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역사속에서 지혜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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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경제33] 을지문덕, 이지함, 전봉준, 우리역사의 소위 NL, PD의 길
오용석
⑴ 먼저 을지문덕의 나라사랑 (NL)
예로부터 동아시아 유일의 패권국가 중국제국의 역사 공식은 자신들의 분열기 → 대륙 통일 → 변방 정복의 순서입니다. 기원후 3세기 이래의 소위 5호16국 시대를 거쳐 6세기 말 다시금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는 양제 시절이던 612년에 물경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섭니다.
하지만 요동성에서부터 고구려의 완강한 방어에 직면하면서 한없이 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장수 우중문으로 하여금 정예별동대 30만을 이끌고서 방어가 허술해졌을 평양성을 향해 진격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때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을 통쾌하게 조롱하면서 읊어줬던 시입니다.
을지문덕 /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與隋將于仲文詩)
귀신같은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神策究天文)
신묘한 계산은 지리에 통달했다네. (妙算窮地理)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아졌으니 (戰勝功旣高)
만족함을 알고서 이만 그치기를 바라오. (知足願云止)
소위 중화 제국주의를 성공적으로 격퇴시킨 민족 공유의 체험! 당시의 민족 자존감을 유감없이 보여준 ‘금상첨화’의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은 아직 전공다운 전공은커녕 정작 진퇴유곡인 상태에서 반어법으로 '어지간하면 돌아가시지?' 하는 야유 반, 조롱 반의 치욕을 당합니다.
우리 역사에 찬연한 612년의 ‘살수대첩’! 우중문은 도저히 승산이 없음을 뒤늦게 깨닫고서 극적으로 회군을 결정하나, 을지문덕은 그 뒤를 세게 몰아쳐서 대승을 거둡니다. 을지문덕의 시 한 수가, 이보다 정확히 900년 뒤 이태리 반도의 통일제국을 꿈꾸며 마키아벨리가 온갖 지략을 다해 써냈던 걸작 ‘군주론’(1512년) 한 권을 실천적으로 능가하고도 남습니다.
(2) 다음으로 이지함의 인민사랑 (PD)
16세기 중반, 조선 인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집니다. 조선 개국 이래 토지제도였던 과전법 자체가 붕괴되며 양반들은 너도나도 마구잡이로 토지를 거둬들입니다. 왕실조차 농민들 땅 강탈에 앞장서는 지경입니다. 속절없이 토지에서 내쫓기면서 여기저기 소위 임꺽정들이 쏟아져 나온 시절입니다.
오늘날 소위 PD로 일컬어지는 인민사상, 곧 조선의 실학은 바로 이런 경제사회적 배경이 그 연원입니다. 시대의 선각자 이지함은 뒤늦게 만 56세 때인 1573년에야 이른바 ‘재야인사’ 케이스로 포천 현감에 오를 기회를 잡습니다.
베옷에 나막신 차림으로 집무를 마친 부임 첫날 저녁,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두고 “먹을 것이 없다”며 물리치고 아전들을 꾸짖습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고 있는데, 벼슬아치들은 이런 진수성찬을 먹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며 오곡밥 한 공기와 나물국 한 그릇만 가져오게 합니다.
이지함 / ‘대인론’ (大人說)
사람마다 네 가지 소원이 있으니 (人有四願)
안으로는 똑똑하고 강해지기를 바라고 (內願靈强)
밖으로는 부자가 되고 귀인이 되려한다. (外願富貴)
그러나 … (然而 …)
아는 것이 없다기에 능히 똑똑하고 (不知而能靈)
다투지 않고서도 능히 강하며 (不爭而能强)
탐하지 않기에 능히 부유하고 (不貪而能富)
관직이 없이도 능히 귀해야만 (不爵而能貴)
비로소 대인이리라. (惟大人)
그가 고을 현감으로 맨 먼저 한 일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문책한 일이었고, 문책 방법도 남달랐습니다. 잘못이 드러나면 나이에 상관없이 애들처럼 머리를 길게 땋도록 하였답니다. 나이 먹도록 덕이 부족해서 아직 아이만도 못하니 스스로 느끼고 뉘우치라는 의미였습니다.
곧 이어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爲天 民以食爲天)는 내용의 유명한 상소문을 올립니다. 왕실 외척 및 중앙조정의 훈구파들과 결탁한 지방 관리들에 의한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굶주린 지경에 처해있음을 ‘있는 그대로’ 지적합니다.
개선책으로 황해도 풍천부의 염전을 임시로 포천에 속하게 해달라고 제안합니다. 소금을 곡식과 바꾸어 식량 부족을 해결하려는 매우 현실적인 정책임에도 이를 조정이 받아주지 않자 다음 해에 병을 핑계로 미련 없이 사직합니다. 당대 인민들이 그의 삶의 역정을 반영하는 애칭 ‘토정’(土亭)으로 불러줬던 이지함, 과연 대인의 인민사랑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3) 마지막으로 전봉준의 나라사랑, 인민사랑 종합 (NL + PD)
새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시대의 변혁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드디어 총칼을 들고서 반제, 반봉건의 인민봉기 선두에 나섭니다. 다음의 사발통문을 돌립니다. “났네, 났어, 난리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1894년, 자주적 근대화와 매국적 식민지화의 갈림길입니다. 관군의 거듭되는 패배에 당황한 조정은 청에 농민군 진압 군대의 파견을 요청합니다. 일본도 이에 질세라 서둘러 군대를 보냈고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 조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6월 23일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킵니다. 6월 25일, 김홍집을 책임자로 하는 ‘갑오 친일정권’을 수립합니다. (김홍집은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친일정부에 성났던 군중들에 광화문에서 맞아죽습니다)
일제는 이제 동학 농민군 공격에 직접 나섭니다. 1894년 11월 '녹두장군' 전봉준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및 관군 연합군에 장렬히 맞서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최후의 패배를 겪습니다. 후일을 기약하며 도피하지만 동지의 배신으로 순창에서 붙잡혀(1894.12.2.) 서울로 압송되면서 떠올렸다는 시가 바로 ‘운명’(殞命)! 흔히들 이야기하는 소위 운명(運命) 따위의 미신이나 숙명이 아니라, 드디어 자신의 목숨이 다했다는 뜻입니다.
전봉준 / 운명 (殞命)
때가 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하였건만 (時來天地皆同力)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수 없구나 (運去英雄不自謨)
인민을 사랑하는 올바름에 내 과실은 혹 없었던가 (愛民正義我無失)
나라를 위한 오직 한 마음. 그 누가 있어 알겠는가 (國丹心誰有知)
사실 개화파는 무슨 개화파? 구한말의 친일파였을 뿐입니다. 1895년 3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한 법무 대신은 10여 년 전 실패했던 갑신 친일쿠데타(1884)의 주범 서광범이었고, 그간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오다가 1894년 갑오 친일쿠데타의 성공으로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또 다른 매국노 박영효에 이어 급거 귀국하였습니다.
또한 친일파는 무슨 친일파? 일제에 부역했던 반역자들일 뿐입니다. 마지막 발악으로 일제가 조선민족 말살 정책에 나서자 이들 민족을 배반한 무리들도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최남선은 “조선인의 일본화가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라고 하고, 이광수는 “일장기가 날리는 곳이 내 자손의 일터”라고 합니다. 오늘날 마치 연례행사처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운운하지만 더 시급한 게 오래전 일제가 써줬던 우리 역사교과서 왜곡 상태의 청산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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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지난달 총선 패배 이후 그래도 우리가 기대야 할 민통당과 통진당이 보여준 담합과 공작의 정치로 말미암아 그들이 정말 우리의 ‘두통’거리로 등장한 상황입니다. 더 많은 인내와 시간을 요하게 된 한미FTA 폐기! 이 시대의 나라사랑(NL), 인민사랑(PD)이 상호 교차하는 바로 오늘의 실천적 과제입니다. 성별 불문 나이 불문하고, 우리 모두 함께 나서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 역사 속의 한시 세 수를 오늘 굳이 반추해보는 까닭입니다.
특히 이지함과 전봉준, 이 시대에 더욱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한 분은 조선 시대 실학의 16세기 연원이었고 그보다 300년 뒤 다른 분은 풍전등화 조선국을 구하고자 이를 장엄하게 실천하다 운명합니다. 동학에서는 여성도 똑같이 존중받았고, 1894년 농민군의 장흥 공격 때는 선두에 서서 농민군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23살의 청춘과부 이소사였음을 부연합니다.
이지함과 전봉준! 어디 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런 대인의 모습을 갖추기야 했겠습니까. 스스로 온갖 삶의 역경을 헤쳐 나오면서 어느새 몸과 마음이 공히 넉넉해질 수밖에 없었던, 역사 속 개인의 실존적 필연으로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시대를 부정한 인물 치고 당대의 최고 긍정이자 창조자 아닌 경우가 과연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요.
* 글쓴이는 현재 개방과 통합 (연) 소장으로 경제민주화와 양극화 해소에 관심이 많습니다. 서울법대 졸업 후 미국 오리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한은, 금감원 등에서 근무하였습니다. https://www.facebook.com/fssoh
기사입력: 2012/05/11 [03:51]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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