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내쫓자 발트3국 뒷문으로 들어온건?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8) 강대국 수백년 지배받아온 발트3국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08/07 [00:34] 최종편집: ⓒ 자주민보 히틀러와 스탈린의 밀약으로 발트 3국을 식민지로 앞문으로 호랑이를 내쫓았더니 뒷문으로 사자가 들어온 발트 3국 발트 3국은 발트해 동쪽에 있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리투아니아 세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또 인종적으로 말한다면 발트 3국은 백인들의 나라로서 북유럽에 속하는 아주 작은 나라들이기도 하다. 발트 3국의 면적은 175,000㎢인데 세 나라를 모두 합쳐도 러시아의 100분의 1에 불과하며 코리아(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나라이다. 인구도 역시 세 나라 모두 다 합쳐서 약 750-800만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발트 3국을 마치 세 쌍둥이 형제들처럼, 하나의 단일국가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다. 국제사회에서 어찌하여 발트 3국을 하나의 단일국가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발트 3국의 민족들은 수 세기동안 외세의 침략과 억압속에서 피지배 민족으로 비극적인 운명속에서 함께 살아 왔다. 그러다가 1991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처음으로 세 나라가 동시에 독립국이 됐다. 그런데 발트 3국이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발트 3국이 호랑이를 쫓아내고 독립을 쟁취한 방법은 비군사적 방법이었다. 발트 3국의 민간인들이 민중적 투쟁방법으로서 이른바 200만명의 “인간띠”로 678km를 연결하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발트 3국 총인구 750-800만명 중에서 200만명을 일제히 동원하여 “인간띠”로 연결하여 끊기지 않는 위력을 과시하면서 그동안 수세기동안 지배해온 서구열강들과 히틀러와 스탈린이 결탁한 침략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서구열강들이 발트 3국을 침략하여 북유럽에 대한 통치의 쇠사슬을 수백년 동안 계속하여 묶어 놓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번만은 강철같이 단결한 발트 3국의 민중들의 궐기와 항쟁으로 결집된 “200만명의 인간띠”의 위력에 의하여 서구열강의 통치의 쇠사슬은 드디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발트 3국이 “인간띠”로 유럽의 쇠사슬을 끊어 버렸는데 이번에는 쇠사슬이 아니라 나토(NATO)의 “쇠그물”로 덮어씌움을 당하는 발트 3국이 되고 말았다. 1. 발트 3국의 간추린 역사 (1)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두 나라의 간추린 역사 발트 3국 중에서 북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는 BC 2000년 경부터 레트족이라고 불리는 발트인들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12세기 말부터 독일인들이 점령하여 기독교화가 됐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1558년에는 제정 러시아의 이반 4세가 점령하여 이들을 지배했다. 1600년대에 들어서서 러시아- 폴란드- 스웨덴의 전쟁으로 인하여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700-1721년에는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 끝에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또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패함으로서 1918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독립국이 됐다. 하지만 1939년에 러시아와 나치 독일이 이른바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비밀협정’을 맺음으로서 중앙유럽을 둘로 분할하였다. 독일은 중앙유럽을 지배하고 러시아는 발트 3국을 지배하도록 비밀조약에 합의를 했다. 유럽의 열강들이 중앙유럽을 둘로 나누어 지배하기 위하여 비밀조약을 맺음으로 1940년 6월부터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남쪽에 있는 리투아니아까지 포함하여 발트 3국이 모두 다 외세의 점령 하에서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발트 3국은 194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그리고 동서 냉전시기가 끝난 1991년까지 52년 동안 유럽의 강대국들에 의하여 지배를 받았다. 동서냉전 시대가 종결된 후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리투아니아는 각각 세 개의 나라로 분리하여 독립국이 됐다. (2) 리투아니아의 간추린 역사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중에서 남쪽에 위치하여 폴란드와 접경하고 있는 나라로서 1009년에 리투아니아라는 나라의 이름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1253년에 여러 이웃의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역사가 시작됐다. 1386년에 리투아니아의 통치자인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여왕과 결혼을 했다. 이 두 나라의 통치자들이 결혼을 함으로 두 나라는 동군연합을 형성했다. 1410년에 독일과의 전쟁에서 폴란드가 독일의 튜튼기사단을 격파해 승리하였다.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덕분에 전승국이 됐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독일을 물리치고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창설하기까지 했으며 이 두 나라는 400년 동안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1795년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 편입이 되었고 폴란드와 영국적으로 분리국이 되고 말았다. 1830년과 1863년에 리투아니아는 반러시아 봉기를 일으켰지만 모두 다 실패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패전함으로 인하여 리투아니아는 123년 만에 독립국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리투아니아는 겨우 독립국이 되기는 했으나 친러시아 공산당세력, 친서방보수세력 그리고 농민노동자 세력들이 대립함으로 인하여 독립국이 된 리투아니아는 불안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대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발트 3국에 대하여 간추린 역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 이후에 발트 3국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중앙유럽에 대한 주도권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치열했다. 독일은 중앙유럽을 마음대로 지배하기 위하여 러시아에게 비밀협정을 제안했다. 1939년 8월 23일에 독일이 러시아에게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비밀협정’을 제안하였는데 이 비밀협정에 의하면 중앙유럽을 둘로 나누어 러시아는 발트 3국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고 독일은 중앙유럽을 독점하여 지배하려고 꿈을 꾸고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요구는 독일이 원하고 계획하고 있는 모든 작전에 대하여 러시아가 일절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요구였다. 1939년 8월 23일에 독일과 러시아가 맺은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비밀협정’은 1905년 8월 10일에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포츠머스 비밀협정’과 동질의 비밀협정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 비밀협정’을 맺음으로서 극동지역에서 분쟁을 끝내고 일본이 조선반도에 대하여 통치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 조약을 중간에서 성사시킨 사람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는데 그는 이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비밀협정’은 또 1905년 7월 29일에 미국과 일본이 함께 맺은 ‘가쓰라-테프트 밀약’과도 동질의 밀약이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여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는 거점으로 삼는데 대하여 일본이 협조하고 일본이 미국에 협조한 대가로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는데 대하여 미국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이 ‘가쓰라-테프트 밀약’이었다. 그러니까 1)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비밀협정’ 2) ‘포츠머스 비밀협정’ 3) ‘가쓰라-테프트 협정’ 등 3 개의 협정들은 독일과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 네 나라가 서로서로 비밀협정을 맺고 약소민족들을 지배하면서 착취하기 위한 열강들의 동질의 비밀협정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협정의 결과도 역시 약소국들에 대한 식민지통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 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또 다시 시작됐다. 1939년 9월 1일 새벽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한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그 다음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1939년 9월에 폴란드를 공격했다. 한편 동양에서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동양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에 미국이 주도하는 UN군의 승리로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지만 냉전시대가 또 다시 시작됐다. UN군의 승리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멀고 먼 오랜 세월동안 발트 3국은 또 다시 냉전시대의 체제하에 묶인 채로 러시아 연방제에 종속된 피지배국으로 남아야만 했다. 그런데 러시아공화국이 고르바초프와 옐친 대통령의 시대에 이르러서 15개의 러시아공화국에 속해 있던 나라들 중에서 12개 국가들이 독립을 하고 독립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했다. 러시아도 이 CIS의 회원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15개의 러시아공화국에 예속되어 있던 나라들 중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발트 3국만은 제외되었으며 CIS의 회원국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냉전시대가 드디어 종식됨으로 인하여 러시아 진영의 연방제 체제가 붕괴됨으로 오랜 세월동안 러시아의 식민지로 묶여 있던 발트 3국도 당연히 독립국이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발트 3국만 제외됐다. 발트 3국은 열등의식을 초월하여 분노가 커져갔다. 그런데 독일과 러시아가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비밀협정’을 맺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가 바로 1989년 8월 23일이다. 비밀협정을 맺음으로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된지 50주년이 되는 해에 발트 3국은 이른바 200만 명이 참가한 “인간띠” 항쟁이라는 강력한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발트 3국은 분노의 50주년이 되는 해인 1989년에 유럽의 열강들이 수백년 동안 저지른 침략의 역사를 전 세계에 낱낱히 고발하는 동시에 발트 3국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하여 민중 200만 명이 “인간띠”를 연결하여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의 사람들은 발트 3국의 “인간띠”의 시위가 기적의 시작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89년에 전개한 발트 3국의 200만 명이 가담한 “인간띠”의 사건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유럽의 열강들이 서둘러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하여 1991년에 드디어 독립국들이 되었던 것이다. 2. 호랑이를 앞문으로 내쫓았으나 뒷문으로 사자를 끌어 들인 “인간띠” 1989년 6월 15일에 발트 3국 대표자회에서 “인간띠”운동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8월 12일에는 발트 3국의 대표자들이 공식적인 합의에 서명하여 확정했다. 그 때 당시 서구열강은 발트 3국의 “인간띠”운동 결의에 대하여 오히려 비난의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극단주의적 이기적인 좁은 민족주의 운동이다”라고 엉뚱한 경고의 말들을 하고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약소민족을 억압하며 착취하고 있는 서구열강들이 피지배국들에 대하여 주장하는 이론은 항상 엉뚱하고 왜곡된 주장들뿐이다. 히틀러-스탈린시대에 있어서 발트 3국이 식민지가 되고 있는데 대하여 유럽공동체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럽의 열강들이 발트 3국의 “인간띠”독립운동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발트 3국의 총인구가 750-800만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 200만명이 동원됐다는 것은 총인구의 25-30%가 “인간띠”에 참가한 셈이다. 이러한 수치는 어린이와 노인들 그리고 병약자들을 제외한다면 발트 3국 인구의 거의 100%가 “인간띠”에 참가했다고 볼 수 있다. 친서방 외세의존적인 기업체들은 근로자들이 “인간띠”에 참가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결근을 이유삼아 감봉과 해고로 위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대다수의 애국적인 기업체에서는 버스를 대절하여 교통을 제공해 주면서까지 종업원들이 “인간띠”에 참가하도록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한다. “인간띠”운동의 당일날은 1989년 8월 23일인데 목요일이었다. 발트 3국은 이 날을 국가공휴일로 선포했다. 1989년 8월 23일 오후 7시부터 7시 15분까지 15분 사이에 “인간띠”에 참가한 200만명이 일제히 한 줄로 서서 양손을 맞잡는 결정적 시간으로 선포했다. 발트 3국의 북쪽에 있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중부에 있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그리고 남쪽에 있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리우스 등 발트 3국 세 곳의 수도들 사이에 600km나 되는 원거리를 손과 손으로 연결하는 “인간띠”는 1989년 8월 23일 오후 7시에서 7시 15분까지 15분 사이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인간띠”에 참가한 200만명이 서로 손을 맞잡는 15분간은 인류의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일한 기적적인 시간이었다. 총 한방 쏘지 않고 50년을 기다리던 독립의 소원이 무혈혁명으로, 자주독립의 꿈이 이루어지는 “인간띠”의 15분이었다. 발트 3국의 “인간띠”운동의 승리에 대하여 웃기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 웃기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다. 부시 대통령은 서독의 콜 수상에게 말하기를 독일과 러시아가 맺은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비밀협정’을 비난하면서 발트 3국의 “인간띠”운동을 지원해 주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은 러시아와 일본이 맺은 ‘포츠머스 비밀조약’에 대해서와 또 미국과 일본이 맺은 ‘가쓰라-테프트 비밀협정’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었다고 한다. 냉전이 종식되고 발트 3국이 독립을 쟁취한 후부터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나토와 러시아의 관계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차원에서 “대립과 협력”이라고 하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 과거 소련이 주동이었던 바르샤바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가 해체되면서 유럽의 안보체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토(NATO)의 팽창이었다. 나토(NATO)는 1949년에 미국이 12개국의 서명을 받아 창건했는데 그동안 꾸준히 확대하여 30여 국가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여기에 구소련계의 여러 나라들을 포섭하여 가입을 시킴으로서 미국은 유럽에서 나토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더불어 냉전시대를 전개시키면서 유럽에 대한 패권을 독단적으로 장악하기 위하여 나토를 강화확대하고 있었다. 서구열강을 나토의 지배체제 안에 묶어 놓는데 성공한 미국은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유럽패권전략에 대하여 러시아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미국의 유럽패권전략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책은 매우 단호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대응은 솜방망이로 양면성, 유동적 관망, 협력과 대립, 인정과 부정 그리고 존중과 비하 등 이중적인 잣대로 일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나토를 미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러시아의 이익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옐친 대통령 시대에 들어서면서 구소련 시대의 동맹국이었던 동구권 나라들이 나토에 가입하는 수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나토의 확대가 러시아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선별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애매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군부에서 나토의 영향력 급증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가 점차로 강경해지고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할 수 없이 대서방 강경파인 예브게니 프리마코프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했으며 미국이 동유럽 문제에 관여하는데 대하여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코소보사태와 유고연방사태에 있어서 미국에 의한 나토의 확장과 러시아의 반격 등에 있어서 미소 양국간의 복잡한 권력의 대결분쟁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는 지면상 제약으로 이것으로 줄인다. 하지만 9.11사태와 그 후에 나타난 러시아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대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은 9.11사태 후 테러와의 전쟁을 빙자하여 나토(NATO)를 강화하여 러시아를 끌어 들임과 동시에 또한 러시아 지역 안에 남아 있으면서 아직 CIS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발트 3국을 재빠르게 나토(NATO)에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다. 발트 3국은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1991년에 쟁취했다. 그런데 발트 3국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동유럽권 전체를 휩쓸고 있을 때 이 돌풍에 의하여 너무나도 허무하게 2004년에 나토(NATO)의 쇠사슬에 또 다시 묶여지는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 앞문으로 호랑이를 쫓아낸 “인간 띠” 발트 3국은 뒷문으로 오히려 더 무서운 사자를 끌어 들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 발트 3국 속에 숨겨진 독립의 모순과 “자유의 슬픔”이 있게 된 것이었다. 미국의 힐러리 국무장관은 발트 3국에 대한 방어계획에 있어서 러시아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나토헌장 제5조의 상호방위규정을 강조했다. 힐러리 국무장관이 강조하는 말에 의하면 “만일 러시아가 발트 3국을 침공하면 나토는 병력을 발트 3국에 투입하여 방어한다”라는 뜻이 있는 말이다. 독립국이 되기는 했지만 발트 3국에게 자체 국방이란 꿈도 꿀 수 없었다. 미국이 나토를 앞세워 러시아를 견제하여 발트 3국을 방어하는 책임을 진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발트 3국에 대한 방어계획을 이른바 “발트 3국 영공초계”라고 부른다. “발트 3국 영공초계”를 책임지는 것은 프랑스 공군, 독일 공군 그리고 폴란드 공군이다. 나토의 방어체제하에서 이들 세 나라의 공군전투기들이 발트 3국의 영공을 자유스럽게 항상 날아 다니면서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나토는 발트 3국에 대한 “영공초계”를 2018년까지라고 처음에는 발표했는데 최근에는 무제한 연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발트 3국을 기어이 나토에 가입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이 미사일 방어망을 발트해에 구축하는데 있어서 발트 3국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미국은 2009년 12월에 발트 3국에 대한 새로운 방어계획을 비밀리에 입안해 놓았다고 폭로하여 러시아를 흥분시켰는데 이에 대하여 러시아 외무장관 라브로프는 “미국과 나토의 진심이 무엇인지 의심이 든다”라고 기자회견에서 항의의 말을 했다고 한다. 또 러시아의 국방장관인 이바노프는 말하기를 “왜 오늘날과 같은 평화시대에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한가”라고 미국 방문중에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항의했다. 3. 발트 3국의 독립은 그림의 떡, 발트 3국의 이모저모 민족이 역사를 창조하고 역사가 민족을 단련시킨다. 이것이 역사와 민족의 진실이다. 이 진실이 발트 3국으로 하여금 숭고한 “몸짓의 역사”를 창조해 내도록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약소민족의 가장 원초적인 의사표시 방법으로서 민중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인간 띠”가 되어 행렬을 짓는 항의와 투쟁은 18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민중항쟁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을 하도록 발트 3국이 크게 공헌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지속되었던 냉전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기존의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어 쇠약해 지는 반면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자본주의가 세계화를 구가하는 기이한 시대가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는 오직 돈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인 체제이다. 미국의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소수의 돈벌이 천재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돈벌이의 천재들은 돈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주장하기를 “돈에는 눈이 없다”라고 당연한 것처럼 주장한다. 눈이 없는 돈은 매정하고 세계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는다. “힘이 정의다”라고 소리를 치면서 돈으로 강화된 자본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눈이 없는 돈”이 막강한 세력으로 세계를 요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 요지경 속에서 제3세계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세계정치체제를 싫든 좋든 받아들이면서 2000년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 독립의 햇빛을 받기 시작한 발트 3국이 1991년에 마침내 독립을 했다. 하지만 독립의 햇빛으로 자유해방이 된 발트 3국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2004년에 나토(NATO)에 회원국으로 가입을 해야만 했다. 나토에 가입한 발트 3국은 미국의 안보를 위하여 발트해 전역에 대한 방위전초기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발트 3국은 자유독립국이 아니라 나토의 구조망에 얽매여 있을 뿐이다. 발트 3국의 국방은 나토 강대국들의 항공기들이 발트 3국의 영공을 순회하면서 책임을 지고 있음으로 발트 3국은 자체 국방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논리 속에 예속된 국가들이 되어 있다. 구소련이라는 하나의 “지붕”아래 살던 발트 3국은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1991년 12월에 독립국이 됐다. 하지만 희망 속에 독립한 발트 3국은 독립한지 21년이 되는 오늘에 있어서 빈곤 속에서 유일한 생존방식에 따라 서구열강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발트 3국에 대하여 서방의 언론들이 보도해 주는 자료들을 통하여 현재 발트 3국의 이모저모를 대략 살펴본다. ㄱ. 발트 3국은 가는 곳마다 멀리는 13세기부터의 유럽풍의 뾰족뾰족한 성당들의 첨탑이 종교적 분위기를 과시하고 있는 듯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발트 3국은 여행자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종교적 외향과 발트 3국의 대다수 국민들의 삶의 질은 종교적 분위기와는 아주 다른 딴판이다. 오늘의 발트 3국은 완전히 탈종교적이며 반종교적인 이교도들의 나라이다. 거리의 풍경은 밤이 아니라도 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으며 노숙자로 보이는 무리들이 도시에서 가는 곳마다 가득차 있는 것이 보인다. 독립 후 서구의 자본주의를 도입함으로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선전을 한다. 하지만 발트 3국의 민중들은 상대적으로 도덕적 붕괴와 빈곤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냉소와 무관심 속에 살고 있다. 발트 3국의 도시마다 자본가들이 독점하고 있는 유흥산업이 매우 발달하여 거리마다 카지노 간판이 요란하고 성인잡지를 팔고 있는 상점들을 거리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끌고 온 빈부의 격차는 발트 3국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ㄴ. 발트 3국에서 유명한 것을 말하자면, 첫째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의 건물들과 꼬불꼬불한 정겨운 거리들의 풍경이다. 둘째는 전 유럽을 평정하고 있는 프로농구단에 대한 자랑거리이다. 셋째는 놀랍게도 자살률이 전 유럽에서 최고이다. 유럽연합 국가들 중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는 다음과 갈다. 자살률 평가는 인구 10만명을 표준으로 삼는다. 1위 리투아니아 10만명당 44명 2위 러시아 10만명당 39명 3위 에스토니아 10만명당 38명 4위 라트비아 10만명당 36명 유럽 외 지역인 스리랑카 10만명당 31명 (* 2002년 발표 자료) 심리학적으로 자살의 이유와 원인을 분석해 보면 발트 3국의 소외된 사람들 중에서 자신들의 영토와 소유물들을 많이 빼앗기게 된 후에 가지는 공허감 때문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자살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ㄷ.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에도 가는 곳마다 성당의 삐죽삐죽한 하늘을 찌르는 첨탑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첨탑 꼭대기에는 십자가는 볼 수 없고 은으로 만든 “은수탉”들이 앉아 있다. 라트비아의 민요의 가사 중에는 “은으로 만든 수탉이 울고 있는 도시”라고 부르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수탉을 신성시하고 있다. 수탉은 어둠이 가고 아침이 오는 것을 알리는 존재로 신성시하면서 리가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리가의 어느 한 높고 높은 첨탑 꼭대기에는 수탉이 아니라 고양이 한 마리가 허리를 굽히고 서있다. 아마도 그 고양이가 언젠가는 수탉을 잡아먹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가 어느 때인지? 어쨌든 라트비아를 민속적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 종교에서 탈종교적으로 다양성을 찾아 볼 수 있는 나라이다.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다른 피지배국가들에서 보는 것과 달리 유독 발트 3국에서는 서방이 지배해온 기독교를 멀리하는 세속화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라트비아의 은수탉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색적인 전통이다. 또 하나 발트 3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그렇게도 많이 있는 거대한 성당 건물들을 유지하는데 재정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 루터교, 로마 카톨릭교회 등 다양한 교파의 교회건물이 13, 14세기의 유물처럼 전국에 가득하다. 발트 3국의 교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지배 하에서 교회를 스스로 운영하고 지키는 전통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발트 교회들은 여전히 막연하게 외국에서 도와주는 선교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트 3국이 과거 자신을 억압하던 나라들의 유럽연합에 새로 가입하는 문제를 놓고 국민 투표를 했다. 그런데 발트 3국의 기독교인들이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열렬히 호응했다고 한다. 기독교신앙의 유혹이 서구열강들의 과거의 억압을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기독교의 역할이 애국적인가 아니면 매국적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발트 3국의 국민투표에서 기독교인들의 국민투표에 의하여 분명히 표출된 것이다. 그 때 당시 러시아는 발트 3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함으로 인하여 서방의 압력이 발트해 지역에서 크게 확장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ㄹ. 미국과 나토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토의 중요한 회원국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러시아에게 무기를 대량 판매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나토의 중요한 국가들이 러시아에게 무기를 판매한 내용을 기록한다. 1) 프랑스는 미스트랄급 상륙함 4척을 계약했는데, 2척은 14억7천만 달러로 판매를 이미 했으며 2척은 2014년에 판매완료를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2) 독일의 방산업체인 라인메달은 1억3천100만 달러의 러시아 군사훈련장 건설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3) 이탈리아의 피아트 회사가 제작한 경장갑차 수십대를 계약했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4) 러시아는 네덜란드와 스페인과도 다수의 상륙함과 군사용 컴퓨터 구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프랑스의 AFP가 2009년 12월에 보도한 바 있다. 유럽의 나라들이 러시아에게 대량의 무기판매 거래를 하고 있는 내용을 더 자세히 여기에 기록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유럽의 나라들이 미국의 눈치 때문에 러시아와 무기판매 거래를 하지 못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유럽은 러시아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설정하여 보다 큰 정치적 목표를 바라보고 있는데 대하여 미국 때문에 주저할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다. 유럽이 러시아에게 무기를 판매하고 있는데 대하여 불안을 느낀 미국의 국방장관이 프랑스를 급히 방문했다. 하지만 두 나라 국방장관들은 원론적으로 두 나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만을 재확인하고 무기판매에 대한 문제는 말도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발트 3국이 유럽 나라들이 러시아에게 무기를 대량 판매하는데 대하여 크게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와 독일은 발트 3국을 설득시키기고 안심하도록 하기 위하여 무척 힘쓰고 있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글을 맺으며 1998년 발트 3국의 “인간띠”사건과 1919년 코리아(한)반도의 3.1운동을 하나로 연결하여 깊이 생각을 하게 된다. 두 사건이 모두 다 강대국의 침략에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켜 세계 역사에 크게 공헌한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두 사건이 모두 다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 공통된 결과이다. 발트 3국의 “인간띠”에 200만명이 참가했는데 코리아반도의 3.1운동에는 연인원 202만 4천명이 참가했다. “인간띠”운동은 평화적으로 손과 손을 맞잡음으로 인간사슬이 되어 항쟁을 맹렬히 전개했으나 인명 피해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코리아반도의 3.1운동은 태극기를 흔들고 열광적으로 만세를 부르면서 항쟁을 전개했는데 사망자가 7,500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가 15,900명 그리고 검거자가 2,800명이었다. 발트 3국의 실패의 원인은 미국과 유럽열강들이 발트 3국을 나토의 방어기지로 삼으려고 나라의 주권을 갈취하여 강대국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코리아반도의 3.1운동이 실패한 원인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일본이 코리아반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 현재는 미국이 분단된 남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발트 3국과 오늘의 코리아반도 남녘의 사정이 똑같은 점은 발트 3국의 기독교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일부 강경 보수세력이 나라의 자주독립보다는 외세에 의존하여 교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두 나라가 같다. 발트 3국과 코리아반도의 같은 점이 또 하나 있다. 발트 3국은 호랑이 같은 구소련의 침략의 잔재를 앞문으로 쫓아냈는데, 어느 새 뒷문으로 사자같이 무서운 미국이 나토와 함께 들어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코리아 반도에서는 일본이라는 교활한 호랑이를 앞문으로 쫓아냈는데, 사나운 사자가 뒷문으로 유엔의 이름을 달고 슬그머니 들어 와 있으면서 지금까지 나가지 않고 있다.(2012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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