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참뜻
<칼럼> 이활웅 통일뉴스 상임고문
이활웅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3.06.24 16:06:27
이활웅 (본사 상임고문, 재미 통일연구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3년이나 되니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전쟁이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 모르며 또 절반 이상이 남한의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의 조사에서 밝혀져 기성세대가 매우 걱정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그런 기성세대는 과연 6.25의 참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미국이 도왔어도 맹목적인 종미주의에 빠져선 안 돼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최대 정책목표는 “북진통일”이었다. 북한정권을 무력으로 타도하고 남북을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군이 일단 북진을 개시하면 북한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북한정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고 호언장담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시도됐는데 국군이 이를 격퇴하고 북진중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러면 그렇겠지 했는데 불과 3일 후 서울은 북한군 수중에 떨어지고 큰소리치던 이 대통령은 도망가고 말았다. 알고 보니 국군은 북한군 앞에 쪽도 못 쓰는 존재였다. 이제 전 한반도가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을 침략으로 규탄한 유엔결의에 따라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의 군사력이 미군사령관의 지휘 하에 북한군을 물리치고 9월말에 서울을 수복하고 10월초부터 38선 이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10월 말 중국군이 개입하여 유엔군을 격퇴하고 다시 38선 일대에서 양쪽의 군사력이 일진일퇴의 장기적인 대치상태를 유지하다가 1953년 7월27일 쌍방이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 한국전의 전투행위는 멈춰졌다.
이렇듯 6.25로 혼쭐이 났다가 미국의 덕으로 공산화를 면한 한국의 기성세대가 미국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직까지도 덮어놓고 미국만 믿고 미국 하자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맹목적인 종미주의(從美主義)에 빠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이승만이 친일잔재세력과 손잡고 세운 서울정권과 항일투쟁에 몸담았던 공산세력이 세운 평양정권 간에 내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때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남한의 무력보다 북한의 무력이 월등 우세하다는 것도 미국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승만 정권에게 막대한 군사원조를 해 주느니 차라리 공산군의 침공으로 남한이 빈사상태에 빠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미국이 직접참전하여 북한군을 격퇴하는 것이 보다 극적이고 효과적이며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미국은 일부러 이승만의 북진을 위한 군사원조 요청을 묵살했던 것이다.
이 무렵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분신으로 알려진 딘 애치슨 국무장관 등이 작성한 비밀문건에는, 북한군이 남침하면 유엔안보리를 긴급 소집하여 다른 회원국들의 찬성과 협조를 얻어 미국 주도의 “경찰행동”을 취하되 중국의 개입가능성에 유의해야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애치슨은 또 1950년 1월 미국언론협회의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열도를 거쳐 류큐에 이르는 것이라며, “미국원조로 강력해진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명시적인 군사적 보호 약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언명했다. 이는 북한의 남침을 유인하기 위한 말이었는데 이 말을 곧이듣고 남침을 결심하거나 동의해준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은 모두 애치슨의 꾀에 넘어간 바보들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6월 24일 토요일 밤(현지시간), 친구들과의 만찬회 도중 북한의 남침 보고를 받은 러스크 국무차관보는 애치슨 장관에게 전화하여 이미 결정된 계획대로 유엔 안보리에 회부처리 하겠다고 보고해 애치슨의 승인을 받았고, 애치슨도 곧 고향에서 휴가 중인 트루먼에게 전화하여 이미 세운 계획대로 유엔에서 처리할 것이니 걱정 말고 예정대로 휴가를 다 마치고 돌아오라고 건의했다.
미국이 꾸민 시나리오대로 잘 돌아간 한국전쟁
한국전이 휴전된 1953년 10월 애치슨은 프린스턴 세미나에 제출한 문서에서 “한국전은 여러 면에서 이론의 영역을 현실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고 밝힌 다음 “한국전은 그 발발 이전 몇 개월 동안 비밀리에 긴급 건의된 정책들을 공공연히 채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모든 일이 미국이 꾸민 시나리오대로 잘 돌아갔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서 남한 약 60만, 북한 약 70만, 중국 약 20만, 그리고 미국 약 3만8천명이었다. 미국인 사망자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적지만 그러나 자국민 목숨의 대가는 톡톡히 받아내야겠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과 동북아에서의 패권적 지위를 한국전의 결과로 얻은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주한미군의 무기한 주둔이다. 그래서 미국은 1953년 7월 체결된 휴전협정이 3개월 이내에 정치회담을 열어 외국군 철수문제를 포함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3개월도 되기 전인 10월에 남한정부와 주한미군의 무기한 주둔을 골자로 하는 방위협정을 체결해버렸다. 또 이듬해 5월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을 결렬시키고 오늘날까지 주한미군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정치 군사 경제적 압박을 계속하며 이에 대한 북한의 당연한 반발을 구실삼아 주한미군 계속주둔을 위한 명분과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남이든 북이든 우리 민족이 통일을 위해서 시작한 6.25전쟁이 미국의 개입으로 미국의 입맛에 맞게 요리되는 통에 결과적으로 통일의 기회를 막아버리는 전쟁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북한보다 인구나 경제력이나 월등 우월한 남한에서 6.25전쟁의 참뜻을 깨닫고 이제 미국의 굴레를 벗어나고 북한과 화해협력의 과정을 거쳐 평화 통일의 길을 터야겠다는 자각이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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