ 1931년 9월 18일 밤 심양 북대영 서쪽 류조구에서 일본만철회사소유의 철도가 폭파되였다. 일제는 장학량군이 철도를 폭파하고 일본수비대를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구실을 내걸고 불의의 침공을 개시하여 일거에 북대영을 점령하였으며 19일 아침에는 봉천비행장까지 차지하였다.
심양에 뒤이어 안동, 영구, 장춘, 봉성, 길림, 돈화와 같은 동북지방의 대도시들이 관동군과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주둔군에 의하여 련달아 점령되였다. 닷새도 못되는 사이에 일본침략군은 료녕, 길림 두 성의 광대한 지역을 거의다 강점하였으며 전역을 계속 넓혀나가면서 금주방향으로 육박하였다.
문자그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진상을 오도하여 중국측에 사건의 책임을 전가시켰지만 세상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내돌리는 여론을 믿지 않았다. 잔꾀가 많은 일제의 본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후날 사건을 조작한 당사자들도 인정하였지만 만철회사소속의 철도를 폭파하고 9.18사변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장본인은 관동군특무기관이였다. 우리는 그 당시 출판물들에 글을 내여 류조구사건은 만주를 먹기 위한 일제의 모략이며 간계라고 폭로하였다.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앞두고 대기상태에 있던 1931년 9월 18일 아침 이 사건의 조작자의 한사람인 도히하라겐지대좌(심양특무기관장)가 갑자기 서울에 나타났다. 그는 조선주둔군사령부 고급참모 간다 마사다네를 찾아가서 신문기자들이 시끄러워 군에게 찾아왔다고 자기의 조선방문리유를 에둘러 설명하였다. 만주사변이 터지면 숱한 기자들이 자기에게 달려들어 성화를 먹이겠는데 그 성화가 싫어서 미리 조선으로 도피해왔다는 소리였다.
같은 시각 일본항공본부장 와다나베 죠따로대장은 서울을 방문하여 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야시 센쥬로대장과 함께 백운장이라는 큰 술집에서 연회를 차리고 휴식을 하였다고 한다. 만주사변과 같이 어마어마한 불집을 마련한 사람들의 행사치고는 너무나도 안온하고 여유작작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
제국주의자들에게 고유한 교활성과 파렴치성,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성과 지배주의적본성을 다 같이 찾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인용문을 보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놓고 《9 · 18만주사변》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제국주의침략자들의 교활성과 악랄성 그리고 비열하게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현상은 비단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일으킨 《9 · 18만주사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인용문의 《9 · 18만주사변》에서 보는 것처럼 음모와 모략 비열한 침략은 서구제국주의가 등장한 16세기 이래 오늘 날까지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은 침략의 본성이자 본질이다.
20세기 중반기 제국주의침략자들이 벌인 가장 유명한 조작사건이 바로 1964년 8월에 있었던 북베트남 《통킹만사건》을 들 수 있다.(베트남언 박보 만, 북에서는 “바크보만”이라고 함)
여기서 잠시 베트남전의 도화선이 된 통킹만(바크보만)사건에 대해 위키백과사전에 올라와 있는 내용을 간략히 보도록 하자. 그리고 제국주의침략자들이 벌이고 있는 위선과 기만성 그리고 비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인식을 하도록 하자.
❝ 1964년 8월 2~4일에 베트남 근해의 통킹 만에서 미국 제7함대 소속 구축함 매덕스호와C. 터너조이호가 북베트남군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미해군 비행기들에게 북베트남을 보복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통킹 만 결의안을 채택했다.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g Incident)
결의안의 목적은 미국군에 대한 어떠한 무장공격도 격퇴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이 취하는 모든 조치를 승인하고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킹 만 결의안은 사실상 대통령에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1995년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사령관이었던 보 구엔 지아프는 8월 2일 매덕스 함을 공격한 것은 인정했지만 8월 4일 공격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통킹 만 사건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2005년 미국안전보장이사회의 옛 비밀문건이 해제되어 공개되었을 때 역시 8월 2일에 교전한 것은 맞지만 8월 4일에는 북베트남 함정이 없었다고 보고되어 있었다. 8월 2일에도 오후 3시 함장이 포수들에게 1,만 야드까지 접근하면 발포하라고 명령했고, 오후 3시 5분에 함포 3발을 발사해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고 되어 있었다. 당시 린드 존슨 대통령이 언급했던 북베트남 어뢰정의 선제 공격은 없었다. 즉, 린드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에 군사적 간섭을 하기 위해 통킹 만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
〈인터넷 위키백과 통킹만 조작사건 중에서〉
위키백과사전의 내용을 보면 베트남전의 도화선이 된 “통킹만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식으로 대단히 완곡하면서도 유연하게 묘사가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미국의 <도미노 이론>이라는 믿음아래 치밀하게 계획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즉 당시 구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구사회주의권의 공산주의화가 이루어졌기에 그 변방의 국가들이 점차로 공산주의국가들이 확대되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자유민주주의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주의 국가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 <도미노 이론>인 것이다. 명목이야 그럴 듯하지만 이를 되돌려 말하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는 말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계획아래 음모와 모략을 꾸미고, 그 실행에 옮긴 것이 1964년 베트남에서 일어난 《통킹만사건》이다. 북베트남 통킹 만에서 일어난 《통킹만사건》은 20세기 중반 제국주의침략자들이 벌인 가장 유명한 조작사건으로 인류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이렇게 제국주의세력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음모와 모략 그리고 심리전을 수행한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온통 자신들의 지배권을 수호하기 위해 현대사회 인간이 개발해놓은 갖은 수단을 통해 검은 것도 희다고 하고, 흰 것도 검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끈임 없이 속이면서 세뇌를 시키고 있다.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과 넋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신이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누군가의 지시와 지배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노릇밖에 할 수 없다. 오늘 날 자본주의의 모든 수단들 언론, 출판, 학문, 문화 ... 등의 모든 영역에서 이와 같은 심리모략전을 벌이고 있다. 자신들이 행하는 악행(惡行)에 대해서는 모두 선(善)을 위한 선행(善行)으로 포장을 하고, 상대국이나 적대국에 대해서는 그들이 행하는 거의 모든 언행(言行)들이 선행임에도 모두 악이요 악행으로 몰아 부친다. 그러면서 끈임 없이 상대국이나 적대국을 악마화(惡魔化) 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현대 미국과 조금이라도 맞서고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 대대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세력들의 심리전(心理戰)과 모략전(謀略戰)에 99% 이상은 속아 넘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일반민중들은 어불성설이라고 치부하면서 여전히 제국주의 지배세력들의 심리모략전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어있다. 바로 제국주의 지배세력들은 민중들의 이러한 점을 노리고 끈임 없이 심리 모략전을 벌이고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스의 선전상(현대식으로는 문화부장관) 이었던 괴벨스는 “거짓말도 백 번만 하면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인다.”라고 하면서 나치스의 끔찍한 만행을 미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점에서 현대라고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발달된 매체를 통해서 더욱더 교묘해지고 더욱더 악랄해졌다.
그러나 역사(歷史) 속에서 진실은 절대로 가릴 수가 없다. 괴벨스의 궤변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을 침략하여 10여년을 전화의 참화 속에 몰아넣었던 미국의 음모와 모략전도 결국 세계 앞에 그 진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1931년 9월 18일 벌인 《9 · 18만주사변》 역시 교활하게 꾸며낸 음모와 모략전의 일환이었으며, 당시로서 벌일 수 있는 각종 수단들을 총동원한 심리전도 함께 진행을 하였다. 《9 · 18만주사변》 당시 심리모략전을 벌였던 것에 대해 인용문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진상을 오도하여 중국측에 사건의 책임을 전가시켰다.”라고 기록을 해놓았다. 물론 인용문을 보면 당시 일본이 벌였던 심리모략전이 그다지 신통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세상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내돌리는 여론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 일반민중들의 마음은 꽤나 순수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당시 조선인이나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타인에게 모략적인 사건을 일으킬 만큼 사악하지 않았던 듯싶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잔꾀가 많은 일제의 본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고 하여 당시 조선인이나 만주에 거주를 하고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며, 사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9 · 18만주사변》을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실행을 했는지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그 음모를 밝히고 있다.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앞두고 대기상태에 있던 1931년 9월 18일 아침 이 사건의 조작자의 한사람인 도히하라겐지대좌(심양특무기관장)가 갑자기 서울에 나타났다. 그는 조선주둔군사령부 고급참모 간다 마사다네를 찾아가서 신문기자들이 시끄러워 군에게 찾아왔다고 자기의 조선방문리유를 에둘러 설명하였다. 만주사변이 터지면 숱한 기자들이 자기에게 달려들어 성화를 먹이겠는데 그 성화가 싫어서 미리 조선으로 도피해왔다는 소리였다.”
라고 하여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짜낼 수 있는 최고의 음모와 계략을 꾸며냈음을 말 해주고 있다.
《9 · 18만주사변》을 장학량군대에 뒤집어씌우기 위해 아래와 같은 비열한 짓도 하였다.일제는 자신들은 결코 일본소유의 만주철도를 폭파하지 않았다는 모략전을 벌였다는 데 대해 인용문은 “같은 시각 일본항공본부장 와다나베 죠따로대장은 서울을 방문하여 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야시 센쥬로대장과 함께 백운장이라는 큰 술집에서 연회를 차리고 휴식을 하였다고 한다.”고 하여 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교활하며 비열한 모략전을 했는지 밝히고 있다.
참으로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파렴치성이 얼마나 치밀한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사건이다. 인용문은 “ 만주사변과 같이 어마어마한 불집을 마련한 사람들의 행사치고는 너무나도 안온하고 여유작작하다고 해야 할것이다.”라고 하여 그들의 저열성과 비열성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다.
일제의 교묘하고도 교활한 모략전에 의해서 저지른 《9 · 18만주사변》 이었지만 당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그들의 모략전(謀略戰)에 대해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인용문은 “우리는 그 당시 출판물들에 글을 내여 류조구사건은 만주를 먹기 위한 일제의 모략이며 간계라고 폭로하였다.”고 하여 당시 이미 조선의 젊은 반일·항일투쟁가들은 그 진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그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와 모략전 그리고 심리전 역시 마찬가지 이다. 제국주의지배주의 세력들이 아무리 정밀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심리모략전을 벌였다고 해도 그 진상이 즉시즉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아는 세력들의 수가 소수이다 보니 대다수 민중들에게까지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하고 있다. 또 지배주의세력들은 자신들의 심리모략을 밝히는 소수의 세력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하면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진실은 역사 속에서 기어이 밝혀지고 만다. 또 한때 거짓과 허위가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정의와 진리에 의해 철저하게 패배하고 만다. 《9 · 18만주사변》에 대한 진상 역시 훗날에 밝혀졌는데 그 진실은 바로 그 사건에 직접 가담을 하였던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인용문은 “후날 사건을 조작한 당사자들도 인정하였지만 만철회사소속의 철도를 폭파하고 9.18사변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장본인은 관동군특무기관이였다.”라고 당시 《9 · 18만주사변》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최첨병인 관동군 특무기관에서 벌인 조작사건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참으로 교활하고 비역하기 이를 데 없는 침략자들의 행태이다. 위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지만 그 본질적 행태는 현대 사회에 와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인용문을 보면 제국주의 지배세력들의 본질에 대해 “제국주의자들에게 고유한 교활성과 파렴치성,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성과 지배주의적본성을 다 같이 찾아보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얼마나 교활하고 간교하게 굴었는지에 대해 북측 자료는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본이 9.18사변과 같은 사변을 도발하여 만주를 먹어치우리라는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확고한 기정사실로 되여왔었다.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장작림폭사사건을 조작했을 때에도 그것을 예감하였고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여 조중인민들사이에 험악한 대결상태가 빚어졌을 때에도 그것을 예감하였으며 《농학사》의 신분을 가지고 간첩활동에 종사하던 관동군 참모본부소속의 나까무라대위의 《실종》사건이 꾸며졌을 때에도 그것을 예감하였다.”
라고 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9 · 18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이전부터 여러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를 분열시키기 위해 조선과 중국인들 간에 이간질을 벌였는지를 말 해주고 있다. 이러한 조-중 인민들 사이에 이간질 전략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판단아래 《9 · 18만주사변》을 거행을 했을 것으로 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중 인민들 사이에 반목과 질시를 조장하기 위해 얼마나 간교하게 치밀하게 심리모략전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들에서 살펴보았다. 일제는 1930년과 1931년 중반까지 벌어졌던 각 종 명목의 대 폭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조-중 인민들 사이에 반목과 질시 더 나아가서 적대적인 관계로 까지 가게 함으로서 험악한 사태를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조-중 인민들 사이에 이간질을 부추기는 모략전은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전술을 썼던 것이다. 즉 조선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어 싸우게 하고 서로 지치게 한 다음 수월하게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술에 따라 일제는 패망하여 항복을 하는 날까지 끈임 없이 꾸며내었다. 일제의 조-중 인민들 사이에 이간질 심리모략전은 조선과 중국 백성들이 연합하여 일제에 맞서 싸운다면 만주를 점령하여 지배를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사건이 바로 만보산사건이다.
만보산 사건에 대해 북측의 자료를 인용하여 보도록 한다.
❝ 만보산은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70~8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자그마한 농촌마을이다.만보산사건이란 바로 이 마을에서 수로문제를 둘러싸고 조선이주민들과 중국원주민들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말한다. 조선이주민들이 논을 풀려고 이통하물을 끌기 위한 물길을 팠는데 그것이 그만 중국원주민들의 밭을 침범하게 되였다. 이통하를 막으면 장마철에 또한 강물이 범람할수 있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이 이 공사를 반대해나서게 되였다.
이런 때에 일본인들이 공사를 강행하도록 조선농민들을 사촉함으로써 분쟁은 확대되고 조선국내에까지 파급되여 인명과 재산피해까지 내는 결과를 빚어냈다. 농촌에서 흔히 있을수 있는 지방적인 분쟁을 민족리간책략에 솜씨있게 리용한것이다.
만일 그때 일본사람들이 리간질을 하지 않았거나 조중농민들중에 선각자가 있어 리성적인 사고를 조금이라도 하였더라면 분쟁은 간단한 언쟁으로 그치고 그이상 확대되여 서로 마스고 두들겨패는것과 같은 양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을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여 조중인민들사이에는 더 큰 오해와 불신이 생기고 반감이 조성되였다.
그때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때문에 비슷한 불행을 겪고있는 두 나라 인민들이 무엇때문에 서로 주먹질을 하면서 피투성이싸움을 해야 하는가, 항일이라는 대전제밑에 두 나라 민족이 손을 굳게 잡고 공동투쟁에 나서야 할 때 물길 하나를 놓고 서로 악에 받쳐 《골육상쟁》을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꼴인가,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이런 참사가 빚어졌는가, 과연 이것이 누구한테 리롭고 누구한테 해로운 일인가 하고 거듭 생각하였다.
나에게는 문득 이 사건이 미리 꾸며진 연극으로, 박두해오고있는 어마어마한 사변의 전주곡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장춘령사관놈들이 농민들의 우발적인 충돌에 끼여들어 조선사람들의 리권을 《옹호》해나선것부터가 미심쩍었다. 《토지조사령》과 같은 략탈적인 법령으로 조선의 농토들을 빼앗고 살인적인 농정을 실시해온자들이 갑자기 보호자로 둔갑하여 우리 농민들을 《옹호》해나선것은 사실상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수 있는 하나의 정치만화였다. 장춘의 《경성일보》지국이 본사에 서둘러 만보산의 분쟁을 통지한 일도 그렇고 국내에서 신문호외를 찍어 조급하게 배포한것도 모두 수상하게 여겨졌다.
조중 두 나라 인민들을 리간시키기 위하여 일제의 영악한 두뇌들이 지방적인 자그마한 분쟁을 민첩하게 악용하여 엄청난 모략을 꾸몄는데 그것이 성공한것이 아닐가. 그렇다면 놈들한테는 무엇때문에 그런 모략이 필요했는가.
우리가 간도오지에서 혁명조직들을 재정비하고있는 사이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분명 무엇인가를 다급하게 준비하고있었다. ❞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인용문을 보면 제국주의침략자들이 얼마나 교활한 지를 알 수가 있다. 비록 사소하고 서로간에 잘 중재만 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를 크게 학대하고 부풀리어 결국에는 조-중 양 민족들 사이의 민족감정까지 건드림으로서 적대관계로까지 몰아가는 음모를 벌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 일본인들이 공사를 강행하도록 조선농민들을 사촉함으로써 분쟁은 확대되고 조선국내에까지 파급되여 인명과 재산피해까지 내는 결과를 빚어냈다. 농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지방적인 분쟁을 민족리간책략에 솜씨 있게 리용한 것이다.”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참으로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비열한 행태이다.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조-중 양 민족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악감정이 쌓이게 되었다. 이는 달리 말 하면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이끄는 반일 · 항일투쟁가들이 당초 계획했던 조-중 양 민족간의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하는데 있어 막대한 장애물이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중국인들의 지배권이 미치는 만주에서 조선인들 단독으로 반일·항일무장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만보산사건에 대한 조선의 젊은 지도자는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기록을 하고 있다.
“ 일본제국주의자들때문에 비슷한 불행을 겪고있는 두 나라 인민들이 무엇때문에 서로 주먹질을 하면서 피투성이싸움을 해야 하는가, 항일이라는 대전제밑에 두 나라 민족이 손을 굳게 잡고 공동투쟁에 나서야 할 때 물길 하나를 놓고 서로 악에 받쳐 《골육상쟁》을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꼴인가, 무엇때문에, 누구때문에 이런 참사가 빚어졌는가, 과연 이것이 누구한테 리롭고 누구한테 해로운 일인가 하고 거듭 생각하였다.”
라고 하여
조선의 젊은 지도자가 만보산사건이 왜 발생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대해 먼저 깊은 사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또 인용문은 계속하여 만보산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그 전개 과정에 대해서도 분석을 하여 그 인관관계를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에게는 문득 이 사건이 미리 꾸며진 연극으로, 박두해오고있는 어마어마한 사변의 전주곡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장춘령사관놈들이 농민들의 우발적인 충돌에 끼여들어 조선사람들의 리권을 《옹호》해나선것부터가 미심쩍었다. 《토지조사령》과 같은 략탈적인 법령으로 조선의 농토들을 빼앗고 살인적인 농정을 실시해온자들이 갑자기 보호자로 둔갑하여 우리 농민들을 《옹호》해나선것은 사실상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수 있는 하나의 정치만화였다. 장춘의 《경성일보》지국이 본사에 서둘러 만보산의 분쟁을 통지한 일도 그렇고 국내에서 신문호외를 찍어 조급하게 배포한것도 모두 수상하게 여겨졌다.
조중 두 나라 인민들을 리간시키기 위하여 일제의 영악한 두뇌들이 지방적인 자그마한 분쟁을 민첩하게 악용하여 엄청난 모략을 꾸몄는데 그것이 성공한것이 아닐가. 그렇다면 놈들한테는 무엇때문에 그런 모략이 필요했는가.”
라고 하여
당시 만보산사건에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지도부가 깊숙하게 개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다. 즉 한 개의 좁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주민들간의 사소한 갈등을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지도부가 개입을 하였다는 것은 만보산사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1930년과 1931년의 대폭동, 만보산사건 등을 지속적으로 발생을 하게 함으로서 조-중 양 민족 사이의 갈등과 대결을 조장하여 양 민족의 힘을 소진하게 한 다음 일제의 더 큰 야욕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지도자는 정확하게 분석을 하고 있다.
만약 이런 상태가 지속이 된다면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식과 단계의 반일·항일투쟁을 계획을 하고 있던 세력들에게는 커다란 타격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한 대책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가 간도오지에서 혁명조직들을 재정비하고있는 사이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분명 무엇인가를 다급하게 준비하고있었다.”라고 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만주침략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예측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혁명조직들을 내오는 사업을 더 다그쳐야 한다는 계획을 하였음을 말 해주고 있다. 이는 《항일무장조직》을 하루라도 빨리 내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931년 들어서서 만주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만주의 상황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만주침략과 아시아지배를 위한 침략전쟁을 고취하는 전조들이 미친 듯이 벌어지고 있었다.
❝ 만보산사건의 여파가 채 가셔지지도 않은 그해 여름의 나까무라대위 《실종》사건은 중일관계를 전쟁접경에로 이끌어나갔다. 이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일본본토에서는 련일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있었다. 도꾜의 청년장교들이 야스구니진쟈에 모여 나까무라의 위령제를 지내고 자기들의 피를 뽑아 일장기를 그렸는가 하면 그것을 신사사두에 높이 띄워놓고 국민들의 전쟁열을 고취시키였다. 형형색색의 만주관계단체들은 만몽문제 각파련합대회라는것을 열고 실력행사로써만 만몽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귀가 아프게 떠들어대고있었다.
나는 그때 일제의 만주침략은 시간상문제라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확정할수 있었던 근거는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조선을 먹은 다음에는 만몽을 먹고 만몽을 먹은 다음에는 중국을 먹으며 중국을 먹은 다음에는 아세아를 제패하려는것은 《다나까상주서》에도 규정되여있는바와 같이 일본의 기본국책이였다. 동아의 맹주가 되려는 야망에 사로잡힌 군국주의일본의 강철바퀴는 이 국책에 따라 거침없이 움직이고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나까무라대위의 《실종》사건을 구실로 삼아 관동군병력을 심양에 집결시키고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인용문을 봐서도 알겠지만 당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망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발광을 하였다.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것은 동아시아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냄으로서 서구제국주의 세력들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서구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 특히 동북아시아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들은 힘이 없으니까 일본이 동북아시아와 여타의 아시아 나라들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시아 나라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궤변중의 궤변을 내돌리면서 조선반도를 포함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였다.
바로 그 대동아공영권의 첫 단계 실현이 조선반도를 자신들의 지배하게 두는 것이다. 일단 첫 단계인 조선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지배를 하고 있으니 2단계인 만주를 점령하는 단계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1930년대 초반기 일본 내에서와 조선반도 그리고 만주에서 침략의 전주곡을 요란하게 울렸던 것이다. 바로 인용문을 1931년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위 인용문을 보면 만주에서 《농학사》라는 위장을 하고 간첩질을 하던 다나까 대위의 실종사건을 빌미로 일본 내에서 전쟁열을 고취한 것을 보면 그 사건 역시 일본이 조작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국민은 물론이고 자국의 첩보원들도 서슴없이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다나까 대위 실종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꾸민 자작극이라는 것은 인용문의 아래 내용을 보면 확실해진다.
“이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일본본토에서는 련일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있었다. 도꾜의 청년장교들이 야스구니진쟈에 모여 나까무라의 위령제를 지내고 자기들의 피를 뽑아 일장기를 그렸는가 하면 그것을 신사사두에 높이 띄워놓고 국민들의 전쟁열을 고취시키였다. 형형색색의 만주관계단체들은 만몽문제 각파련합대회라는것을 열고 실력행사로써만 만몽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귀가 아프게 떠들어대고있었다.”
라고 하여
인용문은 당시 벌어졌던 다나까 대위 실종사건은 만주침략을 위하여 일제가 조작을 해낸 사건이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일개 청년장교 한 사람 실종사건을 가지고 전 일본이 나서서 대대적으로 전쟁열을 고취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뛰어넘은 비상식적인 행위인 것이다. 인용문을 보면 당시 일본은 일본 인반 국민들까지 거의 미쳐 돌아갔던 사회가 아니었나 할 정도로 광기에 휩싸여있다. 이는 누군가 치밀하게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였기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그런 현상은 오늘 날에 와서 더욱더 심해졌다고 봐야 한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이전 세대들보다 똑똑하고 더 많은 정보를 알기에 절대 속지 않는다고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속에 깊은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보라는 것은 그 정보를 움직이는 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흘려주거나 조작하면 되기 때문에 이전 시대보다 훨신 더 쉽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거기에 더 쉽게 확고부동하게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스스로 확신에 차서 더욱더 허위와 거짓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인용문에서 보여주듯 1930년 초반에 들어와서 일본인들의 광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스스로 일본인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실종된 나까무라 대위의 영혼을 달래고 또 그 길은 당사자가 실종된 그 땅을 침략함으로서 그 복수를 하는 것이라는 광기를 부려댄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 국민들의 이러한 광기야말로 당시 치밀하게 계획된 침략의 수뇌부들이 조작한 이데올로기에 세뇌가 된 결과였다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인용문에 언급되어 있는 “전쟁열을 고취하고, 만몽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귀 아프게 떠들어댄 것은 바로 일제의 만주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행위이며, 일본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만주와 몽고 침략전에 참전을 하라고 부추겨대는 선동구호인 것이다.
이와 같이 1930년 초반에 들어서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의 만주와 몽고 더 나아가서 시베리아까지 점령하려는 구체적인 실천단계에 들어서 있었던 데 반해 과연 만주를 담당하고 있었던 장개석이나 장학량측은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었는지를 북측 자료를 인용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만주 침략이나 더 나아가 중국 대륙을 점령하고자 하는 야욕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모택동이 이끄는 붉은 군대와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북측 자료를 보면 이보다도 훨씬 한심하게 굴었던 것이 장개석의 국민당군 이었다. 또 만주를 담당하고 있었던 장학량은 얼마나 한심했었는가. 이에 대한 북측 자료를 보자.
❝ 일제에게 국토의 일부를 떼여주는 한이 있더라도 공산당과 로농홍군을 박멸하자는것이 국민당의 속심이다. 외적을 치기전에 공산주의세력을 숙청하고 국내의 정국부터 평정하자는것이 국민당의 로선이다. 자기 선친이 폭사한 다음 국민당쪽에 아주 기울어진 장학량은 그 저주로운 로선에 맹종하고있다. 때문에 저항은 없을것이며 거기에 기대를 거는것은 허황한 일이다.
《장학량과 같은 사람이 동북땅을 지켜주리라고 생각했으니 나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이였소. 장학량은 중화민족의 신의를 저버리고 항일을 포기한 겁쟁이고 패전장군이요.전에 심양에 가보니 온 도시에 군벌군이 모래알처럼 쭉 깔려있더구만. 골목마다 신식총을 멘 군대가 씨글씨글했소. 그런데 그 많던 군대가 총 한방 쏘지 않고 퇴각하였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있소. 이걸 어떻게 리해해야 하오?》
장학량이 통솔하는 동북군의 수효가 얼마인지 아오? 자그만치 30만이나 된다오, 30만! 30만이란게 간단한 수자요? 그런데 그 30만이 총 한방 쏴보지도 않고 하루밤사이에 심양을 내주었으니,… ❞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당시 중국의 국민당과 만주를 이끌고 있었던 장학량군의 상황을 보면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더구나 “일제에게 국토의 일부를 떼여주는 한이 있더라도 공산당과 로농홍군을 박멸하자는것이 국민당의 속심이다. 외적을 치기전에 공산주의세력을 숙청하고 국내의 정국부터 평정하자는것이 국민당의 로선이다.”라는 것이 장개석이 이끌던 국민당군의 속셈이었다니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국의 일부를 외세에게 떼어준다니 어디 상상이나 할 소리인가. 하지만 분명 당시에 국민당군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유력지도부의 생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긴 현재 남측의 사정 역시 당시 국민당군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현재 남측의 상황이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우려이기도 하다.
인용문에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중국인인 진한장의 탄식이 당시 중국과 만주의 상황을 잘 묘사를 하고 있다. 진한장 역시 자신의 무지무능을 자성하고 있다. 그저 군대의 수만 많다고 하여 그게 곧 조국의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북에서는 “사상이 없는 총대는 썩은 막내기와 같다”고 하고 있다. 당시 만주의 상황을 보면 북에서 하는 이 말은 진리이다. 또 아무리 막강한 무력과 수 많은 군인을 가졌다 해도 그 군대의 사상성이 없으면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구 무너진다는 것은 1991년 구소련의 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구소련 뿐 아니라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도미노처럼 무너진 동구라파 사회주의 역시 결코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그 총대를 틀어쥔 병사들의 사상정신이 썩어 있었기 때문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1930년대의 중국, 만주의 상황과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동구사회주의권의 상황이 판박이처럼 똑같다. 바로 인용문은 총대에 무너지지 않는 사상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려 30만이나 되는 만주의 장학량군대가 총 한 방 쏘아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예로 들은 것처럼 장개석과 장학량의 민족 전체의 안위보다는 자신들 집단의 권력과 지배욕이 앞섰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래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북측의 자료를 인용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 만일 수십수백만 대군을 움직일수 있는 위치에 있던 장개석과 장학량을 비롯한 정계, 군부의 우두머리들에게 돈화의 한 청년한테 있는 애국심이나 통찰력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것이다. 그들이 민족의 운명을 자기자신이나 자기들의 당파적리해관계우에 놓고 반공이 아니라 련공을 하며 전체 민중과 무장력을 항전에로 불러일으켰다면 일제의 침략을 그 첫 걸음에서 좌절시키고 령토와 인민을 영예롭게 지켜냈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도 민족도 다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일본이 만주를 치기전에 벌써 장개석이 장학량의 동북군에 《일본군측으로부터 도전이 있을 경우에는 신중성을 견지하며 백방으로 충돌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명령서를 하달하여 군의 저항을 사전에 억제한 사실은 그후 수억만 중국인민의 분노를 격발시켰다.
9.18사변이 폭발한후에도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중국인민과 중국군대는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고 평정과 인내성을 발휘할데 대한 투항주의적인 성명을 발표하여 군대와 국민의 사기를 저락시키였다. 만주의 운명은 벌써 9.18사변전에 결정된셈이였다. 지어 그들은 대표를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와 비밀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이 교섭과정에 장개석은 일본이 중국의 다른 지역들을 차지하지 않는다는것을 조건부로 하여 쏘중접경지대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양도하는데 동의하는것과 같은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장개석이 수억만 인구와 수백만k㎡의 면적을 자랑하는 나라의 주석이라는 자존심마저 줴버리고 일본사람들에게 국토의 한부분을 큼직하게 떼주는것과 같은 망동을 꺼리낌없이 자행한것은 그가 일본의 대포보다 지주, 매판자본가와 국민당관료들을 반대하는 국내인민의 총구를 더 두려워한데 있다.
그리하여 동북변방군의 30만대군은 자기 무장력의 25분의 1도 못되는 관동군에게 밀려 무진장한 자연부원을 가지고있는 광대한 만주땅전체를 버리고 패주하게 되었다. ❞
〈세기와 더불어 9·18사변 중에서〉
인용문에는 당시 중국의 국민당군이 얼아나 썩어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즉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은 민족성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국민당군벌들이다. 당시 중국을 이끌고 있던 국민당수뇌부의 생각이 인용문과 같은 정도였으니 드넓은 만주를 아루 아침에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일본이 만주를 치기전에 벌써 장개석이 장학량의 동북군에 《일본군측으로부터 도전이 있을 경우에는 신중성을 견지하며 백방으로 충돌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명령서를 하달하여 군의 저항을 사전에 억제한 사실”이 있었다니 도저히 믿겨지지를 않는다. 아마도 그 동안 말로만 만주사변을 듣고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본 자료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이 쳐들어오는데 저항을 하지 말라는 명령서를 내려 보내다니 정신줄을 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하지만 분명 당시 중국의 국민당 수뇌부가 만주 장학량의 동북군에게 명령서를 하달하였다니 분명한 사실이니 부정 할 수는 없다.
인용문에 나와 있는 아래 내용을 보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도저히 믿겨지지를 않는다. 어떻게 인용문과 같은 매국·배족행위를 할 수 있는지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다.
“9.18사변이 폭발한후에도 장개석의 남경정부는 중국인민과 중국군대는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고 평정과 인내성을 발휘할데 대한 투항주의적인 성명을 발표하여 군대와 국민의 사기를 저락시키였다. 만주의 운명은 벌써 9.18사변전에 결정된셈이였다. 지어 그들은 대표를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와 비밀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이 교섭과정에 장개석은 일본이 중국의 다른 지역들을 차지하지 않는다는것을 조건부로 하여 쏘중접경지대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양도하는데 동의하는것과 같은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라고 하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있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니 부정할 수가 없다. 대동아공영권 실현이라는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적 앞에서 어떻게 “중국인민과 중국군대는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고 평정과 인내성을 발휘할데 대한 투항주의적인 성명을 발표” 할 수 있겠는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미 인용문에도 나와 있고 위에서 필자도 간단히 언급을 했듯이 당시 국민당군부 지도부는 민족이니, 나라니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고 오로지 자신들과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안위와 지배력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어이없이 나라를 적들에게 거져 내주는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이에 대해 인용문도 “장개석이 수억만 인구와 수백만k㎡의 면적을 자랑하는 나라의 주석이라는 자존심마저 줴버리고 일본사람들에게 국토의 한부분을 큼직하게 떼주는것과 같은 망동을 꺼리낌없이 자행한것은 그가 일본의 대포보다 지주, 매판자본가와 국민당관료들을 반대하는 국내인민의 총구를 더 두려워한데 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이와 같은 당시 장개석이 이끌고 있던 국민당 수뇌부들의 사적 야욕에 의해 빚어진 행태들로 하여 1931년 9월 18일에 벌어졌던 《9 · 18만주사변》은 정해진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장개석이 수억만 인구와 수백만k㎡의 면적을 자랑하는 나라의 주석이라는 자존심마저 줴버리고 일본사람들에게 국토의 한부분을 큼직하게 떼주는것과 같은 망동을 꺼리낌없이 자행한것은 그가 일본의 대포보다 지주, 매판자본가와 국민당관료들을 반대하는 국내인민의 총구를 더 두려워한데 있다.”고 하여 당시 민족성을 지니고 있었던 중국 인민들을 장개석의 국민당은 적으로 삼고 있었다고 증언을 하고 있다.
※※※ 글이 길어져서 이번 주 《9 · 18만주사변》에 대한 연재를 여기서 마친다. 다음 주 연재는 《9 · 18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조사단의 조사결과와 만주사변이 미치는 조선의 반일·항일독립운동에 얼마나 큰 후과를 미쳤으며 이에 대한 조선의 젊은 세대들의 대처방안은 어떠했는지를 다루도록 한다. ※※※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2015년 6월 8일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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