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동지이자 민족의 DNA인 ‘아리랑’
혁명의 동지이자 민족의 DNA인 ‘아리랑’북한, 예술로 읽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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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16일 저녁 일본 도쿄 소재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동아시아 챔피언십 3차전 경기에서 남북 응원단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아리랑’이었다. 한민족의 DNA에 흐르고 있다는 아리랑은 분단이 된 지금에도 북과 남에서 애창곡이고, 또 남북이 함께 부르는 합창곡 1순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북에서는 “민요 아리랑에서는 아름답고 유순한 선율로써 조선사람의 민족적 감정과 넋을 잘 살려냈기 때문에 선율만 들어도 민족수난에 찬 력사가 되새겨지고 향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적에 따라 조선민요 최고로 아리랑을 손꼽고 있다. 단순한 사랑노래가 아니라 봉건사회의 질곡을 극복하고, 외세로부터 조국 해방을 이루어내는 통일의 의지가 담긴 노래로서 평가하며, 스스로 “아리랑 민족”이라 칭하고 있다.
이처럼 북측에서 아리랑은 과거의 유산이었든 아니면 문예정책에 따라 재형상이 되었든 어쨌거나 대표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연목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시작은 항일 혁명투쟁에서 출발한다. 독립투사들은 아리랑의 곡을 개사하는 등 변용하여 투쟁의 무기로, 민족애를 키우는 수단으로 아리랑을 적극 활용했다. 김산의 아리랑, 정율성의 아리랑이 그러하고, 임시정부의 군가로 불려진 ‘광복군아리랑’이 대표적이다.
“우리네 부모가 날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전해 주소/ (후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넘겨주소/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날려요.”
김일성 주석이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에서 불렀다는 아리랑도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김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6권)에 따르면, 두 전투에서 아리랑은 혁명의 동지로 함께 했다는 것이다. 신운호 작사, 전민철 작곡에 모란봉악단의 단장인 현송월이 노래한 ‘간삼봉에 울린 아리랑’으로 알려졌다.
“보천보에 홰불 올린 혁명군은 기세 높아/ 간삼봉의 싸움터엔 노래소리 드높았네/ 빨찌산녀장군이 선창 떼신 아리랑/ 봉이마다 릉선마다 뢰성타고 울렸네/ (후렴) 아리랑 스리랑 간삼봉에 불비 와서 아라리가 났네… 도천리에 조용조용 부르시던 아리랑/ 싸움터에 산발 쩡쩡 메아리로 울리셨네/ 백발백중 명중탄 불벼락을 안기며/ 사령부의 안녕 지킨 빨찌산녀장군... 하늘에는 번개 번쩍 싸움터엔 총불 번쩍/ 녀장군의 아리랑에 왜호박이 떼굴떼굴/ 삼천리를 피에 잠근 섬오랑캐 모조리/ 통쾌하게 쳐 부시고 조국광복 맞으리”
북측에서 아리랑에 주목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간삼봉 전투 이야기가 알려지고, 76년 배합관현악곡으로 아리랑이 창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혁명전통을 강조하던 문예정책의 대표적 아이템이던 아리랑은 2000년 이후 대외적으로 화해와 통일의 아이콘으로 변화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공식 음악회 첫 곡으로 아리랑이 연주가 되고,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대표적인 합창곡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즈음 북측의 영천아리랑, 통일아리랑 등이 남측에도 소개가 되었다. 그리고 북측 내적으로 아리랑은 고난의 꽃에 머물지 않고 ‘강성부흥아리랑’으로 거듭났다.
북측에서 연구 정리한 아리랑의 연원은, 2001년 12월 월간 문학잡지인 <조선문학>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중엽 최영년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아라리’란 노래를 거론하고 있고, 1901년 11월3일 황성신문의 논설에서 민요 아리랑이 널리 퍼져 부르고 있다는 기록과 황헌이 남긴 <매천야록>에 명시된 아리랑 타령의 기록을 볼 때 “19세기 중엽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파급되어 있었으며, 20세기 초에는 대중적인 가요로 널리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아리랑의 유래와 관련해 여러 가지 설도 소개하고 있다. 우선 고려가요인 ‘청산별곡’의 후렴구인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가 시작이라고 하는 주장과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백성들이 원납금 성화에 못견뎌 부른 ‘아이롱(我耳聾)’설이 있다고 한다. 또 고향을 떠나 몇 년씩 강제부역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큰 난리가 생겼다고 하면서 ‘아난리’라고 하던 것이 변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됐다는 설과 경상도 노령산 밑에 살던 가난한 오누이와 관련된 전설, 밀양부사의 딸 아랑과 관련된 전설 등과 결부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설중에서 ‘성부와 리랑’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조선문학>은 주장했다. 즉 경기도 지방에 김좌수라는 토호 밑에서 종으로 있던 총각 리랑과 처녀 성부가 사랑에 빠졌는데 김좌수가 성부에게 눈독을 들이자 리랑이 농민들과 함께 그를 처단하고 도주해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리랑을 붙잡으려 하자 그는 결국 고장을 떠나게 되었고 성부가 그를 배웅하며 아리랑이라고 하면서 ‘정든 님이 어려운 세상길에 나선다’는 의미에서 ‘고계(苦界)’로 나간다고 했는데 이것이 후에 ‘고개’로 고쳐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발생설을 볼 때 ‘인민들의 불우한 사회적 처지, 서글픈 생활 감정을 바탕에 깔고 있다’며 ‘아리랑은 봉건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로 하여 정든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부모, 처자, 친척들을 버리고 유랑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기에 인민들의 생활처지를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는 서글픈 심정으로 노래했던 것’이라고 잡지는 규정하고 있다.
북측에서 정리한 아리랑은 50여 곡으로 알려졌다. <조선민족음악전집> 민요편 3권에 수록되어 있는 아리랑 곡들은 실제 50여 곡이지만, 이 가운데 아래의 3가지 기준에 의해서 정리 분류한 바 있다.
첫째가 노래의 곡명과 관련해서인데, 곡명이 유사해도 가사내용과 선율형식 등으로 고려할 때 아리랑으로 볼 수 없는 작품들이 꽤 있다. ‘아리령동’과 ‘아이렁랑’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후렴과 관련해서다. 민요에서 후렴은 노래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가장 큰 특징인데, 그렇지 않은 작품도 꽤 있었다. ‘전라도긴아리랑’과 ‘아리랑동’, ‘강릉아리랑’이 대표적이다. 셋째는 가사의 내용이다. 곡명은 아리랑이 아니지만 후렴과 가사내용이 아리랑과 같거나 유사한 경우이다. ‘강원도아르래기’와 ‘정선아이롱’이 대표적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북측의 구전민요에서 곡명과 후렴, 가사내용과 시가형식, 음악형식에서 ‘아리랑’의 면모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곡은 36곡이며, 나머지는 유사한 노래로 보고 있다.
아리랑은 다른 민요와는 달리 전렴과 후렴이 달라, 시대에 따른 사회상과 민중의 생각을 다양하고 반영하고 있어 그 내용도 다양하다.
전렴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유교 질서 아래서도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와 낙천적인 정서 또는 별리의 그리움을 반영하고 있다. “앞집의 총각아 어디로 가나/ 그리운 님 보러 재 넘어간다/ 울너머 담너머 님 숨겨두고/ 호박잎만 난들난들 날 속였네/ 팔랑팔랑 팔랑팔랑 수갑사댕기/ 어깨야 넘어서 춤만 춘다/ 앞남산 국화는 필락말락하는데/ 님하고 나하고는 정들락말락한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수양산 진달래 만발한데/ 님하고 나하고 꽃구경 가세… 인제 가면 언제나 오나/ 오미는 날이나 일러를 주소/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나/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고향을 뺏긴 설움도 담았고,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담은 내용도 있다. “문전의 옥답은 어디다 두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이냐/ 산 설고 물 설은 북간도 땅은/ 눈물에 젖은 길 몇 천리두냐/ 이 땅을 부여안고 울면서 가는/ 두만강 여울살아 말 물어보자/ 문전의 옥답을 다 버리고/ 쓸쓸한 북만주에 왜 왔는가”… “희망찬 앞날을 다짐하고/ 힘차게 용감히 싸워보세/ 가시는 님을 붙잡지 마소/ 갔다가 올 때는 더 반갑소/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섣달에도 꽃만 핀다”
아리랑의 후렴은 크게 두 가지가 일반적인 데, 이별의 서러움을 노래한 것과 행복한 생활에 대한 지향과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허절씨구 날 넘겨주소” 그 외에는 “아리랑 찧어루 방아로다”와 같은 노동생활을 반영한 것과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와 같이 즐거움을 노래한 사연도 있다.
이는 노래의 기능이 달라지면서 가사의 내용과 선율이 변한 것인데, 발생 초기 아리랑이 이별의 서러움을 노래했다면, 이후 많은 이들이 부르는 과정 속에서 괴롭고 슬플 때는 물론이고 일을 하거나 연희를 할 때 불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에 퍼지면서 아리랑도 아리아리랑과 아리아리 등 지역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불리게 된 것이다. ‘아리라이랑’은 단천아리랑, 회령구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 북부 지방에서 불렸고, ‘아리아리’는 고성 아리랑, 삼일포 아리랑, 경상도아리랑 등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불린 것이다.
그리고 아리랑을 선율 형태별로 분류하면 후렴으로 시작하는 형태와 전렴으로 시작하는 형태, 전렴과 후렴의 선율이 같은 형태로 나뉠 수 있다. 후렴으로 시작하는 곡은 아리랑, 서도아리랑, 경기도긴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영천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18곡으로 은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고 처량한 느낌을 준다. 전렴으로 시작하는 형태는 단천아리랑, 은성아리랑, 밀양아리랑, 고성아리랑, 삼일포아리랑 등 10곡으로 활달하고 열정적이면서도 앙양된 인상을 준다. 후렴과 전렴의 선율이 같은 경우는 함경도 지방의 무산아리랑이 대표적으로 총 6곡이다. 기타 도입부적 성격을 가진 선율 형태가 2곡이 있는데, 경주아리랑이 대표적이다.
북측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리랑의 전국 분포 현황은 아래와 같다. 함경도 은성아리랑, 회령구아리랑, 무산아리랑, 단천아리랑, 평안도 진천아리랑, 평안도아리랑1, 2, 서도아리랑, 황해도 해주아리랑1, 2, 강원도 통천아리랑, 고성아리랑1, 2, 삼일포아리랑, 고산엮음아리랑, 강원도아리랑, 평강엮음아리랑1, 2, 양양아리랑, 강원도긴아리랑, 강릉아리랑, 정선아리랑1, 2, 경기도는 경기도긴아리랑, 전라도는 진도아리랑1, 2, 경상도는 초동아리랑1, 2, 경상도아리랑1, 2, 영천아리랑, 영천긴아리랑, 경주아리랑, 청도아리랑, 밀양아리랑1, 2로 분포하고 있다.
북측에서는 전통적인 아리랑보다는 1926년 10월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라운규가 만든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가(OST)를 새롭게 형상한 아리랑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날은 조선총독부 신축사의 낙성식이 있는 날이어서 더욱 뜻 깊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를 초연한 이는 인민배우 김련실이다.
김련실(1911~1997)은 수원의 빈농에서 태어나, 경성근화여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뒤 서울의 한 상점에서 일하던 중 우연히 라운규를 만나게 된다. 고운 그녀의 목소리에 반한 라운규의 제안으로 영화 개봉일에 무대에서 아리랑의 주제가를 부르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열게 되었다. 라운규프로덕션에서 영화배우로의 삶을 시작한 그녀는 해방 후 북행을 해, 1953년 예술영화 <정찰병> 출연을 시작으로,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소속 배우로 80여 편의 작품에서 주로 어머니 역으로 활동하였다. <처녀 이발사>(1970년), <아름다운 거리>(1970년), <잔치날- 도시편>(1974년) 등이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1977년 인민배우가 되었다. 1985년 1월에는 그녀의 집에서 채보한 당시의 아리랑 악보가 공개되기도 하였다.
한편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창작된 신민요로서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이 있고, 대중음악 영역에서는 영암아리랑(하춘화), 홀로아리랑(서유석), 꿈의아리랑(조용필) 등이 있다. 북측의 경우에는 새롭게 창작된 아리랑으로 통일아리랑, 철령아리랑, 군민아리랑, 강성부흥아리랑 등이 대표적이다.
가장 널리 불리는 노래는 통일아리랑으로 박두철 작사, 김운룡 작곡으로 1998년에 창작된 곡이다. “뜻이 깊고 소박하면서도 형상성이 강한 시어들”로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조국통일의 새날을 앞당기자는 불같은 신념과 의자가 맥박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통일아리랑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헤어져 얼마냐 아리랑 아리랑/ 반세기 아픔이 가슴친다 가슴친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통일아리랑 삼천리 내 나라 삼천리 내 나라 통일 아리랑… 이대론 못참아 아리랑 아리랑/ 장벽을 부시고 하나되자 하나되자… 온 겨레 손을 잡고 아리랑 아리랑/ 자주의 새날을 앞당기자 앞당기자”
‘선군시대의 명작’이라고 칭하는 강성부흥아리랑은 2001년 유두근 작사, 안정호 작곡으로 보천보전자악단에 의해 발표가 되었다. 로동신문은 2001년 8월26일자에 “온 나라 인민이 즐겨 부르는 새로 나온 노래 강성부흥아리랑”이란 타이틀로 소개하였다. 이 신문에서는 “위대한 장군님 시대의 명곡, 민족의 긍지 넘치는 기념비적인 작품- 노래 강성부흥아리랑에 대하여‘라는 기획기사가 별도로 게재가 되었다. 이후 강성부흥아리랑은 주체음악예술의 또 하나의 성과이자 민족의 긍지 높이는 기념비적 작품, 로동당 시대의 새 아리랑, 민족음악사 발전의 크나큰 경사, 우리 음악 발전의 획기적인 작품, 새 세기의 가장 훌륭한 민족 아리랑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종장에서 불려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무릉도원 꽃펴가니 흥이로다/ 아리랑 제힘으로 세워가니 멋이로다 아리랑/ (후렴) 장군님의 손길따라 주체강국 나래친다/ 아리아리 아리랑 스리스리 아리랑 강성부흥 아리랑… 일심으로 뭉쳤으니 두렴없이 아리랑/ 철벽으로 다졌으니 끄떡없이 아리랑… 태양조선 강해지니 존엄높아 아리랑/ 태양민족 흥해가니 살기좋아 아리랑”
아리랑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남측의 아리랑은 2012년 12월 유네스코에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로 등재가 되었다. 2014년에는 북측도 아리랑을 등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리랑 민요(Arirang folk so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공식 표기되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남북 선수단은 개회식 때 한반도기를 들고, 아리랑 연주에 맞춰 공동 입장을 한다.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의 기저에 아리랑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온 오솔길이 북남 단합과 통일의 대통로가 되기를 바란다”는 북측 예술단의 사전 방문단이 남긴 글에 새삼 눈길이 가는 이유다.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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