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일, '납북자 최종적 해결' vs '제재 최종적 해제'
2002년 평양선언과 2014년 스톡홀름 합의
김치관 기자 | ckkim@tong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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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29 22: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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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신 남방정책' 시작되나
북한이 일본 카드를 먼저 꺼내들었다. 미국과 한국이 대북 압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이, 의외로 신군국주의화 추진으로 비판받고 있던 아베 정권과 29일 일본인 납치문제를 고리로 대북제재 해제를 이끌어낸 것이다.
미국이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3각 군사동맹 완성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아베 정권이 한국의 박근혜 정권이 아닌 북한 김정은 정권과 먼저 합의를 내놓은 점도 흥미롭다.
일본의 한 전문가는 “북한의 ‘신 남방정책’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며 “북한은 중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시작하는 계기를 일본에서 찾은 것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을 두고 미.일과 중국이 끌어당기기를 하고 있는 형국에서 북한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기대는 대신 일본과 손잡는 전략적 선택을 함으로써 중국과 등거리 외교를 편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중국이 아닌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마지막 국장급 협의를 진행한 것도 중국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북.일 평양선언 3차례 언급, 수준은 달라
이날 북.일 간의 합의 발표는 지난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북한을 전격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일 평양선언을 내놓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당시 허를 찔린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부랴부랴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북한에 보내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꼬투리 삼아 평양선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같은 쓰라린 과거를 잘 알고 있는 탓에 이날 북측은 일본과 동시에 협상결과를 발표하면서 세 차례나 ‘조(북)일평화선언’을 언급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회담에서 쌍방은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문제를 해결하며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진지한 협의를 진행하였다”고 밝히는가 하면 “일본측은 공화국(북)측과 함께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문제를 해결하며 국교정상화를 실현할 의사를 다시금 밝히고 조일 두 나라사이의 신뢰조성과 관계개선을 위한 문제해결에 성실히 림하기로 하였다”고 의지를 비치기도 했다. 또한 “일본측은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재일조선인들의 지위문제를 성실히 협의해나가기로 하였다”고도 했다.
북.일 평양선언은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필두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과 및 경제협력 실시, ‘납북자 문제’(일본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관련된 현안문제)에 대한 북한의 유감 표명 및 재발방지 약속을 담았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움)를 연장시킨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일 평양선언은 양국 정상회담을 거쳐 나온 합의인데다 국교정상화와 미사일 문제까지 포괄하는 최고 수준의 합의인데 비해, 이번 합의는 국장급 협의를 거쳐 납치자 문제와 제재 해제라는 제한된 수준의 합의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아베 총리 직접 발표.. 한국, 발표 직전에야 통보받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일본은 이날 오후 6시 30분 평양과 도쿄에서 합의 사실을 동시에 발표했고, 특히 일본은 아베 수상이 관계 장관들과 각료회의를 가진 뒤 직접 발표에 나서는 등 각별히 신경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 전문가는 “일본은 북한 카드를 내놓음으로써 동북아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다는 입지를 과시할 수 있다”며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과의 대결에 앞서 근린국가와의 관계해결이라는 점”이라고 짚었다.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한국과 중국은 물론 북한까지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총력전이 예상되는 일본으로서는 북한이라는 근린국가와의 불편한 대치관계를 어느 정도 다독여 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양국의 공식 발표가 나오자 일본 <교도통신>은 즉각 해설 기사를 통해 “과거에 (납북자) 재조사 합의가 뒤집혀진 경우가 있어 북조선(북한)측이 어떻게 나올 지 읽기 어렵다. 실제로 진전이 있을 지 예측은 불허다”라고 평가했으며, 미국과 한국이 불신감을 가질 수 있다며 “아베 수상은 납치문제의 진전과 동시에 미.한과의 공조라는 두 가지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 외교부는 고심 끝에 이날 자정이 다 돼서야 “우리 정부는 인도적 견지에서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도 “북한 비핵화 문제에 관해서는 한.미.일 3국 모두 국제적 공조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공동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바, 이러한 맥락에서 일.북 협의 동향을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라고 경계심을 내비쳤다.
정부는 이날 일본측의 공식 발표 직전 외교 경로를 통해 발표내용을 통보받았고, 30일 추가 설명이 있을 예정이라고 밝혀 일본 정부가 한국에 사전 협의나 설명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생존자 발견 경우 귀국” 폭발력 커
어쨌든 결국 이번 북.일 합의의 실질적 진전 여부는 당사자인 북.일 양국의 의지에 달려있다. 특히 이날 북측이 밝힌 합의 내용 중 “생존자가 발견되는 경우 귀국시키는 방향에서 거취문제를 협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북한은 지난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에서 납북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시인하고 사과하면서 재발방지를 약속했고, 고이즈미 총리 방북 후 귀환을 전제로 5명의 납치 일본인들의 일시 귀국을 허용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남북자가 있다며 해결을 요구해왔다.
만약, 이번 합의에 따라 일본인 납치자 중 생존자가 단 한 명이라도 발견되어 귀국할 경우 아베 총리는 개선장군이 될 수 있고, 북.일 관계의 진전도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있다.
이날 발표한 합의 내용 중 “(북이) 종래의 립장은 있지만 포괄적이며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하여 최종적으로 일본인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의사를 표명하였다”는 대목과 “일본측은 현재 독자적으로 취하고있는 대조선(대북) 제재조치를 최종적으로 해제할 의사를 표명하였다”는 대목이 가볍게 여겨지지만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양측이 모두 상대방의 핵심적 요구사항을 ‘최종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 핵심적 요구사항이 풀릴 경우 “회담에서 쌍방은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문제를 해결하며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진지한 협의를 진행하였다”는 발표가 수사적 표현만은 아닐 수도 있다.
‘일본인에 관한 모든 문제 해결’과 ‘대조선 제재조치 최종적 해제’
북.미 관계나 남북 관계, 한.일 관계 등이 모두 악화된 상황에서 북.일 관계 만 홀로 순항하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결국 북한이 꺼내든 북.일 카드는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 개선을 유인하기 위한 지렛대인 셈이다.
그렇다고 북.일 간의 합의가 보여주기 위한 쇼이거나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김정은 정권이 등장한 2012년 이후, 중요한 협의만 하더라도 그해 8월 베이징 북.일 적십자회담과 과장급 협의를 시작으로 11월 울란바토르 국장급 협의, 2013년 이지마 이사오 총리 자문역 방북, 2014년 3월 베이징 국장급 협의, 그리고 이번 스톡홀름 국장급 협의까지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온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의 실패를 교훈삼아 북한과 일본 모두 합의사항 이행을 위해 특별히 힘을 쏟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간 한.미 양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을 지켜보는 것보다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내외의 충고를 귀가 아프게 들었고, 중국도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와 오바마 정부가 아베 정부의 대북 접근을 말리기보다는 이를 대북 관계개선의 계기로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라는 충고 역시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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