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사건 조작... 물고기 잡다가 고문당한 어부들

 

[재심: 바로잡은 역사] 월북으로 조작된 '태영호 납북 사건'

25.11.08 19:38최종 업데이트 25.11.08 19:38
25.11.08 19:38최종 업데이트 25.11.08 19:38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납북귀환 어부들이 50년의 기다림 끝에 2023년 5월 12일 오후 춘천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춘천지법 형사1부(심현근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 또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았던 납북귀환 어부 32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태영호 사건과는 다른 납북귀환어부 간첩 조작 사건)연합뉴스

납북이 월북으로 조작된 사례가 있다. 1970년대 대표적 조작사건 중 하나인 태영호 납북이 그것이다.

어선 태영호의 탑승자는 8명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사는 강대광(선주), 정몽치(선장), 박헌태, 이종섭, 박상용, 강용태(이상 선원), 전남 여수에 사는 박종윤(기관장), 박종옥(선원)"이었다고 알려준다.

민주공화당 정권이 대통령 재선(1967.5.3.)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3선 개헌 국민투표(1969.10.17.)를 향해 나아가던 때인 1968년 6월 4일이었다. 이날 목조기관선인 태영호가 위도면에서 출항했다. 이 배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인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해역으로 가서 병치잡이를 했다. 그러던 중 7월 3일,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북한의 표적이 된 어민들

'남조선혁명과 통일은 동시에 이루어지리라'는 김일성의 구상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벽에 부딪혔다. 북한 군대가 무너트리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이 남한 민중에 의해 붕괴되자, 김일성은 남한 민중이 만만치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는 남한부터 먼저 혁명시킨 뒤 그 뒤에 통일을 추진한다는 남조선혁명론을 1961년 9월 제4차 조선노동당 당대회에서 천명했다.

북한은 남조선혁명을 유발시킬 위와 같은 목적과 더불어, 베트남전쟁에 투입되는 미국의 군사 역량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1960년대 후반에 무장공비들을 대거 파견했다. 미국 외교협회가 2011년 11월 10일 발표한 <한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문가들이 1955~2010년까지의 한반도 군사충돌로 인정한 1436건 중에서 49.4%인 709건이 1960년대 후반에 발생했다.

이 시기에 김일성 정권은 북에서 남으로 무장공비를 파견하는 동시에 남에서 북으로 어민들을 납치했다. 남한 주민들에게 북한의 발전상을 보여줘 남한 민심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북한 경제가 남한을 앞섰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육로를 통해 농민들을 납치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민들이 표적이 됐다.

1970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 '귀환어부 좌담회'는 "최근 들어 북괴는 걸핏하면 생업에 종사하는 무고한 어부들조차 마구 납치해 허위선전, 강제 관광, 간첩 지령까지도 서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북에 의한 '강제 관광'은 '수학여행'으로도 불렸다. 1968년 12월 3일 피랍됐다가 귀환한 속초 어민 남기룡은 만경대대극장·황해제철소·청산리협동농장 등을 답사했다. 그런 곳들을 둘러본 소감을 남한에 가서 홍보하라는 게 북의 요구였다.

태영호 납북 때까지만 해도 남한 정부는 납북어부들을 가급적 처벌하지 않았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당시에는 고의로 월선하였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는 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이 통례였다"고 말한다. 월선했더라도 고의 입증이 되지 않으면 처벌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방침이 계속 유지됐다면 태영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태영호 선원들은 정부 방침이 강경해지는 시점에 북에서 풀려났다. 이들이 귀환한 날은 강원도 울진·삼척에 무장공비가 출현하기 이틀 전인 1968년 10월 31일이다. 이로부터 9일 뒤 '월경 선박에 대한 전원 구속'을 경고하는 정부 방침이 나왔다. 11월 9일자 <경향신문> 7면 하단의 보도다.

"내무부는 요즘 동해에서 어부들의 납북사건이 자주 일어남에 따라 앞으로 어로저지선을 넘어 고기를 잡다가 납북되는 어부들은 모조리 수산업법 위반으로 입건, 휴전선을 넘어 고기를 잡다 납북되는 어부들은 수산업법과 반공법을 아울러 적용, 모조리 구속한다고 9일 상오 관하 경찰에 지시했다."

이 신문의 같은 해 3월 25일자 7면에 따르면, 이날 수산청은 서해 어로저지선을 NLL 남쪽 2마일에 설정했다. 어로저지선을 넘은 뒤 납북되면 수산업법 위반으로 모조리, NLL를 넘은 뒤 납북되면 수산업법 위반에 더해 반공법 위반(탈출·잠입 등)으로 모조리 구속시키겠다고 내무부가 경고한 것이다.

고문에 괴롭힘까지... 태영호 선원들의 억울함

민주노총 경남본부 건물 외벽에 "무죄로 판명된 조작사건들"이라고 새겨진 펼침막이 걸려 있다.윤성효

박정희 정권은 격증하는 어선 납북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는 데다가, 어민들이 이북에서 진술한 남한 지형 및 초소 위치가 무장공비 침투에 활용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부 납북어민들에게 중형을 가하는 방법으로 분위기를 잡고자 했던 것이다.

태영호는 정부 방침이 강경해질 때 귀환했다. 이런 가운데 선원들에 대한 당국의 조사는 가급적 처벌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당국은 이들이 스스로 월북했다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갔다.

10월 31일 북에서 풀려난 선원들은 인천경찰서에서 사흘간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그 뒤 인천서와 여수경찰서를 거쳐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과 전주지검 정읍지청으로 이송됐다. 위도면 선원들은 부안경찰서에서도 수사를 받았다. 이 경찰서에서는 고의 월북을 인정하라며 몽둥이로 구타하는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위 보고서는 말한다.

사건이 순천지청에서 정읍지청으로 넘어간 것은 1969년 4월 29일이다. 4개월여 뒤인 9월 9일, 정읍지청은 해군본부 및 해군인천경비부에 '1968년 7월 3일에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북된 어선이 있는지를 확인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9월 9일에 공문을 받은 해군분부는 27일에 회신을 보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태영호 선원들이 월선하지 않았으며 북한 경비정이 남한 해상으로 넘어와 나포해갔다"는 내용이 회신에 담겼다고 알려준다.

그런데 정읍지청은 회신이 도착하기 전인 9월 12일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기소 의견을 보고했다. '월북하겠다는 확정적 고의가 없었다 해도, 월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냥 가보자는 미필적 고의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9월 16일, 선원들은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에 기소됐다. 9일 뒤에 도착한 위 회신은 검찰의 사건기록 목록에도 기재되지 않고 정읍지원에도 제출되지 않았다고 위 보고서는 지적한다.

고의 월북이라는 검찰 측 주장을 무너트릴 결정적 자료가 은폐됐다. 납북어민들에 대해 강경해지는 정부 방침에 편승하는 사건 조작이었다. 선주 강대광을 비롯한 선원 8명은 당시의 반공법 제6조 제1항이 규정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한 자"로 인정돼 징역 1년에서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선원들은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일례로, 강대광은 "경찰관이 집에 하숙하면서 감시하였다"고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술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다시 수사를 받았다. 남한으로 귀환한 뒤에 북으로 탈출할 시도를 하고 북을 찬양·고무했으며 위도 주변의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였다. 1979년에 광주고등법원은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함께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징역 5년을 받거나, 징역 3년에 집행유예를 받았다.

2006년에 진실화해위원회는 증거도 없이 고의 월북으로 처리되고, 영장 없이 장기간 구속됐으며, 고문과 폭행이 있었던 점 등을 이유로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2008년에 정읍지원은 강대광 등 5명이 신청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선고는 검찰 항소가 없어 확정됐다. 2017년에 검찰이 직권으로 청구한 박종옥 재심과 관련해서도 정읍지원의 무죄 선고가 있었다.

태영호 선원들은 납북됐다가 귀환하는 어부들 때문에 고심하던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 정권이 아니라 귀환어부들을 혼내주기로 결심한 시기에 공안조작의 대상이 됐다. 태영호 선원들은 국민에 대한 겁주기와 화풀이의 시범 케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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