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부의장 출신’ 정진석 비서실장은 왜 국회에 등 돌렸나
기자이승준
수정 2024-09-17 09:14등록 2024-09-17 09:00
“그거는 정진석 실장의 눈물겨운 대통령 실드고요. (…) 왜냐하면 본인이 국회 부의장을 지내신 분이고 당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하신 분인데 의회의 개원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 만일 국회 부의장의 위치에서 봤을 때 얼마나 모욕적이고 협치의 의지가 안 보이는 일일까(…) 대통령 욕 조금이라도 덜 먹게 본인이 총대 메신 거다. 정진석 실장님이 어떤 분인데 그걸 그렇게 (대통령께) 조언했겠습니까?”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5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
지난 4일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실 직원 조회에서 한 말에 대한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의 평가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일 ‘22대 국회 개원식’에 불참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자 정 실장은 직원들에게 “대통령을 향한 조롱과 야유,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국회에 가서 대통령이 곤욕을 치르고 오시라고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느냐”며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참석을 만류했다는 취지로 설명했습니다. 5선의 국회 부의장 출신인 비서실장의 발언으로는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왔죠.
윤 대통령이 4·10 총선 여당 참패 뒤 국정 쇄신 차원에서 4월22일 임명한 정 실장에 대한 여야의 평가는 “여당은 물론 야당과도 소통해가려는 절박한 의지”(국민의힘)와 “친윤 핵심인사로 국정 전환과 여야 협치는 어불성설”(더불어민주당)로 엇갈렸습니다. 다만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 뒤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뒤 발탁한 인사라 관료 출신 김대기·이관섭 전 비서실장과 다른 ‘정무형 비서실장’이 될 것이라는 대체적인 평가가 나왔습니다.
정 실장의 약 5개월 동안의 행보는 ‘소통 의지’에서 ‘어불성설’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듯합니다. 이는 총선 패배 이후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고스란히 대변합니다.
용산 ‘군기’ 잡고, 윤 대통령 이재명·한동훈 만나게 했지만
“저는 대통령께 정치에 투신하시라고 권유를 드렸던 사람이고, 윤석열 정부 출범에 나름대로 기여했던 사람”, “(윤 대통령이) 더 소통하시고, 통섭하시고, 또 통합의 정치를 이끄시는데 제가 미력이나마 잘 보좌해 드리도록 그렇게 노력하겠다.”
정 실장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4월22일 밝힌 소감에서 추출할 수 있는 열쇳말은 서로 상반된 ‘친윤’과 ‘소통’입니다. 일단 정 실장의 초반 행보는 ‘소통’에 방점을 찍긴 했습니다.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담(4월29일)을 성사시키고, 여당 전당대회 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신임지도부 만찬(7월24일),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90분 회동(7월30일) 등의 ‘밥상’을 차렸습니다. 특히 전당대회 기간 전후로 폭발할 가능성이 컸던 윤-한 갈등을 적정선에서 관리했다는 평가가 따라옵니다.
또 비서실장 업무를 시작하며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통령실 관계자’라는 이름으로 부정확한 얘기가 산발적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서들은 정치하지 마라” 등 군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총선 전후 대통령실에서 끊이지 않던 ‘비선 논란’, ‘메시지 관리 실패’ 등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고, 이후 대통령실의 메시지 혼선은 다소 줄어들었습니다.
야당 공세 속 ‘거부권 정치’ 총대 멘 ‘호위 무사’
그러나 야당의 ‘채 상병 특검법’ 처리, 방송통신위원장·검사 탄핵, 윤 대통령을 겨냥한 각종 청문회 공세 속에서 정 실장은 윤 대통령의 ‘호위 무사’로서 총대를 멨습니다. 5월21일 정 실장은 야권 주도로 처리한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윤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대해 직접 브리핑을 열어 “특검법 입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고,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이 법안에 재의 요구를 하지 않으면 대통령의 직무유기”, “헌법 수호자로서 대통령의 의무이자 책무” 등을 강조하며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이후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대야 강경 기조는 계속됩니다. 정 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서도 윤 대통령의 채 상병 순직 사건 외압 의혹, 뉴라이트 편향 인사 등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질의를 ‘철벽 방어’하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 대통령실은 민주당이 제기하는 윤석열 정부의 계엄 준비 의혹, 야권 일부에서 언급하는 ‘대통령 탄핵’, 김건희 여사를 향한 전현희 민주당 의원의 ‘살인자 발언’ 등에 “도를 넘었다”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사실상 ‘협치는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또 윤 대통령은 최근 광복절 경축사 등 주요행사에서 정부 비판세력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는 ‘반국가세력’ ‘반대한민국세력’ 등 거칠고, 격한 표현을 쓰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실 내부에서도 최근 이러한 강경 기조에 제동을 거는 이들은 없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야당 협조 없이는 대통령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실 참모들이 대야관계에 손을 놓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여러 개혁과제 추진을 위해서라도 ‘협치’의 끈을 놓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 실장을 비롯해 누구도 윤 대통령의 ‘마이웨이’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정 실장과 여당의 거리도 멀어지고 있습니다. 정 실장은 “당정은 하나”라고 거듭 강조하며 극단적인 여소야대 구조를 대통령실과 여당과 결속을 통해 돌파하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한동훈 대표의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 제안이 나온 뒤 한 대표와 당정 관계에 대한 정 실장의 생각에도 변화가 감지됩니다. 지난달 30일 열기로 했던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을 대통령실이 연기한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비서실장은 민심 전해야”
윤 대통령과 정 실장이 총선 이후 받고 있는 성적표는 20%대 초중반의 국정지지율입니다. 무엇보다 ‘옳은 일은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한다’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한 윤 대통령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정 실장의 운신 폭도 넓지 않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입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 불리는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지난 4월22일 방송인터뷰에서 정 실장 임명에 대해 “정진석 의원은 바른말을 하시는 분이니 (대통령이 정 의원에게) 함부로 못 할 것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그의 생각이 궁금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 의원은 정 실장에 대한 구체적 평가는 하지 않겠다며 대신 대통령 비서실장의 역할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전했습니다. “비서실장은 민심을 잘 전해야 합니다. 예스맨은 필요 없는 거죠.”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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