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면 이 땅에서 대공분실이 사라질까

[1987 영화감상문] 언제면 이 땅에서 대공분실이 사라질까
김련희 평양시민 
기사입력: 2018/01/29 [22: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1987년 연세대학교 백양로에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이한열 열사, 결국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1달암에 영영 심장의 고동이 멈추었으며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6월항쟁으로 전두환독재정권을 몰아내게 되었다.  

2018년 새해를 맞으며 나는 남녘에서 6년만에 2차 송환을 기다리시는 장기수선생님들과 함께 영화관을 가게 되었다.
별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여서 가기 싫다고 망설였지만 장기수선생님들이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며 한사코 데리고 가시는 것이였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어르신들의 성의에 이끌려 간 곳이지만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남쪽의 영화관은 사뭇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북에서 영화관에 가본 경험으로 1000석이 넘는 큰 방으로 생각했었는데 정작 눈앞에 펼쳐진 서울대입구 롯데시네마 4관은 100석정도의 아담하고 귀여운 작은 방이었다.

▲ 영화 1987 

우리가 보게 된 영화는 <1987>, 2017년 12월 27일부터 한창 대개봉중에 있는 신작이었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조사 중에 잔인한 고문행위에 의해 스물두 살 애젊은 서울대생의 사망으로부터 시작되는 <1987>은 처음부터 가슴을 조여왔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크나큰 충격이었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이 말을 시작으로 고문치사 사건이 은페되자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공안검사, 기자, 교도관 등 용기있는 사람들의 정의의 행동과 이한렬 열사의 죽음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가슴 벅참과 울분으로 마음은 먹먹하고 무거웠다.

“와 못 가노, 종철아, 잘 가그라,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영화에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박종철열사의 마지막 떠나는 순간이었다.
얼어붙은 강에 달라붙은 아들의 유해를 손으로 떠서 강물에 흘러보내시는 아버지의 저 피눈물의 모습,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이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견뎌나갈 수 있을까
꽁꽁 얼어붙은 강위에 자식의 유해를 뿌리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저 아버지의 타들어가는 아픔과 피터지는 고통을 누가 감히 다 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자식을 가진 같은 부모로써, 또 7년 째 보석같이 소중한 딸자식과 생이별 당하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으로 다가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손으로 때려잡은 사람들 비명소리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아요, 우리가 애국자입니까?”

대공수사관의 이 말이 마음속에 콱 박힌다. 너무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고문행위들과 최루탄을 쏘아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대학생들을 때려잡는 수사관들과 경찰들의 모습을 보며 분노와 울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도무지 현실이었다고 받아들이기가 너무 무서웠다.
이한렬 열사를 비롯한 대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아대던 경찰들도 20대 젊은 청년들이였다.
저 사람들이 지금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떤 감정일가? 그때를 기억할 때마다 어떤 마음일가? 
아마도 깊은 자책감으로 평생을 가슴 조이며 살아갈 것이다.

“데모하려 가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그날 같은 거 안 와요. 꿈꾸지 마요. 정신 차려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너무 아파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대사이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묻는 연희의 저 생각은 일반인들의 전반적인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 화장을 밀어붙이는 경찰에 시신보존명령을 내렸던 최검사나 고문치사협의로 수감중인 조형사를 통해 알게 된 사건의 진상을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알려내는 교도관,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보도 지침이냐며 진실을 찾기 위해 발로, 땀으로 뛰여다닌 기자들, 이 분들이 그때 그런 용기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더라면.......  
그 날 같은 거 안온다고 모든 사람들이 공권력에 머리 숙이고 현실을 도피했다면 ......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렇다, 최루탄을 맞아가며 경찰들과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꽃다운 청춘까지도 바쳐야 했던 그들도 이 나라의 평범한 국민이었고 애젊은 대학생들이었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었다. 언뜻 북에 있을 때 보았던 광주에 대한 영화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피여도 피여도 꽃은 없고
맺어도 맺어도 열매없으니
강산은 찢기여 원한이 사무쳤네
오 짓밟힌 내 고향이여
아 남이 사는 내 고향이여
살아도 살아도 살  곳 없고 
죽어도 죽어도 묻힐데 없으니
강산은 찢기여 원한이 사무쳤네
폭풍아 몰아쳐라
바다여 노호하라
수난을 불사르고 새봄을 맞이하자

그 영화에서 한 청년이 이렇게 절절하게 웨치고는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그때는 그냥 영화로만 다가왔기에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거세찬 6월 항쟁의 불길을 보며 잠시 생각해 본다.
...나도 그 시절 함께 존재했더라면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토록 천진하고 무관심하던 연희도 이한렬열사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어느덧 버스에 올라 자연스럽게 주먹을 추켜든다.
수천의 사람들로 꽉 채운 서울광장의 가슴 뛰는 모습은 결코 어둠은 진실을 이길 수 없고 민중의 힘은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방에는 먹먹하고 무거운 기운만이 맴돌았다. 자막에서 흘러나오는 “그날이 오면”의 애절하고 간절한 선률만이 조용한 정적 속을 유유히 흘렀다.

나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함께 가셨던 장기수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저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예요? 나라 없던 식민지 때라면 몰라도 당당하게 자기 나라에서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저렇게 최루탄으로 쏴죽이고 물고문으로 죽일 수 있나요?’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6월항쟁 이전에 대공분실에 갇혀 당했던 물고문, 통닭고문, 전기고문, 데포수정, 쭉지묶기, 고문들은 차마 너무 부끄러워 감히 영화에도 내놓치를 못해’
아!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정말 이건 아닌데, 어떻게 같은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1987>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민주화를 외치며 애젊은 청춘을 바쳤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화를 부르며 차디찬 거리에 뛰쳐나가고 있다.
광주인민봉기 때는 비행기와 탱크를 내몰아 국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6월항쟁 때는 최류탄으로 20대 꽃다운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2016년 박근혜 반대시위 때는 물대포를 쏘아 농부의 소중한 목숨을 또다시 앗아갔다.
오랜 세월 수많은 소중한 생명들이 민주화를 부르며 목숨을 바쳐왔지만 아직도 너무나 민주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이 땅에는 공권력의 탄압이 그대로 남아있다.
언제면 먼저 간 열사들의 민주화 소원이 실현될 수 있을까?
언제면 우리가 탄압과 희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면 이 땅에서 대공분실이 사라질 수 있을까?
언제면 반공, 종북의 무서운 쇠사슬에서 벗어나 우리 한민족이 통일의 광장에서 얼싸안고 춤출 수 있을까?

이 땅에 민주화와 평화를 간절히 소원하며 자신의 청춘도, 생명도, 가정도, 모든 것을 깡그리 바치신 애국열사분들에게 경견한 마음으로 머리숙여 인사드립니다.
열사들의 값비싼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후대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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