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스테”, 인도에 가다

<작은책> 9월호에 실린 글 -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다 이병진 교수 기사입력: 2012/10/10 [23:25] 최종편집: ⓒ 자주민보 [200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구금된 이병진 교수는 지난 6월부터 월간 <작은책>에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공부하던 중 이북의 형제들을 만나고, 이북을 더 알고 싶어 평양을 방문하게 된 이야기, 국내로 돌아와 강의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된 과정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병진 교수의 글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열망하는 일이 과연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을 일인지 짚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병진 교수와 월간 <작은책>의 양해를 얻어 전재합니다._ 편집자]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나를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끌고 갈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조사실은 일반 사무실과 비슷하다. 나와 수사관은 서로 마주 보고 앉고, 보조 수사관이 옆에서 수사 과정을 기록한다. 사무실 한구석에는 침대와 화장실이 있다. “우리는 당신을 오래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숨기지 말고 다 말해!” 위압적인 말투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수사관들은 나를 추궁하며 태어나면서부터 구속되기 직전까지 나의 삶을 샅샅이 조사했다. 아침 8시에 서울구치소를 나와 밤 9시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정훈장교로 군 복무를 했는데, 수사관들은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서 무슨 기밀을 어떻게 빼냈는지 이야기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하고 함께 근무했던 간부들과 대질 신문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나는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조사에 협조했다. 있는 그대로 사실들을 이야기했다. 진실이 밝혀지면 나의 진심이 드러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절망감에 빠졌다. 그렇게 20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강도 높은 수사를 받다 보니 점점 내가 미쳐 가는 것 같았다. 2인 1조로 여러 수사팀이 번갈아 가며 매일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나는 답에 답을 하면서 내가 간첩이라는 것을 세뇌당했다. 그들은 김영환 씨처럼 전향을 하면 우리 식구가 되어 김문수 씨처럼 국회의원도 할 수 있다고 주입시켰다. 나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내가 누구지?’ 깜깜한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내 삶을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극도의 긴장감과 두려움 속에서 나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내 삶의 나침반을 보고 한결같은 방향으로 이 역경을 뚫고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1971년 3월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보과 형사였는데 그게 경찰이라는 것은 고등학교 때 알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일곱 살 때 외할아버지가 사시던 집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그 기와집이 참 좋았다. 봄에는 제비들이 찾아왔고 겨울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며 놀았다. 집 근처에는 유등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곳은 나의 놀이터였다.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여름에는 헤엄을 치며 물고기도 잡았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쌀가게를 내셨는데, 가끔 내가 쌀 배달을 할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쌀 배달을 갔더니 같은 반 여자 동무네 집이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집이 쌀가게인 게 창피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쌀가게를 하신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자랐다. 어머니는 장남인 나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뒷바라지해 주셨다. 중학교 때는 과학 영재반에 들어갔다. 그때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호기심이 많아 직접 확인을 해야 궁금증이 풀렸다. 언제는 아버지가 큰돈을 들여 오디오를 장만했는데 턴테이블의 LP 판이 돌아가며 소리가 나는 원리가 궁금해서 몰래 뜯어 보다 고장을 낸 일도 있었다. 나에게는 세상천지가 온통 궁금하고 알고 싶은 일들로 가득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수학에 흠뻑 빠졌다. 수수께끼 푸는 것처럼 수학 문제의 답을 찾아내면 기분이 좋았다. 한양대 수학과 김용운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수학사(史)에도 관심이 생겼다. 그 책을 들고 무작정 한양대의 김용운 교수님을 찾아갔다. 잘 이해가 안 되는 점을 질문하기 위해서였는데 김 교수님이 대견해하시며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때 처음으로 수학이 발달했던 고대 인도 문명의 이야기를 듣고 인도에 호기심이 생겼다. 인도에 대해서 관심이 생긴 나는 한국외국어대 인도어과를 찾아갔다. 이정호 교수님이 학과장이었는데 인도어과에서는 무슨 공부를 하냐고 물었더니 무슨 인도 공부냐고 핀잔만 주셨다. 크게 기대하고 갔는데 실망만 했다. 그런데 그날 우연하게 외대 노천극장에서 열변을 토하시는 문익환 목사님 강연을 들었다. 남북통일과 정의를 위해 싸우자는 문익환 목사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민주화 운동과 분단 현실에 어렴풋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아직은 막연하기만 했다. 그렇게 거의 1년 가까이 인도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직접 인도에 가 보자.’ 고1 겨울방학 때 이렇게 결심을 하고 한남동에 있는 인도 대사관을 찾아갔다. 대사관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러 번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인도 영사 슈크라 씨가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의 노력을 들려주고 직접 인도에 가서 공부해 보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은 슈크라 씨는 그러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며 대전 한남대학교 영문과에 교환 교수로 계신 아니마 차크라바티 교수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아니마 차크라바티 교수님은 나를 친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다. 그분을 통해서 말하고 쓰는 것부터 차근차근 영어를 배웠고, 인도 음식과 문화에 대해서 알아 가면서 인도 유학을 실현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차크라바티 교수님에게 2년 동안 영어를 배우면서 나의 영어 실력은 부쩍 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수님의 계약 기간이 끝나 인도로 돌아가야 했다. 교수님은 계속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며 대덕연구단지연구소에 파견 나온 슈부라마니엠 박사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슈부라마니엠 박사 내외는 나이가 지긋한 인정 많은 따뜻한 분들이었다. 처음 내가 인도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는데 슈부라마니엠 박사 내외분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서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날 이후 부모님은 걱정을 더셨는지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으셨다. 인도 대사관의 소개로 인도와 한국의 친선 교류 단체인 한•인문화연구원의 김양식 원장님도 만났다. 원장님은 어린 나이임에도 인도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나를 기특하다며 적극 지지해 주셨는데 그때 그분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인도 유학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분은 여전히 나를 아들처럼 여기며 빨리 감옥에 나와 만날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고등학생의 어린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믿어 주시는 그분의 자애로운 품은 참으로 그립다. 나는 차크라바티 교수님을 뵈러 자주 한남대에 갔는데 우연히 대학생들의 탈춤 공연을 보았다. 너무 재미있었다. 그 후론 한남대에 갈 때마다 민요연구회, 탈춤연구회 동아리 방에 놀러갔다. 형, 누나들과 함께 봉산탈춤도 배우고, 민요도 배우고, 장구도 쳤다. 겨울방학 때는 ‘학습’이라는 것을 했는데 우리의 주류 문화가 일제의 잔재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목원대 노동은 교수님의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나는 민족의식과 역사에 눈을 뜨면서 우리 민족의 분단 모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탈춤반 형들을 따라 ‘창의서점’이라는 사회과학전문서점을 갔다. 나는 그 서점에서 우리의 현실과 모순들을 인식하는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당시 인상 좋은 서점 주인 아저씨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돈이 없을 때는 몇 시간씩 서점에서 책을 읽었는데 간식까지 주셨다. 나는 역사 소설책을 좋아했다. 《태백산맥》과 《녹슬은 해방구》를 통해서 혁명가들의 경이로운 삶과 열정에 푹 빠졌다. ‘창의서점’은 내가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때 창의서점 주인 아저씨는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선병렬 의원인데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나는 자비 유학 시험을 봐야 했다. 영어 한 과목이었는데 자신 있었다. 합격한 뒤 델리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원서를 냈지만 답변이 없었다. 인도에 직접 가 볼 수도 없고 힘든 시간을 초조하게 보냈다. 그러던 1991년 5월, 드디어 델리대학교에서 예비입학증이 왔다. 이 증서를 가지고 가 최종 입학 심사에 통과하면 정식 학생이 된다. 내 꿈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앞으로 인도에 가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탐구심과 모험심으로 설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인도에 가고 싶었다. 출국하는 날, 김포국제공항까지 배웅을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울기만 하셨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많이 배우러 가는 길인데 왜 그렇게 우세요”라고 어머니를 위로해 드렸지만 나는 속으로 처음 구경하는 비행기는 어떤 모습인지, 하늘을 나는 기분은 어떤지, 인도는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 들떠 있었다. 나는 그런 철부지 소년이었다. 6시간을 날아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 5시간을 더 날아서 인디라간디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91년 7월, 새벽 1시,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후끈한 열기가 ‘훅’하고 온몸을 덮친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서로 자기의 택시를 타라고 아우성이다. 공항을 나서는 순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과 막막함이 밀려왔다. 어두컴컴한 델리의 낯선 풍경을 창밖으로 보면서 나는 비로소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 혼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라마스테(안녕하세요).” 택시 기사가 인사말을 건넸지만 나는 형식적으로 답을 했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공항에서 울기만 하시던 어머님 생각에 주르륵 눈물을 흘렀다. “어머니…….” -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출처 : [작은책 http://www.sbook.co.kr/]

评论

此博客中的热门博文

[인터뷰] 강위원 “250만 당원이 소수 팬덤? 대통령은 뭐하러 국민이 뽑나”

‘영일만 유전’ 기자회견, 3대 의혹 커지는데 설명은 ‘허술’

윤석열의 '서초동 권력'이 빚어낸 '대혼돈의 멀티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