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5.24' 흔들고 남북관계 변화시키나

<초점> 한.러 공동성명의 의미와 전망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승인 2013.11.14 18:35:40 러시아가 남북관계 변화에 일조하고 있다. 특히 경제협력 분야를 중심으로 러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를 움직여 3년간 유지해온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 근간을 흔드는 모양새다.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러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특히, 한국기업들이 나진-하산 물류협력사업(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주목받고 있다. 이번 양국 정상 공동성명에는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유라시아의 협력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위한 여건의 조성, 특히 지역 안정 강화에 대한 희망"을 표시했다. 이는 북한과 러시아가 진행 중인 경제협력 사업에 국내 기업의 참여를 적극 장려, 남북.러 3각 경제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 번영에 기여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여기에는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우리 정부가 단행한 '5.24조치'라는 대북정책의 근본틀이 걸려있다. 이번 MOU 체결로 국내 기업들의 대북투자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5.24조치'는 사실상 무력화됐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가 유지해 온 '5.24조치'를 흔든 셈이다. '5.24조치'는 3년간 소극적인 대북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모든 대북지원과 대북투자를 가로막았다. 특히 남북경협에 있어, 북한 내륙진출 기업들이 진행한 사업을 중단시켰고, 국내 대기업의 제3국 법인을 활용한 우회투자 등 간접투자까지도 허용하지 않았다. 개성공단의 경우도 '5.24조치'를 이유로 2.3단계 확대개발과 신규투자가 진행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한.러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국내 대기업이 북.러가 진행 중인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고, 국내 기업의 러시아 투자라는 명목이지만 사실상 대북투자가 재개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5.24조치' 해제 신호탄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를 의식한 듯, 통일부는 완강하게 버텼던 '5.24조치' 고수 입장을 이번 경우에 한해서 "국익차원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이번처럼 간접투자 방식의 참여는 '5.24조치'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정부가 이번 사안에만 예외조항을 뒀지만, 다른 기업들이 형평성을 지적하며 대북투자 허용 목소리를 높이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하다. 또한 이들 기업 관계자들의 방북을 지원하겠다는 통일부의 방침에 다른 경협기업들의 방북 신청을 불허할 명분도 약화될 수 밖에 없다. 하나의 구멍이 강둑을 무너뜨리듯, 결국 정부 스스로 '5.24조치'를 허물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셈이다. 그렇기에 이번 한.러 공동성명을 통해 러시아 정부가 우리 정부가 유지해온 '5.24조치'를 무장해제시켜 남북관계, 나아가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안보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5.24조치'가 나온 천안함 사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그 동안 한국정부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2010년 당시 천안함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 폭발은 접촉에 의하지 않은 함선 하부의 수중폭발로 분류된다"고 한국 민.군 합동조사단의 의견과 일치했지만, 북한 어뢰에 의한 침몰이라는 발표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즉, 러시아는 북한 소행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우리 정부가 발표한 '5.24조치'에 러시아 정부가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북한을 경유하는 천연가스 도입사업을 적극적으로 타진했지만, 우리 정부가 '5.24조치' 등의 이유로 소극적 태도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5.24조치'를 '눈엣 가시'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정부가 '나진-하산 프로젝트' MOU 체결을 이끌어 낸 것은 상당한 목적의식성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왜 이 시점에서 대 한반도 정책에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는 것일까? 이는 푸틴의 귀환과 무관하지 않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집권 당시 '러시아연방 대외정책개념'으로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동등한 참여, △남북한과 균형잡힌 관계 유지 등 대 한반도 정책을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집권 이후, 러시아의 목소리가 다소 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러 관계도 이명박 정부의 미국 중심 정책으로 소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강한 러시아'를 표방한 푸틴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실제 지난 9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을 향해 미국의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 반대 입장을 끌어냄으로써 미국의 독불장군 행보를 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G20 계기 한.러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남-북-러 가스관과 철도 연결 문제 등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았을 것이고,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한.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10월 18일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발표하고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 구상을 다시 꺼냈다. 또한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미.일과 북.중 양대 구도가 형성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빠질 수 없다는 내부 목소리가 불거졌을 가능성이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한.러 공동성명에서 "평양의 독자적인 핵.미사일 능력 구축 노선을 용인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핵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없다"고 못박았다. 이어 2005년 9.19공동성명을 언급, "6자회담 참가국들과 공동으로 회담 재개의 여건 조성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최근 6자회담 재개를 둘러싸고 러시아 정부가 스스로 소외되지 않겠다는 천명인 셈이다. 여기서 러시아가 '평양'을 지목한 것은 NPT 상 공식적 핵보유국이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P5) 일원으로서의 기본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6자회담 재개'를 언급한 것은 6자회담 틀 내 '동북아평화안보체제' 실무그룹 의장국으로서 제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는 북핵을 둘러싼 한.미.일 공조를 막고, 북한 이슈를 쥐락펴락하는 중국과 달리 러시아가 독자적으로 대 한반도 문제 나아가 동북아 지역 안보에 개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이번 한.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해 '공감'을 표했을 뿐 '지지'하지 않았다. 대신 "남북관계 정상화와 역내 안보 및 안정의 중요한 조건인 한반도 신뢰 구축 노력을 적극 지지한다"고 언급했다. 여기에는 1991년 구 소련에 제공된 15억 달러가 넘는 차관이 현재 8억달러가 남았고, 한국정부가 KAMD(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 구축의 일환으로 러시아의 장거리 탐지레이더 기술을 도입해 남은 차관을 탕감할 의사를 타진, 러시아가 한국에 아쉬울 것 없다는 자신감도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이와 함께, 러시아가 북한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겠다는 의지도 한 몫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00년 기존 동맹을 강화한 '조.러 친선선린 및 협조조약'을 체결하고, 지난 2월 대선 후보시절에는 "북한 체제를 흔들리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한반도의 안정을 강조했다. 이는 극동시베리아 지역 개발을 위해 남북이 중요한 거점이 된다는 경제적 측면과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 지역 불안정은 러시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안보적 관점 등이 전략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있다. 여인곤 통일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러시아의 신 동진정책, 즉 시베리아 극동지역 개발을 위해 한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려는 목적이 크다"며 "그리고 북한과의 경협을 통해 김정은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즉, '강한 러시아'를 표방한 푸틴 대통령의 귀환으로 동북아 질서가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한.러 정상회담에서 '나진-하산 프로젝트' 참여라는 표면적 성과는 '5.24조치' 무력화라는 의미로 재해석되고, 이는 나아가 남북관계가 새롭게 재정립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그리고 북핵을 둘러싼 그 동안 한.미.일과 북.중 구도에 러시아가 다시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북한으로서는 러시아라는 우군을 얻고, 한.미.일은 러시아라는 또 다른 강자를 상대해야할 입장에 놓여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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