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단에서도 어김없는 반북의 칼바람


<어떤 여행>고성의 절경 ‘화진포의 성’을 찾아서
한성 자유기고가 
기사입력: 2014/12/31 [17:23]  최종편집: ⓒ 자주민보

▲화진포의 성에서 내려다 본 화진포 호수     © 한성 자유기고가

우리가 춘천교소도에서 정설교시인을 접견하고 난뒤 북으로, 북으로 달려 마지막 닿은 곳은 고성이었다.
남한에서는 최북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더 정확히는 화진포였다. 

그곳에 호수가 있었다.
동해안 최대의 자연호수였다. 둘레가 무려 16km나 된다. 주변으로 넓은 갈대밭 그리고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있다. 특히 이중에 넓은 갈대밭은 고니나 청둥오리 등 철새들이 노니는 곳이다. 때가 되면 수천마리가 날아든다고 했다. 

화진포 호수 말고도 화진포 해수욕장도 빼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모래 빛이 유독 밝았다. 더구나 그 촉감은 이루말 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모나즈(monaz)성분이 많아서라고 했다.

주변경관이 뛰어난 절경 화진포. 그래서 갔던 화진포가 그러나 우리를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내보여준 것은 칼 바람이었다. 

바람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경험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람의 세기도 세기였지만 몸에 와 닿은 바람의 촉감은 바다의 찬 공기를 그대로 안겨주는 것이었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라는 표현이 그리 적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화진포 호수 둘레에 서 있는 소나무들은 한결 같이 키가 작고 낮았다. 바람과 함께 사는 방식일 것이었다. 


바람에 함께 사는 방식.
그 바람을 세태라고 할 때 그렇게 사는 방식은 ‘화진포 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칼바람을 뚫고 ‘화진포의 성’을 향해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추운 날이기는 했지만 여행객은 적지가 않았다. 


고성 화진포의 명물로 알려져 있는 ‘화진포의 성’은 일본강점기인 1938년 만들어졌다. 독일건축가인 웨버가 지었다. 외국인 휴양촌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예배당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절경인 화진포의 해안절벽 위 송림 속에 있다고 하여 ‘화진포의 성’이라고 했다.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1948년 이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묵고 간 적이 있어서라고 했다. 

6.25전쟁 중 건물이 훼손되었으나 64년 재건축 과정을 거쳐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999년부터 안보전시관이 되었다. 

필자가 ‘화진포의 성’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중반이었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시기였다.
안보전시관이라고는 했지만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듯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흔적이 역력했었다. 북한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알려주겠다는 그런 기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화진포의 성’은 그때와는 너무 달라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반북교육장으로 전변되어 있었던 것이다. 

‘북괴’라는 단어가 벽 곳곳에 난무하고 있었다. 자주성이 없는 나라에 대해 흔히 쓰는 표현이 괴뢰정부이다. 북한이 괴뢰정부라면 북한이 그 어느 나라보다 자주성을 중시 여긴다고 주장하는 것과의 관계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벽보에는 6.25전쟁을 설명하면서 북한이 지금도 남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그리도 익숙했던 단어와 문장들을 화진포의 칼바람 속에서 확인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없었던 영상관에서는 탈북자가 나와 북한을 연신 시끄럽게 소리 높혀 설명하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날카롭게 뻗어있는 적대의식     © 한성 자유기고가

반북의 바람은 남한의 최북단에서도 그렇게 어김없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였던 것일까.
우리는 갑작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광화문을 떠올렸다.
그랬다. 우리가 다시 가야할 곳은 광화문이었다. 칼바람을 맞으면서 그 칼바람을 눅잦히고 말 광화문을 향해 우리는 차를 향해 걸어내려왔다.
그랬다. 갈 곳은 광화문이었다.  

▲2014년 12월 30일     © 한성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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