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늬와 아람, 그리고 밤송이

 달곰한 우리말

보늬와 아람, 그리고 밤송이

입력
 
2024.09.04 18:30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쩍 벌어진 밤송이 속 영근 아람들. 아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쩍 벌어진 밤송이 속 영근 아람들. 아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파란 하늘 아래 쩍 벌어진 밤송이가 웃고 있다. 휙, 한 줄기 바람에 '툭툭툭!' 알밤이 쏟아진다. 토실토실 영근 알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계절은 이름을 앞세우지 않는다. 밤 떨어지는 소리 뒤로 조용히 새 계절이 왔다. 가을이다.

바람이 선선해지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오른다. 보늬 밤 조림과 막걸리를 만들어 친구들과 나눠 먹는 주인공 혜원. 도시에서 그는 지치고 느른했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온 후, 모처럼 여유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은 늘 보늬처럼 떨떠름하다.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집 나간 엄마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마음속 보늬를 벗겨내고 환하게 웃기를 바랐다. 영화를 세 번째 볼 땐 그를 따라서 나도 보늬 밤 조림을 만들었다.

보늬는 밤, 도토리, 호두 등의 열매를 감싸고 있는 속껍질을 일컫는다. 고운 우리말이다. 딱딱한 겉껍질을 까면 드러나는 얇은 껍질로, 떫은맛이 난다. 보늬 밤 조림은 알맹이를 감싼 보늬를 벗겨 내지 않고 조려서 씹는 맛이 특별하고 몸에도 좋다. 별명이 보늬인 친구가 있다. 툭하면 쓴소리를 하는데, 이상하게 밉지 않다. 그는 좀 더 나이가 들면 보늬를 호로 쓰겠다고 한다. 말맛이 좋은 보늬. 알밤을 먹다가 가슬가슬한 속껍질이 보이면 "보늬" 하고 소리 내 보시라.

밤알을 싸고 있는 두꺼운 겉껍데기는 밤송이다. 밤이 여물면 네 갈래로 벌어져 밤알이 떨어진다. 꽃송이, 눈송이처럼 부드러운 느낌의 '송이'가 붙었지만 조심조심 다뤄야 한다. 혹시 산길을 걷다 가시 돋친 밤송이에 맞아 본 적이 있는지? 밤송이를 까다가 가시에 찔려 본 적이 있는지? 경험한 사람이라면 밤송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 게다.

밤은 순하다. 제대로 영글면 누군가 나무를 흔들지 않아도 혼자 툭! 하고 떨어진다. 밤송이째 떨어져도 알밤이 고개를 쏙 내밀기도 한다. 밤이나 상수리 등이 잘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혹은 그런 열매는 '아람'이다. 밤송이에서 빠지거나 떨어진 밤톨인 알밤과 비슷한 말이다.

발음이 비슷한 '아름'은 밤하곤 관련이 없다. 두 팔을 둥글게 모아서 만든 둘레다. '두 아름 되는 느티나무'처럼 나무 둘레의 길이를 재는 단위로 쓰인다. ‘한 아름의 꽃’은 주는 이의 팔 둘레보단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진다.

누구나 마음속에 보늬 하나쯤 있을 게다. 올가을엔 그 떫은 것을 벗겨내길 바란다. 벗겨내기 힘들다면 설탕에 조려도 좋겠다. 시간이 단맛으로 바꿔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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