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사업 북방 자원개발 유지 받들 기업들 사라질 위기
정주영 탄생 100년과 또 다시 꺾인 북방경제의 꿈
2015년 11월25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의 탄생 100년을 맞아 그를 기억하는 여러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아직 많다. 그러나 금강산 대북사업은 물론이려니와 그가 하려고 했던 시베리아 자원개발 등 북방 협력 사업은 이제 그 기억마저 어렵게 됐다. 시베리아 자원개발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1년만에 부활시켰다는 현대자원개발은 올 초 문을 닫았고, 대북 사업의 모기업인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의 ’워크 아웃’ 등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자원 개발 추진한 현대자원개발 또 다시 문닫아
지 난 2011년 4월 현대중공업은 현대자원개발이라는 회사를 출범시켰다. ‘현대자원개발’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0년 설립한 ‘현대자원개발’의 사명(社名)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현대자원개발은 국내 첫 자원개발 전담기업으로 출범해 시베리아 산림자원과 가스 석유 파이프라인, 석탄 광물 등 자원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야쿠츠크 세계 최대 가스전 개발권을 정부 주도 컨소시엄에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다 현대그룹 내 구조조정으로 98년에 12월에 청산됐다. 현대 중공업은 13년만인 2011년 이 현대자원개발을 다시 출범시키면서 “21년 만에 창업자(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을 잇는 회사가 부활했다는 상징적 의미도 갖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경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려면 목재, 석탄, 석유 등 자원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론이었다. 그의 못다 이룬 꿈을 되살리겠다는 것이었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종합상사의 자원개발업무를 이 현대자원개발로 이관했고 대표이사 사장은 양봉진 현대종합상사 부사장이 맡도록 했다. 또 500억의 자본금 가운데 40% 지분을 현대중공업이 투자한 것을 비롯 현대종합상사,현대미포조선,현대오일뱅크 등 계열사들이 주주로 참여하면서 현대자원개발은 범현대가의 해외 자원 확보에 첨병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당시 자원개발과 관련해 현대중공업과 현대종합상사는 마다가스카르 니켈 광산과 예멘 액화천연가스(LNG) 개발사업, 러시아 연해주 농장(하롤, 미하일로프카 농장 등) 등 세계 8개국에서 광산, 에너지, 농림 등 11개 프로젝트에 총 5억2000만달러를 투자하고 있었다.
10월24일 정주영 탄신 100주년 기념식에서 악수하는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
현대자원개발과 한반도 가스관 사업
하 지만 현대중공업이 현대자원개발을 부활시킨 배경엔 이명박 정부가 자원개발의 기치를 높이든 탓도 있겠지만, 남북러를 연결하는 한반도 가스관 사업이 본격화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1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동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울란우데를 방문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이 가스관 사업 합의를 했으며, 그 뒤 11월엔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 생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러 가스관 사업에 긴밀히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가격 조건 및 북한 통과 가스공급의 안전 보장 등이 쟁점으로 남았지만 남북러 정상간의 합의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이에 따르면 2012년 4월까지 양측이 가격 협상 등을 마무리하고 2013년까지 가스관 노선 설계안을 마련하구요. 2013년부터 3년여의 공사를 거쳐 2017년부터는 한국에 가스 공급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임기말에 접어든 이명박 정권은 이 가스관 사업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열려고 했다. 그러나 가격조건, 가스관의 북한 통과에 대한 우려, 미국산 셰일 가스 우선 도입 그리고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의 갑작스런 사망 등 이 사업은 여러 장애물을 넘지 못한채 사실상 사장되고 말았다.
게다가 2~3년전부터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여파로 불황이 몰아닥치며 조선산업은 천문학적인 적자에 내몰렸다.현대중공업은 2014년 3조 2495억원의 영업손실을 입었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다. 강도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현대자원개발은 그 첫 대상이 되고 말았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지난 2월 현대자원개발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권 사장은 지난해 취임 이후 수익을 내지 못하는 사업을 정리하고 해외법인을 줄이는 등 사업구조를 개편해왔다. 양봉진 현대자원개발 사장은 실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현대자원개발은 20 대 1의 감자로 자본금이 25억원으로 줄어들었다. 또 중공업의 현대자원개발 지분 40%는 현대종합상사로 넘어갔다. 다시 4년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지난 4년여 현대자원개발은 새 프로젝트 발굴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매년 19억 원 가량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북 사업 모기업인 현대그룹 심각한 위기에 몰려
심각한 위기에 처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 대북사업을 추진해 오던 현대그룹은 더 심각하다. 금강산 개성공단 등 대북 사업을 담당한 자회사인 현대아산은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그룹을 지탱해온 현대상선이 난파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현대상선은 2011년부터 북미와 유럽 경제가 침체되면서 물동량이 급감하자 적자의 늪에 빠져들었다. 현대상선은 그룹 전체 매출의 70%을 차지한다. 여기엔 2003년 정몽헌 회장의 자살 뒤 경영권을 이어받은 현정은 회장을 둘러싼 리더쉽 위기의 스캔들도 한 몫을 했다. 현대그룹은 2012년부터 ISMG코리아 대표이사가 현 회장의 그림자 실세로서 현대그룹의 이권 사업을 독식하고 현대그룹 인사 및 경영에도 개입하고 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ISMG 코리아 대표가 100억원대 회삿돈 횡령으로 기소돼 2014년 7월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서 그의 현대그룹 경영 개입등의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경영위기는 계속됐다. 현대증권 매각 등을 통한 구조조정 등 현대그룹의 자구책 마련은 한계에 이르렀고 주가가 곤두박질 치면서 지금 현대상선은 법정관리, 제3자 매각(한진해운과의 합병설), 채권단 떠안기의 3자 택일에 직면해 있다.
정주영의 두가지 꿈
지난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 서강대에서 공연된 연극의 포스터
시베리아 자원개발과 관련해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두가지 꿈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시베리아에서 석유 ·가스를 개발해 이를 파이프 라인으로 한반도로 들여오고, 연해주 등 곡창지대를 확보해 북녘동포에게 쌀을 아낌없이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0년에 만든 회사가 현대자원개발이었다. 무엇보다도 정 명예회장의 대북사업과 시베리아 자원 개발은 출발부터 하나였다. 현대의 대북사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 가운데 하나인 김고중 전 현대아산 부사장은 지난 9월 정주영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1987년말 경 현대종합상사 런던 지사장으로 근무할 때 정 회장으로 들은 얘기에 근거해 이렇게 말했다.
“정주영 회장께서는 1987년부터 방북계획 준비를 진행하면서 1988년말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모스크바에서 면담을 했습니다. 그후 바로 시베리아와 원동지구 진출을 구체적으로 시작했고, 그간 준비했던 첫번째 방북을 1989년 1월에 했습니다”
1989년 1월23일 우리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정 명예회장은 김일성 주석과 만난 뒤 금강산관광,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남북공동진출, 원산 철도차량 공장 합작투자 등 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남북경협은 거의 답보상태에 있었다. 97년까지 정부가 승인한 대북투자는 모두 6건, 그 가운데 실제 생산으로 이어진 사업은 대우의 남포 의류공장과 태창의 금강산 샘물 사업이었다. 그나마 이들 사업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바로 그 때1998년 6월16일 지금은 북쪽으로 넘어간 강원도 통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살 때 아버지의 소 판 돈 70원을 들고 상경한 그가 500마리의 소떼를 실은 트럭 50대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서며 새로운 남북경협의 물꼬를 열었다.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세미나에 참석한 김영희 대기자는 정 명예회장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한 창의적인 기업인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1976년 중동 건설진출의 발판을 닦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 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근대화의 신화 넘어 한국의 미래를 찾아
그 의 말들은 어록으로 남았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시련이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없으면 닦아나가면 된다” 중소기업 착취의 냉혹한 대기업 자본가, 권력과의 정경유착 등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그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를 대변하며 한국 근대화 내지 건설 조선 자동차 등 한국 주력산업의 성장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라는 탈냉전의 새로운 시대를 알아보고 남북경협과 북방 경제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열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말과 꿈만 남은듯 하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8년을 지나며 남북관계의 현실은 참담하다. 북방 경제협력의 꿈은 현실에서 사라지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는 구호만 남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에 관한 일화에는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이 나온다. 75년 중동진출도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였고, 현대중공업도 박 대통령이 강권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신화를 떠받들고 있는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 정 명예회장의 꿈이 다시 꺽인 현실을 보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명박근혜' 시대와 또 다시 꺽인 꿈
2007년 1월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구 경북인 신년교례회`
65 년 현대에 입사해 92년 현대건설 회장을 끝으로 정계로 나온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가. 그가 2007년 선거에 이기고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2008년 초 용비어천가가 난무하던 당시의 기사들은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주영을 알면 이명박이 보인다” “이명박의 멘토는 정주영이다” 두사람은 찰떡 궁합이었다 등등. 이 대통령도 그걸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다.그는 대통령이 되기전 <신화는 없다>를 펴냈다. 제목과 달리 초선의원 시절인 1995년에 쓴 이 자서전은 주로 현대그룹에 입사해 정주영 회장과 함께 만들어냈다고 하는 수많은 신화들을 담고 있다. 그 마지막 장의 제목은 ‘북방에 미래가 있다’다. 그는 여기서 현대건설 회장으로서 1989년부터 1991년 구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 진출 협상 과정의 일화를 담았다.
그 는 정 회장과 함께 시베리아의 야쿠티야 공화국을 방문해 헬기를 타고 연일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가스전 석탄광 금광 다이아몬드광을 답사했다. 현지 관리들도 혀를 내두른 강행군이었다. 매장량이 60억톤이나 되는 그곳의 가스전을 개발해 3,800㎞ 떨어진 우리나라에 육로로 들여오는 구상도 했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의 무진장한 자원을 육로를 이용해 들여오면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자원이나 다름 없다고 그는 썼다. 그는 또 고임금에 시달리는 중소기업들의 북한 진출 효과를 거론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해 유럽, 인도, 중동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실크로드 개척도 주장했다.
정주영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 그의 꿈을 이어가려 했던 것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고, 오히려 비슷한 구상과 비전을 얘기했던 대통령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는 아버지를 둔 또 다른 대통령의 시대를 맞이해 정주영 명예회장의 꿈이 꺾이고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있다는 건 분명 아이러니다.
2015년 11월25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의 탄생 100년을 맞아 그를 기억하는 여러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아직 많다. 그러나 금강산 대북사업은 물론이려니와 그가 하려고 했던 시베리아 자원개발 등 북방 협력 사업은 이제 그 기억마저 어렵게 됐다. 시베리아 자원개발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21년만에 부활시켰다는 현대자원개발은 올 초 문을 닫았고, 대북 사업의 모기업인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의 ’워크 아웃’ 등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자원 개발 추진한 현대자원개발 또 다시 문닫아
지 난 2011년 4월 현대중공업은 현대자원개발이라는 회사를 출범시켰다. ‘현대자원개발’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0년 설립한 ‘현대자원개발’의 사명(社名)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현대자원개발은 국내 첫 자원개발 전담기업으로 출범해 시베리아 산림자원과 가스 석유 파이프라인, 석탄 광물 등 자원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야쿠츠크 세계 최대 가스전 개발권을 정부 주도 컨소시엄에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다 현대그룹 내 구조조정으로 98년에 12월에 청산됐다. 현대 중공업은 13년만인 2011년 이 현대자원개발을 다시 출범시키면서 “21년 만에 창업자(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을 잇는 회사가 부활했다는 상징적 의미도 갖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경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려면 목재, 석탄, 석유 등 자원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론이었다. 그의 못다 이룬 꿈을 되살리겠다는 것이었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종합상사의 자원개발업무를 이 현대자원개발로 이관했고 대표이사 사장은 양봉진 현대종합상사 부사장이 맡도록 했다. 또 500억의 자본금 가운데 40% 지분을 현대중공업이 투자한 것을 비롯 현대종합상사,현대미포조선,현대오일뱅크 등 계열사들이 주주로 참여하면서 현대자원개발은 범현대가의 해외 자원 확보에 첨병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당시 자원개발과 관련해 현대중공업과 현대종합상사는 마다가스카르 니켈 광산과 예멘 액화천연가스(LNG) 개발사업, 러시아 연해주 농장(하롤, 미하일로프카 농장 등) 등 세계 8개국에서 광산, 에너지, 농림 등 11개 프로젝트에 총 5억2000만달러를 투자하고 있었다.
10월24일 정주영 탄신 100주년 기념식에서 악수하는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
현대자원개발과 한반도 가스관 사업
하 지만 현대중공업이 현대자원개발을 부활시킨 배경엔 이명박 정부가 자원개발의 기치를 높이든 탓도 있겠지만, 남북러를 연결하는 한반도 가스관 사업이 본격화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1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동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울란우데를 방문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이 가스관 사업 합의를 했으며, 그 뒤 11월엔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 생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러 가스관 사업에 긴밀히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가격 조건 및 북한 통과 가스공급의 안전 보장 등이 쟁점으로 남았지만 남북러 정상간의 합의는 매우 구체적이었다. 이에 따르면 2012년 4월까지 양측이 가격 협상 등을 마무리하고 2013년까지 가스관 노선 설계안을 마련하구요. 2013년부터 3년여의 공사를 거쳐 2017년부터는 한국에 가스 공급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임기말에 접어든 이명박 정권은 이 가스관 사업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열려고 했다. 그러나 가격조건, 가스관의 북한 통과에 대한 우려, 미국산 셰일 가스 우선 도입 그리고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의 갑작스런 사망 등 이 사업은 여러 장애물을 넘지 못한채 사실상 사장되고 말았다.
게다가 2~3년전부터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여파로 불황이 몰아닥치며 조선산업은 천문학적인 적자에 내몰렸다.현대중공업은 2014년 3조 2495억원의 영업손실을 입었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다. 강도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현대자원개발은 그 첫 대상이 되고 말았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지난 2월 현대자원개발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권 사장은 지난해 취임 이후 수익을 내지 못하는 사업을 정리하고 해외법인을 줄이는 등 사업구조를 개편해왔다. 양봉진 현대자원개발 사장은 실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현대자원개발은 20 대 1의 감자로 자본금이 25억원으로 줄어들었다. 또 중공업의 현대자원개발 지분 40%는 현대종합상사로 넘어갔다. 다시 4년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지난 4년여 현대자원개발은 새 프로젝트 발굴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매년 19억 원 가량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북 사업 모기업인 현대그룹 심각한 위기에 몰려
심각한 위기에 처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 대북사업을 추진해 오던 현대그룹은 더 심각하다. 금강산 개성공단 등 대북 사업을 담당한 자회사인 현대아산은 그렇다 하더라도 현대그룹을 지탱해온 현대상선이 난파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현대상선은 2011년부터 북미와 유럽 경제가 침체되면서 물동량이 급감하자 적자의 늪에 빠져들었다. 현대상선은 그룹 전체 매출의 70%을 차지한다. 여기엔 2003년 정몽헌 회장의 자살 뒤 경영권을 이어받은 현정은 회장을 둘러싼 리더쉽 위기의 스캔들도 한 몫을 했다. 현대그룹은 2012년부터 ISMG코리아 대표이사가 현 회장의 그림자 실세로서 현대그룹의 이권 사업을 독식하고 현대그룹 인사 및 경영에도 개입하고 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ISMG 코리아 대표가 100억원대 회삿돈 횡령으로 기소돼 2014년 7월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서 그의 현대그룹 경영 개입등의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경영위기는 계속됐다. 현대증권 매각 등을 통한 구조조정 등 현대그룹의 자구책 마련은 한계에 이르렀고 주가가 곤두박질 치면서 지금 현대상선은 법정관리, 제3자 매각(한진해운과의 합병설), 채권단 떠안기의 3자 택일에 직면해 있다.
정주영의 두가지 꿈
지난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 서강대에서 공연된 연극의 포스터
시베리아 자원개발과 관련해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두가지 꿈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시베리아에서 석유 ·가스를 개발해 이를 파이프 라인으로 한반도로 들여오고, 연해주 등 곡창지대를 확보해 북녘동포에게 쌀을 아낌없이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0년에 만든 회사가 현대자원개발이었다. 무엇보다도 정 명예회장의 대북사업과 시베리아 자원 개발은 출발부터 하나였다. 현대의 대북사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 가운데 하나인 김고중 전 현대아산 부사장은 지난 9월 정주영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1987년말 경 현대종합상사 런던 지사장으로 근무할 때 정 회장으로 들은 얘기에 근거해 이렇게 말했다.
“정주영 회장께서는 1987년부터 방북계획 준비를 진행하면서 1988년말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모스크바에서 면담을 했습니다. 그후 바로 시베리아와 원동지구 진출을 구체적으로 시작했고, 그간 준비했던 첫번째 방북을 1989년 1월에 했습니다”
1989년 1월23일 우리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정 명예회장은 김일성 주석과 만난 뒤 금강산관광,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남북공동진출, 원산 철도차량 공장 합작투자 등 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남북경협은 거의 답보상태에 있었다. 97년까지 정부가 승인한 대북투자는 모두 6건, 그 가운데 실제 생산으로 이어진 사업은 대우의 남포 의류공장과 태창의 금강산 샘물 사업이었다. 그나마 이들 사업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바로 그 때1998년 6월16일 지금은 북쪽으로 넘어간 강원도 통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살 때 아버지의 소 판 돈 70원을 들고 상경한 그가 500마리의 소떼를 실은 트럭 50대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서며 새로운 남북경협의 물꼬를 열었다.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세미나에 참석한 김영희 대기자는 정 명예회장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한 창의적인 기업인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1976년 중동 건설진출의 발판을 닦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 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근대화의 신화 넘어 한국의 미래를 찾아
그 의 말들은 어록으로 남았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시련이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이 없으면 찾고, 찾아도 없으면 닦아나가면 된다” 중소기업 착취의 냉혹한 대기업 자본가, 권력과의 정경유착 등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그는 불굴의 기업가 정신를 대변하며 한국 근대화 내지 건설 조선 자동차 등 한국 주력산업의 성장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라는 탈냉전의 새로운 시대를 알아보고 남북경협과 북방 경제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열어가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말과 꿈만 남은듯 하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8년을 지나며 남북관계의 현실은 참담하다. 북방 경제협력의 꿈은 현실에서 사라지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는 구호만 남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에 관한 일화에는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이 나온다. 75년 중동진출도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였고, 현대중공업도 박 대통령이 강권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신화를 떠받들고 있는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 정 명예회장의 꿈이 다시 꺽인 현실을 보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명박근혜' 시대와 또 다시 꺽인 꿈
2007년 1월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구 경북인 신년교례회`
65 년 현대에 입사해 92년 현대건설 회장을 끝으로 정계로 나온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가. 그가 2007년 선거에 이기고 대통령 당선인 시절인 2008년 초 용비어천가가 난무하던 당시의 기사들은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주영을 알면 이명박이 보인다” “이명박의 멘토는 정주영이다” 두사람은 찰떡 궁합이었다 등등. 이 대통령도 그걸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다.그는 대통령이 되기전 <신화는 없다>를 펴냈다. 제목과 달리 초선의원 시절인 1995년에 쓴 이 자서전은 주로 현대그룹에 입사해 정주영 회장과 함께 만들어냈다고 하는 수많은 신화들을 담고 있다. 그 마지막 장의 제목은 ‘북방에 미래가 있다’다. 그는 여기서 현대건설 회장으로서 1989년부터 1991년 구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 진출 협상 과정의 일화를 담았다.
그 는 정 회장과 함께 시베리아의 야쿠티야 공화국을 방문해 헬기를 타고 연일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가스전 석탄광 금광 다이아몬드광을 답사했다. 현지 관리들도 혀를 내두른 강행군이었다. 매장량이 60억톤이나 되는 그곳의 가스전을 개발해 3,800㎞ 떨어진 우리나라에 육로로 들여오는 구상도 했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의 무진장한 자원을 육로를 이용해 들여오면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자원이나 다름 없다고 그는 썼다. 그는 또 고임금에 시달리는 중소기업들의 북한 진출 효과를 거론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해 유럽, 인도, 중동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실크로드 개척도 주장했다.
정주영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 그의 꿈을 이어가려 했던 것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고, 오히려 비슷한 구상과 비전을 얘기했던 대통령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는 아버지를 둔 또 다른 대통령의 시대를 맞이해 정주영 명예회장의 꿈이 꺾이고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있다는 건 분명 아이러니다.
강태호 선임기자 kank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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