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안 나서면 아무도 친구의 죽음을 밝히지 않을 거예요”

미등록노동자 단속 중 추락사한 현장목격 증언 “단속반이 발 붙잡은 뒤 중심잃고 머리부터 추락”
경찰 수사 부진 “단속반이 찼던 바디캠 영상 봤지만 더 확인해봐야”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열흘 전인 지난달 30일, 코코(29‧가명)씨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발언대에 올랐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미등록체류자 단속 중 추락해 숨진 친구 딴저테이씨(27)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부평역 앞 광장에서 열린 ‘법무부 죽음의 단속 규탄·딴저테이씨 죽음 진상규명 촉구 추모집회’에서였다. 코코씨 발언은 이주인권운동가 소모뚜씨가 한국어로 동시에 옮겼다.
“저도 미등록체류자입니다. 여기 나오면 위험하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친구가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 죽어갈 텐데. 제가 나와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요. 그래서 왔습니다. 무섭지만. 무섭지만.” 지난 8월22일 코코씨는 딴저테이씨가 단속반에 둘러싸여 창밖으로 추락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단속반은 점심시간에 들이닥쳤다. 코코씨와 딴저테이씨는 건설현장에 딸린 식당에서 닭고기 반찬을 배식 받아 마주앉았다. “오늘 맛있겠다. 많이 먹자”고 대화를 나누고 첫 술을 뜨던 참이었다. 출입구쪽에서 쾅 소리가 났다. “앉아, 앉아, 앉아! 야! 앉아!” 한 미얀마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들끼리 싸움이 난 줄 알았다’고 돌이켰다. 들이닥친 이들은 곧바로 출입문을 걸어 잠갔다. 
“단속 나왔어. 위험해, 뛰어.”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영문을 모르던 코코씨에게 딴저테이씨가 말했다. 돌아보니 공무원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3명, 몸집이 큰 사복 차림이 5명. 유니폼 중 1명은 영상을 찍고 있다. 둘은 서로 반대쪽으로 뛰었다.
식당에 딸린 창고로 향해 뛰며 코코씨는 친구를 돌아봤다. 딴저테이씨는 앞서 뛰어내린 4명에 이어 창틀에 올랐다. 코코씨는 “단속반이 친구가 뛰지 못하게 다리를 붙잡는 걸 봤다”며 “친구는 중심을 잃어 창문 넘어 8m 지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고 했다. 딴저테이씨가 떨어진 곳은 창문 밑 얕은 평지 너머 공사 중이던 현장이었다. 앞서 뛴 4명은 평지에 착지해 살아남았다.
▲ 지난 8월22일 딴저테이씨가 창문에서 추락한 위치. 사진=코코씨 제공
▲ 지난 8월22일 딴저테이씨가 창문에서 추락한 위치. 사진=코코씨 제공
딴저테이씨가 추락한 직후에도 단속반은 단속작업에 열중했다고 코코씨는 말한다. “‘야, 1명 떨어졌어’ 하고 외치는 소리를 창고 안에서 들었어요. 그래도 상관 없이 계속 (단속 색출)해요.” 현장을 지켜본 노동자들은 딴저테이씨가 추락하고 30분가량 흐른 뒤에야 구급대에 실려갔다고 말한다. “추락 20~30분 후 한국인 동료(과장)가 와서 소장에게 무전기로 말했어요. 소장님이 와서 ‘야, 아직 안 죽었잖아. 119 불러’라고 했어요. 5분 뒤에 구급차가 와서 딴저테이를 데려갔어요.” 딴저테이씨는 17일 간 뇌사상태에 있다 9월8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건 당일 중국, 베트남 등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가운데 36명이 붙잡혔다. 미얀마 팀 9명 가운데 5명이 붙잡힌 뒤 본국에 보내졌다. 
법무부 해명은 현장 증언과 엇갈린다. 법무부는 지난 1일 ‘장기기증 미얀마인 불법체류자 추락 보도 내용 관련 설명자료’에서 “보도된 미얀마인은 발견 즉시 법무부 직원에 의해 119에 신고됐다”고 했다. 단속반이 12시5분 단속을 시작했고, 추락한 딴저테이씨를 8분에 발견하자 마자 구급대를 불렀다는 설명이다. 이주인권운동가 소모뚜씨는 “법무부와 현장 목격자 말이 다른데, 증거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법무부는 딴저테이씨 죽음이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는 입장이다. 법무부는 설명자료에서 당시 “외국인의 안전사고에 대비하고자 창문 등에 단속직원을 미리 배치”했다고 말했다. 법무부 입장을 전해들은 코코씨는 안전에 대비한다면 그날 그 시간과 장소를 택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건 아이도 못 믿는 말이에요. 현장에서 단속하는 게 제일 위험해요. 5명이 창문으로 도망쳤고, 딴저테이는 밖으로 떨어져 죽었잖아요.” 법무부 훈령인 ‘출입국사범 단속과정의 적법절차 및 인권보호 준칙(준칙)’은 “제3자의 주거지, 영업장소에서의 단속은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최소한도로 실시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단속반의 반말과 폭언 주장을 두고는 “단속 과정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욕설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준칙은 “외국인 등에 대하여 폭언이나 가혹행위 또는 차별적 언행을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밝히고 있다. 
▲ 딴저테이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주노동자 동료 코코(29)씨(왼쪽)를 인천 부평역 인근 미얀마이주민 협동조합 식당에서 7일 만났다. 오른쪽은 인터뷰 통역을 도운 틴아웅(25)씨. 사진=김예리 기자
▲ 딴저테이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주노동자 동료 코코(29)씨(왼쪽)를 인천 부평역 인근 미얀마이주민 협동조합 식당에서 7일 만났다. 오른쪽은 인터뷰 통역을 도운 틴아웅(25)씨. 사진=김예리 기자
병원 기록에 추락 사유가 ‘자살’로 적힌 점도 미스터리다. 119 구급대 쪽은 이같이 사유를 밝힌 적이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도 부인하고 있다. 설명자료에서 “법무부 직원은 (119 차량이 병원에 도착한) 그 이후에 병원에 도착”했다며 “병원에 이송된 뒤 기록에 추락사유가 ‘자살’이라고 표기돼있는 것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전혀 관여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경찰이 “사건을 수사 중”이라고 했지만 추락 원인 규명은 지지부진하다. 김포경찰서는 현장 단속반원이 찼던 바디카메라 영상 원본을 제출받아 추락 경위를 확인했다고 밝혔으나 접촉 여부를 놓고는 “수사 중이라 말하기 어렵다”며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경찰은 “(단속 과정에서) 다른 문제점이 없는지 더 확인할 예정”이라며 새로운 현장 증언도 참고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일어난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현재까지 가려내지 않은 점은 의문이 생기는 대목이다. 
경찰은 단속반원 1명과 건설업계 관계자를 대상으로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이 단속반원과 건설업계 관계자는 추락 장면을 정확히 목격하지 못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지난 2008년부터 10년 동안 정부가 미등록체류자 단속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인정한 사망자 수는 10명이다. 징계받은 법무부 직원은 1명도 없다. 
미등록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토끼몰이식’ 강력단속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이주인권센터 활동가 박정형씨는 “이전 정권이 미등록이민자를 범죄율과 연동시켰다면, 이제는 서민일자리 보호라는 명분으로 조직적인 과격 단속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미얀마 난민이기도 한 소모뚜씨는 “건설현장을 보면 관리자만 한국인이다. 나머지 청소 등 밑바닥 일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면 하려 하지 않는다”며 “서민 일자리 창출을 말하며 이주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은 부조리”라고 말했다.
딴저테이씨 사건 이후에도 정부는 강력단속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달 20일 “불법체류 외국인이 국민 일자리를 잠식”한다며 “건설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불법취업자 단속활동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1일에는 ‘불법체류자 특별대책’을 시행한다며 △특별 자진출국 기간 △집중단속 등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 8월22일 출입국관리사무소 강제단속 과정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은 미얀마 미등록 이주노동자 딴저테이(27)씨. 사진=코코씨 제공
▲ 8월22일 출입국관리사무소 강제단속 과정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은 미얀마 미등록 이주노동자 딴저테이(27)씨. 사진=코코씨 제공
딴저테이씨는 “1년만 ‘불법체류자’로 일하다 고향에 가겠다”고 동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딴저테이씨의 비자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지난 10월 만료됐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단속 과정에서 사상자가 생기면 자체 가입한 보험으로 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한다. 딴저테이씨의 입원치료비 3600만 원과 장례비 600만 원은 건설사 측이 낸 위로금 5000만원으로 지불했다. 딴저테이씨는 한국인에게 장기를 기증하기로 해 총 4명이 장기를 이식받았다. 

인력부족 3D 업종 채우도록 묵인, 착취 방조하다 2004년 이후 추방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의 역사] 
 
1. 1980년대 – 묵인 
인접 아시아 국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유입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정부의 이주민정책 골자는 ‘묵인’이었다. 기업들이 저임금 고강도-위험노동 업종에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이 자리를 채웠다. 인력이 모자르다는 기업의 호소에 정부는 1992년 6월부터 17차례에 걸쳐 미등록 노동자들의 출국을 유예했다. 이주노동자는 정부의 침묵 속 승인 아래 10년이 넘게 노동시장 밑바닥을 지켰다. 
2. 1990년대 – 착취 
1994년에는 산업연수생제도가 생기면서 산업노동자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이주해왔다. 제도 명목은 개발도상국의 노동력을 받고 한국의 기술을 전수한다는 ‘경제협력’이었다. 그러나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제도를 ‘교육의 이름을 한 착취’라고 했다. 산업연수생을 노동자가 아닌 교육생 신분으로 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탓에 업장 내 가혹행위도 늘어났다. 관리운영 업체의 횡포에도 그대로 노출됐다. 
산업연수생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업장을 바꾸면 ‘불법체류자’가 됐다. 산업연수생 신분을 벗어나 미등록 노동자가 되면 돈도 더 벌 수 있었다. 그 탓에 미등록 체류자가 급증해 2002년엔 이주노동자 가운데 미등록율이 79.8%(36만 2천여 명 가운데 28만 9천여 명)에 달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마세요.’ 1995년 네팔 산업연수생들이 푯말을 내걸고 명동성당 쇠사슬 농성에 나서 ‘현대판 노예제’ 폐지를 촉구했다.
한편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둔 3월 정부는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을 발표하고 신고자에 한해 2003년 3월31일까지 출국 유예했다. 이 기간에 전체 미등록 체류자의 93%가 자진신고를 마쳤다. 
3. 2004년~현재 – 추방 
산업연수생제도 폐지 요구가 커지자 정부는 다른 제도를 꺼내들었다. 고용허가제다. 명목은 △이주노동자 시장을 양성화해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연수생제도에 따른 인권탄압 시비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제도로 정부는 인력을 연수생이 아니라 노동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간 중소기업중앙회가 맡았던 인력 도입과 관리를 정부가 도맡았다.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이 전환기를 ‘정부가 공인한 추방’으로 꼽는다. 2003년 말 고용허가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 차례 미등록 체류자 19만여 명을 합법화한 후 법무부는 대대적 강제 단속에 나섰다. 인권단체 ‘이주노동자 지원대책위원회’에 따르면 2004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강제단속으로 8명이 숨졌다. 미등록 체류자들은 단속을 피하다 객사하거나 적발된 후 강제추방이 두려워 자살했다. 
4. 산업연수생 제도의 착취는 여전 
현대판 노예제라는 오명은 그대로다. 고용허가제도 모든 권한이 사업주에게 집중되긴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상습 폭언이나 성폭행 등 사유를 대고 입증하지 못하면 이주노동자가 업장을 옮길 수 없다. 횟수도 4년 10개월 내 3번으로 제한한다. 이를 어기면 그대로 단속 대상이 된다. 이주노동자들에겐 옴짝달싹하면 ‘불법체류자’로 전락시키는 제도인 셈이다. 
토끼몰이식 단속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법무부에 제출 받은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며 80명이 부상하거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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