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008년 남북 공동조사 발굴 당시 만월대 고려 왕궁터 현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망국의 한을 달래던 노래에 등장했던 ‘황성옛터’를 남북이 공동으로 복원, ‘개성 만월대’ 발굴 유물에 대한 전시회가 처음으로 서울과 개성에서 동시 개최된다.
‘남북 공동발굴 개성 만월대 특별전 및 개성 학술토론회’는 남북역사학자협의회(위원장, 최광식)가 정부의 광복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며, 북측 민족화해협의회가 함께 한다.
서울에서는 오는 13일 저녁 개막식을 시작으로 14일부터 11월 6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전시회가 개최된다.
이 전시회에서는 고려 첨성대 조형물을 배경으로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의 의의가 설명되고 3D 홀로그램 등의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구현한 발굴유물을 볼 수 있다.
특히 만월대 터 모형, CG영상, 기록물 등을 통해 발굴조사 현장에 대한 이해를 돕고, 가상현실 헬멧 디스플레이(HMD, Head Mounted Display) 기술을 통해 만월대 현장에 다녀온 듯한 실감을 얻을 수 있다.
또 일제시대에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개성 만월대 유물들도 전시된다.
북측 개성지역에서는 15일부터 11월 15일까지 개성 고려박물관(고려 성균관) 별도 전시장에서 전시회가 개최되며, 전시회 개막일인 10월 15일에는 남·북의 전문가가 참가한 가운데 학술토론회도 개최된다.
개성 전시에서 관람객들은 도자기, 접시, 막새, 잡상 등 100여 점의 만월대 출토유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고, 디지털 기술이 적용된 만월대 터 모형, 3D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한국 소재 개성 만월대 유물 등을 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 사업은 남측 남북역사학자교류협회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가 주체가 되어 고려왕궁 만월대 터 약 25만㎡ 중 서부 건축군 3만3,000㎡를 남북이 공동으로 발굴·조사하는 사업으로, 지난 2007년 첫 삽을 떴다.
이후 남북간 교류·협력사업이 소원했던 2010년까지 네 차례 공동 발굴·조사 사업이 실시됐으며, 2011년에는 수해를 입은 건물지, 석축의 복구작업을 공동으로 벌였고 지난해 7월 사업을 재개해 올해 6개월에 걸쳐 복원사업을 진행했다.
지난해까지 총 1만 1천700여㎡를 발굴, 사업 진척률 35.5%에 달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원통형 청자와 명문 기와 등 유물 총 1만여 점을 수습하고 정전과 경령전 등 건물터 20개동의 배치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시회에 앞서 만월대의 이모저모를 미리 살펴본다.
| | |
▲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 현황도.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만월대는?
| | |
▲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만월대는 고려왕조 개국부터 멸망에 이르는 470여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됐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만월대(滿月臺)는 개성시 서북쪽에 있는 송악산의 남쪽 기슭인 송악동 부근에 위치한 고려 궁성과 황성, 즉 왕궁터이다.
원래는 왕이 정사를 보던 곳인 희경전을 중심으로 한 여러 궁궐이 있던 대지를 말하는데, 총면적 125만여㎡에 궁성 면적은 약 39만㎡에 달한다.
궁성에는 궁궐들이 있었고 황성에는 고려의 중앙 관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성 안에는 구정이라고 불리던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격구를 비롯한 체육경기도 하고 군사들의 열병식도 열렸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만월대는 처음에 보름달을 바라보는 누대라는 의미에서 망월대로 불렸는데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망월대를 만월대로 부르게 되였으며 점차 고려 왕궁터 전체를 통칭하는 대명사이자 지명으로 자리잡게 됐다.
고려 왕궁터를 만월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왕조 때부터라고 한다.
고려 왕조(918~1392)는 건국 이듬해인 919년 1월 현재의 철원에서 송악산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전신인 태봉국이 건설한 ‘발어참성’을 그대로 왕궁으로 이용하면서 만월대를 처음 건설했다.
건국 이후 940년까지는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초기에는 만월대의 규모를 크게 늘리지 않았다가 고려 제4대 왕인 광종 12년, 961년 수영궁궐도감을 설치해 본격적으로 궁궐공사를 벌였다.
919년 처음 건설된 이후 고려 말기인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전부 불탈 때까지 만월대는 470여 년 동안 고려왕조의 왕궁으로 이용되다 이후 지금까지 터만 남아있다.
지난 2013년 6월 개성시 역사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당시 북측 매체들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현재 개성시 인구는 약 30만 명인데 고려시기 수도로 번성할 때는 70만 명이나 살았다고 한다.
고려시기 예성강 하구 무역항인 벽란도에서 개경(현재 개성)까지 점포가 빼곡히 늘어서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 올 수 있을 만큼 개성은 대단히 발전한 대규모 상업도시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25만㎡에 달하는 거대한 왕궁터 마당 앞에는 웅장한 4개의 돌계단과 일부 성벽만 남아있지만 배수체계가 얼마나 정연했는지 지금도 장마 때면 그 물길을 따라 물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 확인된 만월대의 구조와 주요 건축물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만월대는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의 경사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여러 개의 건물들이 하나의 건축군으로 묶여지고 건물의 지붕이 층층으로 나타나게 되어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되어 있다.
만월대 중심 건축군의 맨앞에는 길이가 60m를 넘고 높이가 7.8m 되는 웅장한 축대가 있으며, 이 축대에는 중심 건축군으로 오르는 33단의 커다란 돌계단 4개가 있다.
이 위에 회경전, 장화전, 원덕전을 중심축으로 하여 여러 건물들이 규모 있게 배치되어 있다.
기본정전인 회경전 터는 동서 약 60m, 남북 약 100m의 네모난 회랑으로 둘러막혀 있는데 앞면이 9칸, 옆면은 4칸이다.
만월대 중심축대 동쪽에는 동궁터, 서쪽에는 건덕전터, 침전터 등 수많은 건물터들이 있다.
고려때 천문기상을 관측하던 유적인 개성첨성대도 이곳 황성 서쪽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북측은 고려 왕궁의 규모와 배치, 건물들의 평면구조와 짜임새가 고구려와 매우 비슷하다며, 만월대 유적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 2013년 6월 23일 만월대를 비롯한 개성시 12개 역사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후 <노동신문>은 만월대 왕궁 궁궐을 크게 중심 건축군과 서부 건축군, 동부 건축군으로 나뉜다고 소개한 바 있다.
신문에 따르면, 중심 건축군은 3개의 큰 궁궐 건물과 기타 부속건물들로 구성돼 있는데, 중심 건축군의 궁궐에서는 국가적인 행사들과 조회, 사신맞이가 진행됐으며 전쟁과 같은 중요 국사들도 논의됐다.
중심 건축군 터는 남북의 공동 발굴에 의해 이미 전모가 거의 드러났다.
| | |
▲ 왕궁의 궁궐들은 크게 중심, 서부, 동부 건축군으로 나뉘는데, 중심 건축군터는 거의 발굴이 끝났다고 한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 |
▲ 당시 유행하던 풍수이론에 따라 명당자리로 선택된 만월대.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 |
▲ 중심 건축군의 맨앞에 길이가 60m를 넘고 높이가 7.8m나 되는 웅장한 축대가 있다. 33단으로 된 4개의 계단을 오르면 기본 정전인 회경전이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 |
▲ 기본 정전인 회경전 앞 축대의 측면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중심 건축군 터의 서쪽 낮은 지대에는 20여채의 궁전건물들이 있었던 서부 건축군 터가 있다.
여기에는 회경전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정전인 건덕전이 있었다. 고려왕들은 중요한 행사나 의식, 중대한 국사토의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보통 건덕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곳에는 그밖에도 선정전(편전-왕이 일상적으로 사무를 보는 궁전의 한 부분), 중광전(편전), 연영전(편전), 장령전(편전), 자수전(편전), 만령전(침전-왕의 침실이 있는 궁전의 한 부분)과 같은 많은 궁전들과 사당, 절들도 있었다.
서부 건축군의 대부분은 아직도 땅속에 묻혀있는데 그 일부는 발굴에 의해 드러났다.
중심 건축군 터의 동쪽 낮은 지대에는 동부 건축군 터가 있다. 여기에는 세자궁인 수춘궁이 있었고 수춘궁에는 대문들인 춘덕문과 원인문, 육덕문 그리고 수춘전, 건명전을 비롯한 여러 궁전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발굴자료와 문헌기록들에 따르면, 왕궁 건물들은 전통적인 민족건축 양식인 목조건물로 왕궁으로서의 지위에 어울리게 웅장 화려하게 건설됐다.
궁전지붕은 모두 푸른 유약을 발라서 구운 청기와를 씌웠고 건물들은 금, 은, 동을 비롯한 금속재료로 장식을 했으며 갖가지 색깔의 옻칠을 하여 사치스럽게 꾸몄다.
고려왕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 확장됐으며, 유적주변에는 천연기념물로 유명한 만월대 느티나무도 있다. |
|
评论
发表评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