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받는 것’이 용기고 위로다
[김이후의 정확한 위로]
받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어떤 위로
- 수정 2025-10-08 09:14
- 등록 2025-10-08 09:00

나의 막내이모는 중고교 공립교사로 평생을 사셨다.
이모가 80년대 초반 경상남도 하동에서 중학교 교사를 할 때였다. 당시에는 ‘가정방문’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학기 초에 담임 교사가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해 부모와 자녀에 대해 상담을 하는 제도였다. 자녀의 가정환경을 둘러보고 부모님과 직접 소통함으로써 자녀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제도였을 터다.
하지만, 이 제도는 ‘촌지 문제’로 말이 많았다. 돈을 밝히는 교사들은 가난한 집은 방문하지 않고 부잣집만 방문해서 촌지를 받았고, 원칙대로 모든 가정을 방문하는 교사들은 부잣집의 촌지를 거절하느라 힘들었다.
조손가정 할머니의 꼬깃꼬깃 촌지
이모는 모든 가정을 방문했다. 그중에는 산골 오지에 살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하루에 버스가 몇 번 다니지 않는 그 집까지 찾아가는 데 꽤나 고생을 했다. 집에 갔더니 허리가 90도로 꺾인 외할머니가 홀로 맞아주었다. 남편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자식들도 일찌감치 도시로 떠났다고 했다. 그중 한 딸이 몇 년 전 찾아와 외손녀를 맡겨놓고 떠난 뒤 연락도 없다고 했다. 초가집은 거의 허물어져 가고 있었고, 할머니는 얼마 되지 않는 밭을 가꾸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모는 그날 가정방문으로 그 여학생이 왜 걸핏하면 학교를 빠지는지, 왜 학교에서 잠만 자는지, 왜 교사들에게 삐딱하게 구는지, 모두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할머니와 대화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할머니가 허리춤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모 손에 꼭 쥐어주었다. “우리 손녀 좀 제발 잘 부탁합니데이.” 이모 손에 쥐어진 것은 수차례 꼬깃꼬깃하게 접혀 다 닳아버린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이었다. 이모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끝내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 눈빛을 보는데…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 ‘이건 꼭 받아야 하는 돈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지. 평생 교사생활을 하면서 받은 유일한 촌지였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나는 이모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은 어떻게 됐어?” 나는 이모가 그 돈값을 못 했을까봐 너무 불안했다.
“형편이 어려워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취직을 했어. 하지만 이후에 돈을 모아서 대학도 가고 지금은 아주 잘 살고 있지.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서 축하해줬어.”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모가 돈값은 했구나’ 하면서. 하지만 그때의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모가 주머니에 가진 돈을 털어서 할머니에게 주고 왔어도 모자랄 판에 왜 할머니의 돈을 받은 것인지, 또 ‘이 돈은 받아야겠구나’ 하는 그 느낌은 무엇인지, 어떤 돈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인지….
부당해고 복직 노동자가 사준 비싼 밥
그리고 10여년이 지났다.
사회부 기자를 할 때였다. 회사에서 억울하게 부당해고를 당한 뒤 시위와 소송을 이어나가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수년째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회사 앞 길바닥에서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제보를 받고 천막에서 그를 만났을 때,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와 짙게 패인 주름은 그의 지난한 삶을 다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사연을 덤덤히 얘기하던 남자는 결국 생계와 자녀 양육을 오롯이 감내하고 있는 아내 얘기를 하다 눈물을 흘렸다.
다른 언론에서는 남자의 사연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나의 신문사 사회면에는 제법 크게 실렸다. 1달 뒤 그는 법원으로부터 복직 판결을 받았다. 그는 “판사가 기사를 보고 복직 판결을 내린 것 같다”며 거듭 감사 인사를 전하며 밥을 사겠다고 했다. 나는 “기사 때문이 아니라 부당 해고니까 복직 판결이 난 것이고, 밥은 안 사주셔도 되니 얼른 건강이나 회복하길 바란다”며 에둘러 식사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몇 차례 계속된 연락에 결국 식사 자리에 나갔다.
그가 잡아놓은 식당은 가격대가 꽤 높은 장어 식당이었다. 함께 나온 그의 아내는 “여기자님이라서 파스타를 사야 된다고 그렇게 설득했는데도 사회부 기자이기 때문에 보양식을 먹어야 한다며 남편이 끝내 이 식당을 고집했다”며 민망해했다.
그는 “많이 드시라”며 자신 몫으로 나온 장어까지 연신 나에게 밀어주었다. 나는 장어를 거의 먹어본 적도 없었던데다 너무 느끼해서 입맛에도 전혀 맞질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는 맛인 척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생계의 벼랑 끝에 서 있던 한 부부로부터 우적우적 밥을 얻어먹었다. 억지로 꾸역꾸역 삼킨 탓에 체해버렸고, 결국 집에 와서 다 토해내고 말았지만, 그날에서야 이모의 마음을 알게 됐다.
때론 받아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
우리는 대개 ‘주는 것’이 훨씬 더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주는 데 인색하고 받는 데 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위로할 때도 ‘해주는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위로는 내가 받는 쪽으로 자리를 바꿔서, 받아주는 역할을 할 때 완성된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의 지적처럼 ‘받는다는 것이 상대의 마음을 존중하는 가장 용감한 방식’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 윤리학이 ‘정의’와 ‘공정’을 따질 때 윤리철학자 캐럴 길리건의 ‘돌봄 윤리’는 관계와 공감, 맥락을 강조한다. 교사가 촌지를 받고 기자가 비싼 식사를 접대받는 건, 정의와 공정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돌봄 윤리에선 옳고 그름 이전에 상대의 입장에 오롯이 공감하고 그 입장을 수용해주는 것을 훨씬 윤리적 행위로 본다.
사실 우리는 정확히 안다. 상대가 주는 것이 뇌물인지, 촌지인지, 마음인지. 또한 내가 받는 것이 뇌물인지, 촌지인지, 마음인지. 그것이 선을 넘지 않는 마음일 때는 감사히 받아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과 위로가 된다.
#김이후의 정확한 위로는?
필자는 언론사에서 사회부, 문화부 기자로 일한 뒤 지금은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먹고 삽니다. 현재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누구라도 찾아와서 고민을 얘기하면 ‘정확한 위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게 꿈입니다. 인터넷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코너에서 더 많은 ‘정확한 위로’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뉴스 페이지에서는 하이퍼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주소창에 아래 링크를 복사해 붙여넣어 읽을 수 있습니다.)
김이후 afterthislife@nate.com
评论
发表评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