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물리학> 쓴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박근혜 대선 압승? 지도만 바꿔봤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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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물정의 물리학> 저자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 |
ⓒ 권우성 |
3년 전 대통령선거 결과를 인구 비례에 맞춰 다시 그린 지도가 눈길을 끌었다. 당시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의 득표율은 51.6% 대 48.0%로 박빙이었지만, 지역별 1위 후보를 표시한 전통적 지도만 보면 박 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역 면적으로 인구 밀도에 맞춰 늘이거나 줄였더니 두 후보가 차지하는 면적이 실제 득표율에 더 가깝게 나타났다.
"우리에게 당연하게 보이는 정보라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걸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시 대학원생 이일구, 조우성 씨와 함께 이 지도를 만든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48)는 언뜻 과학과 무관해 보이는 선거 결과에 간단한 물리학 방법론을 적용해 오랜 고정관념을 깼다. (관련기사: [사이언스온] '51.6 대 48.0' 득표율 그대로 보여주는 인구비례 전국지도)
오지랖 넓은 물리학자,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이처럼 과학 연구 결과가 세상의 관심을 끄는 일은 흔치 않다. 특히 자연과학 가운데서도 물리학은 왠지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선입견을 깨는 데 '세상에 뛰어든 물리학자' 김범준 교수의 '오지랖'도 한몫했다. 김 교수는 물리학에서 다루는 수많은 '입자'에 해당하는 '빅데이터'에 물리학 방법론을 적용한 사회적 연구 결과물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프로야구팀들의 이동 거리를 최소화하는 경기 일정표를 짠다든지, 윷놀이에서 유리한 전략을 계산한 게 대표적이다. 컴퓨터로 무려 10억 번 계산했더니, 같은 편을 업고 가는 '평화적인' 전략보다 상대편 말을 잡는 '공격적인' 전략이 더 유리했다는 것이다. 지난달 펴낸 <세상물정의 물리학>(동아시아)에는 이런 '오지랖 넓은' 연구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세상물정의 사회학>(사계절)에서 따왔다는 책 제목처럼, 지난 10월 2일 찾아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에 있는 김 교수 연구실 모습도 사회학자의 연구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상을 보고 분석하는 데 쓰는 컴퓨터와 프로젝트, 강의할 때 쓰는 장난감 같은 모형들이 고작이었다.
때마침 김 교수는 10년 만에 연구년(안식년)을 맞아 강의는 없었지만, 제자들 논문 지도와 각종 연구로 여념이 없었다. 책에 포함된 상당수 내용들이 논문으로 선보였지만 정작 앞서 인구 비례 지도는 논문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미국 물리학자인 마크 뉴먼 미시건대 교수가 지난 2006년 미국 대선 결과에 사용한 방식을 단순히 우리나라 실정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미국도 중부는 인구가 적은데 보수층이 많아 공화당 지지가 많고, 동부와 서부는 민주당 지지자가 많은데 보통 지도를 그리면 전부 빨간색(공화당)이고 파란색(민주당)은 거의 없어 보여요. 마크 뉴먼 교수가 인구 밀도에 맞춰 그리니 가운데가 쪼그라들고 양쪽이 커지니까 비슷비슷하게 경쟁했다는 걸 알게 돼요. 우리나라도 2012년 대선 때 처음 그려봤어요. 박근혜-문재인 득표율 차이가 없었는데 지도를 보면 박근혜 후보가 압승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반반이었다는 게 명확하게 보여요."
▲ 지난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 선거 결과 지역별 1위 득표자를 표시한 지도(왼쪽)와 지역별 인구밀도를 감안해 그린 인구 비례 지도. 붉은색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파란색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 | |
ⓒ 김범준 교수 연구실 |
"지역감정 등장에 30년 남짓... 결국 정치인들 작품"
지난해 4월 지방선거도 마찬가지였다.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를 지도에 표시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를 지지했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인구 밀도를 적용하면 강원도를 비롯한 도 면적은 줄고 서울과 6대 광역시 면적이 늘면서 양당이 균형을 맞췄다.
김 교수는 마크 뉴먼 연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지역감정'의 뿌리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 지난 1963년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선거에서 당선한 후보의 득표율을 인구비례지도로 그려봤더니, 1971년까지만 해도 동-서간 차이가 거의 없었는데 1987년 대선부터 점차 커지더니 1997년 대선에서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
이 그래프를 토대로 김 교수는 "한국을 동서로 양분하는 지역감정은 (백제-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라) 길게 잡아 30년도 안 되는 한국 현대사의 암울한 기간에 만들어지고 고착화됐다"면서 "지역감정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평범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투표로 선출되기를 바란 정치인을 위해 조장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현재 '서울 영등포구와 구로구에서 야당 지지 성향이 높은 이유가 전라도 출신이 많아서'라는 명제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통계청 전입·전출 자료를 토대로, 전라도 지역 출신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때 아버지의 정치 성향을 그대로 유지할 확률, 현재 거주지 주변 사람들 영향을 받아서 그 지역 대다수가 지지하는 후보로 바꿀 확률 등을 계산한 뒤 실제 선거 득표율과 비교해 보는 방식이다.
"마크 뉴먼 교수 연구도 자세히 살펴보면 각 지역 인구 밀도를 정의하고 인구밀도가 균일하게 퍼지는 수학적 과정을 정의한 상당히 아카데믹한(학문적인) 연구예요. 하지만 저 지도를 달리 그려보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하고 시작한 거죠. 저도 살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은데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해 본 거죠."
"과학자는 가치중립적? 맘에 안 드는 결과 선택 안 할 수도"
김 교수가 이렇게 색다른 연구 주제에 빠진 계기는 이처럼 개인적인 '궁금증'과 '재미', 그리고 '비판의식' 때문이다.
"보통 과학자들 활동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어떤 결과가 맘에 든다, 안 든다 판단할 수 있거든요. 한 과학철학자가 과학하는 사람들이 철학이나 가치관이 없다고 하지만, '체크인 안하고 몰래 들여온 수화물' 속에는 반드시 있다고 한 것처럼 모든 인간 활동이 마찬가지죠."
이 책에서 가장 먼저 거론한 '때맞음(동기화)' 관련 논문이 대표적이다. 한 연구팀은 계층화된 어떤 조직에서 여러 구성원이 동시에 박수 소리를 내려고 할 때 상명하복의 계층구조가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그런데 김 교수팀이 개개인마다 '진동수'가 다르다는 변수를 추가해 오히려 시간은 더 걸려도 계층 간 의사소통이 활발할 조직일수록 더 '때맞는' 박수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상반된 결론을 끌어냈다.
"일단 그 논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논문에서 고려하지 않은 요소들이 보이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똑같다고 가정하는데 실제로 그렇진 않잖아요?"
한마디로 논문에는 진보와 보수 같은 과학자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없지만, 어떤 연구 결과를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하는 건 과학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처음 연구도 수학적으로 올바른 논문이에요. 하지만 그런 연구 결과가 나왔다면 난 그 논문을 쓸까 말까 고민했을 거예요. 비판적인 생각이 들어 제 연구를 시작한 거죠. 그렇다고 논문에 민주적 구조니 상명하복 같은 말을 넣을 순 없어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활발히 하고 집단적으로 의논해서 좋은 결론을 내리고, 시간은 오래 걸려도 위에서 시키면 나는 한다는 '상명하복' 스타일보다는 훨씬 올바른 결론을 내린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어 개인적으로 기뻤던 연구예요. 그 논문을 쓰고 나서 물리학자의 가치관이나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 <세상물정의 물리학> 저자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 |
ⓒ 권우성 |
"국정원 여론 조작, 페이스북은 안 돼도 트위터는 통한다"
'통계학'이나 '물리학'은 그나마 익숙하지만 '통계물리학'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분야다.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 학문인 걸까?
"물리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미시적인 입자 하나하나가 어떤 상호작용을 해 우주를 만드는지 연구해요. 그 입자가 굉장히 많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연구하는 게 통계물리학이에요. 통계학도 많은 샘플이 있어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듯 통계물리학도 굉장히 많은 입자들 가운데 의미 있는 양을 추출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그렇다 보니 관심 대상이 사회 영역까지 조금씩 넓어진 거죠."
통계물리학은 이른바 '빅데이터' 연구의 성장으로 물리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받는 분야지만 국내 연구자는 40명 정도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현재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승환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와 정하웅 카이스트 석좌교수, 김두철 기초과학연구원장이 대표적이다.
빅데이터의 힘을 얘기할 때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직원들은 트위터에 한 아이디(계정)로 올린 글을 다른 아이디로 '인용(리트윗)'하고, 그걸 다른 아이디로 퍼 나르는 일을 반복해 "마치 그 내용이 사실이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처럼 호도했다." (<세상물정의 물리학> 72쪽. '리트윗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하지만 다른 한편 저렇게 소수가 여론을 조작한다고 대선 결과까지 뒤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대선 결과가) 바뀔 수 있죠. 사람들이 전부 서로서로 연결돼 있어 처음 만든 트윗을 본 사람은 얼마 안 돼도 점점 퍼지게 돼요. 사람들 성향이 책 살 때 베스트셀러 목록 보듯 메시지 내용보다 많은 사람이 언급하면 그걸 더 중요시해요. 소수라도 많은 트윗을 날리고 중요한 것처럼 판단되면 메시지 진위에 상관없이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이른바 '마당발'일수록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연결망 효과'다. 하지만 당시 트위터 마당발 상당수는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조직적인 여론 조작 세력에 맞서 '상쇄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일반인이 헌신적으로 여론 호도하려 하지는 않죠. 자발적인 힘과 조직적인 힘의 싸움이라면 조직적인 게 영향이 더 있을 수밖에 없어요. 페이스북은 그룹끼리 얘기하는 방식이어서 영향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트위터 속성상 한 사람이 다수를 향해 말하는 방식이고 상대방의 팔로워(구독 신청)를 거절할 수도 없어 불특정 다수에게 메시지를 퍼트리기에 유리해요. 트위터는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광자보다 빛알, 물리학 용어부터 알기 쉽게 바꿔야"
▲ <세상물정의 물리학> 저자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 |
ⓒ 권우성 |
김 교수가 세상에 다가가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어려운 물리학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이다. 앞서 '동기화'를 '때맞음'으로 바꿨듯, '공명'을 '껴울림'으로, '광자'를 '빛알'로 바꾸는 식이다. 꼭 우리말이 아닌 한자라도 '만유인력' 대신 '보편중력'으로 바꾸면 훨씬 의미 전달이 쉽다. 하지만 때맞춤, 껴울림 같은 우리말이 더 어색한 것도 사실이다.
"'때맞음'이 어색한 건 우리가 '동기화'를 먼저 배워서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광자'란 말을 이해시키려고 한자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20년 전부터 물리학용어집을 발간하면서 은사인 최무영(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많이 노력했지만 반발도 컸어요. 그래도 지금은 두 용어를 병행하고 수업시간에 '빛알'을 쓰는 교수들도 늘고 있어요. '만유인력'도 다른 데서 '만유'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보편적 중력'이라고 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잖아요."
'세상물정'이란 융합 테이블에서 만난 사회학과 물리학
김 교수는 10여 년 전 노명우 교수와 같은 아주대에서 교수 생활을 한 적도 있지만 공교롭게 지금까지 한 번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세상물정...>이라는 책 제목도 양쪽 출판사 대표들의 친분 덕에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노 교수는 이 책 원고를 먼저 보고 "사회학자와 물리학자는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는 동시대 사람임을 '세상물정'이라는 융합의 테이블에서 새삼스럽게 확인했다"면서 "물리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회학자는 그 테이블에서 물리학자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었고, 그 통찰에 감탄했다"는 인상 깊은 추천사를 남겼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읽은 김 교수도 "이 책을 보며 인문사회 글솜씨가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고 감탄하면서 "노 교수도 기존 사회학이 사회와 동떨어져 있고, 강단 사회학이 아니라 세상 속의 사회학을 얘기하자는 메시지로 들었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세상물정의 물리학>도 물리학이 사회와 대중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책 전반에 '불통의 리더십'에 대한 강한 비판과 집단지성에 대한 믿음도 느껴졌다.
"개인적 가치관인 것 같아요. 1980년대 중반 우리 사회의 변화를 목격하는 시기와 (학창시절이) 겹치고 과거 독재에서 벗어나 사람이 참여해서 바꾸는 사회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개인적 경험으로도 많은 사람이 토론해서 내린 결론이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하는 것보다 당연히 좋겠죠. 그렇다고 집단이 만든 결정이 항상 옳은가,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가 숙제죠. '숙의 민주주의'란 말처럼 '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집단지성은 생각 없이 손든 사람들 숫자를 세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도 의미가 있어요."
○ 편집ㅣ손병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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