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살린 것은 친일파 출신 만주군 인맥이었다’

월간조선 조갑제 ‘김창룡이 박정희 살려주지 않았다면?’
‘박정희를 살린 것은 친일파 출신 만주군 인맥이었다’
임병도 | 2015-10-16 08:47:4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TV조선이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동영상을 왜곡하여 보도했습니다. TV조선은 10월 13일 ‘더 일찍 죽었어야… 엇나간 역사수업’이라는 제목으로 한홍구 교수가 2014년 강연한 ‘세월호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 동영상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왜곡 편집, 보도했습니다.

앵커는 ‘박근혜 대통령이 태어나기 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했어야 한다는 성공회대 교수의 동영상을 보고 감상문을 써내라고 한 겁니다.’라면서 마치 한홍구 교수가 박정희를 살해했어야 한다는 식으로 보도합니다. 다른 언론들도 사실관계는 확인하지 않고 앞다퉈 왜곡보도를 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일찍 죽였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한홍구 교수의 동영상”(<동아닷컴> 10월 14일 자 보도)
“ ‘박정희, 만주서 죽였어야…’ 막장 수업 논란”(<채널A> 10월 14일 자 보도)
“강남 고교 교사 ‘박정희’ 과격 동영상 논란”(<중앙일보> 10월 14일 자 보도)
과연 이들의 보도가 사실일까요? 진실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박정희 살해? 김구는 죽이고 박정희는 살려준 김창룡’


한홍구 교수의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김창룡이었습니다. 박정희가 주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홍구 교수가 했던 발언 원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동영상(29분 50초 부분)에서 한홍구 교수는 1948년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군내에서 벌어진 좌익 수사에서 남로당 프락치로 검거된 박정희가 어떻게 살았는지, 누가 살려줬는지 말합니다.

“저 놈(김창룡)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거든요. 그런데 그때 죽여도 될 사람을 하나 살려줬어요. 남로당이 한국군부에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였으니까 그때 기준으로 치면 뭐 죽여도 여러 번 죽였어야 할 자인데 그자를 만주에서 같이 놀던 놈이라고. 그놈이 잡히니까 ‘김창룡을 만나게 해달라.’ ‘김형 나 좀 살려주쇼.’그랬더니 이제 살려줬어요.
아 그때 딱 죽여 버렸으면 우리 역사가 조금은 바뀝니다. 대통령이 두 자리는 확실하게 바뀌어요. 박정희니까. 박정희 그때 죽여 버렸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죠. 우리 언니(박근혜)는 태어나기도 전이에요.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거였는데 살려 줬습니다. 오늘의 박근혜를 있게 한, 오늘의 박근혜가 있기까지는 뭐 이런 분들의 다 은덕이 있는 거죠.”

한홍구 교수의 이 발언은 김창룡이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의 배후세력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전이었습니다. 즉 김창룡이 당시 죽이기보다 살리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박정희는 살려줬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죽이기보다 살리기가 어려워
―金昌龍대위는 金安一 과장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했습니까?
『그는 1연대 정보주임이었는데 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고 독립적인 수사를 거쳐서 하였습니다. 행정적인 처리는 저를 거쳐서 하였습니다. 朴正熙 등 육군 사관학교 내 세포에 대한 수사를 金昌龍이 한 것은 1연대가 그 학교와 가까운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꼭 살려야 할 사람은 살리기가 곤란했고, 꼭 잡아야 할 사람은 잡아놓기가 힘들었습니다. 수사에 협조하여 이제는 풀어주어도 공산주의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을 살리자고 건의하면, 위에서는 여순반란 사건 때문에 내 부하가 얼마나 희생되었는데 살려준단 말이냐고 하면서 난색을 표했고, 친한 부하를 구속시키려면,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변호를 해주고… (월간조선 1989년 12월호, 조갑제)
1989년 12월 조갑제씨가 쓴 월간조선에서도 ‘죽이기보다 살리기가 어려워’라는 소제목이 나옵니다. 박정희가 죽었어야가 아니라, 원래 박정희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습니다.

‘영남유격사력관 박정희? 특무과장 김창룡이 박정희 살리자고 했다’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는 진짜 남로당 프락치였을까요? 조갑제씨와 이동욱 월간조선 기자가 쓴 ‘박정희 전기’에 이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아니, 남의 교수부장을 빨갱이라고 잡아가면 어떻게 하오?’ ‘아닙니다. 그놈은 빨갱이가 틀림없습니다.’ ‘증거가 있소?’ ‘예, 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김창룡이 차트를 펼쳐 보였다. 웬만한 사람의 키를 넘을 만큼 큰 차트에는 남로당 수뇌부를 정점으로 하여 밑으로 피라미드 모양으로 퍼져 나간 남로당 군사조직표가 그려져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조직원들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박원석 대위의 이름은 박정희 소령 밑에 올라 있었다.
‘아니, 박원석이가 무엇을 했길래?’ ‘드러난 것은 없지만 박정희의 세포입니다.’
김정렬은 박정희가 일본육사 57기 유학생대에 다닐 때 박원석이 58기로서 그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정도로만 짐작하고 있었는데 같은 세포라니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김정렬은 몇 달 전의 일이 생각났다. 항공사관 학교 창설을 주도할 간부 7명이 육군사관학교에서 15일간 교육을 받는데 담당 중대장이 박정희 소령이었다. 박 소령은 일제시대의 군경력이 훨씬 선배인 김정렬과 박범집을 매일 저녁에 숙소에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김정렬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것을 알고 유심히 그를 관찰했다. 명망대로의 인물됨이었다. 그런데 그가 좌익이라니.
김정렬이 ‘박원석은 물론이고 박정희 소령도 내가 보기엔 빨갱이가 아닌 것 같은데….’라고 했더니김창룡은 ‘아닙니다. 그는 확실합니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조갑제 출판부부국장·이동욱월간조선기자)
박정희가 공산주의를 잘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로당 사람들과 접촉했고, 숙군 수사를 통해 체포된 사람들과 연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된 사람 대부분도 무죄라고 밝혀야 할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를 수사했던 김안일 소령은 박정희의 구명을 김창룡 대위가 직접 건의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안일 소령은 나중에 백선엽 당시 육군본부정보국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건의했다고 밝혔고, 백선엽은 김안일 소령의 주선으로 박정희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朴正熙가 나를 통해서 白국장을 만났다는데 그런 기억은 없고 朴소령 수사담당자인 金昌龍(김창룡)대위가 나를 찾아와 수사에 협조해준 朴대위를 살려주자고 해서 내가 직접 朴소령을 만난 뒤 金대위와 둘이서 白국장에게 구명을 건의한 기억은 납니다』 (박정희 수사 책임자 김안일 특무과장)

숙군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구명된 유일한 케이스가 있었다. 그는 朴正熙소령이었다. 방첩대(CIC)의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인 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사관학교의좌익조직수사에서 용의자의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은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고 당시 육본작전교육국의 과장이던 박정희소령이었다.
숙군의 일단계 작업이 완결된 즈음인 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의 金安一소령이 나에게 『박정희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 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 봐줄 것을 요청했다. (전쟁과 나, 백선엽)

결국, 박정희는 1949년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이후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다가 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나 강제 예편됐다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나자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합니다. 박정희처럼 남로당 프락치로 연루된 사람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박정희를 살린 것은 친일파 출신 만주군 인맥이었다’
박정희가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군내 좌익 숙군 수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만주군에서 활동했던 만주군 인맥 때문이었습니다.
박정희의 구명을 건의했던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 보조원으로 출발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으로 공산주의자를 잡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라면 이를 갈았던 그가 유독 박정희는 살려줬습니다. 박정희의 구명을 도와준 백선엽 또한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 만주군 중위였습니다.
박정희 수사 책임자였던 김안일 당시 특무과장은 백선엽과 김창룡이 박정희의 구명을 위해 연대보증을 섰다고 밝혔습니다. 박정희, 백선엽, 김창룡은 모두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만주군 출신이었지만 숙군 수사로 처형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달리 박정희는 남로당 조직 명단을 털어놓았고, 전향했기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자백하고 만주군 인맥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살아남은 것입니다.
1989년 12월 월간조선에서 조갑제씨는 박정희 수사 책임자였던 김안일 당시 특무과장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창룡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박정희의 쿠데타와 4.19혁명도 불가능했다고 밝혔습니다. 조갑제씨는 그런 이야기보다 ‘김창룡이 박정희 소령을 살려주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가 더욱 흥미있는 가상을 부를 것 같다’고 했습니다.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당연히 박정희는 죽었고, 5.16쿠데타는 발생하지 않았고,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지 못했으니 박근혜 대통령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홍구 교수의 발언이 이 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친일파 헌병 출신 김창룡은 김구 선생 암살을 주도하면서 민족지도자는 살해하면서, 정작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는 살려줬습니다. 조갑제씨의 말처럼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려주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역사에서 만약은 없겠지만, 국사 역사교과서 논란의 과정에서 나왔던 한홍구 교수 사건을 따져본다면 충분히 생각해볼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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