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집중제와 중앙집권제의 원칙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88) 2012년 10월 06일 (토) 08:31:56 안재구 tongil@tongilnews.com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민주집중제와 중앙집권제의 원칙 아침 일찍이 밥통과 국통 그리고 찬합과 식기와 수저를 담은 함지를 이고 온 마을 처녀 아가씨와 아주머니의 수고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중식으로 삼베 수건에 주먹밥 한 덩이와 장아찌 한 조각을 산 것 하나씩이었다. 우리들은 오늘 포스트 날이 되어 그 보급내용의 정도에 따라 독립취사가 정해질 것이다. 이 식사가 마을에서 도움을 받는 것으로는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 오늘 과업을 실시하기 전 먼저 오늘 일을 알려주셨다. 지도원 동지이신 박철환 선생님은 포스트 등 연락업무가 있어서 훈련생과 따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훈련생은 어제 행군경로를 복습하고 어제 기록 8시간 반을 될수록 얼마만큼이라도 줄이도록 하자고 했다. 이에 대해 훈련생들도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오후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우리들 생활에 필요한 생활규약을 정하자고 했다. 특히 우리들의 생활이 특수하고 새로운 만큼 거기에 따라 여러 가지 새로운 명칭도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예컨대 훈련생의 호칭, 훈련생이 박철환 선생님에 대한 호칭 등도 있고, 불침번규칙, 학습시간의 시작과 마침에서 절도 있는 절차 등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들 모두가 전혀 새로운 일이라 우리들이 스스로 창조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물론 이런 규칙⋅규약을 일시에 모두 정한다는 것은 어려우나 우선 필요한 것부터 정하고 생활하고 학습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정하도록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여러분과 함께 총의로서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8시에는 식사를 마치고 시냇가에서 그릇을 부시고 행군치장을 마친 다음, 마당에 나와 자연 줄을 맞추어 정렬을 했다. 지도원 동지도 준비를 마치고 마당에 나오셨다. 지도원 동지는 일렬로 선 우리들 5명을 죽 훑어보시고선 가장 왼편에, 우리 쪽에선 오른편에 있는 동무에게 시선을 주고 턱짓으로 눈치를 주자 그 동무는 자연스레 거수경례를 하고, 또한 자연스레 집합보고를 했다. “지도원 동지, 우리들 훈련생 5명, 전원 집합했습니다.” 지도원 동지도 거수경례로 인사를 받고, “동무들, 수고했소. 그럼 오늘 우리 과업을 열성적으로 시작합시다. 끝!” 이러자 보고하던 동무는 또한 자연스레, “지도원 동지께, 전체, 경례!” 이런 절차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자 지도원 동지 박철환 선생님은 아주 만족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어디서 훈련을 받은 것처럼 조금도 어색한 데가 없이 척척 맞게 잘합니다.” 지도원 동지는 볏짚과 칡넝쿨과 삼끈으로 만든 큼직한 망태를 매고 나오시더니, 우리들을 향해 손을 흔드시고, “그럼 열심히 한바탕 달리고 오시오!” 하시더니 진검다리 돌을 딛으시고 남쪽 능선으로 올라가시기 시작하자 우리들도 외쪽으로 굽어 시냇물 흐르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우리들은 내리막길은 달리고, 평지 길에서는 숨 고루고, 오르막길은 팔을 좌우로 흔들면서 고개를 꾸벅꾸벅 주억거리면서 속도를 냈다. 긴 내리막길은 가지산 정상에서 아랫재(운문재)까지인데 이는 돌아올 때는 긴 오르막길이다. 이 내리막길은 자연히 몸무게중심을 낮게 잡아야 하고 그러면 발끝에 몸무게가 실리는데 이 때문에 다리가 피로해진다. 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양쪽 다리를 교대 교대로 해서 한쪽 다리가 힘을 쓸 때는 한쪽 다리는 쉬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허리를 좌우로 돌리면서 내리막길을 요령 있게 속도를 유리하면서 미끄러지듯이 달려 내려가는 것이다. 이때 잘못하면 엉덩방아를 찧어 넘어지는 수도 있다. 세게 넘어지면 그 반동으로 몸 전체가 굴을 수도 있어 크게 부상을 입게 된다. 이를 위해 평소에 풀이 무성한 경사면을 찾아 연습을 미리 해두어야 한다. 이 장소로는 천황산의 갈대숲의 경사면이 아주 좋다. 뒤에 이 갈대숲에서 지도원 동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낮을 이런 연습을 했다. 무릉동 아지트에서 8시 30분에 출발한 우리들은 11시 반 쯤에서 가지산에 도착했고 「아랫재」에 12시 좀 넘어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었다. 거리는 약 17킬로미터이다. 주먹밥은 반 넘어 옥수수인데 수수, 차조, 수수에다 호박오가리도 있고 밤 같은 게 씹히고 전체적으로 구수한데 단맛이 나는 것이다. 거기에다 만들어주신 무릉동 아주머니들의 따뜻한 손맛도 들어있어, 그것이 온 몸을 덮어주는 듯하다. 물을 아끼기 위해 밥을 오래도록 씹어 침이 많이 나도록 했고 나의 수통의 물을 입을 헹구는 정도로 마셔 수통의 물의 3분의 1 정도를 비상용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2, 30분 쯤 쉬고선 운문산으로 치올라갔는데 정상 가까이 남면에는 부스러기 너럭바위여서 20여 미터를 바위틈을 딛고 올라갔더니 정상은 펑퍼짐한 풀밭언덕이었다. 마침 날씨가 봄날처럼 화창해서 재 아래 남명리(南冥里) 마을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곧바로 귀로에 들었다. 「아랫재」로 내리고서는 시간을 당기려고 허겁지겁 헐떡이면서 가지산의 정상으로 올라 쉬지도 않고 석남재로 내렸고, 어제 점심 때의 우물을 찾아 그 동안의 목마름을 풀었다. 그리고선 바로 출발했는데 뱃속의 물이 출렁거리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줄곧 거의 평지길인 사자평고원 길을 달리듯이 걸었다. 마침내 무릉동 아지트 마을 초당에 도착했다. 오후 4시 반이었다. 초당 마당을 출발한지 8시간 만이었다. 그처럼 열심히 달리듯이 행군했는데 겨우 어제보다 30분 줄였던 것이다. 우리들이 초당 마당에 들어서자 박철환 선생님은 마당 한쪽에서 장작을 패고 계셨다. 선생님은 목에 걸친 무명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시며, “동무들, 아무 탈 없이 힘찬 모습으로 들어오니 참 반갑소. 수고 많이 했소. 자 그러면 모두 개울가로 갑시다. 땀 씻고 푹 쉬도록 합시다.” 개울가로 나와 발을 벗고 찬물에 발을 담구어 대강 씻었다. 돌팍에 수건을 깔고 발을 딛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나에 작은 말소리로 이야기하셨다. “나도 오늘 포스트에도 갔고, 또 오랜만에 삼거까지 가서 덕생이 동무를 데리고 왔던 그 동무를 만났소. 덕생이 동무에게 안부 전하라고 하더군.” “아, 그래요. 아저씨, 아주머니 두 분 다 건강하시지요? 그리고 아기도요?” “아, 그 뺨이 발간 아기 말이지?” “빰이 빨간 게 얼마나 예쁘다고.” “그래, 모두 다 잘 있어요.” 헤어진 지 며칠도 안 되는데 한 달이나 넘는 것 같았다. 참 시간이란 이상했다. 마치 고무줄처럼 때로는 늘어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당겨지기도 하고..... 시간이란 시계처럼 짤각짤각 새김질하는 정확한 것만은 아니고 어떤 사건에 따라 느려빠지기도 하고, 8.15 왜놈 망할 때처럼 당겨진 고무줄을 탁 놓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닥쳐오기도 하는, 그래서 그때부터 화살처럼 시간이 날아 가버리기도 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이런 생각으로 우두커니 서있자, “덕생이, 무슨 생각을 하시오? 물이 아직 찬데, 빨리 발 닦고 나가지 않고.... 감기가 발로부터 들면 정말 큰일 납니다.” 선생님은 나를 손으로 밀면서 하시는 말씀에 그만 생각에서 되돌아왔다. 모두 제 각기 방으로 들어가 주변 정리가 끝나자 마당으로 나왔다. 지도원 선생님은 저녁식사시간이 다 되어간다고 하시면서 “오늘 아침에 토론하자는 과제는 저녁식사 후에 토론하기로 하고, 모두 그 동안 쉬는 것이 어떻소?” 그러자 모두 와! 하고 좋아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정리한 다음 모두 지도원 선생님이 계시는 초당에 모였다. 우리들이 다모이자 지도원 선생님이 그 방의 한 구석에 덮어둔 담요를 들쳐 내자 거기에는 일본군용의 반합과 수통을 띠로 엮어놓은 것이 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풀색 주머니와 자루 같은 것이 있으며, 또 풀색 학생모자 같은 베로 만든 모자도 있었다. 그리고 적갈색 정미소 벨트 쪼가리 같은 것도 있었다. “여기에서 우선 다급하게 필요한 것만 나누어주겠습니다. 우선 반합과 수통 그리고 수저를 나누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들 5명에게 하나 씩 나누어주셨다. 다음에는 자루에 이리저이 끈을 기다랗게 붙인 것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이 배낭이란다. 배낭 아가리에 자루를 오므려 닫을 수 있는 끈을 두 겹으로 꿰어 양 옆으로 기다랗게 두 가닥 씩 길게 나와 있다. 선생님은 자루 안에 무언가 넣은 것을 하나 가지고 두 닥 씩 나온 것으로 양 쪽을 잡아당겨 자루 아가리를 오므려 닫고, 그 끈을 이번에는 자루 아랫부분 양쪽 바깥에 붙어있는 끈과 일단 묶어서 자루를 등에 메는 두 가닥의 멜빵으로 만들어 등에 짊어지자 모두 알았다는 듯이 ‘아앙’ 하고 소리를 낸다. 다음에는 풀색 베로, 마치 축구선수 정강이뼈(촛대뼈)를 보호하는 보호대에서 대를 빼고 모래를 넣은 것과 같은 것을 한 켜래 씩 주었다. 이것은 행군할 때 다리에 묶어 다리를 무겁게 해서 다리 힘을 올린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정미소 벨트 쪼가리 같은 것인데, 이것은 돗바늘과 밀초 그리고 신기리용 송곳과 굵은 실 한 타래로 신을 기워서 만들라는 것이다. 해방 직후 왜놈들이 하던 운동화나 구두 공장이 없어지고 가죽이 귀해지자 자동차 폐타이어의 속 부분을 오려내어 그것으로 신을 기워서 팔았다. 이 제작방법은 지도원 선생님이 자신 있게 나에게 자랑한 바가 있다. 나중에 지도원 선생의 가르침으로 모두 자기 신발을 한 켜래 씩 만들었는데, 이 신을 신을 때는 두터운 버선을 신고 신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로는 모두 미군용 구두를 신고 있어서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만, 언젠가 유격지구가 포위당할 때는 이렇게 만든 신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유격대훈련용 장비를 나누어 받자 모두 얼굴에 긴장감이 돋았다. 장비를 분배받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아침에 제기된 상호 호칭문제와 생활에서 생기는 규칙⋅규약문제에 관해 토의했다. 먼저 지도원 선생님이 우리들에게서 생기는 문제에 대한 처리는 성원의 의견을 전적으로 반영하는 민주주의원칙에 의해 결정한다는 것, 이와 같이해서 결정된 사실은 정당한 토의를 거치지 않고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 상부기관에서 결정하는 문제는 반드시 하부와 연관되는 경우는, 관계되는 하부에서 반드시 토의를 거쳐 제기시킬 것. 이것은 민주주의를 철저히 관철시킨다는 당의 방침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이와 같이 민주주의적 원치 하에서 결의된 사항은 중앙집중적 권력에 의해서 집행된다는 것이다. 중앙집중적 권력이라는 것은, 하부는 상부의 지도에 복종할 것과 소수는 다수에 복종할 것이다. 민주집중제와 중앙집중제는, 모든 정책은 민중으로부터 올라오고 그 정책은 인민의 이름으로, 하나의 강력한 권력으로 집행한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들은 이 방침에 대해 바로 인식하고 우리들의 모든 결정과 결의는 이를 토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원 동지는 이와 같이 해설하시고, 우리들의 당면 문제인 성원 간 호칭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여러분들이 나를 호칭할 때 여러 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일 때는 여러 호칭도 좋습니다만 어떤 의전적인 형식을 가져야 할 때는 일정한 호칭이 욕구됩니다. 지금 부르고 있는 것으로 ‘지도원 동지’, ‘지도원 선생님’, 그냥 ‘선생님’ 등이 있습니다. 호칭이란 때와 장소에 따라 거기에 알맞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적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군사적 투쟁의 첨예한 속에 있습니다. 뒤의 두 가지 선생이라는 호칭은 서로 간에 정감은 생길지는 몰라도 그런 정감으로 엄중한 규율과 규약으로 제약된 조직 속에 있다는 의지를 나타내기에는 모자라는 듯합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지도원 동지’로 호칭할 것을 제안 합니다. 그리고 여러 동무들은 정식호칭으로는 ‘간부훈련생’ 약칭으로는 ‘훈련생’으로 제안합니다. 다른 경우에는 너무 경색하게 하나로 정하는 것은 조직을 경직하도록 할 우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우리 조직의 의의에서 너무 멀지 않는 한 구태여 제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박수를 치고 찬성했다. 이의 없이 찬성, 결의되었다. 그밖에 ‘집합보고’, ‘명령에 대한 복창’ 등 몇 가지가 제기 되었는데 이를 형식화하기로 하고 이에 대한 안을 작성하여 다음 회의 때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립취사를 결의했는데 취사당번은 불침당번 다음 날에 맡기로 했다. 안재구의 다른기사 보기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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