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시기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록
김상일(전한신대 교수)
기사입력: 2013/01/04 [18:51] 최종편집: ⓒ 자주민보
‘남패자’에서 ‘북대정자’ 까지
‘고난의 행군’이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1938년 12월 상순부터 1939년 3월에 걸쳐 110일 간의 행군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이 첫 구절부터 여늬 다른 글과는 달리 존칭어법이 나오는 지는 자신도 의심스럽습니다.
몽강현 남패자로부터 압록강 연안 장백현 북대정자에 까지 이르는 행군이었습니다. 회고록 7권을 통해 고난의 행군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행군에 관하여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석운기 지음 ‘고난의 행군’(불멸의 역사 13)을 통해 더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걸어서 불과 5-6일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무려 100여일의 긴 행군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때는 하루에도 20번 이상 전투를 할 때도 있었고 100년 내 보기 드문 눈이 그 해는 유달히 추석전부터 내려 길길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눈길이 하도 높아 눈 굴을 만들어 통과할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여성대원들과 병약자들 그리고 어린 대원들이 동행을 했으니 100 여일에 마친 것도 기적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고난의 행군 때 지나 온 마을 이름들과 거기에 얽히고 서린 아련하고도 슬픈 사연들을 중심으로 쓰려고 합니다.
‘남패자’에서 ‘북대정자’ 모두 여기 남한에서는 듣기 힘든 지명들입니다. 윤동주의 ‘별헤는 밤’은 동만일대의 가을 밤하늘을 노래한 것입니다. 거기에 “이름 모름 이국 소녀들의 이름들” 하면서 ‘패, 경, 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패자는 몽강현에 있습니다. ‘몽강’이란 말 역시 이국적입니다. 남패자 회의는 고난의 행군을 결정하는 주요한 회의입니다. 여기서 행한 연설이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고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자”입니다. 조성된 난국이란 좌경모험주의자들이 자행했던 열하원정의 뒷 수습을 의미합니다.
중국과 조선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열하원정을 모무하게 감행하여 대부분의 주력 부대들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일본 토벌대는 승승장구 하는 것 같았고 상대적으로 유격전은 말 그대로 지리 멸멸해 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조성된 난국입니다. 이 때에 일부에서는 청봉 밀령 같은 곳에 들어 가 안전하게 지내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자고 했지만 김일성 제 2방면 사령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국내로 진격해 들어 가 총소리를 내어야 일본놈들의 선전이 허위라는 것을 까발리고 저하된 사기를 진작 시킬 수 있다는 것이 김사령관의 견해였습니다.
이러한 견해를 반영한 것이 남패자 회의에서 그이가 한 연설의 내용이었다. 조성된 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오히려 국내 진격을 해 총소리를 내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고 혁명군들을 용기 백배 만드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지금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북이 식량란으로 곧 무너지고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악화설을 유포 시킬 때에 한 방 총소리를 내어 그렇지 않다고 보여준 사건이 무엇이겠습니까.
회고록을 읽고 공연히 가져다 붙여 추리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대정자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일제침략자들을 련속 타격하고 조국으로 진군하자”였습니다. 발악하는 적들을 계속 피동에 빠지게 하고 조국광복의 서광을 밝히는 연설이었습니다.
청봉밀령에서 무슨일들이
7도구 골짜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부후물 등판을 끼고 들어가면 울창한 잣나무 숲이 나타난다. 수백년 묵은 이 잣나무 숲 속은 이 숲이 생긴 이후 처음 인간이 들어 온 듯하였다. 숲이 너무 빽빽하여 여름이면 해빛 한점 새어 들지 못하고 겨울이면 사나운 바람도 함부로 넘나들지 못는 듯 하였습니다.
이 숲의 이름은 ‘청봉’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청봉은 이름과는 달리 흰눈이 덮여 어디가 어딘지 모를 백봉이라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아 그런데 천고의 신비가 가득한 이 숲 속에 눈 위에 또 다른 흰 종이 눈이 떨어져 있습니다.
왜놈들이 뿌린 ‘투항권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변괴입니까. 투항문에는 최남선과 김동환등 30 여명의 명사들의 이름들로 연명돼 있었습니다.
투항권고문의 내용들은 이러합니다. “대세는 이미 다 기우러졌다. 동양평화, 세계신질서 수립을 위한 성전 일본의 승리는 눈앞에 와 있다. 대 만주국의 오족협화 와 왕도락토 건설은 시간 문제이다. 대일본의 무적함대에 비하면 너희 유격대는 창해일속과 같으니 저항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동포애의 심정으로 간절히 호소한다”와 같았습니다.
자연과 역사는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것입니까. 자연은 반복되는 것이지만 역사는 반복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청봉은 지금도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의 망상과 몽상은 일장춘몽을 끝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결코 반복되는 않을 것입니다.
리성림은 삐라 한 장을 주어 코를 풀어 던져버렸습니다. 청봉에는 밀령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밀령이기 때문에 부상자들과 아녀자들이 장기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 청봉에는 최남선등 명사들이 보낸 삐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장 고요하고 무균질이어야 할 이 곳에도 인간들 간의 갈등은 다른 어는 곳에서보다도 치열했습니다. 극좌 종파주의자들이 때도 시도 없이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밀영 책임자인 엄광호와 손재연이 마당거우 밀영 때부터 공부해온 김일성사령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라는 노선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무정부주의가 어떻고 하면서 맑스-레닌의 교조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심지어는 대원들이 자기 허락 없이는 외부 출입도 못한다고 대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샅샅이 간섭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엄광호에 정면으로 부딪힌 분이 김정숙여사였습니다. 당시 김여사는 잣을 따 잣죽을 끄려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을 때입니다. 김정숙여사는 잣을 따다 곰을 만났습니다. 김여사는 거의 소만한 크기의 곰을 잡아 눕혔습니다. 모두들 좋아 환호를 질렀는데 엄광호만은 김여사가 곰을 잡았다는 사실에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숙여사는 엄광호와 손재연을 향해 종파분열주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청산해야 할 가장 주요한 책무라고 하면서 두 사람들을 향해 이런 밀림 속에까지 와서 민족개량주의를 부르짖고 고전적 명제를 가지고 와 동지들을 이간질을 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이냐고 두 사람을 몰아 부쳤습니다.
엄광호는 거듭 지금은 혁명의 쇠퇴기이니 레닌의 일보전진일보후퇴의 논리에 따라 일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할 때라고 김일성 사령의 주장을 정면 반격했습니다. 혁명을 덮어놓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세가 불리할 때에는 한 걸음 물러 서야 한다면서 일보전진 2보 후퇴론을 거듭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숙 여사는 엄광호의 말은 남패자들 떠날 때에 김일성 사령이 한 발언과는 정면 대치되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중간 청봉 밀령에서 있었던 일들입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되지 않지만 지금도 겨울이면 흰눈이 청봉의 잣나무 숲을 덮습니다. 새벽이면 일어나 잣을 따던 한 여인의 자취도 찾을 길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흘러 혁명은 성공하였고 종파주의자들의 주장은 청봉의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가재수 마을에서 맞이했던 1939년 설날도
물방아간 동네라고도 하고 가재수라고도 하는 곳에 있었던 일입니다. 부후물 등판 전투를 치루고 김일성 부대는 가재수 쪽으로 빠졌습니다. 적들은 다니전술이라는 전법을 구사하였습니다. ‘다니’란 진드기란 뜻입니다. 진드기는 말 그대로 숙주의 몸에 끈질기기에 달라 붙어 피를 빠라 먹는 동물입니다. 적들은 김일성 부대가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끈질기기에 달라붙었습니다. 자기들은 부대를 갈아 대면서 추격하지만 유격대원들은 계속 ?기는 형편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적의 피동에 빠져 추격당하기만 하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김일성 사령은 이 때 일수록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에 근거하여 주민들이 많이 사는 마을 야산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좋다고 가재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야산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습니다.
키가 한 길 만큼 되는 소나무가 가득한 들어 찬 소담한 야산이었습니다. 산아래는 바로 벼랑이었고 벼랑 밑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재수 부락에서 개가 짖으면 야산까지 다 들릴 정도였습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가재수 마을에 추억에 남는 것은 남패자를 떠난 후 처음 천막을 치고 잠을 잔 곳이기 때문입니다.
김일성 사령은 이봉록을 시켜 마을에 내려가 김일이란 사람을 만나게 했습니다. 김일은 지하조직원이었습니다. 이봉록은 마을 사람들에게 귀순하려 왔다고 속여 말했습니다. 처음 마난 사람이 물방앗간 주인 노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노인이 매우 실망을 하면서 산에서 고생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귀순을 해서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면서 묻는 것이 김일성 장군의 안부였습니다. 잘 계시느냐 어디에 계시는냐고 건강은 하시냐고 등.
상대를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이봉록은 자기가 김일성 장군이 보내 내려왔다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자기들이 직접 쌀을 줄 수는 없지만 어느 장소에 쌀을 묻어 둘 터이니 거기서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1939년 음력 설 날입니다. 가재수 마을 사람들은 밥과 고기를 지어 놓고는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을 떠나 온 후 매일 생쌀과 생고기만 먹다가 처음으로 익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그 해 설날은 설답게 보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설날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이봉록과 함께 마을에 간 이호림이 도주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대원들은 먹던 밥그릇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배낭을 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대원들도 아닌 사령부를 보위해야 될 경위 중대 대원이 도주를 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도중에 도주한 대원이 4명이나 되었습니다. 유격대원이 되려면 여간한 각오가 아니고는 안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김창억의 경우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탈락이 된 적도 있을 정도로 심사가 엄격했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이 얼마나 어려웠으며 경위 중대원까지 도주를 했겠습니까. 김일성사령은 회고록에서 말하기를 이호림은 유격대 생활을 얼마 하지 않았지만 “나의 사랑을 지극히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추억하고 있습니다.(회고록 7권 171)
이호림은 조선에서 직접 건너 온 대원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말도 잘 해 전주대에 올라가 적들의 전화를 도청할 정도였습니다. 참으로 아까운 대원이었지만 그는 갈 곳을 가고 말았습니다. 가재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간의 배신과 변절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그 운명이라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행군을 정치 군사적으로만 요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오늘 북조선은 남으로 넘어 오는 변절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산 역사에서 경험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1939년 설날 아침을 가재수마을에서 이렇게 맞이하였습니다. 잠시 잠깐도 다리 펴고 잘 수도 쉴 수도 없었고 숟가락을 들자 말자 놓을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꾸바의 까스뜨로도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세계 혁명 역사상 고난의 행군만큼 간고한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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